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순수한 정열의 천재 니콜라 테슬라 (N.TESLA) VS
비루한 사기꾼 토마스 에디슨(T.EDISON)
니콜라 테슬라(1856~1943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서 얼마만큼 진실에 근접 했을까? 혹은 진실의 반쪽밖에 모르면서 그것이 진리이며 진실이라 믿고 있지는 않는가? 미국의 대표적인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인 ‘토마스 에디슨’ 이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의 업적은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니콜라 테슬라’
과연 그 사람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 될까? 몇몇 이론에 대해서 들어는 봤지만 어떠한 인물인지는 정확히 모를지도 모른다.
간단한 예를 들어 니콜라 테슬라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이 각 가정에 전기가 공급되는 시대는 아마 훨씬 뒤로 미루어 졌을 것이다.
만약 에디슨과 웨스턴 하우스의 전기 공급방식에서 에디슨 측이 이겼다면 전기는 돈 있는 상류 계층들의 혜택으로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니콜라 테슬라는 전기 공급 방식에 대해서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 앞의 과학 기술을 내다보는 안목 또한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한 천재가 왜 ‘비운의 천재’라고 불리우는지는 두 사람의 인물 비교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에디슨, 엔지니어로써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은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나 또한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보며 존경하는 마음은 싹 사라지고 전형적인 돈 좋아하는 사기꾼으로 전락을 했다. 물론 대단한 발명을 했고 과학 기술을 한 단계 이끌어 올린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성격적으로 보면 과히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에디슨을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천진무구한 순순한 소년, 그칠 줄 모르는 탐구심과 실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위대한 발명가로 묘사가 되어 있다. 보통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교육을 받아서 아직까지도 에디슨 하면 닭의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알을 품었을 만큼 순수함과 기차역에서 신분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연구열에 불타올라 말 그대로 기차 뒤 칸을 실수로 화학약품으로 불태울 뻔한 노력형 천재로 인식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실망스러운 것들뿐이었다. 물론 1879년대의 에디슨은 진짜 존경하고 탄식이 터져 나올 만한 인물이었고 그때 나온 발명품들이 에디슨을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과학자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1889년대의 에디슨은 그칠 줄 몰랐던 과학의 열기가 나이에 의해 식었는지 기득권을 얻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보수주의자로 전락했다. 그때 당시 에디슨을 평가하는 글들을 읽어 보면 다들 환상적인 과학자가 아닌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고위층에게 로비를 하는 사업가로 묘사가 되어 있다.
그는 순수한 열정을 잃어 버리고 전형적인 기득권층이 되기 위해 영혼을 판 인물이 되어 있었다.
토머스 에디슨(1847~1931년)
니콜라 테슬라, 크로아티아 태생의 이 사람에 대한 사진은 평생 4장밖에 없을 정도로 그때 당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은 프라하 대학을 막 졸업한 희망과 설렘이 나타나 있는 청년의 모습이 찍혀있다. 두 번째 사진은 테슬라가 미국에 도착한 직후인 1884년에 찍은 것으로 당당함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세 번째 사진은 화려한 성과가 처절한 실패로 점철된 15년의 세월이 흐른 모습이다. 이때가 숙적 토마스 에디슨과 처절한 경쟁이 시작될 무렵이다. 네 번째 사진은 예순 살이 된 테슬라의 모습이다. 괴짜 성격과 다듬어 지지 않은 천재성이 열정과 꿈을 갈아 먹어 서글픈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사람의 위대한 점은 바로 교류 발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패러데이의 실험에 의하면 직류 발전기 보다 교류 발전기가 훨씬 만들기 어렵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에디슨에 비해 테슬라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에디슨과 정반대의 성격과 특징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전기 공급방식에서 교류와 직류 방식의 치열한 싸움으로 그 최고조를 달리게 만들었다. 에디슨과의 차별되는 것은 후에 설명을 하고 테슬라의 인물됨을 알아보자. 테슬라는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 이었다. 이러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내놓은 개념들은 그때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를 몽상가로 만들고 결국에는 과학계에서 잊힌 존재로 만들었다. 그 개념들은 우주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 화성 탐사, 죽음의 광선, 전 지구적 통신, 괴상한 군사 무기 등이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각광받게 된 것은 참으로 역설 적이다.
이제 두 사람의 인물을 비교 해보자. 에디슨은 발명을 할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에 대한 초안을 대충 만들고 난 후 재원을 얻기 위해 뛰어 다녔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가 상품으로 나오기 까지 엄청난 기간이 걸렸다. 하지만 테슬라는 어떻게 만들면 제품이 나올지 확신이 서기 전까지 계획서에 옮기지 않았다. 그래서 테슬라가 에디슨을 평하는 글을 보면 두 사람의 시제품을 만듦에 있어서 차이를 알 수 있다.
“ 건초 더미에 바늘을 하나 던져 놓고 에디슨에게 바늘을 찾으라고 한다면 에디슨은 건초 더미를 하나하나 찾아 볼 것이다. 하지만 나라면 건초 더미에 떨어진 바늘의 범위를 계산해서 에디슨이 하는 일의 90%의 효율로 바늘을 찾을 수 있다.” 배우자에 대해서도 테슬라는 평생 독신 이었다. 에디슨은 첫 번째 부인에게 말하길 "난 당신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소, 당신 역시 그렇다면 나와 결혼 합시다. 나의 제안을 잘 생각해보고 어머니와 상의를 한 후 다음 주 화요일에 결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알려주시오. “
이 두 사람의 대결은 전기 공급 방식에 있어 교류와 직류의 세기의 싸움에서 그 치열한 경쟁을 보여 주고 있다. 에디슨이 만든 직류 발전기로 조명 기구에 전력을 공급하려면 엄청난 양의 전류가 필요했다. 이 전류는 정격 전압과 결합이 돼야 하고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전류 전달 량은 전선의 굵기에 좌우가 되는데 무작정 두껍게만 만든다면 전류가 새어 나오는 누출 량도 비래해 진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누출되도라도 필요한 양만큼 가정에 들어갈 수 있게 하려면 엄청난 양의 전력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직류가 사용되고 있다면 전 지구상의 구리를 다 긁어모아도 필요한 만큼의 구리선을 만드는 데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결국 에디슨은 각각의 건물마다 나름의 발전소를 보유하여 전기의 이동 거리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에 경쟁하는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교류 전압을 변압기를 통해 낮출 수 있었다. 이는 곧 고전압 전류를 생산해 먼 거리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압은 발전소에서 주거 지역으로 가면서, 다시 전기 기구 근처에서 단계적으로 낮추면 된다. 이것이 오늘날 사용되는 방법이다. 발전소에서 40만 볼트에 전압을 보내면 중간 기지에서 11000 볼트로 낮아지고 가정에서 사용할 때는 220볼트가 된다. 결국 충분히 안전한 수준의 전압으로 필요한 만큼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류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어려움도 없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결국 에디슨은 테슬라의 발전기를 앞세운 웨스턴 하우스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대 그 과정에서 에디슨에게 많은 실망이 들었다.
100세르비아디라르 화폐에 있는 니콜라 테슬라와 발전기
교류체계를 부정하기 위해 에디슨 측은 헤럴드 브라운을 앞세워 전기의자를 만들었다. 즉 직류는 안전하고 교류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우리 몸에 치명적인 것은 직류가 아닌 교류이다. 하지만 그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브라운은 여러 강연장에서 개, 말등에 교류 전류를 흘려서 공개 처형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나중에는 사람들 대상으로 한 전기 의자까지 만들어 놓고
“전기의자를 사용하면 단 5분 만에 심장을 정지 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법의 인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고 넘어 갈 것이 있다. 브라운은 교류가 아무 고통 없이 죄인을 처형하는 수단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반 대중이 잘못 사용할 영구 끔찍한 고통을 받는다고 떠들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에디슨 측이 분석적 사고가 아닌 사업적 이익에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에디슨 측은 처형대에 사용할 교류 발전기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웨스팅하우스 측을 속이고 교류 발전기를 얻어 냈다. 더 웃긴 것은 교류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하고 있던 에디슨이 뒤에서는 멘로파크의 자신의 연구실에서 교류체계를 연구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디슨측은 2번이나 테슬라를 속였다. 1번은 스트라스부르 기차역의 발전 설비와 조명 장치 프로젝트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시스템을 정상화 시키면 2500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 2번째는 극장과 사무실에서 사용되는 전구 400여개에 전력을 공급하는 에디슨의 거대한 발전기들을 동기화 시키는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책을 찾아 준다면 5만 달러의 성과급을 주겠다고 했다. 이 문제를 테슬라는 1년 후에 멋지게 해결했고 결과는 처절한 사기였다. 에디슨은 “자네, 우리 미국식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군. 이 말로 1년 동안 고생한 테슬라의 능력을 착취 했다. 도대체 미국식 유머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혹시 안톤 오노도 에디슨의 후예가 아닐지 DNA조사를 해보고 싶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마지막 모습에서도 상반대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둘 다 장수를 했지만 에디슨은 마지막 까지 과학계의 원로자리를 차지했고 당연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1931년 여든넷의 나이로 사망을 했다.
하지만 테슬라는 과학계에 잊힌 존재로 1943년 여든일곱 살의 일기로 궁핍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떠돌이 수십 명과 함께 쓰던 초라한 여관방 창가 자리가 그의 마지막 거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것이다. 교류가 직류와의 경쟁에서 이겼는데 왜 테슬라가 궁핍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일 것이다. 이점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전기 계통에서는 천재였을지 모르지만 사업 면에서는 백치와 다름없었다. 처음 교류 발전기를 만들어서 웨스턴 하우스와 계약할 때는 특허권 사용료를 1마력 마다 1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교류가 시장을 장악하기 직전인 1890년 웨스턴 하우스측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고 US 전기회사와 합병 하게 되었다. 이때 다시 재계약을 맺게 됐고 그 내용은 웨스턴 하우스 측이 일괄 금액을 지불하고 추후의 특허권 사용료는 없애 버린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받은 돈은 216000달러로 그 당시 평생 안락하게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특허권 사용료로 그가 받을 수 있었던 금액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만약 계속 특허권 사용료를 받았다면 지금의 세계 갑부 명단은 바뀌었을 것이다.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 발전기
흔히 우리나라 경제를 보고 ‘가마우치 경제’라는 말을 한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정작 돈은 다른 나라가 버는 것이다. 특허를 사용함에 있어 그 사용료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원천 기술을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면 남 좋은 일을 시켜주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CDMA를 최초로 상용화를 했는데 그 원천 기술을 왜 못 만드는가? 언제까지 남들이 만든 것을 보고 따라하고 그것에 사용료를 지불하는 이런 남 좋은 사이클을 이어 나갈 것인가? 이러한 사이클을 끊기 위해 엔지니어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요즘 이공계 위기라고 기피들 하지만 이공계에서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이 많이 나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테슬라와 에디슨을 조사하면서 방대한 양의 글이 나왔다. 내용이 너무 길면 읽는 사람들이 지루해 질 것 같고 뒤로 갈수록 에디슨을 욕만 안했지 완전 매도하는 글이 될것 같기에 줄여서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이렇게 말을 해도 직접 책을 읽는 것이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냥 이러한 견해가 있고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전하는 것에 만족하는 걸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에디슨은 전기를 훔쳤다. 마이클 화이트지음 2003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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