[스크랩] 그리스 근현대사 4편 - 발칸 전쟁과 국가분열의 시대
지난편
그리스 근현대사 2편 - 그리스 독립전쟁 그리고 서구 열강의 개입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혼란상
한때 대제국을 이루며 오스트리아 빈 공성전(1529, 1683)을 벌이는 등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기도 하였으나 어느덧 서구 열강의 멸시를 받는 존재로 전락한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말 극심한 내홍을 겪으며 20세기를 맞게되었다.
우선 제국이 분열하였다. 1832년 이스탄불 조약으로 그리스가 독립하였고 1877~1878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하자 비스마르크의 중재에 따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루마니아가 독립하였다.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마케도니아를 차지했던 불가리아는 베를린 조약으로 다시 영토가 1/3로 줄어들었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명목상 오스만에 남았으나 다수 무슬림들은 기독교도들의 지배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한편 수에즈 운하와의 보급로에 있던 키프로스 섬은 영국이 차지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인종청소의 전주곡이 이 지역을 휘몰아치게 된다. 187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소작농의 반란이 있었고 1876년에는 불가리아인들이 민족주의 봉기를 일으켰다가 무슬림 비정규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불가리아 기독교도들은 1,000명의 무슬림을 살해했는데 보복에 나선 무슬림들은 3,700명의 불가리아인들을 학살했다.
소아시아에서는 1894~1896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일어났다.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세르비아 등이 독립하자 기독교도였던 아르메니아인들도 독립을 바라게 되는데 술탄 압둘 하미트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배신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까지는 같은 무슬림으로 나름 1.5등 신민의 혜택을 누리던 쿠르드인들을 추동하여 이들에게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임의 처분권을 부여했다. 결국 1896년까지 최소 10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 당합니다. '압둘 하미트 학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그 규모가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가 1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제국의 핵심 구성원인 투르크인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술탄은 아르메니아인 등 제국내 소수민족과 기독교도들에게는 무자비했지만 서구 열강들에 대해서는 매우 굴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열강의 국민들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한 것을 들 수 있다. 자국의 국민들이 전근대적인 오스만의 법정에 서게 할 수 없다며 열강 각국이 면책특권을 경쟁적으로 요구하자 술탄은 이를 순순히 들어준 것이다.
또한 술탄의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열강들에게 진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하게 되자 1881년 공채 관리기관이 이스탄불에 들어섰다. 그리스의 국제금융위원회(IFC)가 1897년에 설립된 것을 감안하면 16년이나 앞서서 오스만은 재정 운영의 제약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면책특권의 비호하에 거만하게 이스탄불을 활보하는 유럽인들과 이들의 경제 간섭은 투르크인들에게 결코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덧붙여서 제국 내에서 투르크인들의 상대적 위상이 떨어진 것도 투르크인들의 불만 원인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투르크인들은 생산 분야와 전문직은 기독교도들과 유대인이 하는 다소 천한 일로 봤으며 자신들은 관료와 군인의 길을 걸었다. 어느 술탄은 대병력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는 길에 병사 중에 장인이 있는지 물었다가 제화공 한 명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다른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크게 낙담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상업활동이 발달하면서 부자가 되는 그리스인들은 늘어나는 반면에 쇠락해 가는 국력으로 공공부문 지출이 줄어들자 투르크인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심해졌다. 아타튀르크가 직접 쓴 글들을 보면 자신이 유년기를 보내던 살로니카(현 테살로니키)에서 그리스인들은 부유한 동네에 모여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가난했다고 적고 있다. 아버지가 지방 하급 관리였던 아타튀르크의 집은 먹고살 만은 했지만 풍요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편 이런 전근대적 직역 구분은 20세기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인종청소 속에서 극심한 전문 인력 부족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복한 것은 1897년 그리스와의 30일 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사실 이 승전의 내막을 보면 오스만 제국의 군현대화 노력이 숨어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1878년 러시아에 패하자 술탄 압둘 하미트는 1880년 독일 황제에게 군현대화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882년 독일 사절단이 오스만에 오게 되는데, 특히 1883년에서 1895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군사 고문을 맡았던 콜마르 폰 데 골츠 장군은 장교 교육과정을 쇄신하고 무려 4,000페이지가 넘는 독일 군사교범을 터키어로 번역하게 함으로써 오스만 군대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결국 이러한 근대화 노력이 1897년 그리스와 치른 전쟁에서 완승을 거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폰 데 골츠 장군은 1911년 은퇴했음에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오스만 제국을 도왔고 아타튀르크 등 젊은 투르크 장교단의 스승이기도 했다.
1908년 투르크 장교들이 감행한 쿠데타와 그리스의 대응
투르크 엘리트들의 누적된 불만은 1908년 쿠데타로 분출되었다. 엔웨르를 주축으로 한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술탄에게 헌법 제정을 압박한 것이다. 엔웨르 등 젊은 투르크 장교들은 몇 년 전부터 '통합과 진보 위원회(CUP)'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서구에 비해 무력한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있었다. 당시 투르크 장교들이 느끼던 문제는 술탄이 군대를 견제하여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뒤처져 있던 오스만의 군대가 더 뒤떨어지고 있다는 위기 의식이 커졌다.
사실 '통합과 진보'라는 말은 프랑스의 실증주의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질서와 진보'라는 말과 매우 유사했다. 아마도 젊은 투르크 장교들이 보기에 오스만 제국의 당면한 질서 이슈는 제국의 분열을 막고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을 모방하고자 했던 주변부 국가의 엘리트 청년들에게는 질서와 진보가 가장 중요한 명제였다.
하여간 1908년 청년 투르크 장교단의 쿠데타는 이웃한 그리스에도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종이 호랑이라고 깔봤던 오스만이 이제 본격적으로 부국강병의 길을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그렇지 않아도 1897년 30일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에게 굴욕적 패배를 당하고 국제금융위원회(IFC)의 감시하에 배상금을 갚아야 했던 모멸적 상황에서 그리스의 젊은 장교들은 1908년 터키의 쿠데타를 보고서 우리도 나서야겠다는 조바심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1909년 그리스 청년 장교들도 쿠데타를 감행했다. 1908년 젊은 투르크 장교단의 쿠데타가 무스타파 케말(아타튀르크)이라는 야심적 장교에게는 대단한 변화를 선사하지는 못했지만(아타튀르크도 통합과 진보 위원회 소속이었으나 엔웨르 등이 속해있던 핵심 지도부는 아니었다.) 그리스에서는 크레타 출신의 근대주의자 정치인 베니젤로스(Eleftheros Venizelos)가 집권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10년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로 총리가 된 베니젤로스 그리스 공직사회의 고질적인 독직과 부패를 혁파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했다. 공개시험을 통한 공무원 채용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여성과 아동에 대한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노령연금제도 도입했다. 또한 노조를 인정하고 기업의 유령 노조를 불법화하였으며, 누진적 소득세를 도입하여 간접세 의존 비중을 낮추려 하였다. 그럼에도 소득세 탈루는 매우 용이하였다. 베니젤로스 총리는 군 현대화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군사학교를 개선하고 방위비를 증액하였다.
베니젤로스의 위대한 아이디어 프로젝트 1단계: 발칸 전쟁
베니젤로스 총리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토와 인구 확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독일인 오토 국왕 시절부터 모토가 되었던 위대한 아이디어를 보다 더 구체화하여 2대륙(유럽, 아시아)과 5해양(이오니아해, 지중해, 에게해, 흑해, 마르마라해)의 그리스를 설정하였다.
* 그리스 근대화의 아버지 베니젤로스 총리와 그의 꿈인 2대륙 5해양 국가로서의 위대한 아이디어의 구현 모습
위대한 꿈의 구현을 위한 첫 단계로 베니젤로스는 자신의 타고난 외교력을 이용하여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반목하고 갈등을 빚었던 발칸의 국가들과 연합하여 오스만을 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스 북부 영토를 둘러싸고 이해가 상충하였지만 그리스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와 동맹을 맺고 1912년 1차 발칸 전쟁을 일으켰다.
세르비아군은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코소보를 점령했는데 이 과정에서 1만 2천 명의 무슬림이 학살되었다. 또한 수만 명의 무슬림들이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 점령된 알바니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또한 그리스는 북부의 핵심도시 살로니카(현재 테살로니키, 아타튀르크의 유년기 고향)를 불가리아에 앞서 점령하였으며 그리스 해군이 에게해를 통제하면서 이탈리아가 점령하고 있던 도데카네스를 제외한 섬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크레타 섬도 이 때 그리스에 병합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서쪽의 유럽 영토 대부분을 빼앗겼다. 그나마 동 트라키아 지역의 에디르네 시가 불가리아의 장기간 공격에도 불구하고 버티면서 이스탄불이 직접적 위협에 노출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1913년 5월 런던조약을 통해 발칸 전쟁의 결과를 인정했다.
한편 1913년으로 접어들자 발칸 동맹은 오스만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가하기 보다 이미 차지한 영토를 두고 내분에 휩싸였다. 2차 발칸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영토 분할을 두고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맞섰으며, 그리스와 세르비아도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결국 불가리아가 물러서면서 발칸 전쟁은 종결되었다.
* 발칸 전쟁으로 주인이 바뀐 영토들: 그리스는 오스만으로부터 북부 마케도니아를 얻었으며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알바니아, 불가리아도 오스만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토를 획득했다. 다만 루마니아는 불가리아로부터 일부 영토를 얻었다.
발칸 전쟁 덕분에 그리스는 현 그리스 영토의 70% 수준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인구도 280만 명에서 480만 명으로 200만 명이나 늘렸다. 이제 그리스는 베니젤로스의 리더십 아래 지중해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1차 대전과 국가 분열(the National Schism)의 시대
1차 발칸 전쟁이 끝나고 2차로 전개되기 직전인 1913년 3월 덴마크 왕가 출신으로 독일인 오토 국왕에 이어 그리스를 근 50년간이나 통치하던 게오르그 1세가 살로니카 방문 중 광인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왕위는 아들인 콘스탄틴 1세가 이어받았다.
이제 전 세계는 바야흐로 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스도 내부적으로 서구 열강 간의 극한 대립에서 어떤 식으로든 포지션을 정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베니젤로스 총리의 입장은 매우 단호했다. 그리스는 삼국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 측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해야 한다고 베니젤로스는 주장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국왕의 생각은 달랐다. 국왕은 전쟁에 그리스가 개입해서 얻을 게 별로 없으며 따라서 중립을 취하는 게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다. 사실 콘스탄틴 국왕은 다가올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지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콘스탄틴 국왕은 독일 빌헬름 2세와 처남 매제 사이로 콘스탄틴의 부인이 빌헬름 2세의 여동생이었다. 또한 콘스탄틴 본인이 독일의 명예원수이기도 하였다.
베니젤로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스의 숙적들인 불가리아나 오스만은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국과 친하기에 중립을 취한다고 해서 그리스의 안전을 담보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베니젤로스의 생각이었다. 오히려 그리스와 관계가 좋았던 영국편에 서서 소아시아의 그리스 정착촌(스미나르 등)을 보장받자며 국왕과 대립했다. 사실 나중에는 국왕이 마음을 돌리는 모습도 보였으나 핵심 측근이었던 요아니스 메탁사스(Ioannis Metaxas) 장군(나중에 언급될 그리스 파시즘의 아버지)이 그러면 불가리아가 동맹국에 붙어서 그리스를 공격할 것이라며 사퇴하자 마음을 다시 바꾸게 되었다.
국왕과 총리의 대립이 지속되자 베니젤로스 총리가 1915년 3월 사임했다. 이어서 6월 총선을 치르는데 베니젤리스트들이 승리하였고 베니젤로스가 다시 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국왕과의 대립은 계속되었고 베니젤로스는 다시 사퇴했다. 1915년 12월 치러진 선거에서는 베니젤리스트들이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왕당파가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불가리아가 그리스의 동맹국이었던 세르비아를 공격하자 베니젤로스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살로니카에 진주시키는 것을 허가하였다. 독일 동맹국에 의해 국경지대 요새들이 함락되고 동부 마케도니아가 불가리아에 점령당하자 결국 베니젤로스와 지지자들은 1916년 살로니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별도의 정부와 군대(the National Defense)를 창설했다.
이리하여 그리스는 1차 대전의 입장 차이로 북부(the New Lands)의 연합국을 지지하는 베니젤리스트들과 남부(the Old Greece)의 중립을 선호하는 국왕과 왕당파로 나눠지는 국가 분열(the National Schism) 시대에 접어들었다. 두 개의 정부는 내부에서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숙청을 벌이며 자신들의 입지를 굳혔다. 이 분열은 1차 대전에 대한 입장 차이가 직접적 이유이기는 했으나 점점 공화제와 군주제, 자본주의적 개혁 대 자영농 중심의 보수주의의 대립으로 이어지면서 그리스의 미래 방향에 대한 근본적 논란을 낳았다.
* 국가 분열로 인한 베니젤리스트와 왕당파의 세력 구분: 반도 남단은 콘스탄틴 국왕의 통치 지역, 살로니카 중심의 마케도니아는 베니젤리스트 영역, 동부 마케도니아는 동맹국에 가담한 불가리아가 점령함
한편 1916년 12월 영국과 프랑스는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 항에 상륙하여 왕당파를 무력화 시켰다. 베니젤리스트들의 남진과 왕당파 숙청이 가속화되자 결국 콘스탄틴 국왕은 후계자도 지명하지 못한 채 퇴위하고 망명길에 나서게 되었다. 공석으로 남겨진 왕좌는 콘스탄틴의 둘째 아들인 알렉산더의 몫으로 돌아갔다.
1차 대전의 종전 처리를 다룬 파리강화회의는 두 명의 스타가 눈길을 모았다. 바로 1차 대전 중 혁명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된 러시아의 레닌과 그리스의 베니젤로스였다. 베니젤로스는 연합국에 대한 공헌의 대가로 소아시아의 그리스인 밀집 지역인 스미르나(Smyrna, 현 이즈미르)와 그 배후지(아래 지도에서 터키 쪽의 노란색 지역)를 요구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국제 통치를 제안하였는데 국제연맹이나 미국이 다스리게 하자고 주장했다.
이 시기는 베니젤로스가 꿈꾼 위대한 아이디어(맨 위 지도)가 허황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정말 실현 가능하다는 희망이 그리스 사람들한테 퍼져나갔다.
* 그리스의 영토 변화: 1832년 독립 시점의 그리스(남색), 발칸 전쟁(초록색), 최전성기 시절인 세브레 조약으로 얻었다가 로잔 조약으로 상실한 지역(노란색)
출처 : 산타크로체님 네이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