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인류 역사상 최악의 졸전 중 하나 - 영국과 청나라의 아편전쟁
1840년 영국과 청나라가 맞붙었던 아편전쟁은 인류 역사상 무수한 전쟁 중에서도 상당히 인지도가 있는 전쟁입니다. 그동안 서구 문명에 우세를 점하는 것처럼 보였던 동방 문명의 낡고 허술함이 만천하에 밝혀지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종언을 뜻하는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며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중국의 역사가 근대사로 진입하는 전쟁으로 일반론적으로는 인식됩니다.
보통 아편전쟁을 언급할때는 그런 역사적 의의와, 아편이라는 물건을 취급하며 전쟁을 건 영국의 부도덕함을 성토하는 주제가 많고, 이 전쟁의 성패나 전개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청이 지는 게 당연한 전투" 라는게 보편적인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아슬아슬한 전투라면야 전개 과정을 되집어보며 상황이 바뀔 수 있었던 분기점을 살펴보지만, 지는게 당연한 전투라면야 굳이 그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이 동시기의 청나라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앞서있던 국가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특히 해군력은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미국이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자신들의 문명보다 거의 1세기 가까이 뒤에 있는듯한 국가들과의 전쟁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고전을 하기도 하는 등, 해외 장거리 원정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굉장히 어려운 싸움입니다.
하물며 영국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인 중국은 당시 기술로는 원정군을 보내는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며, 자연히 많은 병사를 보내기 힘들고, 결정적으로 중국은 땅 하나하나를 단기간에 일일이 싸워가며 점령하는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나라입니다. 즉, 생각해보자면 영국은 청과 싸운다고 해도 '무조건 해보나마나 이기는게 당연하다' 라고 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이겼습니다. 그것도, 너무나도 쉽게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대체 청나라가 얼마나 못 싸웠길래 그렇게 졌단 말인가?"
(이 그림은 2척의 "상선"이 29척의 "정규 함대"를 완파시켰다는 그 천비 해전 맞습니다. 다만 상선이라 함은 영국 해군 소속이 아니고,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최신예 무장상선이었습니다.)
전쟁의 시작 당시, 영국군은 임칙서가 지키고 있던 광동을 일부러 피해 주산열도(舟山列島)을 공격했습니다. 임칙서가 지키고 있는 지역은 그의 (자신 나름대로의)철저한 대비로 여러척의 병선과 수백문의 대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주산열도에는 2천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사실 이들 대부분은 현지의 목공, 토목들로 이루어진 제대로 된 부대라고 하기 힘든 부대들 이었고, 당연히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했으며 영국군은 유유히 북상했습니다.
이 함대는 천진 앞바다까지 나아갔습니다. 천진과 베이징은 그야말로 지척으로, 북경 앞까지 적군이 몰려온 것을 본 청나라 조정은 경악하게 됩니다. 그동안 북경이 적에게 위협받은 적은 청나라 역사상 없다시피 했고, 아편과 관련된 영국과의 분쟁도 그저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란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란이 눈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갑자기 임칙서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습니다. 대관절 임칙서라는 작자가 얼마나 무능하길래 적이 이 곳 앞까지 오도록 사태를 초래했느냐는 동시에, 적을 눈 앞에 두고 지도부가 겁을 먹은 탓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현지에서 열심히 싸움에 대비하던 임칙서를 영국군 비위도 맞출겸 파면하고, 협상으로 정책을 잡아 영국군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협상을 하는 대신 장소를 천진 앞바다에서 광동으로 바꿔 대화하자고 사정 사정했고, 영국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협상을 하며 청나라 조정은 영국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앞서 말했듯 임칙서를 파면했고, 현지 의용병을 해산했으며, 방어시설을 철거하고, 수비병 1만을 2천명으로 감축했습니다.
이 과정엔 조금 웃픈 일이 있습니다. 협상에 나서는 청나라 쪽에서 불충하고 어리석은 임칙서를 파면했다며 영국군에 경하할 일이라고 하자, 영국군 사령관이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아니, 임칙서는 실제로 훌륭한 재능과 용기를 지닌 대단한 총독이었소. 애석하게도 외국 사정을 몰랐을 뿐이오."
그런데 이렇게 대략의 협상을 하고 있자니, 당장 눈앞의 적이 다시 광동으로 떠나 사라지자, 갑자기 조정에서는 뜬금없이 주전론이 급부상 합니다. 눈앞에 적이 올때는 벌벌 떨었으니 사라지고 보니 무서울 게 없는데 오랑캐놈들이 괘씸하다 이겁니다. 그렇게 아무 대책 없이 당장 당장의 분위기에 휩쓸려 목소리를 높인 정치인들의 주장으로 다시 전쟁이 재개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현지 지휘관을 해임하고 방위시설 철거하고 병력 해산하고 군비 감축한 상태인데 말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영국군은 다시 선공을 하여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영국군의 병력은 1,461명의 병력에 왕국 포병대가 가세한 숫자였는데, 이를 막는 청나라군의 숫자는 600명에 불과했습니다. 본래 2천명이었는데, 원활한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줄여놓은 것입니다. 당연히 상대도 되지 않고 청군은 대패했으며, 이쪽의 사망자는 200명이 넘었는데 비해 영국군은 단 한명도 죽지 않고, 부상자만 몇십명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이때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엘리엇은 자신들이 장악한 주산이 기지를 세우기엔 불편한 땅이었기에, 주산을 반환하고 점령한 요새에서 철수할테니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청을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은 강경책으로만 일관했는데, 강경책에 필요한 준비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지르고 보는 것입니다.
영국군은 이후 정원(靖遠) 포대를 공격했습니다. 양측의 훈련도와 무장 상태를 보면 청나라군의 규모가 수만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국군을 막기 쉽지 않을 판에, 실제로 정원포대를 지키는 병력은 고작 200명이었습니다. 물론 협상한다고 부대를 줄여놓았기 때문이지요.
이때 광저우를 지키기 위해 내려온 사람은 참찬대신 양방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방은, 영국군의 포격이 정확한 이유를 발달한 기술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적의 주술이 강력하기 때문에' 라고 생각했고, '적 주술사의 힘을 약하게 해야' 승리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점쟁이에게 견해를 물어보자, '외이의 요술을 막으려면 여자가 쓰는 요강의 뚜껑을 벗겨, 그 입구를 적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하면 요술은 금세 깨질 것이다.' 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양방이 부임하자마자 내린 첫 명령은, 다름 아닌 요강을 모두 모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광저우를 지키기 위해 몰려왔던 4만명의 청나라 군사는 사실상 도적떼나 다름없는 수준의 군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커녕 현지 주민을 폭행, 살해, 강간, 약탈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넝마가 된 현지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무기를 들고 군대를 습격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적이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상태였습니다.
장군은 여자 오줌을 모으고 있고, 백성들은 악랄한 관군을 습격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영국군은 광저우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러자 여지껏 약탈에 전념하던 청나라 병사들은 실제로 적이 오는것을 보고는 총 한발 쏘지 않고 바로 달아났고, 남은 백성들은 영국군에게 무자비하게 학살, 강간, 약탈을 당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민병대를 조직, 2만의 숫자를 갖추고 영국군을 습격하여 포위했습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곡괭이를 든 민병 2만명이 있어도 총기로 잘 무장된 영국군이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필 이 날 비가 내려 총기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가 아편전쟁에 있어 영국군의 최대 위기로, 까딱하면 전멸 당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광저우 총독 여보순이 나타났습니다. 이길 자신이 없었던 그는 사태를 대충 무마하기 위해 현지에서 협상을 벌이는 동시에, "만약 영국군을 공격하는 민병이 있으면, 그 민병에게 "6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물리겠다." 며 협박했습니다.
600만 달러면 지금의 가치로도 한화 68억. 1800년대 중반의 가난한 중국 시골의 농민은 태어나서 죽을떄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100년 넘게 평생을 거쳐 일만 하다 죽어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아니, 본인은 둘째치고 자기 자식들에서 손자들에까지 영원토록 지옥같은 나락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의 금액입니다. 이 협박에 민병들도 움찔하며 결국 포위를 중단했고, 영국군은 구사일생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은 기왕 시작한 싸움 여기서 협상하고 끝낼 생각이 없었기에, 협상에 동의한 현지 지휘관을 해임하고 새로운 지휘관을 파견해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즉 포위를 푼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닝보(寧波)를 지키던 장군 여보운(余步云)은 적이 도달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 외의 몇차례에 걸친 전투는 한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영국군이 공격하면, 청군은 도망쳤고, 청군이 공격하면, 영국군이 격퇴해 버렸습니다.
청군은 공격하는 영국군보다 오히려 숫자가 적거나, 혹은 숫자가 더 많은 경우에는 병사 태반이 아편중독자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지휘관에도 아편 중독자가 있었을 정도였지요.
그렇게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영국군은 진강에 도달했습니다. 진강은 장강과 남북의 운하를 모두 제압할 수 있는 요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이를 공격하는 영국군의 병력은 7천여명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지구 반바퀴를 돌아 강을 타고 중국의 심장부로 침입하는 영국군의 숫자가 7천여명인데 비해, 자국 영토의 요지에서 이를 방어하는 청나라 정부의 병력이 주방기병 1,200명, 청주병 200명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10배가 넘는 숫자의 병력으로 결사항전해도 이기기 힘들 판에 숫자마저 적으니 당연히 제대로 싸울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다만, 이 진강을 지키던 주방만주기병 부도통(副都統) 해령(海齡)은 무언가 약간 광기가 들린 사람마냥 일반 시민까지 강제로 가담시켜 싸운 끝에 아편전쟁 동안 벌어진 싸움 중에서는 그나마 영국군이 "아, 싸움 같은 싸움 좀 잠깐 했다." 라고 할 정도의 고전을 강요하긴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당연히 대패였고, 해령은 자살했습니다.
진강을 함락한 영국군이 남경 근처에 도달하자, 이미 경제적 파탄 상태인데 자국 내에서 치뤄지는 전쟁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쪼들렸던 청나라는 결국 백기를 내걸었습니다. 이렇게 1차 아편전쟁은 종결 됩니다.
1차 아프간 전쟁 당시 영국군은 전비로 1,500만 파운드를 사용했고, 버마 전쟁에서는 500만 ~ 1,300만 파운드에 이르는 전쟁 비용을 냈습니다. (자료 출처는 옆동네 앨런비님)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큰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에 사용된 전비는 당연히 그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2,000만 파운드? 아니면 좀 낮게 잡아서 3,000만? 아니면 5,000만?
셋 다 아닙니다. 영국이 아편전쟁을 치르는데 소모한 전비는 고작 150만 파운드. 최대치도 250만 파운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영국이 마오리족을 상대할때 쓴 군자금이 300만 파운드 입니다. 즉, 인구 4억의 제국 청나라는 영국군에게 있어 마오리족만도 못한 난이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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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성세를 자랑하던 이 몸이 어쩌다가..."
당연한 소리지만, 청나라가 그 정도로 무력한 나라는 아닙니다. 불과 몇십년 뒤의 청불전쟁에서 청나라는 비록 해전에서는 전력상 열세를 배겨내지 못하고 참패를 면치 못했지만, 지상전에서는 놀랍게도 프랑스군을 상대로 분전을 거듭하여 상대를 심하게 곤혹스럽게 했고, 중국에게 계속해서 패배를 당한 여파로 프랑스의 페리 내각이 총사퇴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즉,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분명 그 급벽하는 19세기에 조차도 최후의 저항 정도는 해볼 저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지만, "중앙 조정의 무능"은 그 모든걸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청불전쟁에서도 막상 그렇게 선전을 해놓고도 중앙정부에서 협상을 졸속으로 하느라 전투에서 거둔 성과를 전혀 살리지 못했습니다.
"우월한 서구문명이 낡은 동아시아 문명을 집어삼킨 역사의 필연적 흐름."으로 이해되어 아편전쟁 시기 청나라 지도부 및 지휘관들이 보여준 무능과 작태는 "어쩔 수 없이 결국 패배할 운명이었던 사람들" 정도로 이해되어 그다지 포커스가 집중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들이야 말로 당대 청나라 엘리트의 전쟁에 대한 역량과 대응은 '끔찍하다' 는 말로도 표현 하기 어려울 수 있을것 같습니다.
4억 인구의 제국을 가지고, 뉴질랜드 마오리족만도 못하게 싸우다니요?
결과적으로 도광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 지도자 중 하나로 불러도 과언은 아닐것입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 추장이 그보다는 더 잘 싸웠다.)
출처 : 네이버 부흥카페 신불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