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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은 보릿고개에 시달렸다? 날조 반박!!

대운풍 2017. 5. 16. 21:55

18세기 서울의 술집현황과 음주풍속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잊혀진 풍경을 복원해보면 수많은 술집들이 주등(酒燈)을 휘황하게 밝혀서 유혹하고, 술꾼들은 삼삼오오 그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상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만큼 번창하였고, 서울은 과음에 빠진 술꾼으로 넘쳐났다. 술과 안주의 과소비는 금주령을 불러왔으나 끝내 과음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한양 제일의 술집 군칠이집

18세기 한양의 많은 술집 가운데 현재까지 (상호) 이름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집이 있다. 군칠이집! 이 술집 겸 음식점은 기업형 술집이라고까지 할 만큼 규모가 컸고, 현재도 여러 곳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담배 사려!” 외치는 소리 끊어졌다 이어지고
행랑에는 등불 밝혀 골목길이 환하다.
한가로운 네댓 사람 팔짱 끼고 말하네.
“밤새 군칠이 집에 술을 새로 담갔다더군.”

童謠賣草斷連聲, 燈火行廊夾路明.
四五閒人交臂語, 夜來君七酒新淸.

「저녁에 종루 거리를 지나가다 짓다」 제3수, 『취사당연화록』
(「暮過鐘樓街上口占」 第3首, 『取斯堂煙華錄』)

1766년 어느 봄날 남대문 밖 약현(藥峴)에 사는 양반집 선비 서명인(徐命寅, 1725~1802)은 유사온(兪士溫)이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날이 저물어 남산은 작은 달을 토해놓고 종루에서 저녁 종소리가 퍼진다.

청계천을 거치고 종로 사거리를 들러서 남대문을 거쳐 나가려는데 인파가 몰려들어 흰옷 입은 군중에 휩쓸린다. 길게 이어진 시전(市廛)을 따라 취객들이 나타나고 곳곳에서 풍악에 맞춰 기생들의 노랫가락이 섞여 들려온다.

서명인(徐命寅)의 문집 『취사당연화록(取斯堂煙華錄)』, 규장각 소장,
필사본. 서명인은 한양토박이로 전형적 서울 풍경을 묘사한 시를 지었다. 특히, 한가롭게 종로를 거닐며 본 풍경과 감상을 3수의 시에 담아냈다.

인구 8백만의 조선에서 한양은 8만 가구 30만의 주민수를 자랑하는 대도회지였다. 종로(당시는 운종가(雲從街))는 18세기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내내 그리고 근대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놓지 않았다.

그 중심은 종로 사거리였다. 어둠이 깔리는 거리는 여전히 담배 사라는 외침이 띄엄띄엄 요란하다. 행랑마다 등불이 켜지고 어울려 지나던 한 무리 사람들이 쑥덕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난 밤 군칠이 집에 술을 새로 담갔겠지?”

네댓 명 술꾼이 한 잔 걸치자는 제안이다. 틀림없이 그들은 군칠이집에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을 것이다. 도회지 번화한 풍물을 읊은 짧은 시는 흥미로운 정보를 담고 있다.

1766년경 종로에서 청계천쪽 가까운 곳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술집 군칠이집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마지막 구절에 “여자 군칠(君七)과 남자 군칠이 있는데 모두들 큰 술집[酒家]으로 서울에서 명성이 자자했다”1)라고 부연하여 설명하였다.

이 술집은 작은 주막이 아니라 술을 많이 빚는 대양(大釀) 가운데 첫 손가락 꼽는 곳이었다. 적어도 18세기 초반부터 명성을 누렸고, 1766년 무렵에는 여자 군칠이집과 남자 군칠이집으로 확장 또는 분가하였다.

명성이 너무 높아 너도나도 군칠이집이라는 이름을 걸고 술장사를 했다. 그로부터 100년 뒤 한양에서 군칠이집은 술집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쓰였다.2)

신윤복, <주사거배(酒肆擧盃)>, 간송미술관 소장.
부뚜막 위에 앉은 주모가 술을 따라 손님에게 건네는 장면이다. 기둥 옆에는 중노미가 서 있고, 손님들 여럿이 서 있는 장면으로 서울의 일반적 술집풍경으로 추정된다.

군칠이집은 술독이 백여 독이 넘는데다 각종 안주를 함께 파는 큰 주사(酒肆)였다. 이 집은 개장국을 잘 요리하여 그 명성이 자자했다.

군칠이 집은 술맛도 주객을 사로잡았지만 개장국을 주 안주로 하여 갖은 어육(魚肉) 안주로 입맛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기록에 이 집은 한양 술집과 음식점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19세기 장편소설 『남원고사』(춘향전 이본)에서 남원 한량들이 수작할 때 부채질하는 왈자(曰者)를 책망하며 “이 자식아! 네가 군칠이집 더부살이 살 제 산적 굽던 부채질로 사람을 기가 막히게 부치느냐?”라는 대목이 나온다.

군칠이집은 술을 빚고 음식을 파느라 ‘중노미’ 또는 ‘더부살이’라는 말로 불리는 고용인을 많이 썼고, 훗날 군칠이집 더부살이라는 말은 술집 중노미 노릇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질 만큼 큰 명성을 누렸다.

한양 가게의 절반은 술집

한양은 크고 작은 술집이 번창하여 상점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할 만큼 수효가 많았다. 술집은 서울의 상업 활동의 중심축으로서 사회문제를 일으키며 도회지 풍경을 상징하였다.

군칠이집은 18세기 한양 술집의 대명사였다. 한양은 매우 많은 술집이 있었고, 규모와 종류가 단일하지 않았다. 군칠이집만큼은 아니라도 수십에서 백여 개가 넘는 술독을 보유하여 술을 파는 큰 술집이 있었다.

또 규모가 그보다는 못해도 중소 규모의 술집은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특이한 상점으로 은국전(銀麯廛)이 종로의 시전 거리에 있었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조정에 역을 지는 시전의 하나로 술을 빚어 파는 이들에게 술의 원료인 누룩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일종의 도가(都家)였다.

도가였으므로 은국전은 시전에 주는 특권을 누려서 주류 판매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특권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누룩을 파는 중소 규모의 난전(亂廛)도 많았는데 그것을 막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규모를 가리지 않고 술집에서는 자유롭게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었다.

<운종가> 시전풍경
조선 후기의 시전 풍경을 담은 풍속화로 당시 운종가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양), 한국콘텐츠진흥원

수많은 종류의 술집이 서로 술맛과 음식맛으로 경쟁하면서 한양 상권에서 가장 번성한 업종의 하나였다. 몇몇 기록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해보자.

정조대 후반에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활동한 이면승(李勉昇, 1766~1835)은 술 제조의 금지에 관한 논란을 논한 「금양의(禁釀議)」에서 한양 술집 현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말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으로는 양조업이 가장 많고, 양조하는 곳은 경성(京城)이 가장 많습니다. 지금은 골목이고 거리고 술집 깃발이 서로 이어져 거의 집집마다 주모요 가가호호 술집입니다.

그러니 쌀과 밀가루의 비용이 날마다 만 냥 단위로 헤아리고, 푸줏간과 어시장의 고깃덩어리와 진귀한 물고기, 기름과 장, 김치와 채소 등 입에 맞고 배를 채울 먹을거리의 절반이 아침저녁의 술안주로 운반해 보냅니다.

온갖 물건값이 이로 말미암아 뛰어오르고, 도회민이 그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 소송이 빈발하고 풍속이 퇴폐해지는 현상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이면승, 『감은편』, 「금양의」, 규장각 소장 사본.
李勉昇, 『感恩編』, 「禁釀議」

한양의 시장과 골목이 술과 안주의 소비로 흥청망청하는 술집으로 도배된 풍경을 폭로하고 있다. 글의 성격상 과장이 얼마간 있다고 해도 실상을 크게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같은 글에서 한양성 안에 있는 술집[酒戶]이 수천 호이고, 그 술집에 종사하거나 연관되어 있는 호구(戶口)가 수만 명에 달한다고 적었다. 그 숫자는 한양성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서 10의 2에 이르는 엄청난 비중이다. 과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

그것이 18세기 후반의 상황이지만 18세기 초반 상황 역시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1728년 형조판서 서명균(徐命均)이 영조에게 보고한 내용에서도 비슷한 현황이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보고에서는, 당시 한양 도회민이 생계가 어려워지자 술집에 종사하는 이가 크게 늘어서 여염집에서 주사(酒肆)가 10중 7 내지 8이 되고 그들이 빚는 술의 양이 많게는 100여 섬[斛]이고, 아무리 적어도 6, 70섬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였다.3)

서명균의 보고는 특히나 금주령의 실시를 주장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에 과장이 상당히 가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도 술집이 상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많았다는 실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술집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공유하는 의견이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역시 『성호사설』에서 큰 거리의 상점 가운데 절반이 주점임을 개탄하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익이 40세 전후부터 자신의 생각이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록한 책이다.

그렇게 보면, 술집은 한양 어디를 가든 마주치게 되는 도회지 풍경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다. 서울의 풍경과 풍속을 장편시로 쓴 일련의 <성시전도(城市全圖)> 작품마다 한양 거리 풍경의 하나로 술집을 빠트리지 않고 묘사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박제가가 지은 <성시전도>, 『정유각삼집(貞蕤閣三集)』, 일본 동양문고 소장.
실제 풍물을 가장 잘 묘사한 그림 <성시전도>를 보고 박제가가 쓴 장편시로서, 18세기 후반 한양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묘사하였다. 박제가가 친필로 쓴 시집이다.
신관호

가련타! 광통교 색주가(色酒家)는
별자(別字) 쓴 등을 걸고 탁자를 늘어놓았네.

可憐通橋色酒家
別字燈掛列卓匜

서유구

홍등은 후란교를 뒤덮고
잘 익은 새 술은 맑고도 맛이 좋네.

紅燈冪䍥后欄橋
發醅新醪淸且旨

박제가

오리 거위 한가롭게 제멋대로 쪼아대는
물가 주막에는 술지게미 산더미일세.

舒雁舒鵝恣呻唼
酒家臨水糟爲壘

김희순

살구꽃에 주렴 드리운 집은 누구의 술집인가?
초록 술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네.

杏花簾箔誰家樓
淡碧酒旗風旖旎

시마다 서울의 독특하고 인상적인 술집 풍경을 묘사하고 있으나 묘사의 대상이 똑같지는 않다. 그 가운데 공통적인 특징 하나가 바로 술집임을 알려주는 표지로 주등(酒燈)이 걸린다는 점이다. 한양에서는 깃발보다는 등으로 술을 파는 곳임을 표시하였다.

1743년의 상소문에서 “도성의 술집은 곳곳에 등을 달아 걸고 있다(都城酒家, 處處懸燈.)”라고 말한 글도 마찬가지이다. 19세기 전반기에 그려진 <태평성시도>에서도 술집은 주등(酒燈)으로 표시된다.

작자미상, <태평성시도>의 주루(酒樓)
19세기 전반기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한양의 풍경과 풍속을 중국의 도회지 풍경과 오버랩하여 그린 대작이다. 각종 술동이 술잔이 놓여 있는 탁자에서 술꾼이 술을 마시고 있다. 높은 장대에 주등(酒燈) 2개가 걸려 술집임을 알린다.

한편, 신관호는 술집 가운데 색주가를 인상적 풍경으로 묘사하였다. 색주가는 일반 술집과는 달리 기생이 술시중을 드는 특별한 술집이다. 기생이 술을 따르고 심지어 매음까지도 하는 색주가는 고급술집의 하나였다.

색주가의 술파는 방식은 점차로 일반 술집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술집의 종류를 자세하게 파악하여 보여주는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도시 안에서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홍도, 기방쟁웅(妓房爭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생집 안팎의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당시 기생이 술시중을 드는 술집의 풍경으로 추정된다.

서울 안에서 술은 대단히 많이 소비되었고, 그에 따라 술 제조의 명산지도 부각되었다. 당시에는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성행하였다. 서울 남촌(南村) 지역에서는 술을 잘 빚고 북촌(北村)에서는 떡을 잘 빚었다는 말이다.

도성 남쪽에서도 남산 밑의 장흥방(長興坊)과 회현동에서 빚은 술을 제일로 쳤다. 그 술맛은 빛깔과 맛이 좋아서 한 잔만 마셔도 불콰해지고 술에서 깨도 목이 마르지 않았다.

장흥방에 거주한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전국에서 가장 빼어난 명주요 사람을 나른하게 하는 요물이라며 자기 마을에서 나는 술에 자부심을 표현하였다.

금주령의 시대

조선은 술의 과소비가 극심하였고, 그래서 영조는 치세 내내 금주를 주요한 정책으로 추진했다. 음주를 극도로 싫어한 영조는 금주령을 엄격하게 실시했다. 반면 정조는 음주는 법으로 통제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아 자제하였다.

18세기 술집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금주령(禁酒令)이다. 금주령은 상시(常時)로 술을 경계하거나 거리에서 술주정을 금하는 것이 있고, 가뭄과 홍수 시기에 내리는 비상시적 금주령이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초기부터 19세기까지 비상시적으로 빈번하게 실시되었다.

그런데 18세기에는 다른 어떤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영조의 특별한 금주령 정책이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통치기간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빈번하게 금주령을 내렸다. 영조 치하의 한양은 상당한 기간 술의 양조와 매매가 금지되었다.

영조 영정

영조는 척결하고자 하는 세 가지 중요 정책 현안을 통치 기간 내내 강조하였는데 바로 붕당(朋黨), 사치(奢侈), 숭음(崇飮)이었다. 다른 국왕과 달리 유난스러운 것이 숭음, 곧 술의 숭배를 경계하는 시정방침이었다.

숭음의 배척은 바로 금주령으로 나타나서 음주를 경계하고 나아가 술의 제조와 판매, 음주를 처벌하는 실질적 금지방안을 내놓았다. 영조 대에는 술이 기호(嗜好)의 문제를 벗어나 형법에 저촉되는 범죄로 인식되는 안건으로 변하였다.

금주령은 사치 행위나 흡연을 싫어하여 다양한 사치근절책을 내놓고 금연책을 강력하게 시행한 영조의 시책에 잘 어울리는 정책이었다. 그 때문에 금주령 실시 이전 한양 가게의 절반에 육박하던 주점이 대거 폐업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영조대 한양 술집의 현황과 금주에 대한 국왕의 의지를 보여주는 생동하는 자료가 전한다. 영조 10년(1734년) 11월 22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야대(夜對)를 진행하는 중에 검토관(檢討官) 김약로(金若魯)와 다음 대화를 나누었다.

김약로: 시골은 술을 금하기가 쉽고 시장의 술은 탁주에 불과합니다. 경성의 경우에는 한 집에서 빚는 술이 거의 백 석에 이르고, 이것으로 치부(致富)합니다. 때때로 엄금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영조: 지금은 대궐문에서 지척되는 거리 곳곳까지 모두 주등(酒燈)이 걸리니 저번에 풍원부원군(조현명)이 말한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다.

김약로: 근래 주등이 대궐문 지척에 퍼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경성 내외로 말씀 드리면 열에 여덟아홉이 술집입니다.

영조: 때때로 대궐 안에서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주등이 대단히 많다. 그렇다고 그 점을 민망히 여겨 금주를 실시한다면 삼사(三司)의 아전 놈들이 여항에서 폐단을 일으킬 테니 이것이 난처하구나.

『승정원일기』 36책, 영조 4년(1728) 6월 18일.

영조가 신하들과 서울안 술집의 현황을 놓고 주고받은 대화가 적지 않은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당시 가장 중요하고 번화한 거리의 하나였던 돈화문로의 궐문 밖까지 술집이 대거 침투하고, 경성 안팎 특히 마포를 비롯한 상업중심지 경강(京江)은 술집 거상들이 많았다.

영조는 궐안 높은 지대에서 주등으로 뒤덮인 한양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숭음하는 무리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던 듯하다. 다른 신하에게는 성균관 주변은 밤이면 일찍 등불을 끄고 자는데 유독 멀리서 보이는 것은 주등뿐이라며 한심한 꼴에 개탄을 금치 못하였다. 불을 켜놓고 공부해야 할 선비들은 잠을 자고 술집 등불만 켜져 있는 현상을 몹시 못마땅해 한 것이다.

특히, 1755년부터 1766년 무렵까지는 국가의 모든 전례에서 술을 배제하는 등의 물샐틈없는 금주령을 시행하여 전국에서 술의 제조와 음주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었다. 영조는 1757년과 1762년 각각 <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과 <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을 한글로 반포하여 음주를 경계하기도 하였다. 강력한 시책의 결과 형벌을 당하는 이가 속출하고 처형을 당하는 관료까지 등장하였다.

그 때문에 누룩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시전 국전(麯廛)이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양에서 문을 닫는 술집이 속출하였다. 그 무렵 한양 술집에서는 주등(酒燈)이 꺼져 술꾼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런 암흑시대가 연출되었다.

영조, <어제계주윤음(御製戒酒綸音)>, 1757, 1책, 목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앞부분은 한글로 토를 붙인 한문이고, 뒷부분은 한글로 번역한 글로 구성하였다. 술에 중독되는 해악을 들어 음주를 삼가라고 권하였다. 음주의 문제를 영조가 얼마나 중시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영조가 전반적으로 규제를 통해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면 그 손자 정조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가뭄 때문에 금주령을 잠시 시행한 적은 있으나 정조는 규제를 철폐하는 정책방향을 취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 바로 국전을 은전(銀廛)과 통합하여 시전의 하나인 은국전으로 복구하였다. 또 중소상인들이 한양에서 자유롭게 술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영조시대에 크게 위축되었던 주점 경기가 정조 대에는 가게의 절반이 술집이라는 과거의 호황을 다시 누리게 되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한양 술집에는 주등(酒燈)이 다시 휘황한 불빛을 발산하였다. 지금 전하는 회화 가운데 술집 풍경이 빈번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시기가 대체로 정조 치하와 겹친다. 이는 술을 대하는 국왕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정조 영정

하지만 정조의 규제 철폐가 술꾼들에게는 환호작약할 일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환영할 일이 아니었다. 폭음과 과음이 사회와 가정에 끼친 폐해가 상당히 심했고, 술 과소비가 가져오는 경제적 문제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런 탓에 18세기 내내 금주령 내지 술 소비 억제책을 요구하는 사대부들의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금주령을 최소한으로 자제한 정조 시대에도 풍속이나 농업 진작 문제를 다룬 상소에는 으레 금주를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으로 보거나 이를 부차적인 요구사항으로 제시하였다.

금주를 요구하는 주장에 대해 정조는 대체로 술의 폐해가 있더라도 이는 법으로 다스릴 문제가 아니며 그러한 주장은 시무(時務)를 모르는 서생의 고지식한 주장이라 하여 음주 문제를 사회나 경제, 산업과 연결시켜 보는 이들과 달리 서로를 분리하여 보려는 태도를 취했다. 아무리 강력하게 억제해도 술 소비가 줄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빈번하게 음주의 폐해가 제기되자 정조는 금주령을 시행하는 안건을 초계문신에게 시험문제로 내기도 하였다. 그에 대해 홍석주(洪奭周)와 이면승이 <금양의(禁釀議)>를 제출하였고, 홍석주가 장원을 차지한 일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금주령의 전면적 실시를 반대하였다. 분명히 정조의 의중을 파악하고 내린 결론일 것이다.

명문장가 연암 박지원도 <주금책(酒禁策)>을 지어 의견을 제출하였는데 아깝게도 그 글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태호(太湖) 홍원섭(洪元燮) 같은 이가 연암의 글 가운데 가장 낫다고 평가한 글이다. 술을 금할 것인가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국가적 차원의 안건으로 18세기 내내 거론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 사회에서도 첨예하게 의견이 갈려 있었다.

주모와 취객의 풍경

술집은 술맛으로 승부하지만 18세기 당시 술집의 운영을 맡은 주모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술손님을 끄는 주모와 고객의 관계에는 단순한 고객 이상의 인간적 체취가 있었다.

18세기에 금주령이 그렇게까지 문제가 된 이유는 그만큼 조선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신 데 있다. 18세기 살인사건의 동기로 음주는 치정과 관련한 동기 다음으로 많았고, 음주로 인한 사망사고도 적지 않았다. 남녀노소 따질 것 없이 술을 즐겼고, 아동도 열 살 이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김홍도, <점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하는 중에 점심을 즐기는 평민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반주를 즐기는 일꾼과 술을 따라주는 소년의 모습에서 술이 우리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실정을 보여준다.

전국적으로 탁주와 소주(燒酒)를 널리 빚어 마셨는데 갈수록 독한 술을 선호하여 18세기에는 아이들도 소주를 즐겨 마신다는 개탄이 나올 정도였다.

평양의 홍로주, 여산의 호산춘, 개성의 삼후주 같은 명주가 각 지역에서 명성을 누렸고 서울에도 유통되었다. 한양 술꾼의 풍미를 돋우는 한양의 술로는 소국주(小麴酒)를 가장 많이 꼽았다.

큰 술집은 중앙관서의 아전이나 기생, 일반 서민들이 운영하였다. 색주가는 당연히 기생들이 술을 따르는 술집으로 인기를 누렸다. 본래 한양 술집의 주된 이용자는 중인 이하 신분이었다.

한양 술집의 풍경과 술꾼이 풍기는 멋은 독특한 정취가 있었다. 19세기 중반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는데 18세기에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서경순(徐慶淳, 1804~?)이 청나라에서 술을 마시다 한양의 술집을 그리워하며 말한 대목이다.

각전(各殿) 별감과 정원(政院) 사령, 그리고 각 집안의 청지기 무리들이 호박풍잠(琥珀風簪)에 수사세립(水紗細笠)을 쓰고 반쯤 취해서 비틀비틀 길을 간다. 해가 서산에 지고 까막까치가 날개를 접고 내려앉을 무렵 한 패 두 패가 종로 앞길이나 의금부 뒤쪽에서 만나면 부득불 색주가로 몰려가 한 잔 걸치지 않을 수 없다.

술잔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성명을 주고받고 말을 섞을 때 경우가 맞지 않는다고 그중 한 놈이 대뜸 객기를 부려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대며, 술상을 쳐 박살내고 닥치는 대로 치고 받는다. 이것이 부랑자 건달, 난봉꾼들의 제일가는 통쾌한 일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멋을 모르니 결함이라 하겠다.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당시 한양 유흥가의 주인이나 이용자가 누구인지, 그들은 어떻게 술을 즐기고 놀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술집의 핵심 고객은 중인들이거나 서민들이었다. 반면에 양반들은 보통 술집에서 술을 마시기를 꺼렸고, 특히 밤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경계도 점차 무너져 양반들도 술집출입이 잦았다. 양반들이 술집을 찾은 기록들이 18세기 들어 자주 나타나는데 그들이 술집에서 술을 사 마시고 취해 거리를 돌아다니는 장면을 연암 박지원은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에서 재미있게 기록하였다.

신윤복, <유곽쟁웅(遊廓爭雄)>, 간송미술관 소장.
색주가에서 술을 마신 술꾼들이 싸움을 벌인 장면을 그렸다. 서경순이 묘사한 한양 술집을 묘사한 글을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느껴지니 색주가에서는 자주 일어날 법한 장면이다.

그 실상을 담정(藫庭) 김려(金鑢, 1766~1822)가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경화세족 양반 출신의 한 사람인 담정은 서울 술집 주모들과 잘 어울려 술을 마셨다. 담정은 그들에게 시를 주거나 주모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남기기까지 했다.

동대문 밖 널다리에서 40년 동안 과객에게 술을 팔던 이초랑(李楚娘)과도 어울렸고, 호남 출신 기생 은애(銀愛)가 동대문 안 인수교(仁壽橋)에 차린 술집에도 자주 출입하였다.

또 청계천 가에서 술집을 하던 주모 이씨(李氏)와도 친하게 지냈다. 화사하게 차려입고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술집을 하던 주모[酒嫗]가 죽자 김려는 애도하는 시 10수를 지어주었다. 그중 두 수는 다음과 같다.

광희문 안 두 다리 남쪽에
고운 문 구슬 난간이 푸른 못가에 있었네.
주모와 즐기던 장소를 말하려 하니
처연한 눈물이 나도 모르게 적삼을 적시네.

光煕門內二橋南
繡戶珠欄倚碧潭
欲說阿娘行樂地
不堪凄淚滿輕衫

때 못 만나 기구한 병든 수재가
나귀 타고 터벅터벅 주렴 걷고 들어가네.
술이 어찌 사탕 같은 맛이 있어서랴!
주모의 의기를 사랑해서 찾아갔네.

歷落 崎病秀才
靑騾倦踏綠帘開
何曾酒有砂磄味
爲愛孃孃意氣來

김홍도, <주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초가집으로 된 시골 주막의 모습으로 당시 주막의 풍경을 추정할 수 있다.

늙은 주모가 죽자 시를 열 수나 지어 애도했는데 인간적 교감이 깊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 시를 읽으면 출세하지 못한 양반 문사가 찾아가 주모와 대화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거기에서 큰 위로를 받는 술집 풍경이 그려진다.

한두 해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손님과 주모의 단골 관계가 길게 유지되고 있다. 담정은 주모와 술꾼의 관계를 서슴없이 그려냈는데 다른 양반 문인들은 설령 그런 단골 술집과 주모가 있었다 해도 글을 써서 밝히지 않았다. 양반이 피해야 할 행위라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더라도 기려가 묘사한 단골 술집이 실제로는 18세기 당시의 많은 술집 풍경의 하나였을 것이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행복�O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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