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범근(車範根, 1953년 5월 22일 ~ , 경기도 화성)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할 당시 독일 사람들이 차범근의 로마자 표기를 부르기 어려워 차붐 (Tscha Bum)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빠른 공간 침투와 공중전에 강한 면모 때문에 갈색 폭격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국제 축구 역사 & 통계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차범근의 클럽 선수 생활]

[SV 다름슈타트 98]
1976년 10월 공군 축구단에 입대해 군 복무를 마치고, 1978년 12월에 분데스리가 SV 다름슈타트 98로
이적하였지만 병역 관련 문제로 계약이 파기되었다.
(당시 차범근은 참모총장의 권한으로 2년 뒤 제대를 약속받고, 공군에 입대하였다.
약속된 1978년 12월 복무 기간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특별 휴가를 받아 독일로 떠나 푸스발-분데스리가 SV 다름슈타트 98에서
1경기에 출장했다. 그러나 공군의 입장 변화로 출국 11일만에 다시 귀국한 후, 복귀해서 1979년 5월 31일 만기 제대하였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80년 UEFA컵을 들어올리는 차붐]
[1980년 UEFA컵 결승전 차범근 활약상 모음]
병역 관련 문제를 해결한 후, 1979년 7월 분데스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스카우트된다.
스카우트 후에는 곧바로 1980년 팀을 UEFA컵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고,
이듬해인 1981년에는 팀이 DFB-포칼 우승컵을 드는데 공헌하였다.
1980년 3월에 열린 UEFA컵 결승 1차전에서는 나중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MVP가 되는 '로타 마테우스'가
차붐을 전담마크하면서 프랑크푸르트가 2:3으로 패하게 된다.
5월에 열린 2차전에서도 역시 마테우스를 내세워 차붐을 전담마크했으나 차붐이 대활약을 펼치며
프랑크프루트가 1:0으로 승리하고, 차붐은 MOM에 선정되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MVP, 로타 마테우스]
* UEFA컵은 지금도 값어치가 충분한 컵이지만 차범근의 시대에는 그 값어치가 훨씬 더 높았다고 이야기할 만하다.
이전부터 필자는 UEFA컵의
가치를 형식적으로 격하시킨 결정적인 사건을 99/00 시즌 도입된
‘챔피언스리그 탈락 팀들의
UEFA컵 합류 제도’로 간주해왔다. 이것야말로 최종 예선과 조별 단계를 통해
챔피언스리그에서 ‘낙오’된 클럽들을 구제하는 ‘패자부활전’ 성격을 띠면서 UEFA컵의 ‘독자성’을 크게 훼손하였다.
각 리그의 ‘컵 우승자’들끼리 벌이는 컵위너스컵이
폐지되고 UEFA컵이 그 기능을 포괄하게 된 것도
UEFA컵의 강화라기보다
챔피언스리그를 ‘최대한 비대한 양질의 대회’로 구성코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였다.
이러한 변화는 챔피언스리그에 국한해서는 분명 성공적이었던 반면, UEFA컵은
중계율, 중계권료, 스폰서비, 입장수입 등의
‘경제 논리’ 상으로도 챔피언스리그에 여러 발짝
떨어진 대회로 전락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차범근 감독의 분데스리가 시절, UEFA컵은 바로 이 ‘독자성’을 갖추고 있는 대회였으며,
각 리그의 ‘시즌 챔피언’과 ‘컵 우승자’만을
제외한 많은 나머지 강호들에게 문호가 열려있는 대회였다.
-출처 토탈사커 '한준희'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8년 UEFA컵을 들어올리는 차붐]
[1988년 UEFA컵 결승전 골 장면과 승부차기 영상]
1983년 7월에는 분데스리가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여 1988년에 다시 한 번 UEFA컵에서 우승하였다.
이 우승으로 차범근은 각기 다른 두 팀에서 UEFA컵 우승을 차지한 9번째 선수가 되었다.
1988년 5월에 열린 UEFA컵 결승 1차전에서 레버쿠젠은 45분, 49분, 56분에 골을 내주고
3:0으로 패한다. 2주 후에 레버쿠젠에서 벌어진 2차전 경기에서도 전반전까지 3골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0:0으로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후반전에 레버쿠젠은 57분, 63분에 골을 넣으며
1,2차전 합계 3:2를 만들었다. 차붐은 후반 81분 우측에서 프리킥으로 올려준 공을 헤딩으로 꽂아넣으며 동점을 만들었다.
레버쿠젠은 24분 사이에 3골을 터트리며 연장전으로 경기를 가져갔다. 양팀은 승부차기에 돌입했지만
레버쿠젠은 승부차기에서 2-0으로 밀리며 큰 위기에 봉착한다. 하지만 레버쿠젠의 골키퍼 뤼디게르 볼보른이
상대의 킥을 연속으로 세번이나 막아내면서 기적적으로 레버쿠젠은 3-2로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1989년 현역에서 은퇴한 차범근은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리그 경기에서 98골을 득점하는 기록을 남겨
기존에 네덜란드의 빌리 립펜스의 기록(92골)을 경신하고, 리그 외국인 선수 최다 골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0년 후 1999년 스위스의 스테판 샤퓌자가 106골로 경신했다.)
차범근의 308경기 출장은 1977년 덴마크의 올레 비요른모세가 수립한 323경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출전 기록이다.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게이 바바레즈가 경신했다.)
차범근이 1985-86 시즌에 기록한 17골은 지금까지 분데스리가에서 아시아 출신 선수 중
한 시즌 동안 가장 많은 골을 넣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다른 기록은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기록한 98골이 모조리 필드골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는 선수 시절 페널티킥 공포증을 겪었고 그 때문에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
그 ‘트라우마’는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된 첫 경기에서 발생했다. 차범근은 운명의 1972년 5월 7일,
제5회 아시안컵 대회 출전을 시작으로 성인 대표팀 무대를 밟게 되었다. 그날 태국 방콕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전이었고, 한국은 2-4로 패했다. 차범근도 키커에 포함되어 보란 듯이 찼으나
긴장한 탓인지 공이 골대 높이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이후 차범근은 국내에서나 독일에서나 은퇴할 때까지 페널티킥을 차지 않게 되었다.
그는 대학생 시절 연습 경기에서도 페널티킥을 자주 실축했고, 유럽에서 뛸 때는 자신에게
승부차기 임무가 맡겨질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그리고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한 10시즌 동안 단 1장의 옐로카드만을 받았을 정도로 투철한 페어플레이 정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차범근의 국가대표 생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의 모습]
1971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1년 후인 1972년에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5월 7일 이라크와의 AFC 아시안컵 경기에서 데뷔하였다. 1986년 FIFA 월드컵에도 참가하였다.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에서 1:4로 뒤지고 있을 때 7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해 동점을 만든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86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였던 1986년 6월 10일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에서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국가대표로 121경기에 출전하여 55골을 넣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선수 중 최다 골 기록이다.
차범근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초로 센추리 클럽(A매치 100경기)에 가입하였으며
세계에서 최연소(24년 139일)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였다.
[차범근의 지도자 생활]
1990년 11월 23일 K리그 팀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아, 1991년 K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1994년 시즌을 마치고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어 팀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997년 1월 7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됬는데, 당시 대표팀의 상황은 어수선했다.
불과 한 달 전인 1996년 12월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 이란에 2-6의 참패를 당해
8강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어 박종환 감독이 경질되었고, 선수단의 사기 역시 떨어져 있었다.
차범근은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고 수습하여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 대비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차범근은 자신이 경험한 독일 푸스발-분데스리가 시절을 토대로 독일식 축구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그 결과 서서히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인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일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조였는데 무엇보다도
숙적 일본과 같은 조에 속한 것이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다음은 당시 펼쳐진 아시아 최종예선의 결과이다.
카자흐스탄 3:0(승)
우즈베키스탄 2:1(승, 후반 42분 결승골)
2연승을 기록한 대한민국은 본선 진출에 있어 최대 고비인 일본과의 원정 경기를 9월 28일 도쿄 국립 경기장에서 치르게 되었다.
반드시 월드컵 본선에 첫 진출하겠다는 일본에 맞서 대한민국은 상당히 고전했고,
결국 후반 20분 고정운의 패스미스로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의 가모 슈 감독은 선제골을 지키기 수비수 아키타 유타카를 넣는 수비전술을 펼쳤고,
이를 눈치챈 차범근은 수비수 홍명보에게까지 공격에 적극 가세할 것을 지시하여 공격전술로 맞불을 놓았다.
이 전술이 적중하여 마침내 후반 40분과 43분 잇따라 골을 기록해 2-1로 역전승을 거둬 대한민국은 3연승으로 B조에서
단독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이 경기는 소위 ‘도쿄 대첩’으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히고 있다.)
이후 아랍에미리트3:0(승)
우즈베키스탄 5:1(승)

[1988년 멕시코 월드컵 대진표]
발언을 해서대한축구협회는 그에게 5년간 대한민국 국내 지도자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다.
징계가 해제된 2003년 말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감독을 맡게 되어 현장에 복귀했다.
차지하였다. 2008년에는 자신의 K리그 통산 2번째 우승과 컵대회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여 더블을 이룩하였다.
2009 시즌에 임해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10위에 머물렀다.
일어나기도 하였다. 2010년 4월 24일 5연패를 기록한 뒤 인터뷰에서 퇴진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6월 6일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포스코컵 2010 경기가 끝난 후 공식적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캐스터 : 독일의 명장 뢰브가 화면에 잡히고 있습니다.
차범근 : 그렇습니다. 제가 선수시절에 함께 뛰었었는데요. 좋은 선수에서 좋은 지도자 되었군요.
캐스터 : 뢰브는 어떠한 선수였나요?
차범근 : 제 교체선수였습니다.
2.레버쿠젠의 레전드이자 2002 한일 월드컵의 독일 국대 감독인 루디 푈러와의 이야기
2002년 FIFA 월드컵 기간 중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16강 독일과 파라과이의 경기를 해설하였는데,
경기 내용을 보고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다. 준비도 안 된 상태다.’라고 말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루디 푈러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차범근이 현역 시절 아스피린을 너무 많이 먹었다.’며 되받아쳤다.
이 둘의 설전이 독일 전역에 전해지자 여론은 루디 푈러가 '차붐에게 무례한 말을 했다' '푈러가 망언을 내뱉었다'라며
맹비난을 퍼부었고 결국 푈러는 차범근에게 사과를 하게 되었다.
3.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 11 행사에 초청된 차범근을 두고 팬들이 남긴 말
“10년 동안 308경기에서 단 한 장의 옐로카드? 세계 최고의 페어플레이어라는 얘기잖아.”(tempestloor)
“한국이 다른 많은 문제들로 축구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시절에 차범근이 태어났다는 점이 안타깝군.
만약 요즘이라면 메시나 호날두 같은 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IKAG4ever)
“내 유년기의 완벽한 영웅이 귀환하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러 가야지. 직장에서 쫒겨나는 한이 있더라도.”(Booking agent)
-출처: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01&contents_id=22947
4.퍼거슨 전 감독과의 프랑크프루트 시절 UEFA컵 일화

5.지도자 시절 레버쿠젠과의 일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39&aid=0001946356
차범근 감독은 13일(현지시간) 열린 친정팀 바이엘 레버쿠젠의 홈 경기 관전을 위해 바이아레나를 방문했다가
대대적인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리그 17라운드 경기가 열리기 전 레버쿠젠의 장내 아나운서는
“차붐이 경기를 관전하러 왔다. K-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이 곳을 방문했다”고 소개했고, 전 관중이 기립 박수와 환호로 축하를 했다.
현지 중계 방송에도 차범근 감독이 경기를 지켜보고, 옛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잡혔다.
중계 캐스터는 차 감독을 레버쿠젠의 ‘레전드’로 소개하며 수원을 한국의 챔피언으로 만들고 경기를 보러 왔다고 설명해줬다.
경기를 진행하던 레버쿠젠과코트부스의 선수들도 무슨일인지 의아해하다가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다.
심지어 패트릭 헤머스 슈테판 키슬링, 카어스텐 라멜로프 등의 선수들은 직접 차범근에게 찾아서 사인과 사진을 요청했다한다.
6.지도자 시절 무리뉴, 발락과의 만남



발락 “여기가 차붐의 조국입니까?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7.프리패스 차붐
“차붐이라면 어디든 프리패스”
[스포츠칸 2006-06-09 16:42]
차붐’(차범근 MBC 해설위원·수원삼성 감독)은 독일에서 ‘프리패스’다. 언제나 어디서나 환영이다.
상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독일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대표 얼굴이라고 할까.
13일 토고 전이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스타디움. 테러나 훌리건 우려 때문에 철통보안으로 취재진
역시 사전취재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차붐’과 함께라면 촬영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봉쇄된 스타디움이 ‘차붐’이라는 한 단어에 스르르 열린 것이다.
“당신에게 사인을 받고 싶었다. 제게 정말 큰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