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300년을 기다린 호랑이 사냥꾼들, 일본 제국 시대(BGM/계속 업데이트)

대운풍 2014. 7. 2. 08:50

 

 

 

칼을 버리는 사무라이들, 메이지 유신 시대편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889년 헌법제정, 메이지 유신 종료

明治維新

 

 

 

 

 

 

 

 

 

이제

군국주의 팽창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한편 조선에서는....

 

 

 

 

 

 

 

1894년 6월 조선 정부의 부패로 백성들이 들고 일어섰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게 조선 백성들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했다.

동학농민군 봉기를 계기로 출병했던 일본의 조선 왕궁 점거와 동학농민군 진압 작전.

당시 일본에서는 이를  ‘한일전쟁’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본 판화들을 우키요에라고 부르는데

에도막부 말기 즉 메이지유신 시작 전즈음에 제작되고 판매된다.

이종 크리에이터가 이런 자료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당시 일본의 시각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들이 무언인지 알게해준다.

재패니메이션의 미화와 연출의 뿌리는 우키요에가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한국사의 지식이 없는 분들은 이번계기로 한국사도 나와 같이 공부하시길 바란다.

가능하면 햇갈리지 않게 친절하게 자료를 만들어 보겠다.

일본의 "천황의 군대" 영웅화, 신격화는 이때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서 무기 개발에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결국 최신의 무기들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죽창과 농기구, 화승총으로 무장했던 농민군들 이삼백명을,

일본군 한 사람이 상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화승총은 300년전 임진왜란 때 쓰던 총이었다.

 

재래식 화승총 사정거리 약 100m, 분당 2발 발사

13년식 무라타 소총 사정거리 약 2,000m, 분당 10발이상 발사)

 

 

 

 

 

 

 

 

조선 정부와 일본군은 조선백성들의 세금으로 구입한

 미국제 개틀링건으로 조선 백성들을 학살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청나라가 조선백성 토벌을 끝내면

일본까지도 토벌 해줄거라 생각한 듯 하다.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섬나라 민족의 오랜 꿈, 드디어 대륙을 치다.

 

 

 

 

 

 

후쿠자와 유키치 :

"이대로 곧장 중국으로 쳐들어가 성경과 길림과 흑룡강 3성을 점령하여

일본의 수중에 넣고, 북경까지 진공하여 보물과 고서적 같은 귀한 재보들을 약탈하라"

 

(야스카와 주노스케-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약이 체결되고 전쟁이 끝난다.

조선은 일본이 지배하는 걸로 확인했고,

 배상금 2억냥을 일본에 지불, 랴오둥 반도, 대만, 팽호 제도를 할양했다.

 

 

 

 

1904년 02월 08일 러일전쟁

러시아 제국이 쓰러지다.

동양인, 서양인 모두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중재로 러일협정을 맺었다.

이제 조선은 일본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로 넘지 못할 것 같았던 서양인을

쓰러뜨린 왜소했던 섬나라 일본,

 

메이지 유신의 검증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근대화의 행보에 대한 확신과

지금까지의 여정이 운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본 국민들은 무한한 자부심과, 애국심이 넘쳐났다.

전쟁은 두렵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 정치는 군인들이 하기 시작했다.

 

 

 

1905년 7월 29일 미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국을

상호 승인하는 극비협정을 맺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

청나라와 러시아에게 쇼부(しょうぶ)를 보았고, 미국과의 단도리(だんどり)를 잘 했으니

 이제 조선에게는 거칠 게 없었다.

 

 

 

 

 

1905년 조선 경부선 철도 개통

많은 전투와 열강들의 식민지를 목격한 일본은 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부산에서 서울까지 빠르게 군대와 물자를 실어나를 수 있게 되었다.

 

 

 

 

1909년 10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이토히로부미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인 안중근에 의해 사망.

안중근의 시신를 돌려주지 않기로 했다.

(100년이 지나도 돌려주지 않았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협조로 한일병합조약 조인 

 (후에 불법으로 밝혀졌다)

그는 매국노와 을사오적이란 호칭을 얻고,

일본제국으로부터는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아주 소수의 조선인들만이 반기를 들 뿐이었다.

 

 

 

 

 

 

 

 

오랜 숙원이었던

조선정벌-호랑이 사냥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결국 호랑이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이종 크리에이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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