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갤러리 헐트119님의 글입니다.
아프니까 결혼이다
1. 연애에 목숨을 걸다
1-1. 보빨의 미덕
1-2. 더치페이
1-3. 내가 왜 화난지 몰라?
1-4. 74와 임신공격
2. 헬게이트 오픈, 예식
2-1. 장모의 그늘
2-2. 꾸밈비
2-3. 공동명의, 인생딜
2-4. 기분 갑자기 다운됐어
3. 결혼, 허울뿐인 무상섹스
3-1. 고양이기운, 콘푸레이크
3-2. 용돈생활
3-3. 오늘 나 건들지마
4. 희망, 나의 분신
4-1. 카톡프로필을 채워주는 너
4-2. 200백만원짜리 유모차
4-3. 키즈까페 사모님
4-4. 마눌년의 하소연
5. 집구석
5-1. 쓸쓸한 출근
5-2. 김부장, 이 개새끼
5-3. 넥타이 패잔병
5-4. 멍멍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5-5. 아빠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
6. 숨지고싶다
6-1. 중국원양자원
6-2. 풋이냐 콜이냐
6-3. 여보 미안, 영숙이가 어렵데
6-4. 빚보증 그리고 공황장애
6-5. 아프니까 결혼이다
7. 손절 타이밍
7-1. 피타보라스 마지막 공식
7-2. 헤븐 스탬프, 이혼수속
7-3. 뽀삐야 죽지마
7-4. 독거
8. 잘놀다 갑니다.
8-1. 아팠다, 이제는 아니다.
8-2. 파란불
8-3. 따뜻한 봄의 한강
8-4. 상장폐지 내 인생
프롤로그
다행이다.
딱 적당한 만큼의 따뜻함이다.
마포대교,
삶의 끝자락에 서있던 사람들이 마지막 악수를 하던 난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보다 눈물이 날것 같아 그만뒀던 사연들.
바람이 귓볼을 따뜻하게 스친다.
긴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봄볕이 반갑기도 하지만
새 생명을 일으키는 이 태양볕 밑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다.
지난 시간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릿솔을 훑고 지나간다.
10년간의 결혼생활,
신혼여행을 갔던일
차를 사고 좋아했던일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줄 아이가 태어났던일
넓은 평수로 옮기며 정든 동네를 떠났던 일
차들이 내 뒤를 쌩쌩 지나간다.
지난 기억들도 그렇게 빠르게 나를 떠나버려,
내 삶을 편안한 안식속에서 잠들수 있게, 허락해 줬으면 좋겠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내 아들 해철아.
미안하다.
내 존재가 너에게 짐이 되어버린 이 사실이
나는 견딜수가 없구나.
먼 훗날 너도 이해 할수 있겠지.
그리고 여보.
미경아.
나 이해해 줄거지?
난 당신이 미워서 떠난게 아니야.
난... 그저...
난간을 넘으니 지나가던 차들이 크락션을 울린다.
하지만 멈춰서는 차는 없다.
그래, 이건 저들의 응원일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눈앞이 흐려진다.
하지만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길을 먼저 갔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봤을 이풍경을 기억하자.
낯선 그곳에 갔을때, 그사람들도 알고 있을 이 풍경을 말거리 삼아
말을 걸고 친구가 되자.
그러면 나는 그곳에서도 외롭지 않겠지.
그래 외롭지 않을거야.
외롭지 말자.
바람이 휙 불었다.
저 뒤에서 누가 애타게 부르는것도 같지만
처연한 뒷모습을 인사삼아 작별 하련다.
당신들은 아프지 마세요.
나처럼 아프지 마세요.
이 스러져가는 나를 보며
당신들은 행복의 방향을 찾으세요.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
인사처럼 남깁니다.
아프니까,
아프니까 결혼이다.
풍덩
제1장 연애에 목숨을 걸다.
1-1. 보빨의 미덕
갓 대학에 입학한 모솔아다 김헌동군.
공부는 고딩때 열심히 했으니 신나게 놀고 싶고
무엇보다도 연애가 해보고 싶다.
같이 입학한 여자동기들을 대충 둘러보긴 했는데 참 답이 안나온다.
공부독이 덜빠져 아직도 뽀끔뽀끔 피어있는 여드름 하며,
교정이 진행중인 토끼이빨, 어설픈 화장과 차림새까지.
도저히 여자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남초성향이 강한 학부 특성상
be CC를 위한 경쟁률을 뚫어내기 쉽지 않다.
사실상 헌동이같은 172, 흔한 뿔테충에게 눈길을 주는 여자애도 없다.
와꾸가 살짝은 세련된 선배년들도 마찬가지다.
수년간 받아온 보빨탓에 더 건방지고, 남자를 더 깔보면 깔봤지 덜하진 않다.
상태가 괜찮은 동기년들은 이미 그 물에 젖기 시작한것 같다.
동기며 선배들이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밥값부터 시작해서 기념일 선물까지, ?들이 따로 오더를 주는게 아닌데에도
잦들은 의무감 이상으로 보빨을 행하고 있다.
보빨,
시파, 이 보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알다시피 이걸 펼쳐 네 음절을 만들면, 분명 우리가 입에 담아 음성으로 전달하기 힘들만큼의
저속한 단어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타액 이송이 아니다.
이것은 필시 구시대부터 쌓여온 남녀관계의 적폐중 하나이자,
섹스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잦들의 울부짖음이다.
그리고 시대의 남성들이 짊어지고 가야할 책임과 의무감의 상징이기도 하지.
헌동이는 오늘도 기분이 잦같다.
처음하는 조별과제, 학부에 몇명 있지도 않는 ?동기중 두명과 함께 하게 되었다.
고추들만 있는것 보다 분위기도 좋고 이참에 친해지기도 싶었는데,
같은 조에 들어온 고추동기가 문제다.
까톡
영미: ^*^ 준석아~~
준석: ^^응 왜 영미야?
영미: 나랑 혜영이 좀 늦을것 같은데 헌동이랑 둘이 먼저 좀 하고 있으면 안될까?
준석: 웅웅 걱정마 ㅎㅎ 조심히와~
"야... 왜 애들 안오냐?"
"아, 좀 늦는다가 천천히 오랬어"
"왜 , 뭐하는데"
"몰라? 오겠지"
"아 얘들은 맨날 늦게와 우리둘만 준비하는거 같아... 졸짱.. 빨리 오라고 하지는..."
"헌동이 너가 말하면 되잖아.."
하지만 헌동도 말꺼내기가 쉽지 않다.
괜히 틱틱거리는 성격으로 비춰질까봐 두렵다.
속으로 시파시파 거린뒤, 휴 하고 참아 넘긴다.
막상 ?들이 헤헤 웃으면서 나타나면
자기도 모르게 혀가 움찔움찔 거리며 보빨모션을 취하게 된다.
준비해둔 꿀잼드립에 빵 터져주는 ?동기를 보면 보빨지수가 더 올라간다.
보빨 보빨,
이 끊을수 없는 굴레는 어디서 부터 왔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바다건너 섬숭이들 처럼보빨에 초연해 질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보빨을 하면서도 ?들의 주체적인 삶을 등떠미는 코쟁이 성님처럼 될수 있을까.
헌동이는 도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학교 생활에 익숙해질즈음..
헌동은 일찌감치 공대녀 동기들을 타겟아웃 하고,
보빨 열정을 실현한 상대 ?을 타학부에서 찾게 되었다.
누가 말했지.
남자에게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단 한명의 여자가 있다고.
그래, 첫사랑.
그년 생각에 잠 못들던 헌동.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편지를 쓰던 날들.
그리고 어느 여름날의 고백.
"영아아... 너... 너 흡... 너... 를 좋?..좋아해!!!"
애송이 그 자체 였던 헌동.
그리고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는 말로 거절을 대신한 무용과 그년.
얼마후 농구부 선배 품에서 술에 취한채 비틀거리는 그년을 보고 헌동은 생각했다.
'맞아.. 그녀의 행복을 빌어줄수 있다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것 만으로도 ... 크?'
그년이 찾아와 그사람때문에 힘들다고, 그사람 없인 안되겠다고,
그리고 너처럼 좋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라고 했던 그 날밤에도
같이 듣던 교양과목 레포트를 맡겨주며, '넌 정말 믿을수 있어' 라고
응원을 해주던 날에도.
헌동은 의식 저변에 '그 무언가'가 쌓여가는지도 모르고
그년을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년은,
그년은,
바로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먼 훗날,
그때 느꼈던 '그 무언가는' 바로
'보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년에 대한 보혐이 아닌, 그년을 제외한 년들에 대한 '보혐'
첫사랑에게는 결코 오버랩 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것.
보혐은 보빨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보혐종자들은, 한때 지독한 보빨러였다.
-이름 모를 주갤러
제1장 연애에 목숨을 걸다.
1-2. 더치페이
전역한 헌동.
물론 기다려준 여자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여자가 없었지.
일병 꺾였을 무렵,
외박 나와서 불러본 여관바리 아줌마가 인생의 첫여자였고
지금까지는 마지막 여자다.
그날 막내이모뻘 아줌마를 품고 애써 눈물을 참았던 기억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있다.
그렇게 수없이 보빨을 시전했건만
헌동을 받아주는 ?은 없었다.
전역 후 집에서 한참을 뒹굴거렸더니 살이 찌기 시작했고 피부도 안좋아졌다.
예전에 스스로가 생각했던 극혐 히키 이미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닥을 치는 자존감, 속에서 뭔가 부글거리는게 있으면
키보드로 풀게 되었다.
한때 '오늘만 산다'는 그린야갤러로 활동했었다가
문득 두려워진 고소미 때문에 주갤로 적을 옮겼다.
모솔게이다. 아.. ㅅㅂ 나도 연애하고 떡치고 싶다.
여자 사귀어본썰 은 여관바리
이런 여자가 홀딱벗고 드라군 자세로 덤비면 어쩔거냐?
??머? 횡령따리 겸손따~
.
.
.
하루의 반이상을 주갤과 야갤을 왔다갔다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
고등학교 친구놈이다.
"임마, 너는 복학안하냐? 알바라도 하지 그르냐?"
전화 받자마자 속을 긁는게 거슬린다. 대충 끊어야겠다 생각한다.
"왜.. 또... "
"마, 여자 소개 시켜줄까?"
오옷!
생각치도 못한 소개팅 제안이 반갑다.
ㅇㅇ, 흔쾌히 예스를 날리고
사진을 요구 한다.
괜찮다. ㅍㅌㅊ.
약간 김슬기 삘이 나는것 같기도 하다.
다리를 달달떨며 손톱을 물어뜯는다.
생각해보니 뭐 부터 해야될지 모르겠다.
주갤럼들아 나 소개팅 잡혔다. 김슬기 삘나는데?
Re: 주멍
아이 개?기들.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3일후에 잡힌 약속이다.
옷도 사고 해야될거 같다.
거울을 본다.
덥수룩한 머리
뿔테안경
런닝과 트렁크만 입은 히키하마 한마리가 서있다.
갑자기 자신감이 급다운된다.
의자에 앉아 곰곰히 생각한다.
이걸 나가야되나.
나가면 또 무슨말을 하지?
옷은 어떡하고.
돈은... 아... 씌발... ?까 그냥?
갈등이 된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왠지 이번에 밖에 걸어나가는걸 실패한다면
세상과는 영영 조우를 하지 못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에이 몰라 가자.
머리를 자르고
오랫동안 연락을 안하고 지내던 클럽 죽돌이 친구에게 코디를 부탁한다.
어... 엄마... 나 사실 소개팅이 잡혔는데 돈좀....
쭈뼛쭈뼛 거리며 어머니께 말을걸었다.
예상했던것과는 다르게 어머니 얼굴에 화색이 도신다.
아이고 그럼 그럼 돈 줘야지.
뭐하는 아가씨니.
몇살.
어디가고.
집에 한번 데리고 와 응?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 아들놈.
이놈이 여자를 만나러 나간다니,
마치 옥같은 며느리라도 얻은 기분이신가 보다.
아냐 아냐 그런거 하면서 돈을 낚아채듯 받아
방으로 들어온다.
또 고민.
음... 뭘해야 되지? 음...
주갤럼들아. 한번만 도와줘. 소개팅 나가서 무슨말 하냐.
Re: 따먹
Re: 꿀잼드립 ㄱㄱ
Re: 드립 자제하라 이기야. 베츙이 티 내지 마라 이기야.
역시 별도움은 안되지만,
인터넷 용어를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약속 장소에 30분이나 미리 도착했다.
김슬기삘 ?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게 보인다.
어색한 미소로 웃으며 인사를 건낸다.
?도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한다.
나쁜 여자 같진 않다.
여자들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스타벅스에 가자고 한다.
미리 연습한 대사를 그대로 읊으며 뭐 드시겠어요?
아, 저는 아메리카노요.
아메리카노 두잔요.
계산을 한다.
속으로 내심 , 이 여자는 더치페이를 안하는가 보내.
아마 밥은 자기가 사겠지?
주갤문학에 나오는 그런년들은 흔히 있는게 아닐테니까 말이야.
서로 호구조사를 간단히 마치고
관심사나 학교 이야기등을 하는데
이야기가 꽤 통하는 편 같다.
툭툭 내가 날리는 조심스런 잽드립도 먹힌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쌩긋 웃는 모습이 이쁘다고 생각한다.
저녁드시러 가실까요?
페북에서 보니 여자들은 남자가 '뭐 먹으로 갈래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하는걸 싫어한단다.
그래서 미리 식당을 봐오긴했다.
예의상, 어떤거 좋아하세요? 물으니
여자가 대뜸 '초밥욧!' 한다.
원래 여자의 대답을 '호호 아무거나요'라고 정해놨었다.
그래서 경양식집을 알아봐놨는데
약간 당황.
그래도 커피만 마시고 도망가는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한다.
부랴부랴 스마트폰으로 찾아 간 일식집.
조금 비싸 보이긴 하다.
여자한테 돈을 다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가격대다.
일단은 먹는다.
이런 저런 얘기를 더한다.
생각 보다 즐겁다.
에프터를 신청할법 한 사이즈라 생각한다.
식사를 다 마치고 자리를 일어나려는데
이 ?이가 약간 쭈뼛쭈뼛 하면서 화장실을 간다.
왠지 자기가 화장실 간 사이에 계산을 마쳐놓으라는 사인 같다.
아무리 보빨을 하러 나왔다해도 주갤럼은 주갤럼.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나와 밥을 먹어줬다는 자괴스런 고마움에,
그래! 다음에 내가 얻어먹으면 되지 안그래?!
둘이 밖으로 나오니
얻어먹은게 당연하다는 듯 '잘먹었어요 오빠'.
순간 보혐으로 움찔했지만, '오빠'소리에 기분이 좋다.
허허 웃으며 그래 그래 ~
집으로 룰루랄라 돌아오는길.
왠지 잘 될것 같다.
어머 아들 왔어? 어땠어 어땠어?
대답대신 식 웃고 방으로 그냥 슥 들어온다.
까톡
헌동: 난 집으로 들어왔어 ^^ 잘 들어갔니?
20분간 답장이 없다.
왠지 초조하다.
그렇다고 전화를 하는건 오바인듯.
다시 확인해보니 숫자1이 없어졌다.
갑자기 초조하다.
설마.
설마.
그때
"까톡"
오오오
박동수: 윈드러너 초대 이벤트 ! 바람을 달려라 !
아... 개?기.
또 자신감이 없어진다.
엄마 한테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때 전화가 걸려온다.
옷! 그 ?이다.
엽세여? 네.. 오빠 ㅎㅎ 네 금방 왔어여 네네~ 네~
다행이다.
문자보다 더 비중있는 통화가 걸려오다니.
왠지 기분이 좋아 자랑하고 싶다.
주갤럼들아 오늘 소개팅한애다. 드립좀 먹히더라.
Re: 10%0%안전 12바13카123라 안114심번호 제공
관심없노..
암튼
그날 이후 시간날때마다 카톡을 센딩 센딩.
바로 바로 답장은 안온다.
그래도 항상 답장을 빼먹지 않는 친절한 아이다.
어느새 주갤럼의 보혐지수는 제로에 가까워 지고 있다.
주선자 친구 녀석도 꽤 좋은 신호를 줬다.
자신감이 붙는다.
그래 할 수 있다.
과감히 에프터 신청.
예스를 받아냈다.
받아내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돈이 제일 문제다.
내가 그래도 얘보다 나이도 많은데 얻어먹는건 문제가 있는것 같다.
이건 보빨이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해주는거다! 생각한다.
알바자리를 알아봤다.
단기간에 비교적 안전하고 쉽고 착하게 돈버는 직종(이라고 생각을 했다)을 찾았다.
택배 상하차.
누구는 힘들거라고 했지만, 어떤가 살도 빼고 좋은데?
드디어 본격 연애시즌에 돌입한것 같다.
돈 벌고 잘꾸며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잘 보이고 싶다.
아자 아자!
제1장 연애에 목숨을 걸다.
1-3. 내가 왜 화난지 몰라?
그래 진짜 모르겠다고 진짜 시팔연아!!!!!!
라고 목까지 차오른 말을 뱉을 뻔했다.
내년이 되어버린 이년은 정말 알아갈수록 골때린다.
어떻게 골때린건지 그걸 또 설명하기가 그렇다.
노랑색인줄 알고 쭉짰더니 검은색이 쭉 나오는,
매사에 종잡을수 없는 감정을 가진년이다.
사귄지 1년
이?을 내?으로 만들어 감격에 젖어 있던것도 잠시.
사랑이라는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것을 느끼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티비에 나온 연예?을 이쁘다고 했다고 삐지고
다이어트 하는데 치킨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고 삐지고
아무리 봐도 인디언 추장같은 치마를 입어놓고는 이상하다고 했다고 삐지고
오목두다가 졌다고 삐지고
살찐거를 안쪘다고 해서 삐지고
또 막상 왜 삐졌냐고 물어보면 알려주지도 않아요.
그래도 항상 비는건 헌동쪽이었다.
헌동은 이?을 어렵게 꼬셨다.
처음에 들이댔더니, 저만치 달아나고
나중엔, 아 내가 싫은가보다 하고 체념할려니
모해 ㅇ_ㅇ?
이딴 문자나 보내서 심란하게 하고...
군대가기전 짝사랑했던 무용과?보다 더 숭악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 휘둘리는 이마음을 어쩌겠는가.
이 불편한 잦을 떼버리고 불가에 귀의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왜 어중간하게 태어나서는,
말한방에 여자들을 뻑뻑 넘기는 존잘들처럼 살 수 없을까.
-그... 그래 윤미야... 그게...
-뭐? 뭘 잘못했는데?
-아니 그래.. 내 잘못은 말야...
-그것도 모르지? 응?
욕이 또 목구녕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이럴때 말빨조지는 주갤럼 한명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것을.
SNL 김구라편에서 봤던 욕 대행서비스가 간절했다.
여자박사 주갤럼들도 이런건 해결을 못한다.
일단 무조건 헤어지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들이다.
선택지에 오답밖에 없다 이거다.
헌동한텐 이런 상황이 안올줄 알았다.
연애 초창기,
공부한다고 애쓴다며 도시락을 바리 바리 싸들고 온 그년을
헌동은 천사라 생각했다.
보혐보혐 거리는 주갤럼들도 꼴보기 싫었다.
디씨도 끊었었다.
헌동은 인생을 다 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로 감정소모가 심해지니
보이지 않던것이 보이고
염두하지 않았던 것이 느껴졌다.
데이트 비용도 거의다 부담했고,
기념일에 선물도 헌동쪽에서만 챙겼다.
애초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헌동은 남자고, 남자는 힘쓰는 일로 돈을 금방 벌수 있다 생각했으니까.
데이트 통장?
말조차 꺼낼수가 없었다.
자존심, 알량한 자존심때문에.
가끔은 눈치빠른 여친?이 알아서 척척 돈을 썼으면 싶을때가 있었지만
계산대 앞에만 가면 팔짱을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니
어쩔수가 없었다.
남자는 자존심 때문에 불편하다 생각했다.
특히 이 헬조센의 체면남, 격식남들 말이다.
첫?도 만난지 3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했다.
목석처럼 굳어서 멀뚱 멀뚱 올려다 보는 여친?의 눈빛이 거슬렸지만
사정후 정성스럽게 키스해주는것을 잊지 않았다.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물론 이 ?은 처녀가 아니었다.
헌동도 엄연히 말하면 숫총각이 아니긴 하지만,
여관바리한테 페이강간 당한 세미 총각 아니겠는가.
그 부분이 좀 쫀심상하는 대목이긴했다.
하지만 과거를 묻진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
아니, 어차피
너 왜케 허벌해라고 주갤 식으로 표현했다간 차일께 뻔했으니까.
아무튼 이젠 조금씩 지쳐간다.
오랜만에 주갤에 접속했다.
주갤럼들아, 이 씌빨 여친 ?을 뚫어버릴까?
존나 지맘 몰라준다고 염병을 떠는데?
조금은 과격한 표현 같지만, 주갤럼들은 이런 자극적인 떡밥이 아니면
관심을 안준다 (속으로 미경아 미안해, 를 잊지않는다).
Re : 초대남 줄서 봅니다.
Re : ㅗㅜㅑ
Re : ㄴㄷㅌ
Re : ㄴ ㄴㄷㅎ
Re : 네 여친부터 만드시구요
Re : ㄴ 리얼 여친있다.
Re : 주작은 뭐다?
예상했던대로 크게 진도는 안나가네.
암튼, 고향같은 주갤에 돌아오니 보혐이 충전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 기분을 내일 만나는 여친?에게 꼭 풀어내야겠다.
화이또!
제1장 연애에 목숨을 걸다.
1-3. 74와 임신공격
시간이 흘렀다.
헌동과 여친?은 기나긴 연애 레이스의 막바지에 다다른것 같다.
자기 친구 결혼에 다녀올때 마다 유난히 짜증을 더 부린다.
지나가다가 애기들을 보면 왠지 오바스럽게
"꺄~~ 넘흐 귀여웡" 거린다.
헌동은 왠지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 직장 생활 1년차,
모아둔 돈도 없고, 일단은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있다.
유부남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는데,
웨딩프레스를 가하는 여친?이 부담스럽다.
여친?이 압박을 가할때마다 빠져나가기 쉽지가 않다.
이년도 이제 내년이면 서른, 참 오래도 만났지.
상폐를 앞두고 손절가 지키려는 발버둥이 가끔 무섭기도 하다.
-오빠, 1년 회사생활하면 얼마모여?
헌동이 얼마 모았는지 궁금하나 보다.
-모으긴 뭘 모아... 없어 모은거....
-그래....
실망스러움이 역력한 여친?의 얼굴에 대고
이 왜정마름영감 같은 년아, 니년 먹이고, 니년 입히고, 니년 모시고
다니느라 다썼지 어디갔겄냐? 아오 이 날강도 같은년.
만나러 나올때 교통카드만 딸랑 들고 나오는 년이 아주 뒤질려고!
를 외칠뻔했다.
결혼이란 참 부담 스러운거다.
5년이나 만난 여친?이지만, 확신이 들지 않는다.
얘가 날 정말 사랑하나? 아니 아니 내가 얘를 정말 사랑하나?
가끔 회사동료?이나 주위 지인?중에 괜찮은 사람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간다.
왠지 저 ?이라면 헌동을 더 사랑해줄것 같고
더 챙겨줄것 같고, 더 잘 맞을것 같다.
남의떡이라 그런지 훨씬더 이뻐보이기도 한다.
잦친구를 만났다.
-햐. 결혼 어떡하냐
-뭘 어떡해, 해야지, 제수씨가 하기 싫데?
-아니.. 그건 아니고
-뭘 망설여! 남자가 여자를 한번 사랑을 했으면 블랄블랄 옹시렁옹시렁
역시 보빨럼들은 만나면 피곤하다.
이럴때 주갤럼같은 보혐종자 잦친구가 없는게 아쉽다.
다들 남파한 간첩처럼 신분을 숨기고 사니까 있다해도 알아볼수 없지.
오늘은 헌동의 잦친구놈 결혼식.
혼자 올려고 했는데, 여친?이 박박 우겨 기어이 따라왔다.
어떻게 그런 자리에 남친을 혼자 보낼수 있겠냐며,
안면도 없는 헌동의 잦친구 결혼식에 따라온거다.
뭐 그 새초롬한 의중을 모르지는 않는다.
고급 웨딩홀 식당에서 공짜 점심을 먹을수 있는데다가
가장 효과적인 웨딩프레스를 가할수 있기 때문이다.
왕~~ 신부 넘흐 이쁘당~~
꺄 ~~ 오빠 오빠 친구분도 턱시도 넘넘 멋지넹?
우와~~ 축가 잘부른다.
흐응... 웨딩홀 넘흐 근사하당.
굉장히 거슬린다.
축의금 한푼 안낸 식권테이커, 헌동은 사뭇 못마땅하다.
다음부턴 몰래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식장을 나와 집에 가려는데
-벌써 가려구? ㅡㅜ?
-왜.. 뭐 하고 싶은거 있어?
주중에 잔업으로 달려 주말엔 쉬고싶었는데,
뭔가 느낌이 안좋다.
대게 이런식으로 되물어 보면 여친?은 삐진다.
-아냐... 나 갈게...
하...
돌아서는 여친?의 팔을 마지못해 당기며
-음.. 영화보러갈래?
요즘들어 배알이 좋아진 년은 삐진것도 금방 풀린다.
씽긋 웃더니 있는 힘껏 끄덕끄덕.
영화보는 내내 졸았더니 무슨내용인지도 모르겠다.
하품을 찢어지게 하면서 나오는데,
여친?이 더 불길한 싸인을 준다.
자꾸 칭얼대고 몸을 다 맡긴채 부비적거리며 걷는다.
얼마전 부터 대뜸 '섹스의 맛'을 알것 같니 마니 하더니,
며칠뒤에 생리 터지는데...
이 싸인을 캐치 못하거나 모른체 했다가는
꽤 피곤할거라는걸 안다.
이 섹스라는건 그야말로 여성가좆부처럼 여성편향적이다.
?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잠자리를 거부 할 수 있지만,
잦이 ?의 섹스사인에 No를 날렸다가는
반사회적 수치심 유발자가 되어버린다.
대실주세요.
터덜터덜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새끼마냥 절망적이다.
여친?이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잠자리가 원샷에 끝난적이 없다.
오늘같이 온몸을 베베 꼬는 날은 최소 쓰리샷이다.
콘돔을 챙겨 머리 맡에 두려는데
-오빠 콘돔 쓰게 ㅇㅇ?
-응.. 써야 되지 않을까...?
-치.. 내가 더럽니.. 오늘 안전한 날인데...
-그... 그래?
-응응... 나 요즘 콘돔 이물감도 싫단말야~
하면서 안겨오는 여친?.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거절할 구실이 없는게 안타깝다.
무엇보다도, 몸이 너무 힘들다.
내일 출근이 걱정된다.
섹스메크로 발동.
한떡 헉헉
두떡 헥헥
미경아 ..잠깐 입으로 안해줘도...
세떡 윽윽
여친?이 유난히 격정적이다.
소리를 꺄악 꺄악 지른다.
왠일인지 애무도 정성스레 해준다.
안쓰럽기도 하다.
며칠후
"까톡"
ㅡㅡ오빠
응 왜?
휴....
왜?
사진
주갤럼들아. 여친 임테기 두줄떴다.
칼같이 지켜오던 피임을 깨더니, 임신했단다.
이거 임신공격 아니냐?
Re : ㅋㅋ
Re : 네 다 호구
Re : 임신공격도 공사 싸이즈가 나와야...
Re : 무정자증 드립 ㄱㄱ
Re : ㅋㅋㅋㅋㅋㅊㅋㅊㅋ
Re : 태어나니 아빠가 주갤럼
눈물이 그렁거린다.
숨겨놨던 담배를 다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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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에 오타수정. 윤미->미경 ㅈㅅㅈㅅ
미래와 과거의 시간차없이 항상 현재를 배경으로 합니다.
나이만 먹어갈뿐. 이해바람.
제2장 헬게이트 오픈, 예식
2-1. 장모의 그늘
저녁즈음 걸려온 전화
흐으응 ㅜㅜ 오빠 흐흐흥흥
여친?이다.
그리고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
이년아 나가 뒤져 이년아~~ 아이고 이년아 내가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빼에에에에엑!!!!
여친? 엄마다.
여친?이 임신사실을 알린듯 하다.
가슴이 더 착찹해진다.
여친? 어머니께도 너무 죄송스럽다.
여친? 엄마가 수화기를 낚아채 쏘아붙인다.
자네 어떻게 할건가 ! 금지옥엽으로 키운 우리딸 !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 어머님.. 제가 곧 퇴근을 하니까. 댁에서 뵙겠습니다.
여친? 짚압.
초인종 누르기가 너무 망설여진다.
사실 여친의 부모는 헌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헌동이 한참 취업준비 공부를 할때,
여친?은 김치개밥같은 도시락을 싸들고 쫓아다녔다
그런데 헌동이 자꾸 결혼을 미루니
딸래미 적령기가 잦아들어도 모른척하는 파렴치한 놈으로 보이는거다.
뒷바라지 알맹이만 쏙 빼먹은 도동놈처럼.
그런데 이렇게 임신까지 시켜버렸으니..
할말이 없다.
여친?의 부모 앞.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네.
네. 어머님.
이제 어떻게 할건가?
네.. 그게 아직 준비가 안됐지는지라.. 하.. 죄송합니다.
??! 그게 할소린가? 얼른 날 잡으세!
예상 했던 시나리오였다.
분명 이 얘기가 나올것 같았다.
하지만, 모아놓은게 없는데 어떡하겠나? 응?
책임을 안지겠다는게 아니다.
당장은 어렵다는 거지.
물론 여친? 부모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여유를 가지고 '생각'할 시간좀 가지겠다며 직장을 때려치운
좆소기업 경리출신 딸년을 언능 치워버리고 싶겠지.
이냔이 뒹굴 뒹굴, 그 '생각'을 2년동안이나
하는걸 보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것은 말안해도 뻔하다.
아버님, 어머님,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꼭 미경이를 책임 지겠습니다.
여친?과 여친? 엄마의 입언저리가 씰룩 하는것 같다.
일단의 합의성 딜에 마음이 놓인듯 하다.
여친? 아버지는 흠... 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배웅 나온 여친?.
미안해 ㅠㅠ 힝힝..
아냐.. 울지마..
오빠.. 우리 애기는 어떻게 해? ㅠㅠ
'우리 애기'.
참 가슴을 무겁게 하는 말이다.
이 여자의 뱃속에 나의 주니어가...
내가 지켜줘야할... 생명이...
집에 돌아오는길
가슴이 무거운 와중에 뭔가 설레인다.
에잇 그랫!
여보세요? 응 오빠 왜?
미경아! 날 잡자. 내가 우리 부모님한테 말씀드려볼께!
진짜? 응... 알겠어...
태연한척 하는 여친?.
하지만 헌동은 알고 있다.
말의 뒷끝이 이렇게 파르르 떨리는걸 보면, 여친?은 감격에 젖어들고 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약간은 놀라시지만, 하고 싶은데로 하라신다.
아들놈이 취직이 늦어 모아둔돈이 없는것도 알고 계신다.
걱정 말라신다.
너무 죄송스럽다.
다음날 오전
여보세요? 아 네 .. 어머니.
여친? 엄마의 전화다.
다짜고짜 상견례 날을 안잡냐고 쏘아붙인다.
지금 근무중이라 다시 전화 준다해도 막무가내다.
아니 그런일을 미루면 되나!? 응 젊은 사람이 결단을 했으면 바로 바로 블라블라!@!$@#$@
아니 이런 씹ㅍ... 욕을 할뻔했다.
아무리 여친? 엄마지만, 곧 장모가 될 사람.
주갤럼이지만, 인륜은 지키고 싶다.
대충 네네 하고 달래서 전화를 끊었다.
문득, 이 결혼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자기 엄마를 닮아간다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여친 ?도 많이 변하긴했다.
탈김치는 아니었지만, 여리여리한 성격에 인상쓰는법 없었다.
그런데 요즘 지 엄마를 조금씩 닮아가는게 느껴진다.
하나하나 따지고 드는 성격이며,
성미에 차지 않으면 금새 얼굴이 욹그락 붉그락 해지는 것까지.
과연 여친? 집에서 나를 백년손님으로 맞아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상견례가 두렵다.
어른들 생각은 혼전임신이 여자쪽 책이라는데,
그걸 만회하려고 너구리같은 꾀를 냈을것이 분명하다.
서글서글 허허 거리시는 부모님이 마냥 그꾀에 당할까봐 무섭다.
집은,
차는,
혼수며,
예식장,
이런거 다 어떻게 하지?
가슴이 또 답답하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여친 ?의 전화도 한번 씹었다.
이 답답함.
우리 부모님 세대는 서로 힘합쳐 떨쳐내셨겠지?
하지만, 나는 마눌?이될 여친?의 몫까지 떨쳐내야 될 것 같다.
'힘듦'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니까.
나는, 강한 남자이니까.
그게 대한민국 남자의 몫이니까.
그것은 아픈 결혼의 시작이었다.
2-2. 꾸밈비
헌동과 여친?은 서로 언성이 커졌다.
-아니 그러니까 말야, 그걸 왜하냐고?? 돈을 딴쪽으로 쓰면 되잖아!
-아냐 아냐 ㅜㅜ힝 이건 꼭 해야해!!
아주 불고집, 똥꼬집, 이런 고집이 없다.
평소엔 그렇게 넋을 놓고 멍때림 상태로 살더니,
이년이 언제 부터 그렇게 똑부러졌다고 이러는지.
환장할 노릇이다.
오늘은 그냥 결혼식의 간략한 아웃라인만 의논할 예정이었다.
안그래도 최근엔 회사일까지 겹쳐 머리가 지끈 거리는 상황.
양가부모님 일이며, 곧 있을 상견례며, 친구들 섭외까지, 생각할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것 저것 알아봐 와가지고는 들이미는 여친?.
자기가 다 알아서 할테니 그렇게 알고만 있으란다.
얼씨구?
맨날 밀리던 휴대폰 요금도 알아서 하시지?
헌동쪽에서는 당췌 데이터가 없으니 반박할수가 없다.
뭐 스드메? 리허설 촬영? 셀렉?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거 할거지? 저거 할거지? 뭐할까?
그것도 하고 , 요것도 하고어맛! 이건 꼭 해야해!
여기가 좋데! 여기 예복은 완전 고급져 고급져!
신혼 여행은 발리? 아아 괌이 좋겠다!! ㅎ헤
하.. 정말 조선인의 피가 역류하는 순간이 아닐수 없다.
-아니,.. 미경아.. 그건 나중에 상의하고 지금 식장도 안알아봤는데
혼수랑.. 이런건 순서가 안맞잖아. 또 꾸밈비는 뭐야...
-꾸밈비! 꺄꺄 , 그거 엄청 중요한거야~
말이 안통하는년.
일평생을 이렇게 두서없이 살아온 년은 기분이 업되면
남얘기를 안듣는다.
집으로 돌아온 헌동.
훈련소 입소전 머리를 깎는 기분이다.
아니, 군대는 2년이면 끝나지만, 결혼은 죽어야 전역아닌가.
그야말로 앞이 안보이는 상황.
일단은 상태가 별로 안좋은 여친?을 어떻게든 구슬려봐야 된다.
처음엔 구름처럼 실실거리는게 귀엽고 이뻐 보였는데
지금은 거미집을 짜는거 같다.
말코호랑거미 같은년.
마땅히 상의할 곳이 없다.
여친?에게 다 맡겼다가는 터무니 없는 견적이 나올게 뻔하다.
주갤럼들아.. 혹시 꾸밈ㅂ...
아 관두자.
바랄걸 바래야지.
이미 3년전에 유부충이된 잦친구와 약속을 잡는다.
결혼하고는 자주 볼 수가 없던 녀석이었다.
-야야 오랜만이다야 어때 신혼~
-흐흐... 뭐 그렇지 뭐...
녀석의 얼굴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마누라한테 꽉잡혀 외출도 잘 못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음 그건 아닌것 같다.
그래도 뭔가 퀭하다.
총각때 그 많은 ?들을 후리고 다닌놈이라, 와잎 감시가 타이트한것 같긴하다.
그래도 결혼 경험이 있는놈 답게 이것 저것 잘 알려준다.
- 오케이 그럼 그건 됐고... 흠... 아! 야 꾸밈비는 뭐냐?
- 꾸... 밈비?... 그걸 달래?
- 어. 중요한거라던데
- 캬 제수씨 똑부러 지시네 아주그냥~ ㅋㅋ
이때까지만 해도 여친?을 칭찬하는것 같아 흐뭇했다.
-아 그래? 하하하하. 생각보다 미경이가 많이 알고 있구나 하하하하.
집으로 가는길.
녀석이 알수 없는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쓱 쓱 두번 쓸어준다.
- 여~ 담에 또 보자구! 웰컴투 유부남 월드~
훗.. 실없는놈
오랜만에 부모님과 형 내외까지 모여 저녁을 먹게 되었다.
- 야 헌동, 어떻게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냐. 급하게 만든 뱃속애기땜에 더 급하지?
형의 비아냥 거림에 대꾸 할수가 없다. 맞는 말이니...
옆에서 듣던 형수가 형을 만류 하며, 왜그래요 여보...
형수는 좋으신 분이다.
친절하고 사려도 깊어 부모님이 좋아하신다.
-아아, 형수 꾸밈비가 뭐에요?
형수와 엄마 표정이 굳어진다.
엄마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슬며시 내려 놓으며
-그건 왜? 꾸밈비 받아야 겠다니?
심상치 않다.
- 아니 아니, 그건 아냐~ 그건 아냐
일단 덮는다.
잠시 후 형수를 조용히 불러 다시 묻는다.
-아... 도련님 그건 말이죠....... @#$(&@(#
형수의 설명을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당장에라도 여친?에게 전화를 걸어 사자후를 날리고 싶다.
'내... 이년의 달팽이관을 그냥... !!!!'
- 어 오빠? 왜?
- 야 , 너 꾸밈비? 그거 받아야 겠다고 그랬냐?
- 뭐... 왜.... 그건 갑자기....
여친?이 안좋은 낌새를 알아차렸다.
- 아니 받을려고 하는 거냐고
- 으... 응....
헌동의 쇠힘줄같은 이성이 곧 끊어 질것 같다.
여친?이 학교 졸업후 스물 아홉까지 모은돈은 500,
어이가 없었지만, 헌동 자신도 변변찮으니 별소리 없이 넘어갔다.
어차피 양가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
헌동의 아버지는 아파트 전셋값을 내 놓으시며
새 아가는 몸만 와도 된다. 하셨다.
여친?네 형편이 좋지 않다는걸 아셨기 때문.
눈치없는 여친?은 그저 싱글벙글.
참 한심한 냔이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혼수비며, 부족한 부대비용도 부모님이 빌려주시는 마당에
꾸밈비?
- 그거 받아서 뭐하게, 화장품 사고 명품백 사게? 앙!!!?
처음으로 언성을 높인 헌동.
- ...
수화기 넘어로 여친?의 훌쩍거림이 들린다.
지친다.
아직 출발해보지도 못한 결혼.
내가 더 울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날 밤,
여친?의 어머니로 부터 전화가 왔다.
너구리 같은 기질로 한수 접고 들어온다.
- 호호호호, 김서방, 호호호호, 우리 미경이가 잘 모르고 그랬다네
그래도 요즘은 다 그렇게 한다더만 호호호, 그래도 우리는 그런거 생략합세 !
힘이 빠진다.
어떻게 풀어나가야 될지 모르겠다.
결혼한 친구들이 대단해 보인다.
웰컴투 유부남 월드~ 를 외치며 멀어지던 친구놈.
그 미소의 의미를 이제야 알것 같다.
거실에 나왔다.
어머니가 쇼파 위에서 잠들어 계셨다.
항상 저렇게 집안의 세남자를 기다리시던 엄마.
눈물이 핑 돌것 같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한테는 효도 해야하는데...
좋은 며느리 보게 해드려야 하는데...
2-3. 공동명의, 인생딜
지난주 주말, 양가 상견례가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속에서도
즐겁게 식사를 하며, 양가 가족이 담소를 나눴다.
장모님이 너구리 같이 둥글둥글 대화를 이끌어서
헌동네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한숨 돌리니, 앞으로 해야할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혼집을 알아보고
웨딩홀도 알아보고
웨딩촬영, 폐백, 피로연, 신혼여행, ....
아씨발 존나 많네.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두명 몫을.
집에서 놀고 있는 여친? 더러 가전 제품하고, 가구는 대충 싸구려로 골라 놓으라고 했다.
입을 삐쭉 거리는 여친?, 아주 저걸 그냥 확 ...
헌동은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결혼식때 부를 사람들도 챙겨야 된다.
골때리는건 여친?쪽 하객알바를 불러야된다는거.
친척도 그렇고 친구도 몇명 없댄다.
그도 그럴것이, 연애하는 동안 여친?의 친구?들을 몇명 못만나봤다.
기껏해여 길가면서 몇번 마주친 정도.
그때마다 여친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친?...
하고 묻는 친구?에게
아~ 아~ 응 ~ 그냥~
하는식으로 얼버무리며 그 자리를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런 여친?의 행동이 좀 낯설었고,
섭섭할뻔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헌동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는 삼엽충삘인걸.
암튼 그런 협소인맥 여친?에게,
예전 다니던 회사사람들 부르면 안된냐니까,
펄쩍펄쩍 뛴다.
캥기는게 있나보다.
자기같은 주갤히키도 쥐어짜면 부를사람이 있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암튼, 가까운 친구놈들 부터, 연락이 오래 전에 끊긴 녀석들 한테 까지
청첩장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은 신혼집을 보러가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회사가 여친?집이랑 가까워 그 근처에 구하기로 했다.
공교롭다는 표현은, 그래, 그다지 좋지는 않다는 거다.
부모가 자식 집에 온다는게 이상할것도 없지만은
그래도 아직은 장모될 사람이 부담 스럽다.
저기 여친?이 온다.
역시 약속시간에 늦었다.
맨날 30분 늦던걸 오늘은 20분 늦었으니 칭찬해 달란다.
휴... 그래... 잘했네...
까페
대충 알아봐둔 신혼집 리스트를 다시 체크한다.
음... 오빠오빠... 여긴 울집이랑 넘 가깝지 그치?
음... 오빠오빠... 여긴 좀 오래된거 같지 않아 그치?
음... 오빠오빠... 여긴 좀 이쁠것 같다 그치 그치?
음... 오빠오빠... 여긴 완전 고급 고급 렁옹시렁 옹시렁 옹시 렁
기준 설정 장애인 여친?은, 가장 중요한 '돈'을 빼먹고 있다.
모르는척 하는건지, 그냥 상관없다고 생각하는건지.
답답하다.
어차피 우리 아버지 돈이라 이건가?
미경아 미경아, 거긴다 우리가 들어가기 너무 비싸.
힝... 그래.... ?
응. 알잖아. 아버지가 주신돈 xxxxx 정도야.
음... 그르쿠나...
아쉬운듯,
쎄련?련 아기자기한 빌라를 리스트에서 지운다.
근데, 오빠
응?
이거 공동명의지?
훅 들어온다.
올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자기 여친?이라면 던질법한 수류탄 같은 멘트,
'김헌동. 정신차려라. 어차피 이 결혼 계산기를 두드려야해.
부모님이 주신돈, 공동명의는 아니되오!!!'
으...응 글?? 일단 부모님 명의로 해둬야 되지 않을까?
앙? 그러면 세금 더 내야되실건데 오빠 부모님?
다시 예상밖의 공격.
여친?이 말하고 있는 세금관계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미리 한수 읽고 들어온 여친?.
준비를 미리하고 온게 틀림없다.
당황스럽다.
'김헌동!! 물러서지마!! 두뇌풀가동!!'
아니 그러면 내명의로 하지뭐, 상관없잖아?
한수 던지고 여친? 표정변화를 살핀다.
예상했던대로 도끼눈이 되기 시작한다.
또 온갖 일장연설를 쏟아내서 사람 속을 긁을 태세다.
응! 알겠어!
?!
오. 의외다.
헌동이 예상 할 수 있던, 여친?의 모션이 아니다.
응당 눈물을 그렁 거리며,
같이 살면서 그렇게 까지 해야해? 같은 대사를 쳤어야 내 여친?인디?
아, 암튼 뭔가 기선을 잡은것 같아, 기분이 좋다.
역대급 인생딜이었다 생각한다.
맛있는 밥 까지 사주고,
여친?을 바래다 주고 집으로 왔다.
'그래, 그래 이냔아, 불공정 거래? 안되죠..ㅋㅋ'
발걸음이 가볍다.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뭔가 엄청 무거운 냄새가 헌동을 엄습한다.
'..뭐지?'
부모님이 나란히 쇼파에 앉아, 심상치 않은 눈길로 보신다.
뭔가 할말이 있으신것 같다.
불길하다.
'그 거'에 관한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너 집 너 명의로 한다고 했니?
씨팔.. '그 거' 다.
네? 네.. 그걸 어떻게?
니 장모될 사람 전화왔더라.
이런 씨말려죽을 여친?!
기어이!
너구리 같은 모녀가 작당을 했음이 분명하다.
아이고 사돈어른 ~, 네네~ 안녕하셔써요~ 암 그러믄요~
아, 네 안그래도 '그 거' 때문에 전화 드렸죠. 호호호호
요즘은 다 그렇게 하는건데 말이죠 호호호, 좀 서운하기도 블라블라 웅시렁 옹시렁
아... 아버지 신경쓰지 마세요. 그건 제가...
긴말 하지말고 공동명의 해라. 그런거 생각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하는거 아니냐.
아버지 말씀이 틀린게 아니다.
하지만, 여친?의 술수에 넘어간것 같다.
왠지모를 배신감을 느낀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이 고생해서 모으신 그돈을...
또 가슴에 먹구름이 양떼 처럼 몰려온다.
네... 아부지... 그럴게요...
아버지 뜻을 거스를 수가 없다.
이런 일에 고집을 꺾으실 분이 아니시다.
헌동도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돈으로 구하는 집이니까.
헛기침 한번 하시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 뒷모습.
저 야윈 어깨에 자기가 얹혀놓은 짐같은게 보이는듯 하다.
헌동의 얄팍한 계산이 부모의 사랑앞에 하찮아진것도 같고.
부끄러웠다.
죄송스럽고.
아버지는,
철없는 막내 며느리도 자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으셨나보다.
2-4. 기분 갑자기 다운 됐어.
헌동은 여친?과의 연애 초창기 추억에 잠겨있다.
여의도에서 흐드러지던 벚꽃을 눈처럼 맞던 그년,
경복궁 돌담안을 무수리 나인처럼 총총 걸어다니던 그년,
여름날 계곡에 발을 담그고 물처럼 맑게 웃던 그년,
그래, 여친?은 아름다웠고,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여친?은 헌동 인생의 첫 단짝이었다.
헌동은 이 '여자'를 평생이고 지켜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럴수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결혼이란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무시무시 했다.
어렵고 복잡했다.
둘만 생각하면 됐던 연애시절과는 달랐다.
양가부모님은 물론 친척, 친구와 지인들까지 챙겨야 했다.
특히 부모, 형제와 마눌년 사이에서
우왕좌왕 거리는 잦친구들을 적지않게 봐왔다.
누가 그랬다.
가운데서 정치를 잘 하라고.
하지만, 헌동, 제 몸하나 건사하기도 벅차다.
어디서부터 불어나 버린건지 알 수 없는 허례허식과 사람들의 기대치가 와류처럼
헌동을 휩쓸어 내렸다.
아니, 이런 시팔, 그냥 둘이 조용히 살면 안되는건가?
몇백년 몇천년 살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준비할게 많지?
결혼식 준비도 그래, 차떼고 포떼고 이것저것 다 생략해봤지만
눈에 띄게 확 줄어드는게 없어.
누가 이런걸 만든거야? 응?
가장 컨트롤 하기 힘들었던건 단연 여친?이었다.
몇번 대충 찍고 몇백만원 달라는 요상한 웨딩사진들.
찍어봤자, 집구석에 쳐박아 놓고 안볼게 뻔한데
꼭 찍어야 된단다.
하고야 말겠단다.
드레스며, 장신구며, 메이크업까지
헌동의 눈엔 다 똑같다.
아주 일관적으로 희멀겋다.
그런데 여친? 말론 죽어도 다르단다.
자기는 생애 가장 중요한날 싸구려 드레스로
존심 구기는 여자가 되기 싫단다.
처음엔 설득을 했다.
- 아니 미경아. 우리 그돈 더 아껴서, 집 사는데 보탠다던가, 여행을 간다던가 하면 안될까?
- 응, 안돼.
- 아니 왜? 그날 하루 하고 말거잖아?
- 안돼,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안돼.
?들의 세계엔 도저히 이성적인 논리가 파고 들수 없는 영역이 있다.
앞뒤 맞춰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득해봤자 안통한다.
헌동만 열받는다.
발끈.
눈이 뜨였다.
새벽이다.
결혼 날을 잡고,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다.
자다가도 결혼식 생각만하면 눈이 번쩍 떠진다.
요즘은 회사일도 유난히 바쁘다.
결혼식 준비 때문에 한번씩 빠져나오는데 미안해죽겠다.
잠을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 힘들다.
주갤럼들아 나 곧 장가간다. 잠이 안온다.
Re : 캬 주갤럼 보혐 보빨 이중성 보소
Re : ㅗㅗ
Re : ㅠㅠ
Re : 헬게이트 오픈ㅋㅋ
Re : 마누라 사진올려봐라
Re : 결혼 왜하냐. 안정되려면 클래식을 들어라
...... 주갤럼색기들 여전하구만.
하... 글쎄... 나도 정신차리고 보니 여기 와있네.
결혼. 왜하는거지?
집을 보러왔다.
회사 근처의 다세대 주택이다.
셋이 살기엔 나쁘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여친? 표정은 떨떠름 하다.
- 오빠.
- 응?
- 여기 몇평이랬지?
- 스물둘? 스물넷?
- 흠.... 글쎄...
'뭔... 씨발 글쎄는 얼어죽을...'
지 웨딩드레스는 그렇게 쿨하게 쵸이스 하더니,
이성이성 열매를 쳐먹었나...
- 딴데 알아보면 안돼?
- 다 봤잖아. 여기가 가격도 적당하고 회사도 가까워.
- 아니... 내친구 현미는 서른평에 사는데.... 그래도 좁데
'아오, 씨발... '
- 하하하.. 나중에 돈벌면 넓혀가자. 지금은 형편이 안되니까 응?
- ... 기분 별루야...ㅠㅜ
아니, 당장 두대가리 눕힐려면 원룸도 넘치지 뭔 시버럴
서른평이야 서른평이, 방이 도대체 몇개나 필요한겨 이 여왕개미 같은년아!
헌동은 알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또래 년놈들 중에, 서른평에 마흔평에
집 척척 사서 결혼하는 년놈들은 정체가 뭐지?
또 그걸 사서 뭐해 도대체.
아니 사정이 된다면 사겠지만, 이냔은 진짜 밑도 끝도 없어.
살려고 사는게 아니라 보여줄려고 살려는, 어우 오진년...
붙잡고 설득을 해봤다.
안통한다.
여친 ?은 기분은 더 안좋아지고 있다.
꽤 오래 갈것 같다.
이럴땐 일찌감치 설득을 포기해야된다.
- 알겠어 알겠어.
그럼 딴데 한번 더 보러 가자.
- 헤헷
'하... 시파... 무얼 위해 이렇게 사는고...'
그해 여름,
헌동과 미경은 결혼식을 올렸다.
웨딩홀 성수기를 피해 잡은 무더운 여름 날이었다.
장모의 말에 따르면 용한 무당이 잡아줬다는 그날.
거의 반값에 빌리다 시피한 웨딩홀.
그 가운데서 최고급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눌년이 아주 활짝 웃고있었다.
신혼집은 회사에서 1시간 반 떨어진 시외 서른평 아파트를 전세로 잡았다.
대출을 잔뜩 끼고 잡은 그집에 들어가면서,
차라리, 처가와 멀어 다행이다... 라고 헌동은 되내었다.
그리고, 마눌년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다.
3-1. 고양이기운, 콘푸레이크
- 그래.. 그렇다니까.. . 마누라 싫은게 아니라
'결혼'이 무서워서 다시는 못하겠다야.
- ㅋㅋㅋㅋ핑계는... 야 너 전화오는거 아냐?
- 어? 어...
마눌련이다.
퇴근후 친구좀 잠깐 만났는데, 벌써 닥달 전화가 온다.
야자 짼날 걸려온 담탱이의 전화같다.
- 어.. 여보..
- 어디야?
- 응, 회사 앞인데, 잠깐 현우좀 만났어..
- 아 현우 오빠? 그 오빠 뭐해 요새?
마눌련을 나에게 엮어줬던 바로 그 잦친구다.
- 뭐 그냥... 회사 다니지 뭐
- 암튼 빨리 들어와. 애기가 떡볶이 먹고 싶데.
염병.. 지가 먹고 싶은거면서..
- 어.. 그래 이제 갈거야..
- 뭐야 벌써들어오래? 캬.. 김헌동이도 어쩔수 없구나
- 닥쳐 새꺄.. 그건 그렇고..... 넌 언제 결혼 안하냐?
- 때 되면 하겄지 뭐~ㅋㅋㅋㅋㅋ
떡볶이를 사들고 집에 온 헌동.
현관문 앞, 뾰로통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마눌련.
눈빛에 가시가 잔뜩있다.
통화할때 까지는 괜찮더니, 또 뭔 수가 틀렸나 보다.
- 나, 왔어.
- ....
- 왜 뭔일 있어?
- 너무 한거 아냐?
- 뭐가?
임신한 와이프는 배가 불러서 밖에잘 나가지도 못하고
입덧때문에 음식도 제대로 못먹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퇴근후에 곧장 집에와서 와이프 수발 들 생각은 안하고
친구랑 노닥거리고 놀고, 전화 안했으면 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
또 시작이다.
남들은 이 마눌련이 호로몬 과다 분비로 임신우울증, 조울증 같은게 온거라고,
그래서 감정의 기복이 심한거라고, 남편잦인 내가 이해 해야 된다고 한다.
하, 그런데 이 냔은 분명 출산전에도, 결혼전에도
원래 이랬단 말이다.
- 미안해 미안해, 금방들어올려고 했어.
하지만 토를 달면 안된다.
떡볶이를 건내주고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물을 빼면서 거울을 보다
딴생각에 잠긴다.
왜 내가 여기 있지?
어떻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된거고
내가 누군가의 남편이 된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불과 몇년전만해도 히키짓으로 허송 세월을 보내고 있던 헌동.
아주가끔씩 친구들이랑 피시방 가는 정도가 대외활동의 전부였다.
늘 더먹머리에, 바지에 똥싼놈처럼 어기적 어기적 걸어다니는 뿔테충.
20대 중반의 김헌동.
흠. 내가 변한건가...?
그때 나는 혼자였는데, 외로웠나?
맨날 캬캬 꿀잼 꿀잼 키득키득.... 철이 없긴 했지.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웃고 낙천적으로 지낸거 같기도 하고....
헌동 자신도 스스로가 낯설어 볼을 꼬집어 본다.
꿈은 아니다.
마눌련 배가 부르는 만큼, 부담감도 커진다.
하지만 설레이기도 하다.
내 아이.
내 아이가 태어 난다라...
- 여보~~ 빨리 안나오고 뭐해~~
- 어, 어 그래 ~
마눌련은 아주 떡볶이청소기다.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왠지 사랑스럽다.
내 아이를 가진 '여자'는, 사랑스러운것 같다.
내 아이가 지금 떡볶이를 먹고 있...
흑,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그래 이게 행복이 아닐까?
다음날 아침.
헌동은 잠을 설쳤다.
마눌련이 떡볶이 먹다 체했는지,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걱정이 되서 한숨도 못잤다.
지금은 좀 나아진것 같다.
옆에서 코까지 곯며 잘 자고있다.
주방으로 오니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쌓여있다.
싸이즈를 보아하니 어제 점심때 부터 미룬것 같다.
출근시간이 약간 널널 하니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앉힌다.
아침거리가 없나 싶어 냉장고를 열어본다.
막상 차려먹기가 귀찮다.
식탁위엔 반쯤 줄어든 시리얼 봉지가 있다.
음.. 오늘도..
우유 유통기한이 하루 지났지만, 괜찮을것 같다.
콸콸콸... 사부작 사부작
씨리얼을 와그작 와그작 씹다보니
어릴적 생각이 난다.
'참, 어릴땐 이걸 좋아했는데, 엄마가 해주시는 밥보다 더...
... 요번 주말에 집에가서 반찬이나 얻어올까?'
마눌련 이불을 덮어주고 집을 나선다.
머리도 한번 쓰다듬어준다.
'흠.. 아프지 마라'
피곤하긴 한데, 견딜 만하다.
왠지 더 힘이 나는것 같기도 하다.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잡는다.
헌동, 생각한다.
사람들은 지금의 내모습을 어떻게 기억할까?
나는 누구지.
띵동
엘리베이터에 탄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어깨를 꽉 짓누르는것 같다.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생각한다.
'이 부담감에 지고싶지 않다.'
어릴적 티비에 나오던 시리얼 광고 노래가 귓가를 맴돈다.
안녕 토미~ 난 니가 정말 좋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
좋았어!
그래, 김헌동!
좋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
아자, 아자!
3-2. 용돈생활
요즘 따라 회사 일이 바쁜 헌동.
월말 보고니 연말 보고니 하며 눈코 뜰새가 없다.
- 어이 김대리
- 예, 차장님
- 오늘 퇴근 후에 대포 한잔 어때?
- 캬~ 좋죠~ 저야 영광이지만, 아시잖습니까~ 와이프 만삭인거요 하하!
- 아 그랬지 허허허!
헌동은 꽤 능구렁이가 되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돌려 치는 법을 몸에 익힌것 같다.
이제 더이상 말 수 없 극내성 히키가 아니다.
업무 능력은 모르겠는데, 사람들과 어울림에 있어서 트러블이 거의 없다.
단 ?들은 제외.
얼마전 회식자리,
결혼시 남녀 불평등에 대해 같은 부서 미스 황이랑
말씨름을 한적이 있다.
최대한 그런쪽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다크 주갤럼 헌동,
하지만 술김에 미스황에게 크리티컬 데미지를 입혔고,
'여자들이 다 그런건 아니거든여? 제 주위에는 안그러 거든여?' 라며
길길이 날뛰는 미스 황년을,
각종 미디어 여론과 검증된 통계를 제시하며
확인 사살했다.
그 날 이후 사무실의 ?들한테 공공의적 취급을 받지만,
신경 안쓴다.
마눌련을 제외한 ?들은 언제나 손절 가능이니까.
되려 ?들 신경안쓰고 더 능청스레 비빌 수 있으니
윗사람들이 더 좋아한다.
아무튼 오늘도 집에 빨리 들어가야 한다.
점심때 통화한 마눌련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오늘도 ?퀴려고 손톱을 세우고 있을것 같다.
- 왔엉?♡
?
뭐지
왠일로 현관문까지 인사를 나왔누.
알랑 방구 낄거리가 생겼나?
헛 시발?
설마?
책장 책에 꽂아둔 비자금을 발견한건가?
등에 한줄기 땀이 흐른다.
주스를 갖다 주며 옆에 바짝붙는 마눌련.
뭔가 불안하다.
- 여보~
- 으.. 응?
- 우리집은 돈을 여보야가 관리 하잖아~?
- 관리랄게 있나.. 그냥 통장 오픈해서 적금 들어가는거 빼고 생활비 주는건데.
- 아니, 그래두.. 일단 여보야가 다 맡는 거잖아.
조금씩 마눌련의 꿍꿍이가 드러난다.
곧 탁본 뜨듯 선명히 찍힐것 같다.
- 아니~, 내 친구들은 다 지들이 관리 한다더라고~
그럼 그렇지..
뭔 소리 하나 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경제주권 박탈 드라이브다.
아니 된다.
지금도 유명 무실한 오픈 어카운트.
이걸 통?로 다 맡겼다가는 자체 금융위기가 올것이 뻔하다.
- 아냐, 어차피 내가 맡으나 너가 맡으나 다 똑같은데 뭘.
- 치... 모야... 내 친구들이 왜 너는 생활비 받아 쓰냐 그런단 말이야!
하. 또 피가 역류해 기어2가 발동할것 같다.
염병, 몇 있지도 않은 김치 친구?들.
그년들은 진짜 문제다.
가만히 잘 있는 마눌련을 꼬셔서 암투를 벌이게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남편은 이래야된다, 우리 남편은 어떻다,
남자들이 그래야지, 시월드 어쩌구 저쩌구, Cm #g 어쩌구 저쩌구
온갖 딤채사상을 전파하는 역적도당들..
마눌련 김칫물 들이는 그 양산형 김치?들, 정말 싫다.
낙엽 지는 가을 산에 묻어 버리고 싶다.
아 물론, 헌동은 자기 와잎이 김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조금 멍청하고, 조금 고집쌔고, 앞뒤가 안맞을 뿐.
주위 친구들이 물들이려고 하는거지, 마눌련은 원래 착하다 순수하다 생각한다.
암튼, 경제 관념 부족한 이 마눌련은 믿을 수가 없다.
절대 월급 통장을 넘겨 줄 순 없다.
공과금도 제대로 못내는 이 마눌년은, 수년안에 디폴트를 선언할거다.
- 그래 , 조금만 생각 해보자. 애기 낳고 생각해봐도 되는 거잖아?
- 진짜지? 진짜지? 애기 낳고는 내가 관리 하는거지 ?
- 아... 아니 .. 그게 ..아니라
- 오예~, 둥둥아 아빠가 약속했져요~ 우리 둥둥이~ 아빠 져야여~
배를 쓰담 쓰담
- ...
어이가 없다.
'아.. 아무리 그래봐라...뺏길까보냐...'
아기가 태어난다해도 어떻게든 뻐팅겨야한다.
주갤럼들이 말하는 남성 권위 절하 시대,
자신 만큼은 스스로 동참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물 마시러 가는척 책장으로 향한다.
김난도 선생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빼낸다.
조심 스럽게 책을 펼치니, 5만원권 5장이 빳빴하게 살아있다.
마눌련 몰래, 목숨을 걸고 빼돌린 비자금이다.
회사수당 지급명세서를 세탁했다.
볼때마다 행복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책을 꽂아둔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돈을 빼돌린게 뿌듯하다.
'암, 남자는 또 언제 돈들어 갈지 모르지! 이건 정당한거야'
몰래 딴주머니를 찬게 흥미진진하고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하다.
어차피 다 자기가 벌어다 준 돈인건 잊고 있는 헌동.
3-3 마눌련의 하소연
으으으으으으...
헌동은 요즘 머리가 아프다.
출산을 곧 앞둔 마눌련의 조울증세가 깊어지고 있다.
안그래도 지랄맞은 성격, 호로몬 분비체계에 문제가 생긴게 틀림없다.
헌동은 집에 갈때마다 살얼음을 걷는것 같다.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현관문만 바라봐도
가슴이 쿵쾅 거린다.
회사에서도 틈틈히 문자나 전화를 주고 받지만
와이프는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린다.
그저께는 순대가 먹고 싶대서 사갔더니
지가 원한 순대의 느낌이 아니라고 생지랄 발광 염병을 아주 개 ㅆ....
출산 경험이 있는 같은 사무실 ?들에게 조언을 구해보지만
- 흥! 글?요.
냉담하다.
아직도 헌동에 대한 데프콘이 해제가 안됐나보다.
개냔들....
동료 잦들한테 물어보면
- ^-^ 야근을 하세요. 맘 편합니다.
어휴..
삐빅 ?
거실이며 온통 불이 다 꺼져 있다.
? 뭐지
- 여보..? 미경아...
불을켰다.
마눌련이 완전 다운된 분위기로 쇼파에 앉아있다.
머리를 잔뜩 풀어 헤쳤다.
- 옴마야... ! 야, 너 뭐하니
- ...
대꾸가 없다.
- 여보.. 뭐해? 뭔일 있어?
- 흐아아앙 흐엉어어엉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마눌년.
왜 그렇냐고 물어봐도 대답없이 울기만 한다.
낮에 엄마가 다녀 가셨다고 했는데 무슨일이 있었나보다.
난감하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봐야 되나.
- 왜? 뭔일 있었어? 엄마가 뭐라셔?
고개를 절래절래
그건 아닌가 보다.
- 그러면 뭔데? 울지말구... 말을해봐...
어차피 지 감정이 허락하지 않으면 말을 안할 마눌련이다.
그때 까지 달래줘야 된다.
게임할때 경험치 같은거다.
일정이상 채워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 히잉...흐응... 그게... 힝....
입을 뗀다
- 미영이가....
미영이? 마눌의 몇 없는 친구다.
- 프랑ㅅ... 프랑스로.. 놀러 갔어...
- ... ?
이 임신 우울중이란건 아주 뜬금없는 방향으로 찾아온다.
화장실에 갔다가 자기 모습을 보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남편이 지가 먹을려고 챙겨뒀던 요구르트를 멋모르고 먹어도 우울해진다.
주위 얘기를 들어보니 유독 내 마눌련이 더 심한것 같긴 하다.
헌동한테는 온갖 잡변덕을 부리고 허파아웃하는 염병질을 하지만,
천성은 완전 밝은 여자였다.
그 긍정적이고 팔푼이 처럼 밝은 모습.
택배 사기를 당해도 푸하하 웃고
지나가던 차가 뿌린 물웅덩이 오물을 뒤집어 쓰고도 웃던 마눌.
누구 보다 밝던 이 마눌련은 누구 보다도 더 어두워졌다.
상한가 물량을 받아 놨더니, 오후에 하한가를 맞은 심정.
출산후에도 회복이 안될까 걱정된다.
둥글 둥글 해진몸을 일으켜 어디 갈데가 없으니,
할 수 있는게 많이 없었나 보다.
밥을 차려주러 오셨던 엄마가 다녀가시고 나서는,
하루종일 태교 음악 듣고, 책 보고
또 지루해서 친구들 SNS도 들어가 보고,
그러다가 친구?의 페북을 봤는데, 미영이란 년이 에펠탑 옆에서 시큼하게 웃고 있더란다.
너무 부러웠단다.
그래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단다.
예전 같으면 별거 아닌거 가지고 개염병한다고 뭐라 했겠지만,
임산부 아닌가.
조심 스럽다.
헌동도조금씩 우울해지는것 같다.
손뼉으로 양 볼을 치며
그래, 나라도 정신차려야지!
- 여보... 아니.. 오빠..
- 응?
- 나, 이제 엄마 되는거지?
- 그렇지...
- 나.. 이제 홍미경이 아니라 누군가의 엄마로 사는거지?
- ...
- 난... 이제 내 인생을 가질수도 없고, 꿈도 찾을수 없는거지?
솔직히, 이 대목에서는 풉, 웃을 뻔했다.
애초에 취집이 꿈이었으면서...
- 그... 그런가?
- 하... 나도 이제 다 저물어 가는 구나...
마눌련의 그 말에, 헌동도 새삼, '나'란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아빠, 아버지?
김헌동 말고,
누구의 아버지.
곧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눌,
소중한 나의 가족이 또 하나 생기는구나.
거울 앞에서 볼을 꼬집고 있던 한 남자는
아들이나 딸을 안고서, 다시 거울앞에 서겠지.
그리고는 생각 할거다.
이 아이를 지켜 주겠다고.
이 아이의 우산이 되어 주겠다고.
그리고 이 마눌련,
이 '여자'와 남은 여생을 함께 저물어 가겠지.
헌동 혼자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가끔 개 엿같은 직장 생활을 견디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누구에게 위로 받아야겠다,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럴 겨를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느껴가고 있다.
상처위에 새살이 돋듯,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변해가고 있는것.
그 나태하던 히키청년은, 이제 가장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세상 누구 보다.
강한 이름.
가장.
아버지.
마눌년아.. 아니 미경아... 좀만 힘내자.
지켜줄게.
4-1. 카톡프로필을 채워주는 너
주갤럼들아, 나 아빠됐다!!!!!!!!!!!!! .jpg
축하해줘라! 다행히도 이목구비는 지 엄마 닮았다.
건강한 아들이다! 야호!
아 ㅋㅋ 너무 심한 드립은 치지마라. 부탁한다.
Re : ㅊㅋㅊㅋㅊㅋ
Re : 읔... 유부충 그켬 ....
Re : 아기 이쁘네, 열심히 키우소
Re : 친자확인 ㄱㄱ
Re : ㄴㅋㅋㅋㅋㅋ미친색?ㅋㅋ
Re : ㄴㅋㅋㅋㅋㅋㅋㅋ명불허전 주갤럼ㅋㅋㅋ
Re : 짐하나 더 생겼네, 힘내라 이기
Re : 캬 아빠가 주갤럼 캬 긔엽긔
온세상의 축복을 받고있다.
주갤럼들도 말을 거칠게 하지만 본심이 아닐거다.
하늘을 날것 같다.
아기가 태어났다.
건강한 남자 아기!
여기저기서 축하를 해준다.
너무 좋다.
헌동은 세상을 다 얻은것 같다.
아니, 세상을 다 준다해도 이 아이와 바꿀수 없다.
아버지께서 바다처럼 넓고 강한사람이 되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튼튼하게 자라 주었으면 좋겠다.
형 내외가 찾아왔다.
- 마, 헌동, 축하한다.
- 도련님 , 축하드려요!
- 삼춘~ 애기 어딨떠?
- 응 애기 보러갈까? 히히히
- 마, 헌동, 우량아를 낳았니.
- 허허, 그지?
엄마는 솥뚜껑 만한 손자를 보고는 우셨다.
1년 가까이 밖에도 안나가고 히키짓을 했던, 철부지 막내아들.
그 아들이, 이렇게 가정을 이루고, 떡뚜꺼비 같은 손주까지 안겨주다니.
감격이었다.
- 호호호호호호호호호, 김써~방 호호호호호호 축하해 , 어이구 어이구
니가 해철이구나 우쭈쭈 그랬쪄? 이렇게 커서 그렇게 힘들게 나왔쪄 ? 호호호호
- ...
장인어른도 내색은 안하시지만 감격에 겨운 표정이다.
금지옥엽 키운 외동딸이 속도위ㅂ... 아... 암튼,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헌동 생에 이렇게 기쁜 날이 있었던가.
없었던것 같다.
힘들게 시작했던 결혼 생활,
만만치 않았던 마눌련의 임신기간
다 이날을 위해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던것 같다.
며칠뒤
산후 조리원으로 옮긴 '애엄마' 홍미경.
붓기가 빠지고 조금씩 몸이 나아지는게 눈에 보인다.
연일 하한가를 치던 마눌련의 감정상태는 턴어롼 후 박스권에 진입.
모든게 순조롭다.
급이 좀 있는 산후 조리원을 잡아줬더니 마눌련도 흡족한 표정이다.
친구?들에게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는것 같다.
- 김해철 애기 아버님?
산후 조리원 직원이다.
- 아 네네!!
- 아 예~ 내일 부터 산모님 식사 들어가실 건데여 , 일반식은 만오천원, 특식은 2만원이여.
- 특식으로 주세요!!!
그래, 마눌이 먹으면 내 아이까지 먹을 건데 ! 좋은거 좋은거!
- 해철애기 아버님?
- 네 네
- 아, 내일부터 산모님 영양제 들어가실 건데여~,
일반은 3만원 , 외국 유명 제약사것은 행사가로 5만원이여 아버님~
- ㅇ.. 오만원짜리로 주세요!
그래, 좋은거, 좋은거.
- 아버님?
- 네....
- 아 저희 조리원에서 이번에 산모용 비타민제 런칭했는데여
외국제약사 어쩌구 저쩌구 FDA 어쩌구 저쩌구 10만원 내놔
- 네.... ㄱ..그거 주세요.
아 시발 헬조선 엿같네.
씨빨 장삿속!!
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내자식에게 들어가는건 아깝지 않다.
아깝지 않아!
아기가 태어나면 돈이 많이 든다.
하지만, 틈틈히 가계부 까지 직접 써가며 돈을 모아왔다.
부담이 적진 않지만 괜찮다.
충분히 돌파가능!!!
아! 얼마전, 지인의 추천으로 매입한 주식,
상승폭은 크지 않지만
연일 빨간불이다.
언젠간 큰 힘이 될거 같다.
모든게 순조롭다.
내 아들, 해철아!
세상 끝까지 너를 지켜주마.
4-2. 200만원짜리 유모차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굉장히, 아주,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이 사랑스러운 녀석의 함정은,
그 힘듦을 본능처럼 버티게 한다는 것.
헌동은 힘들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헌동이 퇴근하자 마자 뻗어버리는 마눌년을 대신해
자기전까지 아기를 봤다.
기저귀도 갈아주고
분유도 먹이고
자다 깨서 울면 헌동도 깼다.
아들이 잠들때까지 얼르고 달래다가 부은눈으로 출근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마눌련이 아침밥을 차려준다.
맛이 개발새발이지만, 감격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마눌련도 양심이 있는지,
'집에 있으면서 밥 안차려주는 기집애들' 이라며 친구?들을 흉본다.
지년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나나 보다.
암튼 다행이다.
밥을 차려주는 여자는, 믿음이가고, 어떤때는 또 사랑스러워 보이고
정말 '내 마누라' 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출근길이 멀기도 하다.
아버지가 갓난쟁이가 있으면 차가 필요할거라고
차사는데 돈을 보태주셨다.
하지만 별로 쓸일이 없다.
차타고 출근 했다가는 러쉬아워에 걸려 지각만 반복할거다.
워낙 회사가 머니까.
조금 불편하지만, 전철을 타고 간다.
아들녀석이 밤새 울어버리면 전철에서 졸면서 간다.
등이 바닥에 닿기만 하면 울어버리는 아들녀석의 울음은 꽤 우렁차다.
신기한건 마눌년은 꿈쩍도 안하고 잘 잔다.
참 무감각 해서 속편한 마눌련.
달리는 전철, 운좋게 자리를 잡았다.
꾸벅 꾸벅 졸고 있는데, 누가 와서 툭 친다.
- 야 김헌동, 피곤하냐?ㅋㅋ
앞을 올려다 보니 타부서에 있는 회사 동료다.
나이가 같아 친구 먹기로 했다.
- 어 영팔아, 너도 일찍 출근하는 구나..
- 말마라, 우리 부장이 어찌나 출근을 빨리 하는지.. 우리부서는 블라블라
...근데 너는 왜케 일찍가냐?
- 아.. 밤새 애가 울어서, 재우고 ?김에 그냥 일찍 나왔지.
- 왜, 제수씨는 뭐하고.. 아파?
응? 와이프..? 옆에서.. 잤지? 라고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말을 뱉으면 왠지 창피할것 같았다.
헌동이 집에 가기만 하면
으아~ 여보 나 힘들었어~
하며 아들을 안겨주는 마눌련.
듣고보니 또 그렇네..
- 김대리님. 여기여
사무실의 꽃?, 미스 윤이다.
반반한 얼굴로 잦들을 그렇게 후리고 다니더니, 이제야 청첩장을 건네준다.
하.. 요 수르수트뢰밍년.. 아주 나를 슈렉취급하더니.
결혼한다고 수금을 하시겠다?
미스 황 그년을 중심으로 헌동과 대립각을 세우던 사무실 ?들중
남은건 미스 윤 이년뿐이다.
나머지는, 곧 결혼 찡찡, 시월드 찡찡, 경력단절 찡찡, 육아 찡찡
아주 찡찡거리기만 하더니, 다들 전업주부로 전향했다.
- 어.. 그래.. 가야지,, 이번주 주말이네?
- 네 사모님이랑 꼭 같이 오세여!
나이가 몇살인데 벌써 사모님이야 이년아.
마눌련 애봐야돼..
- 하하.. 글? 와이프는 애때문에.. 애가 워낙 초우량이라..ㅎㅎ
- 아니 왜여? 유모차에 태우고 오면 되져?
- 유모차?
유모차라,, 너무 어려서 태울수 있을런지..
그래도 일단은 필요는 할거야.
왜 유모차 살 생각을 안했지.
집으로 돌아온 헌동.
아이를 건네받아 안고, 마눌년에게
- 여보.
- 응?
- 유모차 사야되지?
- 응? 어떻게 알았어? 안그래도 알아보고 있었는데 헤헤
- 아 그래 ? 벌써 알아봤어?
- 응 미리 미리 사놓으면 좋잖아 헤헤
마눌련이 애를 낳더니 그래도 미리 미리 생각하는 구나 싶었다.
원래 이런 년이 아니었는데.
항상 뭔가 닥치지 않으면 안하고 말야.
- 여보, 그보다 약속은 지켜야지 ? ^^
- 무슨 ?
- 있잖아 그거 헤헤 통.장.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또 경제권을 호시탐탐 노린다.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아니, 애초에 확답을 준적도 없다.
마눌련 지가 일방적으로 정한거다.
도리도리 했더니
뱃속에 있던 애를 걸고 거짓말을 한거냐며, 눈을 부릅뜬다.
- 아... 아니 그게 아니잖아... 지금 잘 관리 해왔잖아 내가...
- 아~ 아~아아아~ 이 이이잉~
또 되도 않는 고집을 피운다.
둘다 애가 울까봐 큰소리는 못낸다.
- 아니, 그걸 왜. 내가 어디 삥땅을 치니?
- 내친구들은 다 지들이 관리한단 말야!
하.. 또 그 영양가없는 백?들..
도대체 이렇게 엉키면 어디서 부터 풀어가야할지 모르겠다.
- 애.. 애 좀 더 크면.. 그때 하자 그때, 클린하게 인수인계 할게.
- ... 그럼 카드를 줘
- 카드?
- 그래 카드.
- 음... 알겠어.
지깟년이 쓰면 얼마나 쓰겠냐 싶어 카드를 하나 넘겨줬다.
긁을때마다 헌동 폰으로 사용내역이 날아오니 크게 걱정할거 없었다.
그리고 마눌년이 생각보다 그리 씀씀이가 크지 않다는것도 않다.
큰돈을 벌어본적 없는 년, 그래서 크게 크게 쓸줄 모르는 마눌련.
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며칠 후
점심시간
식당서 밥을 먹고 올라오는데, 라스트 김치 미스 윤과 마주쳤다.
- 어 윤영희씨, 이거.
가봤자 남을것도 없는 결혼식,
헐겁게 채운 축의금 봉투로 퉁 칠셈이었다.
- 흐응 왜 , 안오시게여?
아쉬운척 하지마라, 요년아.
- 으..응 그..그날 큰아버지 환갑이시더라구.
- 아네...
"띵똥"
문자가 왔다.
-------------------
[결제] (주) K마켓
오빗 유모차 1,970,000
-------------------
'음... 와이프가 유모차를 질럿나보네.
19만 7천원... 생각보다 비싸구만...'
- 꺅 사모님 ! 오빗 하나 지르셨구나 ! ??!
헌동 폰을 슬쩍 보던 미스? 윤이 방방 뛴다.
- 뭐야 아는거야?
- 그럼요! 영맘들의 핫아이템 이에여~ 그나저나 무리좀 하셨네여 ㅎㅎ
꼴깝은 이젠 하다하다 유모차가 핫아이템이냐...
- 뭐.. 애기 용품은 다 비싸니께....
미스 윤 표정이 오.. 쫌 하는데? 다.
년들은 별 애기 유모차에도 지랄 염병을 한다 생각했다.
- 어이 김탕구씨
- 네.. 네 선배님.
옆자리 앉은 사원 김탕구.
올해 새로들어왔다.
신삥이라 그런지 헌동을 어려워한다.
- ㅋㅋㅋ 요즘 여자들은 별거 아닌거에도 열광들을 하지?
- 아... 네 맞습니다.
- 한심한 종자들.. 그거 알어 요즘엔 별 유모차에 까지 발광들을 하더라니까?
- 아... 네.. 그렇군요.
- 흠... 뭐야... 나만 모르는 거야? .. 김탕구씨 이거 알어?
결제내역 문자를 보여준다.
- 아... 아뇨... 모르겠습니다.
- 그치? ㅎㅎ하여간... 여자들이란...
- 근데 유모차가 197만원이면 좀 비싸긴 하네요.
- ..뭐..?
액정을 다시 들여다본 헌동.
이 씨발 ! 이게 뭐야 진짜 197만원이잖아??
이 씨빨!
뭐야!
마눌련 이 정신나간!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카톡이 온다.
'해철이 깨니까 집와서 얘기해'
이년이 지서방 뒷목 잡게 하려고 용을 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스벌 스벌 거리며 퇴근시간만 기다린다.
'내 이년을 오늘만큼은 가만 안두리'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온 헌동
- 당신 미친거 아냐? 200만원이 뉘집 개이름이야?
- 쉿 조용히해. 해철이 깬단 말야.
말리는 헌동.
목소리를 모기소리 만큼 줄인다.
- 아니. 무슨 정신으로 200만원짜리를 산거냐고?
이럴려고 통장 달라고 했니?
- 뭐. 주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그거 살만해서 산거야. 필요해서 산거라구.
- 뭐 필요? 그런게 도대체 왜 필요해!?
마눌련의 얘기는 즉슨,
무엇보다, 좋은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야 안전하고,
현동이 2000Cc를 타는것처럼, 자기도 그 급에 맞는 유모차를 몰아야 된다는거다.
이런 달밤에 개짖는 소리는 헌동을 더 환장하게 한다.
결제 취소를 강요했다.
불가.
강요.
불가.
취소!
절대불가!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젠 되려 사정한다.
- 아니.. 왜 그러냐... 우리 대출금도 있잖니...
- 우리 애기 태울꺼잖아. 좋고 안전한 유모차에 태우면 좋은거 아냐?
- 아니 애기 곧 크면 못탈걸 왜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사냐고~
- 아니 당신은 타지도 않을차 왜 샀어!?
- 차는 중고 시장에 팔수 있어!
- 유모차도 다시 팔수 있어!
- ... 엥? 그... 그걸 누가사!
마눌련 얘기를 듣고 들어가본 중고나루.
헉, 시발 정말이네.
뭐야?
그래, 유모차는 다시 되팔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 보다 감가상각율이 훨씬 낮았다.
어떨때는 샀을때 가격보다 비싸게 되팔리기도 했다.
이런 미친 세상...
허세에 가득차 각자가 끄는 유모차로 서로의 계급을 짐작하는
한국 젊은 ?들의 세계를, 헌동같은 남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남자가 끌어도 힘에 부칠 것 같은 헤비급 유모차를 꾸역꾸역 끌고 나가는 젊은 미시?들.
카페 한켠에 세워둔 유모차.
다른 ?들이 보내는 시선에 우월감을 느끼는 종특 조선?들.
이 반도위의 조선?들은 자식새끼를 핑계삼아
자존심과 우월감을 사고 팔고 있었다.
뭐.. 비단 여자들 뿐이겠냐.
카푸어, 하우스 푸어.
다 그런 심리에서 생긴거지.
헌동은, 한숨만 폭 쉰다.
며칠후 도착한 유모차.
197만원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헌동.
4-3. 키즈까페 사모님
계절이 빠르게 지나갔다.
휴휴~ 휴휴~
운동 중인 헌동.
요즘 따라 배가 더 나왔다며 구박하는 마눌련 때문에
틈틈히 운동을 하고 있다.
나이들수록 살빼기가 더 힘들어지는것 같다.
- 어~ 형님 오셨어요.
- 어 용수, 왔냐?
헬스장에서 알게된 동생이다.
- 요즘 자주 오시네요. 요전까지는 뵙기 힘들더니.
- 그냐? ㅋㅋㅋ, 운동이라도 하러 나와야지, 집구석 갑갑하다야.
- 네 ~ ㅋㅋㅋ 예, 그럼 운동 하다 가세요~
- 오냐~
캬 새끼, 몸 탄탄한거 보소.
참 젊음이 넘치는 구만.
좋을때다~
햐, 나도 저 나이때가 참 좋았는데
헌동은 가끔 젊은 미혼잦들이 너무 부럽다.
저 자유로움.
저 여유.
저 신선함.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리 젊은 잦이라도 기혼 잦들은 표가 난다.
애써 맡지 않아도 풍겨오는 3일 묵은 양말같은 퀘퀘함.
온갖 번뇌에 시달리는 눈빛과,
한층 더 느끼해진 웃음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겠지...'
디이이이잉
- 어, 여보
- 어, 나 하루 자고 갈게.
- 어... 그.. 그래 그렇게 해!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끊었지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너무 좋아서.
친정간 마눌련이 하룻밤 자고 온단다.
아들 해철이도 데리고 갔으니,
오늘은 헌동 혼자 집에 있는거다.
두근 두근 거린다.
뭐하지? 뭐하지?
딱히 할건 없다만, 왠지 기분이 좋다.
혼자사는 인생을 누가 외롭다 했더냐.
이리 혼자됨이 좋은데.
친구를 불러서 놀까?, 밖에서 술을? 후후후후!
"까톡"
'여보, 깜빡하고 음식물 쓰레기 안버리고 왔어, 냄새나니까
좀 버려줘, 그리고 청소기도 좀 돌리고, 아 베란다에 화분
물주는거 잊지마. 밖에 나가서 돈쓰지말고 집에 있어'
'... 이노무 여편네가...'
잠깐 발끈하긴했지만, 이내 온화함을 되찾는다.
되려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해준 마눌련에게 감사하다.
운동을 어서 접고 집으로 달려가는 헌동.
오늘은 영화 보면서 맥주를 마셔야 겠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주갤도!
디이이이이잉
- 왜왜왜
또 마눌련이다.
- 해철이가 아빠 바꿔 달래,
- 어어어, 어이구 내새끼 외갓집에서 잘 놀구 있어?
그려 그려 한밤 코 자구와잉? 흐흐흐
눈에 넣어도 안아플 늘 보고싶은 자식놈이지만,
오늘은 일단 자유가 먼저다. 자유!
친정에 간 미경.
아들을 친정엄마 한테 맡겨두고 꿀잠을 한숨 때리고 있다.
- 얘얘 미경아 일어나 밥 먹자
눈을뜬 미경.
- 응? 나 미영이 만나서 밥먹기루 했는뎅?
- 뭐? 오밤중에 어딜나가, 애 놔두고~
- 에이, 엄마가 쫌 봐줘엉~ 금방 들어올게~~
- 어휴... 이년아.. 나도 모르겄다. 김서방 저녁거리는 차려주고 왔니?
- 김서방 자기 혼자 엄청 잘 차려 먹어~~ 히히
딸을 한심하게 쳐다 보는 미경엄마.
- 나, 나갔다 올게, 요 앞에서 볼거야요~ 걱정마요~.
동네 친구?, 미영을 만나러온 미경.
미영은 얼마전에 결혼을 했다.
호구 남친잦 하나 물어서 유럽여행을 갔다오더니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미경처럼 속도위반 딱지 끊자마자 서둘러 결혼을 한 케이스.
- 꺄꺄꺄꺄꺄 미영아~~~~
- 꺄꺄꺄꺄꺄꺄 미경아 ~~~~~ 뭐야 완전 반갑다 ~~~~
- 그치 그치그치그치~~~~
그 와중에도 재빨리 친구?을 스캔하는 미경.
신상구두, 명품가방, 목걸이, 귀걸이, 반지, 얼굴 물광 등등등..
?이 타?을 스캔하는데에는 찰나의 시간만 필요하다.
스카우터 없이도 전투력 측정 가능, 사스가 조선의 ?들.
자신도 스캔 당할걸 알기에 나름 준비를 해서 왔다.
이렇게 한껏 꾸미고 온날은 싸구려 식당에 가면 섭하다.
왜슐리 정도는 가줘야 품격 상승.
- 기집애.. 얼굴 좋아졌다? 애는?
- 아 엄마 한테 맞기구 왔징. 너는?
- 나는 시어머니 ^^
미영도 1년전 아들을 낳았다.
남자손 귀한 부잣집에 들어가서 보란듯이 떡뚜꺼비 손자를 안겨드렸고,
온갖 럭셔리 관리와 지원을 받는 중.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면서,
늘 반 꼴지를 도맡아하던 미영의 성공적 취집이 배아픈 미경.
'흥.. 하지만 얘는 시부모님 모시고 살잖아? 흥... 부.. 부럽지않아'
- 난 그대루지 뭐, 미영이 니가 때깔이 장난 아닌걸?
- 홍홍? 그래? 아니, 사실~ 요즘 강남 럭셔리 케어샵 다니거든.
- 그... 그래? 야, 야 야 완전 부럽당~~ 거기 완전 비싸잖아~
- 아니 뭐~ 시어머니가 등록 해주신거라 안다닐수도 없궁 ~ 홍홍~
대범한척 하기가 너무 힘든 미경.
집에 가거든 남편은 볶아 피부관리샵 회원권을 따낼까, 생각한다.
- 아아 미경아, 너 이사 안가니?
- 이사? 왜?
- 아니 지금 니가 사는 그동네 애기 교육시키기 좋은 동네는 아니잖니?
이년이 자꾸 속을 긁는거 같다.
부글거리지만, 태연한척한다.
- 히히;;;; 그래? 그.. 그래도 아직 애기 어리니까... 애기 학교 가면 우리도 강남으로 갈거야^^;;;
질수 없어 치는 헛된 구라.
- 에이~ 얘가 뭘 모르네~ 야, 요즘은 유치원도 입시설명회를 하는데, 그때가면 너무 늦지~
- 유... 유치원?
- 그럼 ~ 얘 너 정보가 많이 늦구나~ 엄마들 모임도 좀 나가고 해~
요새는 키즈까페에 신식 엄마들 많이 온다더라야~, 지금 뒤쳐저서
나중에 자식 원망 사면 어떡할려궁 홍홍홍~ 그렇게 늦으면 안.될.텐.데?
홍홍홍홍홍~
- ....
미경은 지금 자존심이 굉장히 상해 있다.
미영을 보내고 친정집에 돌아왔지만, 분이 안풀린다.
태연한척했지만 자기 이마에 선 핏대를 분명 미영이 년이 봤을거다.
짐을 싼다.
- 얘 얘 너 뭐하니, 오밤중에 어디갈려구.
- 나, 집에 가야겠어. 전철 끊기기 전에!
- 이년이 미쳤나... 안돼 이 밤중에 또 어딜가.
- 아 몰라 ~ 갈거야!
전철안, 집에 가면서도 부글부글 거리는 속이 안풀린다.
미영이 년의 재수없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자꾸 맴돈다.
눈물이 날것 같다.
무시당한것 같고, 진 것만 같다.
안고있는 아들에게도 미안해지고, 그것때문에 더 화가난다.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온 미경.
- 여보! 해철이 아빠!
갑자기 들이닥친 마눌련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는 헌동.
허 시벌 뭐야 .
- 아니 안온다며...
옛추억에 잠겨, 스타와즈 시리즈를 정주행 하고 있던 헌동.
몰입에 몰입을 거쳐 제다이 전사로 빙의하려던 순간이었는데!
야속한 마누라년....
불을 켜고 후닥닥 빈 맥주캔을 치운다.
- 뭐, 내가 못올때 왔어? 그냥 왔어.
이년이 또 뭔일이 있었구만..
목소리가 영락없이 살쾡이다.
- 아니. 그건 아니지....
- 해철 아빠, 나랑 얘기좀해.
헌동은 또 가슴이 답답해진다.
'불토'와 '처없는 날'이 계기월식처럼 겹친, 기적같은 날.
그 평화를 와창창 깨버린것도 짜증나는데
마눌련은 거기에 일장연설까지 더할셈이다.
- 해... 얘기....
- 우리 이사 안가?
- 이.. 이사!?
- 응. 이.사.
이년이 소라게 귀신이 씌였나...
- 뭔 오밤중에 뜬금 없는 소리야~ 아니,, 뭔 이사야.. 몇년 살았다고..
- 당장 가자는게 아니라! 우리도 해철이 교육 시키려면
유치원 들어가기 전에 가야된다구!
-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이 근처에도 유치원 있고, 초,중,고 까지 다 있어~
- 뭐어? 그냥 이런 보통 동네에서 애를 고등학교까지 키우자구?
당신 아빠 맞아? 강남 8학군 가자고 우겨도 모자랄판에!
헌동은 한동안 잠잠하던 마눌련이 이러는 이유를 짐작 할 법하다.
필시 친정 갔다가, 동창을 만나고 왔을거라 장담한다.
아메바같은 마눌련의 열등감을 유난히 잘 자극하는 친구?을 2명정도 꿰고 있다.
마눌련이 그 친구들을 만나는 날엔 야근을 하면 안된다.
어차피 뱉을 말의 분량은 정해져있다.
늦게 들어오면 늦게 잘수밖에 없다.
'전미영, 박윤자,, 내 요년들을 그냥...'
- 아니.. 가야지, 가긴 가야지...
일단, 공격 회피.
- 언제 가는데?
'.. 어.. 언제?'
갑자기 땡겨 오는 뒷골.
헌동은 기억하고 있다.
신혼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그때.
최후까지 리스트에 남은 그집.
위치도 좋고, 학군도 좋아 애들 교육시키기도 좋을 것 같던 그 집.
회사도 가까운 그 집.
'서른평 병'이 걸린 마눌년은 기어이 그 집을 외면했었다.
지금은 전셋값이 올라 그동네로 가지도 못한다.
헌동은 그때, 끝까지 결사항전 하지 못한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
아픈 기억이었다.
- 음...사.. 사정 풀리면 가자 꼭 가자.
- 사정? 언제 풀려?
오늘 따라 더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마눌련.
헌동은 어서 이 소모적인 대화를 끝내고 싶다.
- 음..아! '형제 자동차' 알지? 예전에 주식 묻어둔거. 그거 좀 더 오르면 !
저.. 전문가들 분석이 곧 대박 날거래!
마눌련 얼굴이 사악 밝아진다.
- 그.. 그래? 헤헤 ,
단순한년.
- 아, 여보! 나 부탁이 있어.
- 뭐... 또...
- 나 피부샵 다니면 안될까? 나도 이제 관리들어가야징~
- 그... 그래 그렇게 해.
헌동, 아줌마화에 가속도가 붙은 마눌련을 말리고 싶진 않다.
- 히히 ~ 근데 뭐 보고 있었어? 계속봐~ 안주 만들어주까?
- 어... 부탁할게...
다시 찾아온 주말의 반쪽짜리 평화.
이미 파도가 한번치고 빠진, 현동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 ... 이사라...'
다음날,
키즈까페를 찾은 미경.
당당히 오빗 유모차를 밀며 입장한다.
다른 미시?들로 부터 스캔이 들어온다.
시선을 즐기는 미경.
놀고 있는 아들을 계속 지켜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만한 자리를 찾는다.
'오전인데... 무슨 애엄마들이 이렇게 많담..'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다.
여편네들이 끊임 없이 수다를 떨고 있다.
어떤 테이블은 술까지 마신다.
'어머 어머.. 왠일이야..'
- 저기요~ 자리 없으면 여기 앉으세요~
말을 걸어 오는 어떤 미시?.
차림새가 장난이 아니다.
얼굴에 귀티가 좔좔 흐른다.
괜히 이 여편네랑 앉아서 몇마디 주고 받았다가는
또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길것 같다.
하지만 앉을 곳이 마땅찮다.
- 아.. 네 감사합니다.
조선의 ?들은 공감대만 있으면 금방 친해진다.
깊이 친해지지 않을 뿐이지,
마음 한켠에 베리어를 세워두고 온갖 대화를 탁구치듯 주고 받는다.
애교육, 남편얘기, 시월드, 친구년, ....
그렇게 몰려드는 조선의 ?들.
남편잦들을 회사 보낸 뒤,
키즈까페란 사냥터로 출동.
엘러간트한 브런치를 물약삼아, 온갖 뒷방얘기를 사냥하러 다닌다.
4-4. 오늘 나 건들지마
아들 해철이 어느덧 4살이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녀석을 보니 뿌듯하다.
헌동도 과장진급을 앞두고 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나름 중견기업에서 능력을 인정 받고 있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가 뛰쳐나온다.
- 아~~~~~빠~~~~~~~~~~~~~
아이를 껴안아 올릴때, 정말 행복하다.
마누라도 철이 들었는지, 꼭 현관문에서 남편의 퇴근을 맞아준다.
그리고 좋은일이 하나 생겼다.
해철이 태어나던해에 묻어놨던 종목, '형제자동차'가 조금씩 꾸준히 오르더니
올해 어닝서프라이즈를 맞았다.
아주 수직상승, 빨간불 잔치다.
딱 아들녀석 유치원 보낼때쯤 해서 한방 빵 터져주니,
더할나위 없는 축복이라 생각한다.
이제 대출금도 거의 다 갚았고,
그간 부모님께 받았던 도움도 다 돌려드렸다.
한푼 한푼 잘 아껴서 알뜰하게 살았다 생각한다.
쌓여가는 가계부를 보면 뿌듯하다.
꽁시렁거리면서도 잘 따라와준 마누라에게도 고맙다.
덕분에 남들보다는 약간은 빨리 안정권에 든것 같다.
부모님의 도움도 있긴 했지만.
오빗 유모차는 아직 잘 쓰고 있다.
마누라는 유모차를 기세 등등, 잘도 몰고 다녔다.
곧 중고나루에 올려 되팔겠다고 한다.
그 돈으로 가방이나 하나 사라고 했더니 좋아한다.
- 해철 아빠, 우리 이사 주객동으로 갈까??
- 응? 왜 거긴? 당신 개념동으로 가자고 했잖아 학군 좋다면서.
- 아니... 당장은 이른것 같기도 하궁...
- 아냐, 우리 주객동 갈수 있어. 걱정마.
마누라는 떼쓰던 버릇이 없어졌다.
예전처럼, 바락 바락 우기며 덤벼들던 일이 잦아진거다.
굳이 말하자면 여기엔 사연이 있다.
작년 겨울 헌동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 네, 디씨전자 김헌동 입니다.
- 네, 여기 미스맘 캐피탈인데여~ 홍미경씨 남편분 되시져?
- 네네..
- 아 네, 부인 되시는 홍미경 고객님 께서 올해 1월에 받아가신 대출금의 이자미납 솰라솰라
이자체납 옹시렁옹시랑 연체기간 솰라살라 돈갚아.
그렇다. 마누라는 남편몰래 돈을 빌린것이었다.
그리 큰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겁쟁이 마누라 홍미경은 남편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까뒤집고 보는 성격인 친정 엄마한테 얘기했다가는 바로 헌동도 알게 될테고,
자존심도 쌔서 주위 친구?들에게 푼돈 꾸기도 자존심 상했던거다.
애초에 셈이 약했던 마누라는 금방 불어나는 이자를 실감치 못했다.
경제관념에 바싹한 남편, 셈에 능한 남편, 늘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는 남편.
아무리 온화한 성격의 남편이라도, 이 사실을 안다면 불같이 화를 낼것 같았다.
이자도 못내고 있는 와중에 캐피탈에서 독촉을 하니
말도 못하고 어버버버 거렸나보다.
결국 캐피탈쪽에서 남편인 헌동에게 콜을 때린것.
사실 헌동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 액수가 크지 않고 조기에 알게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돌려 막기 안한 마누라가 대견 스러울 정도.
오히려 최소한의 절차만 거쳐, 별 증빙도 없이 대출해준 캐피탈 쪽에 화가났다.
꾸시렁 꾸시렁 되긴 하지만 연애부터 지금까지 10년을 쫓아와준 마누라였다.
결혼 후엔 크게 말썽도 안부리고, 엄마노릇도 잘해주는 마누라.
혼내고 싶진 않았다.
다만, 돈이 왜 필요해서 빌린건지는 알고 싶었다.
퇴근후 집으로 들어가며
- 어이 마눌, 어디서 돈꿨어?
능청스레 웃으며 묻는 헌동.
마누라는 표정이 확 굳어 지더니 눈물을 터트렸다.
지 엄마가 우니 아들도 엉엉.
- 워워 ~~ 뭘 울기까지 하시나~ 해철아 울지마 ~ 안울어도 돼~
- 흐으응흥 흐읗으흥 여.. 보 미안..해 ?응흥흐
마누라는 울음을 그치고 예전의 일들을 풀어놨다.
철없던 회사원 시절.
퇴사를 앞두고 아는 언니? 두명에게 돈을 조금씩 빌렸단다.
퇴사후 2년동안 놀면서 이래저래 돈쓰다 보니 갚지도 못했고,
그러다 연락을 씹고 잠수를 타버린 꼴.
친했던 언니?들이라 더 배신감이 컸었나 보다.
몇년이 지나, 마누라를 찾아왔고 이자를 포함한 채무변제를 요구했단다.
친했던 ?들이라 약점같은걸 하나쯤 알고 있었을테지,
입싹 닦고 배째라 하기엔, 겁이 너무 많은 마누라.
헌동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돈을 갚고 겁에 질렸을 마누라를 달래면 그뿐.
잘 타지도 않던 차, 과감히 팔았다.
남은 돈으로 양가 부모님 용돈을 드렸다.
그리고 마누라에게 더이상 잘못을 묻지 않았다.
현명하게 해결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시건방 질정도로 당당하던 그 여친?, 마누라는 기가 팍 죽어버렸다.
조금씩 헌동 눈치를 보는 듯 싶더니,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 일이 마음에 사무쳐 찾아온 우울증인지,
아니면 또 예전처럼 자아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찾아온 우울증인지는 알수 없었다.
다만, 아이 엄마에게 닥친 우울증,
작지 않은 가정의 위기였다.
말수가 줄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혼자 있을 시간이,
헌동은 사뭇 걱정됐다.
- 여보...
- 응?
- 오늘 별일 없었어?
- 어...
옆에 누워있는 마누라 허리에 손을 슬며시 얹어본다.
다시 그 손을 천천히 거둬내는 마누라.
마누라의 우울증은 무겁고, 동시에 권태로웠다.
부부관계를 안한지 꽤 오래 되었다.
- 나, 오늘 피곤해...
회사사옥 흡연실.
담배를 길게 빨고 뱉는 헌동.
- 선배님, 무슨 안좋은 일 있어요?
- 아.. 탕구씨.. 와이프가 요새 우울증이 온거 같애.
- 음... 육아우울증 그런건가요?
- 글쎄... 내가 요새 바빠 집에 늦게 가니까, 더걱정되네..
- 어쩜~ 언니 제가 그래서 그 새끼를 깠다니여 ! 히히히
- 그랬니? 그새끼를 깠어? 후하하하~
옆부서 미스 송, 미스 송(2)다.
담배 한모금 빨고 가래침을 아주 걸쭉하게도 뱉는 ?들이다.
마누라도 저렇게 막무가내로 밝던 시절이 있었지.
저년들도 밖에 나가면 저렇게 우왁스럽진 않겠지.
?들은 참 못믿을 것들이야, 생각하는 헌동.
유난히 몸이 무거운 퇴근길.
오늘도 사람이 터져 나가는 전철.
'참... 이젠 진짜 힘든거 다 끝난줄 알았는데, 인생이란 알 수가 없구나'
터덜 터덜 올라서 역을 나와 집으로 향한다.
반짝 반짝 네온사인,
사거리를 돌아 빠져나가는 자동차들,
스산하게 부는 바람,
이어폰을 꼽고 유쾌하게 걷는 청년,
빤쓰가 보일까 스커트 끝단을 내려가며 또각또각 걷는 아가씨?.
느긋하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는 중절모 할아버지
교복입은 학생들,
오늘 따라 늘 똑같은 풍경, 늘 똑같은 사람들이 유독 더 눈에 들어온다.
그래, 나도 이길을 수없이 다녔지.
이사를 오고,
마누라와 둘어 걷던 이길을,
아들 녀석과 함께,
걸었지.
마누라.
지금 당신 머릿속은 어디를 그렇게 방황하고 있냐.
답답하다.
후.
마누라도 나처럼 혼자서 이길을 수없이 왔다갔다 했겠지..
아들 데리러도 가고, 친정가려고 지하철도 타고.
늘 어디쯤에서 어딘가로..
어디쯤에서..
...? 어라
마누라 잖아?
저만치 앞에 마누라가 보인다.
아들 손을 잡고서, 어느 상가 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장을 보고 왔나 보다.
반대손엔 마트 봉지가 들려있다.
조금씩 가까워지니
아들과 마누라의 대화가 들린다.
- 엄마, 우, 깡아지, 이거 히히, 강지
- 응~ 그래 강아지지 ~ 와 귀엽다.
- 응, 이뽀 깡지. 깡아지.
애견샵.
둘이 사이좋게 쇼윈도 안쪽 개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와이프가 활짝 웃고있다.
오랜만에 본다.
저렇게 웃는거.
마누라가 개를 좋아했던가?
- 여보 뭐해
- 어 ~ 오늘 빨리 마쳤네~ 나 장보고 들어가는길
표정이 밝다.
- 응, 어서 들어가자.
'개....... '
그 해 가을 헌동은 흰색 말티즈 한마리를 집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곧, 마누라도 조금씩 웃음을 찾기 시작했다.
5-1. 쓸쓸한 출근
헌동은 암조명만 옅게 깔린 어두운 방에 누워있다.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헌동, 긴장이 된다.
몸을 슬며시 일으킨다.
문이열리고,
샤워타올 한장에 몸을 가린 여자가 다가온다.
침을 꿀꺽 삼키는 헌동.
여자의 샴푸냄새가 강렬하다.
여자는 이내 현동옆에 눕는다.
헌동.
여자의 얼굴을 조심히 바라본다.
여자도 몸을돌려 헌동을 감싸 안는다.
- 여... 영아야...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
오랜만이다.
그녀는 타월을 조심스레 풀어헤친다.
백옥같은 알몸이 눈에 들어온다.
'아... 안돼... 시발... 난 가정이 있다구....'
하지만 몸의 반응을 거부 할수 없는 헌동.
그녀는 치명적이다.
그녀의 백자 같은 몸에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 나는것 같다.
헌동, 슬며시 그녀의 가슴에 손을 뻗어 부드럽게 주무른다.
그녀, 얕은 신음소리를 낸다.
그녀는 마치 뱀처럼 헌동 위에 올라왔다.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다.
헌동의 가슴은 터질것 같다.
입술이 거의 닿기 전이다.
'... 이익 여보 미안해!!'
눈을 질끈 감는 헌동.
그녀는 훗, 하고 웃더니 고개를 낮춰 헌동의 목덜미에 입을 ?춘다.
그리고는 사탕 처럼 달콤하고 솜털 처럼 부드러운 애무.
그녀의 혀끝이 느껴진다.
헌동, 소름이 돋는다.
?.. ?...
- 아... 악.... 영아야....
? 스.... ?...... 츄릅....
츄할... 할...짝.....
할짝...
할짝 할짝 할짝
할짝?
잉?
아시발꿈
몸을 일으키는 헌동.
'이... 개새끼.... 아오....'
- 뽀삐, 아빠 깨웠니? 헌동아빠~ 얼른 와 밥먹어~
- 아... 뭐야... 씁....
욕이 나올뻔했다.
그런데 아들 해철이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참았다.
목에 묻은 개침을 닦는다.
이 영악한 개새끼.
이 개새끼는 헌동이 생각했더것 보다 훨씬 머리가 좋다.
처음데리고 올때, 개새끼가 뭘 알겠어. 했는데,
아주 이젠 사람 같다.
눈치도 빠르고 말귀도 잘 알아 먹는다.
가끔 소름 돋을 때도 있다.
헌동은 원래 개를 싫어한다.
개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별로 안좋아한다.
만졌을때 그 뜨뜻한? 살아숨쉬는? 그 느낌이 싫다.
마누라랑 애가 좋아하지 않았다면 안 데려 왔을거다.
- 뽀삐~ 아빠 깨워쪄~? 헤헤 아빠 밥먹으세여~
- 어.. 그래 그래 해철이 일찍 깼구나.
아들 해철은 어느덧 7살이다.
지 엄마를 닮을줄 알았더니,
얼마전 가족모임에서.
- 마, 헌동, 우리 조카는 너 어릴때랑 똑같니.
- 그렇지? 저 볼살 터질려는거봐, 붕어빵이야 완전.
엄마, 형이 하는 얘기로는 자기 어릴적과 똑같단다.
좋은건가...
- 다녀 오셰여~~
- 조심히 다녀와.
개새끼도 꼬리를 촐랑촐랑 흔든다.
- 응. 다녀올게..
헌동네는 얼마전 이사를 왔다.
회사다니기가 조금은 수월해졌다.
- 아... 그렇다니까요 형님? 와... 아주 환장을 하겠어요 형님.
- 그렇니까 집에서 탱자탱자 거리는 와이프가 아침에 밥대신 빵을 준다?
- 그렇다니까요! 아니, 한국 사람이라면 밥을 먹어야 되는거 아니냐구요!
김탕구 대리, 얼마전에 결혼을 했다.
헌동은 속으로 ㅋㅋㅋ 웃고 있다.
웰컴투디 유부충월드!
- 야, 그래두 너는 제수씨가 겁나게 미인이잖냐~
- 아, 형님, 그런건 3개월도 안간거 같아요. 와. 진짜.
- 못생긴건 평생가 임마...
옆에서 끼어드는 김부장.
김부장 이 소갈머리 다날라간 노땅은,
자꾸 젊은 사람들 쪽에 끼어서 놀려고 한다.
가끔 던지는 씹노잼 드립은 참아주기 힘들다.
- 하하 , 그... 그렇죠?
어지간히 지 마누라가 개떡인가 보다.
-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어쩌구 저쩌꾸 콸라콸라!#@#(*&
- 하하하하하하하하 역시 우리 부장님!
가식왕 김과장, 김헌동.
- 여 , 김과장, 김대리 오늘 대포한잔 콜?
- 아하하,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와이프랑 기념일이라....
'잇! 김탕구 이 약삭빠른놈!'
재빨리 다이를 치는 김탕구, 이놈도 회사생활 좀 하더니 뺀질이가 되었다.
- 아, 그럼 김과장은 ? 오늘은 빠져나가는거 아니지? 응?
- 아! 저.. 저야 좋죠! 하하!
맨날 이핑계 저핑계 대다 보니 빠져 나갈 구멍없는 헌동.
김부장 이 인간으로 말할것 같으면, 그냥 답답한 인간이다.
고지식하고 고집도 쌔서 같은또래 회사 사람들 한테도 왕따를 당하는것 같다.
그래서 맨날 나이어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든다.
' 아... 이런 썅... 오늘도 봉사활동 하는구나'
왠지 짜증나는 헌동.
- 어.. 여보.. 나 오늘 늦을것 같아. 응.. 김부장 알지? 오늘 마치고 얘기좀 하자네.
글치,,뭐.. 아오 나도 언능 집에가고 싶다야. 그래.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먼저 자.
응. 그래. 나도 최대한 일찍 갈게.
회사 근처 꼼장어가게.
- 캬... 술맛 죽인다. 그치 ? 김과장.
- 아.. 예이 예이 그러믄요. 하하하. 좋네요!
- 김과장은 술 잘 안마시는것 같더만 ~ 이 좋은걸 안마시나 그래?
- 아~ 마누라 눈치보여서 맨날 마실수 있나요 뭐~
- 아! 마누라! 캬 ! 그렇지! 우리! 김과장! 힘내!
지리한 대화의 연속.
어느새 시간을 자정을 새벽으로 달려가고 있다.
김부장의 일장연설은 끝날 기미가 안보인다.
마누라한테서 전화가 두어번 왔었다.
걱정말고 먼저 자라고 했다.
살짝 취한것 같기도 하지만 , 술이 쌘 김부장.
쉬지 않고 마신다.
눈치를 보며 끊어 마시긴 하지만, 헌동은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 아이고 우리 부장님, 너무 심하게 달리시는것 아닙니까?
내일 화요일 아닙니까~ 하하.
너무 과한것 같아 만류하는 헌동.
- 뭐!? 에이~ 우리는 프로 아닌가! 돈받고 일하는 프로! 후후,
새벽같이 마시고도 칼같이 출근해서 일치고 나가는게 프로아냐?!
- 암요, 그러믄요~
- 요즘... 젊은 것들은 패기.. 패기가 없어요! 우리땐 말야...
아시발! 이건 1시간 짜리 레파토리다.
- 맞습죠 네네~ 아근데 늦은 시간! 사모님이 걱정하시잖아요~
발군의 기지로 막아서는 헌동.
헌동의 그 말에, 김부장이 흐리 멍텅한 눈으로 헌동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이내,
- 후... 후... 후하하하하하하~
미친놈 처럼 웃는다.
'뭐야.. 이새끼.. 째렸구만?'
- 어이, 김과장, 하하 크크크 , 나... 갈매기 아빠야 크크 하하.
- 갈...? 아... 기러기 아빠요?
- 그.. 그래 크크크,, 딸꾹... 그거 기러기 아빠.
- 아... 네
말문이 막힌 헌동.
- 김... 과~자앙~ 흐흐. 그거 아나? 우리 마누라, 아들래미 딸래미
다 뵌쿠붜... 뵌꾸붜에 있어 알어? 크크~ 알아? 흐흐
- 아.. 아.. 그러셨군군요.
- 그래,,, 우리 아들딸 보고 싶.구우만... 하하 크크.. 요즘은 전화도 잘 안오긴 하는데!
뭐... 성공하면 지 애비 호강 시켜주지 않?어? 딸꾹 응? 크흐흐
헌동은 갑자기 이 답답한 인간 김부장이 측은해 진다.
'그래 이 새ㄲ... 아니, 이 사람도 아버지지...'
- 나~ 집에 가도 맞아줄 사람 없어요~ 혼자에요~ 딸꾹 흐흐흐
틈만 나면 회사사람들에게,
마치고 술한잔 하자고 보채던
김부장의 지난 모습들이 떠오른다.
이 인간, 오갈데 없는 인간이었구만...
- 그... 그래도.. 술을 줄이셔야, 손주 까지 보고 오래 사시죠.
- 오래? 푸흐... 크크크.. @#$(*%@#($
정줄이 나간듯.
김부장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집에 안간다는 것을 억지로 돌려 세웠다.
눈이 풀린채 퍼져버린 김부장은 그렇게 택시를 타고 멀어졌다.
'저 인간 아침이나 챙겨 먹을까...'
마음이 안좋아 졌다.
김부장은 월급의 대부분을 처자식에게 부치며,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겠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아들딸 이니까.
오늘 밤도 혼자사는 오피스텔에서,
양말 벗겨주는 마누라도 없이, 입은 옷 그대로 홀로 잠이 들겠지.
그리고 다시 내일 아침이면, 삶의 고단함을 알람삼아 잠에서 깰거다.
하.. 김부장 이 인간아.
쓰린 속 부여잡고 나오는 그 출근길은 또 얼마나 쓸쓸할까.
그래도 헌동네는 하다 못해 개새끼까지 꼬리 치며 배웅 나오는데.
헌동은 자꾸만, 멀어져가던 김부장의 풀려버린 눈이 맘에 걸린다.
이시대 아버지들의 눈동자.
그리고 거기 비친, 멀지않은 미래의 자기 모습.
5-2. 김부장, 이 개새끼
- 아빠~
- 응?
- 애기는 엄마 소중이랑 아빠 사랑이가 만나서 태어난거래. 나도 그렇게 태어났찌?
- ... 으... 응?
말 문이 막힌 헌동.
' 시..파.. 요즘 유치원에서는 도대체 뭘 가르치는거야..'
- 맞아 맞아~ 우와 해철이 그런거 어떻게 알아?
지켜보던 마누라, 머뭇거리는 헌동 대신 대답한다.
- 으응!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갈쳐줬떠!
역시, 여자랑 엄마는 다르구만, 생각하는 헌동.
'어쨌거나, 세상이 많이도 변했지.
옷입는 거 하나부터, 사람 머릿속에 들어가는 지식들까지..
게다가 요즘은 집구석에 앉아서 못하는게 없으니,
영화도 보고, 물건도 사고, 멀리 있는 사람이랑 얼굴보고 얘기도 할 수 있고..
캬.. 좋은세상, 과학 만세다 시파'
- 여보, 뽀삐좀 산책시키고 와~
- ...응?
- 강아지 집에만 있으면 우울증 생긴데, 당신도 요새 너무 안움직여~
개 끌고 밖으로 나온 헌동.
'씨파.. 이건 집구석에서 못하는구나'
개를 공원에 끌고 가니 싱싱한 아가씨들이 관심을 보인다.
헤벌쭉해진 헌동.
- 와 ~~ 귀엽다 몇살이에여? 이름 머에여?
- 두..두살인가? 세살? 하하.. 이름요. 뽀.삐. 하하하
일평생 낯선 여자가 이렇게 다가와 말건적이 없었는데,
헌동은 왠지 기쁘면서도 서글프다.
'하.. 개만도 못한 내인생'
다음날 회사.
사무실 분위기가 어수선 하다.
- 뭐야 뭐야? 왜이래?
- 아 형ㄴ... 아니 과장님, 오늘 부장님이 결근이신가봐요?
- 그래? 뭐야 지각 한번 한적 없는 양반이...
말 떨어지기 무섭게 김부장이 들어온다.
굉장히 부스스 하다.
술냄새가 팍난다.
- 어... 어 다들 좋은아침....
'뭐야... 술먹고도 일하니 마니 할땐 언제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갔는데,
그 이후 김부장의 지각이 잦아졌다.
부쩍 술을 더 자주 마시는것 같다.
'같이 술마실 사람도 없을텐데.. 혼자 푸나?'
- 과장님 요새 부장님 좀 이상한데요?
- 흠...
너무 깐깐해서 피곤하던 양반이, 요즘은 집중을 못하고 멍해 보인다.
그러다가 결국 얼마전엔 무단 결근까지 했다.
그리 큰회사가 아니라, 중역이 한명빠지니 밑에 사람들이 피곤하다.
결제와 업무가 밀리고, 사원들 지휘가 안된다.
- 아,, 뭐야... 도대체 왜 안나와..
짜증난 헌동.
점심때 전화를 걸어보니 술병이 나서 다죽어가는 김부장.
무기력한 말년을 몸소 보여주는 김부장이 한심하다.
흡연실,
- 형님, 뭔일 있어요 부장님?
- 하... 나도 몰라, 뭔 술을 그리 마셔.. 하 시파 피곤 하게.. 일 존나 밀리네...
- 왜 그렇시지...? 상부에 지각 계속한거랑 무단결근한거 다 올라갔죠?
- 그렇겠지...
- 헉... 짤리는건가요...
- 모르지... 일단 오늘 내가 한번 부장집에 다녀와야겠어.
띵동
김부장이 다 죽어가는 몰골을 하고 나온다.
10평 남짓한 오피스텔, 호래비 냄새가 코를 찌른다.
라면 봉지만 싱크대 위에 굴러 다니고, 밥솥엔 불이 꺼져있다.
- 괜찮으세요?
- 으... 응...
-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그리도 많이 드세요~? 뭔일 있어요?
- 아... 아냐...
헌동은 슬슬 짜증이 난다.
그 꼬장 꼬장 하던 양반이 이빨이 다빠져서 갤갤 거리는걸 보니
속이 더 뒤틀린다.
헌동, 대충 몇 마디 건네고 나온다.
김부장은 슬리퍼를 끌고 엘리베이터 까지 마중을 나온다.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 몸조리 잘 하세요. 내일도 아프시면 제가 병가 대신 내드릴게요. 전화 하세요.
- 김... 김과장. 조심히 가.
집으로 돌아온 헌동,
요즘은 퇴근후 바로 뻗어 버리거나, 쇼파에 딱 붙어 움직이질 않는다..
- 여보 요새 많이 바빠?
- 뭐 그냥... 요새 안그래도 발주 많이 들어와서 죽겠는데, 부장 그인간이 ... 휴 아니다...
- 쉬엄 쉬엄 해...
- 아, 장모님이 김치랑 찬거리 보내준거 좀 있어?
- 응? 조금밖에 없는데 왜?
- 아, 김부장 좀 갖다 주려고, 혼자 살거든.
- 아? 진짜? 대박, 불쌍하다. 내가 만들어 줄까?
- 아... 아냐...
무슨 욕을 쳐들어 먹을려고, 라고 생각한다.
옆에서 개새끼가 쳐다 보고 있다.
속 마음을 다 들여다 보고 있는것 같아 아니꼽다.
저... 개새끼..
또, 다음날 회사.
- 탕구대리~ 오늘도 부장님 지각이냐?
- 그런가 본대요?
- 하.. 그양반 전화를 하라니까. 곧 짤리것구만 이거...
부장에게 전화를 거는 헌동.
안 받는다.
- 아, 이거 또 뻗었구만, 야 탕구야.
- 네 형님.
- 내가 니일 봐줄 테니까, 부장집에 좀 다녀와라, 이 꼰대양반 밥줄 숨통 한번 살려주자.
1시간 후, 김탕구에게서 걸려온 전화.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하는 탕구.
벨누르고 문드드려 봐도 대답이 없단다.
잠수 탄거 같단다.
- 하.. 시발.. 가지 가지 하는 구만.
헌동만 더 바쁘게 되었다.
차장이 부장대행을 맡고, 자기가 차장일을 맡았다.
그리고 부장은 며칠째 회사에 나오지 않고있다.
해고가 기정사실화 된듯하다.
헌동은, 마음 한켠이 불편하면서도 업무 스트레스로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올랐다.
매일 퇴근이 늦어지고 주말을 반납했다.
- 아오, 김부장 이 개새끼! 좀 사람이라도 구하고 잠수를 타던가!
그리고 몇일 뒤.
상부에서 공문이 하나 내려왔다.
'지난 20여년간 본사를 위해 무던히도 애써왔던
기술영업부 부장 김동식 과장이 지난 9월 10일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 했습니다. 전 사원은 이를.........'
!!!!
망치같은게 뒤통수를 후린것 같다 .
헌동, 충격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멍하다.
-
어머 어머 그거 알아? 김부장님 기러기 아빠였데~
아 공문에 있던? 그사람? 자살했다며~
대박. 대박, 어쩐지 사람이 호래비 냄새가 나더라~
어쩜 글?, 김부장이랑 그나마 친한 인사부 박부장 말로는
캐나다간 마누라가 연락두절이 되옹시렁옹시렁옹시렁
-
회사에는 온갖 소문이 다 돌았다.
사람들에게 김부장의 부고는
그저 회사에서 늘 땡깡 부리던 꼰대의 죽음,
아니면 타부서 어떤 부장의 영구부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부장.
김부장.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아버지,
또 누군가의 동료 였던 그 사람.
헌동,
이제야 머리에 충격이 전해진다.
자꾸,
자꾸만, 김부장 오피스텔의 식어있던 밥솥이 아른거린다.
엘리베이터 문틈사이로 사라져버린,
유난히 초췌했던 그날의 김부장.
이 좋은 세상 다 못 살다간, 불쌍한 김부장.
5-3넥타이 패잔병
여전히 바쁘다.
아니 그전보다 더~ 바쁘다.
헌동은 요즘 주요 프로젝트에서 중책을 맡았다.
퇴근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주말에 쉬기라도 하면 다행.
이제 피로가 만성이 되어간다.
- 해철아빠, 내일 해철이 데리고 이브랜드 갈까?
토요일,
점심때 퇴근한 헌동은 쇼파위에 퍼져있다.
- 아.... 난 피곤한데.. 둘이 다녀오면 안돼?
- 아니다.... 됐다....
- .... 해철이 어디 갔어?
- 학원갔지..
- 뭔 초등학생 1학년 짜리가 토요일에도 학원을 다니냐... 참 세상...
- ...
헌동도 이젠 영락없는 한국 중년이 다됐다.
여친?, 마눌련의 시큰둥함을 못견뎌, 알랑방구를 끼기엔 나이가 들어버린거다.
마누라도 별 신경 안쓰는 눈치다.
헌동과, 미경은 그렇게 중년부부의 초입을 지나고 있었다.
"오늘 오전 5시경 디시구 주객동 모 아파트 입주민인 40대 윤모씨가
생활고를 비관해 ..... "
'허 씨발. 생활고가 더럽게 빡쌨나보네. 짠하구만.. 아재'
요즘은 단발성 가쉽거리보다 정치, 사회 토픽 같은데 더 관심이 간다.
뉴스나 다큐멘타리 같은게 더 좋다.
주갤을 들어가도, 주로 야짤을 캐러 다니던 20대나 30대 초반과는 달리
주식이나 시사정보 관련 게시글만 본다.
코 앞에 닥친 불혹.
헌동은 '그냥' 아저씨였다.
- 어, 뭐야 보고 있잖아..
마누라가 채널을 돌렸다.
- 아 드라마좀 보자...
- 아.. 재방송이잖아, 봤던거 또 왜봐~
- 이거 안봤어~
이런 시발, 일주일 내내 회사에서 뺑이치고
주말에 하루 집에서 쉬는데, 채널 선정권도 없다니.
멸망해라 지구.
갑갑해서 집 밖으로 나왔다.
사실 담배도 집에서 못피운다.
원래 베란다에서 피던걸,
아들 교육에 안좋다며 마누라가 생지랄 하는 바람에, 뭐 그렇게 됐다.
요즘은 어딜가서 담배 피기도 마땅치 않지.
길빵치면 온갖 눈총은 다받고
금연 거리같은 곳에선 불만 붙여도 벌금을 내야되니 원...
흡연부스는 또 존나게 너구리잡아요..
그러고 보면 우리 같은 아저씨들은 마땅히 갈데가 없어?
술이나 퍼 마시거나 ?해야 등산,
그러니 시발, 해발고도 조또 낮은 나라에 온갖 기능성 등산복이 쳐 굴러다니지.
집에 들어온 헌동
- 밥 줘.
- 담배폈어?
- ... 뭐.
- 끊는 다며.
- 아.. 끊을 거야.
또 시작된 잔소리.
중년은 어디서 쉰단 말이냐.
- 아 됐어, 끊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 확 폐병이나 나버려라!
- 이... 여편네가 말이야 말미잘이야!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마누라.
울화통이 터질것 같은 헌동.
왜 시발, 전장에서 싸우고 돌아온 남편들이
패잔병 취급을 당한단 말인가.
5-4 멍멍 주인님 다녀오셨어요!
- 어... 우... 뒈질것 같네.
- 뭔놈의 술을 그렇게 마셨어?
- 마시고 싶어 마시냐, 다 살려고 마시는 거지...
- 어이구 핑계는 좋아...
아침부터 속을 긁는 마누라.
- 아 꿀물이나 갖다줘... 북어국을 끓이든가....
- 에효....
마누라는 눈을 흘기며 방을 나간다.
분위기를 짐작했는지 옆에 있던 개새끼, 안절부절 못한다.
- 절로 꺼져 확...
다 알아듣고 나가버리는 개새끼.
요즘 망년회에, 바이어 접대회식에, 헌동은 아주 죽을 맛이다.
'아... 시발.. 암보험을 몇개 더 들까나...'
- 아빠
- 응?
- 나 용돈.
- 응? 엄마가 안줬니?
- 그건 엄마용돈, 아빠용돈 따로따로 헤헤
아이고 이놈아 너도 본격 수탈전선에 합류하는구나.
지갑에서 만원짜리 두장 꺼내주는 헌동.
최근들어 와이프 생활비를 대폭올려줬다.
그래도 나름 알뜰하게 살림하는 마누라지만,
아들에게 들어가는 교육비가 장난이 아닌가 보다.
학원을 도대체 몇개나 다니는 건지.
어차피 공부할 놈들은 학원 안보내줘도 다 알아서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애들은 학원 안가면 방과후에 할게 없단다.
또래 친구들이 다 학원을 가버리니 같이 놀사람이 없어지는거다.
끽해야 피시방가는 정도이니,
차라리 부모들은 학원 보내버리는걸 선택한다.
' 나 어릴땐 참, 골목에 애들이 바글바글 거렸는데'
온갖 문명의 혜택을 다 받고 있지만, 요새 애들도 참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출근길.
헌동은 운전대를 안잡은지 오래 됐다.
늘 미어터지는 전철을 이용한다.
뉴스도 보고, 주식도 보고, 자리가 나면 앉아 눈을 붙이고...
비단 헌동 뿐만 아니다.
다 똑같이 사는것 같다.
자기같은 사람이 앞에서있고, 자기같은 사람이 옆에 앉아 졸고있고,
자기같은 사람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양산형 가장들.
점점 삶이 더 축 늘어지는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직책이 올라가서, 연봉도 올라가면
돈도 더 잘 모이고, 더 안정될줄 알았다.
중형차도 사고, 완공된지 얼마안된 브랜드 아파트도 들어가고...
현실은 시발 걸어다니는 ATM이다.
들어오는 돈 만큼 나가는 돈도 많다.
교육비며, 각종 경조사비, 공과금, 관리비, 종류도 참 개같이 많은 보험료, 등등...
말하면 끝도 없다.
거기다가 나중에 자식새끼 원망 안살려면 뭐라도 물려줘야 될거 아닌가.
아니 당장에 대학은? 결혼은?
하.. 이 나이먹고도 부모님 도움 받고싶은 중압감.
개같은 세상.
마누라 하나, 아들하나, 개새끼하나
헌동은 축 늘어진 인생여행의 멤버를 딱 여기까지만 한정지었다.
둘째 계획을 아예 접었지.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니까.
주식이나 빵 터졌으면 좋겠다.
'형제차야... 한번만 터져줘라... 아주 빵!'
- 탕구대리,
- 예 과장님.
- 오늘 접대 따라갈래?
- 하하... 형님 한번만 봐주세요. 오늘도 늦으면 마누라 친정갈듯요.
- 이런 씨발, 우리 남편들 설자리는 어디냐!
- 하하... 그.. 그렇죠.
근처에 있다가, 헌동이 하는 말을 들은 여직원들, 눈빛들이 아주 불손한것 같다.
'아주 저년들 눈깔을 확 그냥...'
아주 지 밖에 모르는 년들.
꼭 생리휴가 금요일에 내는년들.
업무시간에 딴짓하고 있다가 일 던져주면
개엿같이 불쌍한 표정 짓고 힝힝 되는년들.
년들 밑으로 들어온 잦사원들은 참 불쌍하다.
온갖 희롱섞인 말도 다 들어줘야 되고,
비위라도 거슬렸다간 왕따를 당하니.
햐.
말이냐.
오늘도 바이어 회식이 있다.
집에 일찍가긴 글렀다.
- 탕구야, 왜... 시발, 이건 시간외 근무로 안쳐주는거냐...
- 하하하.. 그.. 글?요.
새벽 2시.
헌동은 현관문 앞에 서있다.
오늘은 다른날 보다 더 거나하게 취했다.
- 아.. 씨.. 도어락 비번이... 음냐.. 음냐....
삐삐 삐... 빽! 오류
삐삐 삐... 빽! 오류
'아.... 뭐지...? 왜 안열려... 마누라가 바꿨냐? 이런썅?'
문안쪽에서 사그락 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개새끼가 문 긁는 소리일거다.
다시 다시.
삐삐 삐... 띵동.
'오.. 오.. 마누라 미안~'
거실에 암등하나 켜져있다.
마누라는 방에 들어가 자나 보다.
코앞에 개새끼가 꼬리를 흔들고 있다.
좋다고 달려들면, 헌동이 발로 찬다는 걸 알고 미리 물러서 있다.
아주 영악한 개새끼.
'그래도 시파.. 2시까지 안자고 기다리는건 너뿐이구나'
헌동은 가만히 개새끼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아본다.
- 마, 일루 와바.
개새끼, 눈치만 보고 안온다.
그래, 한번 제대로 쓰다듬은적도 없으니까...
마누라 등에 떠밀려,
개새끼와 산책을 나가면 헌동은 그냥 벤치에만 앉아 있는다.
개새끼 입장에선 아주 속터질 일이지.
헌동, 목소리를 부드럽게 가다듬어본다.
-음음,, 그래 우리 개새끼~ 오늘도 나 기다렸니 ~ 우쭈쭈 일로 와봐~
개새끼가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며 슬며시 다가온다.
이 개새끼 나중에 말도 하는거아냐? 싶다.
- 개새끼가 뭐니 , 개새끼가... 해철이 들을까 무섭다.
부스스하게 방에서 나오는 마누라.
- 아... 안잤어?
- 깼어.. 뭐해 언능 씻구자...
- 그.. 그래야지...
헌동은 고개를 돌려 개새끼를 봤다.
꼬리를 살랑 살랑 두번 흔들고, 쇼파옆 지자리로 가는 개새끼.
그래... 마누라 보다 니가 낫다..
늦게 왔다고 구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시발, 더 오랜만이라서 더 반갑다, 이러는데.
5-5. 아빠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
헌동은 고민 중이다.
일을 하다가도 수시로 폰을 확인한다.
- 시바. 진짜 장난 아닌거 같은데.. 이걸 들어가? 말어?
'전국원양자원'
얼마전 부터 꾸준히 지켜봐오던 종목이다.
이미 증권가에서는 '핫' 이슈.
곧 대박이 날거라는 '주식쟁이' 선배의 얘기가 있었다.
믿을 만한 인간이다.
'하... 들어가자 마자 쭉 빠지는 거아냐?'
손실이 두려렵기도 한 헌동.
사실 헌동에겐 든든한 밑천이 생겼다.
매입가 현재가 수익률 ---
----------------------------------------------------
형제 자동차 / 39000 112500 284.4% ---
HNH / 367500 588500 160.1% ---
.
.
최근 몇개월만에 꿈처럼 다가온 수익률.
볼때마다 훈훈해지는 HTS의 빨간불.
이 녀석들을 다시는 못 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 두려운거다.
- 형 형~ 햐... 이번 거는 너무 테마주 아냐? 개미들 꼬이는거 봐~
- 야 야! 너 형 못믿니? 햐.. 섭섭하다. 니가 나때문에 얼마벌었니?
야 일단 만나서 얘기하지, 술한잔 혀~
회사원에서 전업투자쟁이로 전향한 왕개미 '육봉수'.
아까말한 '주식쟁이'가 이사람이다.
헌동의 고등학교 동문 선배.
이 형이 알려주는대로 돈을 밖아넣었다가 뺐다가 몇번 했더니,
돈이 금새 불어났다.
듣기로는 같은 개미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꽤 있는 주식쟁이란다.
처자식까지 내팽개 치고 뛰어든 주식판.
독한 인간이다.
헌동이 크게 부자가 된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형 덕분에 어려워질 수도 있었던 경제상황을 잘 뚫고 나왔다.
주식 일부를 팔아 집 대출도 빨리갚고, 적금도 알차게 들어놨다.
처음에 큰돈으로 주식한다고 생난리를 피우던 마누라도
막상 돈이 들어오니 실실 웃으며 좋아한다.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은 헌동.
'햐... 이거... 진짜 게시판 분위기 장난 아닌걸? 이참에 외제차 한대 굴려봐?'
- 아빠.
- ...
- 아빠!
- 으... 응?
- 뭐해~ 엄마가 나와서 떡 먹으라잖아.
- 떠... 떡?
'배.. 배부른데..'
홱 돌아나가는 아들 해철.
헌동은 마지 못해 따라 나온다.
- 당신은 좀 집에오면 애랑도 놀아주고 해... 뭐 나온다고 컴퓨터 앞에만 붙어있어?
- 맞아.. 맞아...
거드는 아들.
- 해철이 몇학년 몇 반인지나 알어?
- ... 음... 3학년 1반?
- 허...
아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 하하하 몇반이냐? 3학년은 맞지?
- 그러지 말고 당신, 이번 주말 애 데리고 이브랜드나 다녀와.
아빠란 사람이 애한테 관심이 없어?!
- 그.. 그럴까?
오우예~ 거리며 좋아하는 아들, 해철.
다음날 회사.
- 이봐 유미애 대리,
- 네 과장님.
- 이번주 주말 말야, 미안한데.... 프로젝트서 내가 맡아놓은거 분량만 좀 해주면 안될까?
- 뭐, 그렇게 하시죠.
역시 쿨미애,
회사 ?들 중에 가장 쿨하다.
힘든 일도 마다 않고, 요령도 안부리는, 우리부서 보배! 진주!
지난 인사이동때 얻어걸렸다.
10명중 하나 얻어걸릴까 말까한 이런 ?직원들은 성격도 꼼꼼해서 일을 맡기기가 좋지.
이쁜 얼굴은 아니지만, 하는 짓이 이쁘니 다 이뻐 보인다.
- 캬... 탕구야, 그 쪽 부서 일은 할만하냐?
- 그냥 그래요. 유미애씨 일잘하죠? 평판 엄청 좋던데?
- 야, 잔다르크가 따로 없더라.
같은 기집이라 그런지, 밑에 뺀질거리던 기집들이 눈치 본다고 바쁘더라구 흐흐!
- 와 대박 ㅋㅋㅋㅋ, 역시 쿨미애.
- 그치 그치? ㅋㅋㅋ 그냥 느낌이 군대 후임이여. 그나 저나 나도 이 담배 끊어야 되는데 말야..
사무실로 들어온 헌동.
자리에 앉으려는데 건너편 책상들 분위기가 이상하다.
'뭐야.. '
건너편은 ?들 네명이 쓰는, 김장칸.
어떤지 공기가 냉랭한데?
낌새가 이상해 얼굴을 이리 저리 돌려 보는 헌동.
' 이년들이 한바탕 한건가?'
싶었지만 무심코 지나갔다.
디이이이잉
- 어.. 어 형...
육봉수다.
- 야 헌동아, 너 HNH 분할 매도 다 끝났냐? 총알 빼놨어?
- 아.. 아직 형.. 나 지금 일하니까 나중에 마치고 전화하께.
어휴, 이 밑도 끝도 없는 주식쟁이.
집에 온 헌동.
- 쉭 절루가 이눔아.
주인 맞으러 나오던 개가 재빨리 방향을 돌린다.
아주 말귀 하나는 시원하게 뻥 뚫린놈이구만, 생각하는 헌동.
아들 놈은 주말 나들이 생각에 한 껏 들떠있다.
반면에 온통 주식생각 뿐인 헌동.
'내일 오전에 살살 눈치 봐서 팔았다가? 살살 갈아타면 될랑가?'
- 아빠,
- 응?
- 토욜날 가는거야?
- 토요일도 좋고~ 일요일도 좋고~
아들은 또 싱글벙글이다.
다음날 아침,
회사,
- 오케이, 살짝 올라있구나~ 팔자 흐흐 팔자~
HNH 종목을 조금씩 매도 건다.
' 5시리즈? 아니면 E클라스? 이참에 적금도 깨서 같이 박으면 좋겠는걸? '
새로 온 포청천 닮은 밥맛 부장이 눈알을 굴리지만,
관록의 헌동, 몰래 몰래 호가창을 모니터한다.
' 오케이.. 오케이... 잘 팔리고 있어~ 오케이... 오ㅋ...'
- 어이 이봐요!!!!!!!!!! 유대리님 괜찮아요? 유대리님!!!!!!!!!!!
' 뭐... 뭐야?'
헌동이 일어나 고개를 들어보니 유미애가 쓰러져 있다.
- 야야, 뭐야!!??
부장도 놀랐다.
- 가... 갑자기 기절 했어요.
유미애 얼굴이 창백하다.
주위 ?들도 안절부절 못한다.
- 이봐, 영석씨 일단 의무실로 옮기구, 내가 구급차 부를께.
- 네네!
병원.
병실에 누워 있는 유미애.
병원측 말로는 스트레스성 쇼크가 왔단다.
안정을 취해야 한단다.
헌동과 시선도 못 마주치는 유미애.
헌동은 어제 느꼈던, 김장칸의 그 냉랭함이 떠올랐다.
무슨일이지? 의아한 헌동.
야근을 그렇게 밥먹듯이 해도 표정하나 안변하고, 오히려 더 냉철하던 유미애였다.
종 땡치면 꽁무니 빼던 유약한 ?들과는 달랐다.
- 미애씨, 좀 ?찮아?
- 네... 죄송해요. 과장님.
- 아냐, 아냐.. 조금있다 부모님 오신다니까, 일단 푹쉬어,
아, 그리고 이번 주말은 내가 알아서 할께.
유미애는 더 미안한지, 물기 머금은 목소리로 겨우, 네, 한다.
회사로 돌아온 헌동은 추영석을 호출한다.
들어 온지 얼마 안된 신입이다.
키가 멀대같이 크고, 시원하게 잘 생긴놈이다.
- 이봐, 영석씨, 유미애 뭔일 있지?
유미애 옆에서 일을 배우던 추영석이었다.
- 그.. 글?요...
- 아니 아는게 있으면 말을 해봐. 사람이 아프잖어.
- 사.. 사실은 그게...
헌동은 추영석의 말을 듣고, 머리 끝까지 화가 뻗쳤다.
' 이.. 이... 샹년들을 아주 그냥!!!!'
능력을 인정 받아 승진과 동시에 헌동쪽 부서로 옮겨온 유미애,
헌동의 부서에도 대리급 ?이 한명 있긴 했지만, 생각이 아주그냥 푹삭은 묵은지였다.
성실하고 똑부러지고, 차분하기까지한 쿨미애에게 밀릴수 밖에.
시간만 채우다 진급한 상폐 김치가 유미애같은 인텔리에게 게임이 될리가 없었다.
결국 김치칸의 실세자리를 빼앗긴 이 럴커김치.
자기보다 어린 유미애한테 업무 주도를 뺏겼으니, 이가 갈릴 법도 했다.
결국 남은 두 김치를 끌어들여 유미애를 왕따시킬 역도모의를 한거다.
앞에서는 고분 고분 '네, 네' 거리는척하다가,
'김치'특유의 졸렬함으로 '사람'을 괴롭힌거다.
대놓고 뒤에서 수근거린다던지 하는식으로 말이다.
- 뭐.. 이런 썅년... 들이...
또 오랜만에 피가 끓는 김과장, 헌동.
추영석이 덧붙인 말로는,
유미애가 이틀간 야근하며 수집한 데이터를 몰래 지워버린 것 같단다. 그 김치?들이.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겪어본 경험들을 비춰봤을때,
헌동은 ?들이 뭉치면 충분히 그런짓을 할 수 있다 생각했다.
지들 끼리는 킥킥 거리며 좋다고 웃겠지.
이래서 김치 옆에 배추 두지 말라했다. 같이 김치 된다고.
이년들은 군대를 보내야된다! 고 생각하는 헌동.
조만간에 아주 혼쭐을 낼 생각이다.
'아주 그냥 화생방에서 아랫물까지 쭉쭉 빼야돼... 오자랄년들'
그나저나, 머리가 또 복잡한 헌동.
아들이랑 한 약속이 생각났다.
실망가득한 아들의 표정이 떠오른다.
'아 어떡하지... 울고불고 난리를 칠텐데, 아오, 이년들만 아니었어도.'
우선은 자리에 돌아와 주말동안 진행할 업무 준비를 서두른다.
그리고 늦은 퇴근을 한 헌동.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자고있다.
잠들어 있는 아들을 보니 마음이 더 무겁다.
그 다음날 아침, 헌동은 한껏 들떠 있는 아들에게
조심스레 말한다.
- 저... 해철아.
- 응?
- 저기.. 아빠가 오늘 출근을 해야 되는데...
- 오늘?
- 응.. 그리고 내일도 좀 바쁜데.. 이브랜드는 다음 주에 갈까?
울지마 울지마, 난리 치지마를 속으로 외치는 헌동.
아들 표정을 살피는데,
- 음. 그래? 어쩔수 없지뭐. 흐흐. 담주 고고!
엥? 뭐야. 왜케 무덤덤해.
- 빨리 밥먹어, 오전엔 학원 가야돼.
옆에 마누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아들놈이. 벌써 이만큼 큰건가?
갖고 싶은게 있으면 일단 드러눕고 시작하던 그 녀석.
아빠의 입장이란걸 이해 하게 되다니.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내심 더 미안해지는 아빠 헌동.
'아빠가 니가 이만큼 자란지 몰랐다야...'
6-1 전국원양자원
- 그래 해철아, 다음주엔 꼭 아빠가 약속 지킬께 꼭.
- 응. 알겠어! 다녀오세요~
- 조심히 다녀와.
집을 나서는 헌동.
완연히 봄이 찾아와 날씨가 따뜻하다.
햐, 날씨보소.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길,
문득 어제 회사에서 쓰러진 유미애가 생각난다.
'참 걔도, 어린나이에 이런 봄날 못즐기고 맨날 회사에 밖혀있었으니...'
전철을 기다리고, 타고가고, 내릴때까지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헌동.
온갖 뉴스가 하루가 다르게 세상으로 뿌려지고 있다.
연예속보 [디스푸치] 단독 취재, 영화배우 신송이, 유진형과 핑크빛 기류
"그냥 돌리고 싶었다" 하진크루즈 부사장, 정현이, 일본서 회항물의
이웃간 층간소음이 또... 40대 회사원 흉기 휘둘러 같은 동 주민 사망
前 참시민당 총재 양광구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소환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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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별 새롭지도 않을, 곧 사라질 일회성 기사들.
'오랜만에 주갤이나 들어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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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4124 현재 시각 전국원양자원 주주 상황. jpg
6124123 야 ㅋㅋㅋㅋㅋㅋ 상류인생 존나 대박아니냐ㅋㅋ
6124122 야 전원주주는 휫자 쏴라 횟자
6124121 검사 색갸 글좀 고만올려 ㅅㅂㄻ야갤로 꺼져
6124120 전원주주들이 월욜날 매도를 쳐야되는 .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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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전국원양자원' 무슨일 있나?'
종목검색을 해보는 헌동,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
헌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뻔했다.
부랴부랴 육봉수에게 전화를 건다.
- 어 그래! 헌동아 ~ 캬 인생 아름답지 않냐!
- 아 뭐야! 형 나이거 못샀어! 아!
- 뭐! 야 안사고 뭐했냐! 하 이자식 나를 못믿어!
- 아니.. 그게 아니라 어제 일이 있어서! 아오!
2시 까진 횡보였는데? 뭐야!?
- 야 말도 마라, 캬캬, 완전 장 막판에 묵직한놈 하나가 들어오더라.
개미들 까지 한방에 삼키고 캬캬캬! 상한가 가는데 망설임이 없더라 야! 캬캬!
- 아오, 총알까지 다 빼놨었는데! 봉수형 나 5시쯤에 끝날거 같으니까 마치고 봐!
속이 쓰린 헌동.
어제 유미애 쓰러지고, 병원 나올때 확인 했을때는 분명 보합세였다.
변동이 없었다는 거다.
'아오.. 이거 살려고 HNH도 다 팔았는데 지기럴..'
사실 어제 그 일이 없었다해도,
새가슴 헌동이 그 종목을 주저없이 매수 했었을런지는 장담 할수 없다.
어쩌면 월요일이나 그 후까지 더 간을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 '내 주머니에 들어 올수도 있었을 돈'이라는 것는 참 안타깝기만 하다.
사무실에 오니, 왠일로 김치 3인방이 출근해 있다.
주말에는 절대 안기어나오는 년들이, 니들도 어제 일로 찔리는게 있구나, 싶은 헌동.
어제 요년들 때문에 '전.원'을 놓쳤다고 생각하니 더 얄밉다.
'요년들을...'
- 양송희 씨.
- 네...
맞언니 김치다. 이년이 주동해서 유미애를 괴롭혔을 거다.
평소에도 아주 싹퉁이 노란년이다.
- 어제 말한 전표수정건 다 해결했어?
- 지금 하려구요.
헌동, 퉁명스런 상폐김치의 반응에 편두통이 올것 같다.
인중에 핵꿀밤을 먹일뻔했다.
- 아니.. 그걸 아직도 안하면 어쩌나!
- 아녀. 저도 바빴어여.
시발. 이년을 그냥.
어제 분명 메신져 투명창 조절해가며 채팅으로 노닥거리는걸 봤는데!
헌동은 너무도 당당한 이년 태도에 더 화가난다.
맨날 창 여러개 띄워 놓고 여자사랑인지 우먼사랑인지 하는 사이트, 거기 쳐 들락거리는걸 모르는 줄 아나!
하지만 말빨 딸리는 헌동.
- ...그... 그래. 뭐, 암튼 지금 유미애씨 아프니까,
송희씨가 대신해서 유미애씨 하던 데이터 수집 업무 좀 하라구.
화요일까지.
일로 조져야 겠다고 생각한 헌동.
하지만 양송희, 대꾸를 않는다.
눈빛이 굉장히 오만 불손이다.
하, 시발 말세일세.
왜이런 평화로운 주말에, 이 김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혀야 된단 말인가.
차라리 얼굴이라도 안보면 스트레스라도 안받을것을.
그냥 집에 가라고 말하고 싶다.
- 왜.. 대답이 없나.
- 아녀. 제 일 다 끝나고 시간되면 할게여.
- 아니! 그러면 누가해!?
- 유미애씨가 하겠져! 왜 저보고 그러세여! 아 짱나.
획돌아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상폐김치.
그리고, 쫄쫄 따라나가는 부하김치 둘.
헌동은 뒷목을 잡을 뻔했다.
분명 담배 태우러 갔을거다. 요년들.
뒤쫓아 올라가는 헌동.
- 양송희씨! 왜이렇게 이기적이야! 동료위해 그거 못해!?
시키는 일이라도 잘 하던가!
- 아 못해서 죄송하네여! 아니면 과장님이 하시던가여! 아진짜 여기까지 따라와서 별꼴이야 증말!
담뱃불을 붙이다 말고 표독스럽게 쏘아 붙이는 양송희, 이년은 원래 위아래가 불분명한년이다.
- 뭐... 뭐!?
- 과장님이 하시라구여! 아니면 과장님 좋아하시는 유미애랑 둘이 손잡고 하시면 되겠네여!
이에 못참고 눈깔이 돌아버린 헌동. 필터 없이 주갤식 화법을 구사한다.
- 이 씨발련아! 말 다했어! 아주 그냥 보자 보자 하니까, 구석구석 털을 다 밀어버릴라!
- 어이구 과장님 과장님 그만하세요.
추영석이 뒤늦게 쫓아 올라와 말리기 시작한다.
- 뭐여!? 지금 욕한거에여? 참나, 누군 욕 못하나! 씨발! 회사 그만 두면 될거 아냐!
- 그만둬 이 시팔련아! 아주 구녕이란 구녕은 코르크로 다 막아버릴까보다. 이 썅년아!
추영석이 말리는 와중에도 주거니 받거니 서로를 물어뜯는 헌동과, 송희김치.
몇마디 더 뱉은 후 양송희는 돌아서 내려간다.
부하김치들도 잔뜩 눈을 흘기고는 뒤따라간다.
- 아이고 과장님 그만하세요. 왜이렇세요!!
- ... 씨익... 씨익... 하.. 아 됐고, 담배 있음 하나 줘봐.
화가 안풀리는 헌동.
저년 때문에 손실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더 열받는다.
프로젝트에서 척추처럼 버티고 있던 유미애가 쓰러진일,
아들 녀석과 약속을 못지킨일,
'전국 원양자원' 매입을 못한일,
이번일 두고 두고 마음에 담고 가리라 다짐한다.
퇴근후
- 어이~ 김헌동이~ 사람 못믿는 김헌동이~
두더쥐처럼 생긴 중년남자. 호프집 문을 열고 촐래 촐래 들어온다.
육병수다.
- 그런거 아냐.. 형 못믿은게 아냐.. 어제 일이 좀 있었어.
- 야 주식하는 놈이 주식보다 중요한 일이 있냐? 집에 뭔일 있구나?
또 제수씨한테 개 털렸구나!?
크크 마, 형봐! 이혼해! 딱 깔끔하잖냐~
- 아 그런거 아냐. 회사일이야 회사일.
예전 부터 깝죽거리길 좋아하던 육병수.
사람 잘 놀리고 약올리기도 잘하고 반응 좀 있다 싶으면 더 집요하게 갈구고 찝적대는 스타일이다.
후배들한테 하극상도 몇번 당했다.
그래서 인지 육병수는 다른 친구나 후배들 보다 김헌동을 유난히 아낀다.
딴놈들과는 다르게 아무리 짖궂게 해도 무덤덤히 옆에 붙어 있던 헌동이었다.
이혼후, 전업투자를 위해 얻은 사무실겸 잠자리인 오피스텔,
그 쓸쓸함 곳에, 잠깐씩이지만 유일하게 들러주는 사람도 역시 헌동이었다.
- 야야, 걱정마 곧 타이밍이 올거다.
- 타이밍? 그걸 어떻게 알어?
- 야야, 형 또 못믿니. 너두 형처럼 ?쯔! ?쯔 몰아야 될거 아냐 이 돼지짜샤~ 이 뚱뽀쨔샤~
두더지 땅파듯이 헌동 배를 손톱으로 샥샥샥 긁는 육병수.
헌동은 신경 안쓰고 되묻는다,
- 아 진짜? 언제? 언제?
- 요 팔푼아, 크크, 내가 볼땐 지금 아직 바닥이야. 내가 얼마짜리 정보를 가지고 있는 줄 아니? 흐흐..
- 오.. 진짜? 오케이 오케이 , 나 그러면 형만 믿고 대기만 탈게!
- 그래 임마! 잘 되면 한턱 더 크게 쏴라! 요것두 니가 계산하구 응? 크크
헌동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병수의 말에 마음이 놓인다.
사실 헌동이 조금 검소한 편이긴 하지만, 돈욕심이 그리 많은편은 아니다.
처음에 주식을 시작한것도, 조금이나마 가계경제를 호전 시키기 위함이었지,
큰 여윳돈을 만지기 위함은 아니었다.
대출 좀 갚고, 여윳돈만 약간 만들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주식이란건 등락, 즉 오르고 내리는게 있지않은가.
오른상태에서 수익금이 생기면 당연히 그만두는게 맞지만,
우리 바보 개미들은 그 오름의 종점이 어딘지 모른다.
더 갈것 같고.
더 딸것 같고.
제일 처음 주식을 할때에도,
굳이 이런식으로 돈을 벌어야 되나 싶었지만,
대한민국의 보통 직장인의 월급으로는,
남들보다 '약간' 여유있는 삶을 살기엔 벅차다는것을 느꼈다.
'그래, 이번에 따면 그만두자!'
월요일 아침.
회사에 출근한 헌동은 '전.원.' 호가창을 확인중이다.
'뭐야. 그 많던 대기물량이 다빠졌네? 되려 2%나 떨어졌잖아. 역시 작전인가...'
헌동, 화장실 가는척 몰래 빠져나와 육병수에게 전화를 건다.
- 형, 이거 설거지 아냐? 왜 파란불이야. 들어가도 돼? 보니까 저점에서 이미 2배넘게 올랐는데?
- 야야야야! 같은말 계속 하지말고 지금이라도 타! 언능! 기회야! 있는돈 싸그리 걸어!
- 진짜? 진짜? 나 골로가는거 아니지?
'좋다... 시발 어차피 수익으로 먹은돈, 한번 써보자.
형제자동차야, 너도 그간 고마웠다. 바이 바이.
오케이 2만주, 매수들어간다. 시발. 적금 모아둔거 빼면 전재산이다.'
매수체결.------------
헌동, 작전주인지 테마주인지, 아니면 진짜 초우량주일지 모를
이 주식 '전국원양자원' 에, 30대를 보내며 모은 돈의 대부분을 걸었다.
왠지, 느낌이 좋은것 같기도하고, 들뜨기도 한다.
처음 '형제자동차'를 살때와는 사뭇 다른느낌이다.
제발, 신이시여 하고 나지 막히 빌어본다.
제발! 제발!
- 형님!
?
담배피려고 옥상으로 가려는데
김탕구가 뒤에서 부르더니 헌동쪽으로 달려온다.
- 형님! 미스양, 아니, 양송희랑 무슨일 있었어요?
- 뭐... 약간... 왜?
- 이..일단 옥상가서 얘기하시죠.
'뭐..야..'
느낌이 좋지않다.
- 오늘 양송희 안나왔죠?
- 응, 회사그만둔다고 했어, 나한테.
- 걔, 회사 그만둔거 아니고 병가낸거에요.
- 그래? 근데?
김탕구가 조심스럽게 표정을 가다듬더니 조심스럽게 말한다.
- 형님, 사내 성희롱 문제로 징계위원회에 진정서 올라갔다던데요?
리스트에 이미 이름 올라갔구요.
'....!?'
6-2. 풋이냐, 콜이냐
헌동은 부장과 면담중이다.
- 김과장, 여기 적힌 이게 다.. 사실인가?
- 아.. 부장님,..
당장 성희롱범으로 몰리니 헌동도 적잖이 당황을 했다.
구차한 변명 같았지만, 하나하나 일련의 사건들을 설명했다.
유미애와 양송희 간에 있었던 트러블과, 양송희의 근무 태만에 대해서.
그것때문에 훈계를 했는데, 양송희가 삐딱하게 나와서 말다툼이 오고 간것 뿐이라고..
- 하.. 이사람아.. 이건 정도가 지나친것 같아서 말이야.. 우리때야 이런일이 비일비재
했지만 서도, 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했잖나.
다른 여자직원들도 있었다면서, 남자 직원도 한명더 있었고.
코르크... 구녕... 하... 이건
- ... 하.. 네. 면목이 없습니다.
고개를 떨구는 헌동.
- 일단은 사실만 두고 봤을땐 양대리가 충분히 수치심을 느낄만 하구만 그래.
요새 자네 무지하게 바쁜거 알아. 하지만 나도 어쩔수가 없네.
이런걸 커버 쳤다간 노동청에서...
음, 일단 징계위원회로 넘어갔으니 기다려 보자구.
자리로 돌아온다.
건너편에 있던 김치부하 둘은 헌동이 보이자, 킥킥 되던것을 멈추고 표정을 감춘다.
'아오... 저년들때문에 훅가게 생겼네'
사실 새로온 포청천 부장이 야속하기도 하다.
나이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으려고 몸사리는게 보인다.
세상떠난 김동식 부장이었다면 헌동을 믿어줬을지도.
기분이 아주 안좋은 헌동.
줄담배를 하나, 둘..
머리가 지끈거린다.
십년 넘게 다닌회사.
업무에 하나하나 맡을때 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마흔 넘어 처음 다는 타이틀이 '성희롱 가해자'라니.
피가 또 꺼꾸로 솟을려고 한다.
디이이잉 디이이잉
육병수의 전화다.
- 얌마, 뭐하냐.
- 일하지 왜
- 어쭈 형한테 목소리를 깔어? 어쭈 ~ 어쭈구리~
- ...
이인간의 깐죽거림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 왜 말이 없어 크크, 야 나 아까 밖에서 제수씨 봤어~
- 애엄마?
- 어~ 크크 삼동 백화점근처 카페에서~ 어떤 느끼하게 생긴놈이랑 같이 있던데 ?
- 아 그래?
- 제수씨가 나를 먼저 알아보더라야~ 인사했어~ 크크, 재수씨 새 남자친구 생겼냐?
'이 두더쥐새끼가 꼭 말을해도...'
- 상관안해.. 생겼음 생긴거지 뭐.. 형 나중에 전화할께 나 바빠.
' 남자는 얼어죽을... '
누군가 싶기도 하지만, 크게 신경쓰진 않는다.
헌동도, 마누라도 마흔줄에 서있는 중년이다.
연애할때 또는 신혼초기에 느낄법한 질투나 시기 같은건 진작에 초연함으로 바뀌었다.
아는 사람이겠거니 한다.
그 보다 손에 일이 안잡힌다.
징계 수위가 그리 높을것 같진 않지만,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를 코앞에 두고있어 걱정이다.
부서 이동이라도 하는 날에는 여지껏 준비해왔던 것을 다음사람에게 고스란히
인수인계 해야될거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간다해도 그 공이 표시가 안날게 뻔하다.
- 과장님.
점심 후 찾아온 유미애.
- 응? 오 미애씨 좀 괜찮아?
유미애는 병가를 내라는 부서사람들의 뜻을 물리치고
기어이 출근을 했다.
차가운 표정, 차분한 말투, 병원갔다 오더니 더 냉정해보인다.
- 얘기좀 하실까요.
- 응? 해.
- 가능하다면 퇴근후에 잠깐 뵙겠습니다.
- 그... 그래.
거절하기 힘든 단호함이다.
회사 밑 커피숍에 마주한 두사람.
헌동과 유미애.
- 뭐야~ 굳이 커피까지 마시면서 얘기해야 되는거야?
이봐 나 이래뵈도 유부남이야.
- 알고 있어요.
농담 참 안통하는년. 웃어주는 법이 없어요.
쿨한 성격만큼이나 콜드한 표정. 유미애의 유일한 단점이다.
- 하하.. 그.. 그래...
- 그보다 징계 한방 드셨다면서요.
- 아... 그래. 뭐 그렇게 됐네. 참. 하하.
- 저 때문이신가요.
- 뭐? 아냐 그런거 하하.
- 저 때문 맞는거 같은데요?
아니라니깐 이년아, 내가 시발 쌍욕을 아주 더럽게 해서....
- 하하하하, 전혀... 미애씨는 신경 안써도 돼.
- 아뇨, 저도 들은게 있어요. 제 편의 봐주시려다가 큰소리 내셨다면서요.
털을 다깎아버리고 온 구멍을 다 막아버리겠다고 하셨다던데. 아닌가요?
'시.. 시발'
헌동은 얼굴이 화끈거린다.
- 아하하....
유미애는 헌동이 불합리한 중징계를 받게되면 상부에 진정서를 내주겠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장님 안녕히 가세요. 하고는 아무 표정도 없이 또각또각 걸어가는 유미애.
그런 유미애를 보며 헌동은, 저년은 삼시세끼를 얼음만 쳐먹나, 하고 생각했다.
- 여보~ 나왔어~
- 저녁 안먹고 왔지? 좀만 기다려 국만 올리면 되니까.
- 해철이는?
- 학원.
- 뭔 학원을 도대체 몇개나 다니는겨. 요즘애들 무쟈게 피곤하겠구만.
- ...
개가 식탁 의자에 앉아있는 헌동옆에 딱 앉아 두사람의 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너 이 개놈아, 너도 저녁 안먹었냐. 허허.
- 개새끼라 한다고 뭐라하니까 이제 개놈이라 하니.. 글고 뽀삐 암컷이야.
- 음.. 그래.. 아 오늘 백화점 갔었어? 병수형이 당신 봤다던데.
- 아, 당신 셔츠랑 넥타이나 좀 보려고 갔었지.
- 병수형이 어떤사람이랑 있었다고 하더만.
- 마주친거야. 학교다닐때 과 선배.
- 그렇군... 오늘은 국이 좀 덜짜네.
무덤덤히 묻는 헌동.
무덤덤히 답하는 미경.
이 중년 부부에게는, 아니 적어도 헌동에게는 권태라는 굳은살속에 박힌 마누라에 대한 신뢰가 있다.
믿고 말고 할 거리가 없다.
헌동과 미경은 중년이고,
그리고 그 이전에 부모다.
어떤 직책, 어떤 권위 보다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헌동은 알고 있다.
그것 말고 어떤 믿음이 더 필요할까.
출근한 헌동. 오늘 징계위의 결과가 발표날거라고 한다.
일단 부장은 크게 염려치 말라고 하지만,
'지일 아니라고.. 개년, 아니 개놈이...'
배알이 꼴리는건 어쩔수 없다.
- 형님, 담배 한대 피시죠~
김탕구가 검지로 옥상쪽을 가리키며 부른다.
- 야 시발. 이게 무슨 꼴이냐.
- 양송희는 아직 병가에요?
- 그렇댄다야.. 욕처먹은거로 병가 내면 난 이미 저세상에 있겄다.
이래서 년들도 군대를 가야돼.
야, 그건 그렇고 난 어떻게 된다니.
- 글쎄요. 끽해야 감봉 3개월 정도 되지 않을까요.
담배를 피우고 내려오는데, 여사원 한명이 공고를 붙이고 있다.
아마 저기에 징계결과가 있을거라 생각한 헌동.
잰걸음으로 가서 공고를 보는데,
' 이, 시발.. ! 뭐야...! '
띠이이잉, 그리고 도착한 문자.
육병수가 보낸거다.
'VICTORY'
일주일 후
헌동은 징계차원의 인사이동을 하게 되었다.
옮겨간곳은 헌동의 회사에서 중추외 부서였던 '고객대응팀'.
헌동이 저지른 실수에 비해 그 무게가 무거운 징계였다.
헌동은 이에 불복해 상부에 진정을 여러차례 냈지만 일괄적으로 묵살당했다.
퇴사를 무릎쓴 유미애의 강력한 항의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무시당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오너쪽 낙하산 한마리가 경력직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나름 중추부서의 중책을 맡고있던 헌동이 실책을 저질렀고,
그틈에 그 낙하산이 헌동의 자리로 비집고 들어온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
사실관계야 어찌 되었든, 헌동은 10년가까이 충성을 바쳐온 회사로 부터
뒷통수를 맞은 격이 됐다.
반면,
역설적이게도 헌동이 징계를 확인했던 그 날, 그 순간,
육병수의 문자 'VICTORY' 기점으로
'전국원양자원'은 연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HTS에 찍힌 난생처음 보는 억대 실현이익금을 보며
헌동은 생각했다.
'지금 내인생 이순간은 콜을 치는거냐, 풋을 치는거냐'
6-3. 여보 미안해, 영숙이가 힘들대
요즘 헌동은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부서이동후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빠른시일내에 징계해제를 약속했던 포청천 부장도 한달째 입을 닫고 있다.
아마, 소문대로 낙하산이 굴러들어온것 같다.
이전 부서로의 복귀가 힘들어보인다.
육병수와 통화를 하고 있는 헌동.
- 진짜 엿같아서 못해먹겠다니까.
헌신했더니 진짜 헌신짝이 됐어 이 씁...
- 크크크크, 야~ 때려치고 나랑 전업 하자니까~
- 아 무슨 전업이야...
그러면서 헌동은 반대손으로 안쪽주머니 봉투끝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사직서다.
처자식만 아니었다면 수십번도 더 던졌을 사직서.
- 크크크, 야~ 한방 딱하고 노후 준비 끝나면 ~ 크루즈! 크루즈 타러가는거야~
- 휴... 말을 말자.
- 크크크, 조만간 보자구~ 안그래도 할말이 있으니까~
- 할말..?
헌동은 일찍 회사를 나섰다.
요즘은 그냥 눈치안보고 칼퇴근이다.
회사에 더 붙어 있어봤자, 이미 변방으로 쫓겨난 몸.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집에 오니 마누라가 없다.
아침에 여고동창 계모임을 나간다고 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마누라가 들어온다.
헌동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
- ... 안잤어? 먼저 자라니까.
- 일찍 일찍좀 다녀...
- ...
별 대꾸 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버리는 마누라.
"디이이이잉"
전화진동소리.
헌동이 쇼파 밑에 있던 자신의 휴대폰을 샥, 들어보지만
헌동것에서 오는 진동이 아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쪽에 놔둔 마누라 가방에서 나는 소리.
굳이 마누라 폰을 받으려고 몸을 움직이진 않는다.
'마누라가 알아서 다시 걸겠지 뭐...'
"디이이이잉"
하지만 자꾸 들리는 진동소리.
한번 왔다가 끊기고, 또 위잉~ 하고 왔다가 끊기고.
TV를 보던 헌동은 조금씩 거슬린다.
- 아.. 뭐야 오밤중에..
결국 마누라의 가방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헌동.
휴대폰을 딱 집어드니, 거기서 진동이 멈춘다.
전화 건 쪽에서 끊은 듯.
'이.. 썅...'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넣어두려는데,
"까톡'
대기화면에 뜨는 메세지
"JSM : ^^누나전화 안받으시네요. 잘들어가셨..."
'뭐야... 이거...'
3시간전,
미경의 여고동창 모임.
미경은 이 모임에 오랜만에 나왔다.
워낙 드센 친구들이 많은 모임이라, 기를 펴기 힘들다.
그래서 그간 계비만 야금 야금 내고는 잘 나오지 않았었다.
- 얘, 얘 미경이 너는 참 얼마만이니~ 니가 젤 안늙었다야~.
- 홍홍홍 얘~ 영숙아, 너 미경이 부처한테 시집간거 모르니? 홍홍홍
얼마전에 이혼을 한 미영.
술만 마시면 주먹을 날리는 남편에게 가정폭력사범 타이틀을 선물해주고
위자료도 왕창 땡겼다.
- 야야~ 우리 이렇게 모인게 얼마만이니~ 기집애들 그렇게 바쁜척들 하더니!
오늘 재밌게 놀자야~
학창시절에도 항상 앞에 나서서 분위기를 띄우던 영숙,
결혼 이후에 쭉 볼기회가 없었던 이 친구년을 미경은 오랜만이라 생각한다.
- 야야~ 우리 '거기'나 갈까?
- 거기??
- ??
미경과 친구년들은 어느새 자리를 옮겨,
스트라이프 네온싸인이 번쩍거리는 어느 술집앞에 와있다.
- 얘얘~ 또 여기니~
- 야~ 뭐 어때, 오랜만에 미경이도 왔으니까 분위가 한번 띄우자구~
- 그래 그래 영숙이 말이 맞어~ 새파랗게 어린 기집들도 생일파티다 뭐다 하면서
들락 거리는데 우리는 안될거 없잖아?
미경은 이 가게가 어떤 곳인지 대충 눈치를 챘다.
아까부터 하는 말들을 들어보니, 여긴 분명 '호스트바'다.
미경에겐 친구년들은 물론 남편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결혼전,
회사의 친한 언니들 손에 이끌려, 몇번 들락거린적이 있던터였다.
그땐 그 언니들이랑 어울리는거 자체가 재밌어서
별 생각도 없이 다녔던 건데,
헌동과 결혼 생각을 한 뒤로는 들락 거린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리 내키지는 않는 미경.
친구들이 몇마디 주고 받더니 우르르 들어간다.
- 야 영숙이 너 아는 새끼 마담 있지?
- 응응, 불러볼께~
영숙이 전화를 거니,
이내 곧 뺀질하게 생긴 젊은놈 하나가 뉘옙 뉘옙 거리며 쫓아나온다.
- 아! 누나! 왜케 오랜만이야~ 우리 선수들 오줌 쌀뻔했잖아~
그말을 듣고 입이 귀에 걸리는 영숙.
- 얘 탄두야~ 우리 오늘 중요한날이니까~ 재밌는 애들로 넣어줘~
- 아~ 그럼요 그럼요~
룸에 우르르 들어가는 친구들.
휩쓸려 들어가는 미경.
- 얘 미경아 쫄거 없어~ 그냥 애들 술잔받아주고 접대 받는다 생각해~
요즘은 젊은애들도 이런데서 모임한다 너?
캬바레 가기엔 너무 노티 나잖니~
영숙은 눈을 껌뻑거리며 미경을 안심시키려한다.
미경이 이런곳은 당연히 처음일거라고 생각한듯.
- 기집애.. 아,알겠어~
- 미경아~ 모임좀 이젠좀 자주 나와~ 얼마나 좋니~
- 맞아 맞아~ 니가 자주 나왔으면 이런 좋은데도 진작 와보지 안그래?
친구년들, 여기 온게 한두번이 아니구나, 생각하는 미경.
'기집애들, 어쩐지 계비가 그거밖에 안모였더라.'
선수들 입장.
친구년들은 신이났다.
- 얘~꽃돌아~ 홍홍홍 주위에 괜찮은 돌싱있으면 하나 소개시켜줘~ 홍홍홍
오랜만에 남자허벅지 주물러보는 미영이 부터 시작해서
다들 아주 흥이 오르고 있다.
- 얘! 남편들도 접대다 뭐다해서 룸사롱 다니는데 우린 안되니! 마셔~ 마셔~
친구년들은 독한 양주에 조금씩 맛탱이가 가고 있다.
깔깔깔깔 거리며 남자애들 바지에 손을 집어 넣거나,
그놈들 손을 당겨서 젖가슴을 주무르게 하는둥,
인사불성이다.
술을 거의 못하는 미경은, 일단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몰래 나온다.
남편이 기다릴거 같다.
자기를 수발들던 아랍왕자 같은놈에게
얼떨결에 번호를 건네 준것이 맘에 걸리긴 했지만.
미경은 큰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안방에 들어와 누운 헌동.
헌동은 자신이 화가 난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유치한 감정을 개입시킬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안그래도 회사일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는데,
마누라까지 신경쓰려니 편두통이 팍 온다.
한달전 육병수와 통화를 하며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제수씨 남자친구 생긴거 아냐?'
그럴리가 없다.
이 곰팡이 같은 마누라, 밖에도 잘 안나간다.
헌동, 일단은 잠시 신경을 접어두는쪽으로 정해놓고
잠이든다.
다음날
헌동은 육병수를 만나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일방적으로 육병수가 헌동을 설득하려는 분위기다.
- 헌동아, 이건 투자야 투자~
- 형, 이거, 보증서는거랑 다름 없는거 아냐?
- 야~ 무슨 보증이니~ 너 또 나 못믿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서 잘못된적 있어?
틀린말은 아니다.
적어도 헌동에게 육병수는 자칫 험난할뻔했던 30대를 여유롭게 돌파할수 있게 해준,
신앙이자 종교였다.
병수의 말을 들으면 빚을 갚았고, 병수의 조언을 따르면 돈이 쌓였다.
'전국원양자원'으로 생애최초 억대현금을 만질 수 있었던 것도, 병수의 덕이었다.
- 야, 니가 가진 자산 그거 얼마나 된다고 내가 보증을 세우겠니~
이건 말야 투자야 투자 ~
병수의 말은 즉, 곧 소금융 투자회사를 설립 하려는데,
자기자산도 죄다 주식에 묶여 있고, 은행대출도 한계가 있으니
헌동같은 신용도 깔끔한 소액 투자자들을 한데 모아, 그 연대보증으로
대출을 받아 회사를 설립하자는 거다.
그게 투자의 또다른 방법이고, 또 그렇게 투자를 해서 수익금이 수십배가 되면
바로 바로 분배해주니 ,자기도 좋고 헌동도 좋다는 거다.
사실 헌동은 육병수가 하는 말이 무슨말인지 제대로 다 알아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일단 '보증'이란 말에 거부감이 드는건 어쩔수 없다.
- 야~ 너 말고도 사람들 이미 거의 다 모였어~ 내가 너 생각해주는거야 임마. 크크크
- 나... 나도 알지...
- 짜식. 크크크, 생각해봐, 투자야 투자 크크크, 너 회사 때려치고 싶다며~
이거 한방 똬 하고 건물세 받아가며 살면 좋잖냐 ~ 응? 크크크.
'건물세....'
헌동은 아주 잠깐,
외제 세단에서 내린 자신의 모습과,
부리나케 뛰어나와 헌동에게 인사하는 상인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고는 금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닐거야...'
헌동네 집.
미경은 영숙이년과 통화중이다.
영숙이년은 어제 왜 먼저 같냐며 핀잔을 주더니,
가게비와 화대비의 엔빵비로 30만원을 입금하라고 한다.
- 야, 나 그럴돈 없어. 나 그리고 어제 먼저 나왔잖아.
- 얘~ 나갈려면 선수를 물리고 나가든지~,
그리고 너 언제 갔는지 기억도 안난다얘
어제와는 다르게 영숙이년 목소리가 싸늘하다.
얼마나 쳐 마셨길래 1인당 30만원이냐 나온거냐고 따져보지만
- 일단 입금시켜, 그거 얼마한다고 그러니~
하고 끊어버린다.
한숨 쉬는 미경.
30만원을 생활비에서 썼다간 빵구가 날게 분명하다.
또 그런 푼돈을 남한테 빌리자니 구실 정하기가 마땅찮고.
게다가 돈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해봤자, 남편이 금방 알아챌거다.
무시할까 생각하다가,
이일로 남편있는때 전화가 오면 난감할거라 생각한다.
결국 헌동한테 전화하는 미경.
일단 대충 둘러 말하고 다음달 부터 생활비에서 조금씩 충당할 요량이다.
- 어, 왜. 나 병수형 집이야.
- 아, 나 30만원만 입금해줘.
계비 때문에 그러는데 친구대신 메우고 나중에 받기로 했어.
- 뭐, 누가 얼마나 어렵길래... 30만원이 없대?
- 으.. 응.
- 누구.
- 음... 아, 영숙이가.
- 그건 또 누구여. 알겠어. 붙여줄께, 일단 바쁘니까 끊어.
핸드폰을 집어드는 헌동.
- 아, 형 잠깐만. 나 모바일뱅킹 좀 잠깐할게
별 의심 없이 입금을 해주는 헌동.
왠지모르게 , 어제 마누라 폰에 떠있던 메시지가 떠오르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알고도 속아주는 남편 헌동.
안 속았어도 아는척 하기 힘든 남편 헌동.
그리고는 다시 병수와의 대화로 돌아왔다.
- 왜 30만원 붙여 달래?
- 응...
- 야~ 뭐 30만원 때문에 그러냐~ 크크크~
너두 참~ 야! 이참에 한방 탁 땡겨서 제수씨 호강 시켜줘!
- ...
'호..강.. 호강이라...'
아까 그려 놓았던 상상에,
마누라와 아들도 함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고급스런 원피스를 입고 세단에서 내리는 미경과
턱시도를 입고 헌동에게 달려오는 꼬마신사 아들.
참, 따지고 보면 늘 근검 절약만 강조했지,
마누라 한테 뭐하나 제대로 해준게 없는것 같다.
지금 상황이 그리 나쁘진 않지만...
회사에서 입지가 불안정하고...
이렇게 지내다가 나중에 생활이 쪼들리게 되면...
'그... 그래'
침을 꿀꺽 한번 삼키고는,
헌동은 말한다.
- 형. 병수형. 나 그거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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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에서 제가 좀 애매하게 표현한게 있어서 부연설명 넣습니다.
주식거래에서 '실현' 되었다는 말은 이미 그 주식을 팔았다는 말입니다.
말미에 실현이익금이라고 했으니, 헌동이 이미 그 전.원.주를 팔고
손에 현금을 쥔것이지요.
*반대로 평가이익이라 함이 그 주식을 팔지않고 기다릴때의 이익이라 생각하면
편합니다.
애매한 표현 쏘리 쏘리.
6-4. 빚보증 그리고 공황장애
- 괜찮아? 잘되가? 문제 없는거지? 누구처럼 공황장애 오는거 아니지?
- 크크크, 미친놈, 아~ 전화좀 그만해라
육병수에게 보증을 서준 뒤,
헌동은 틈만나면 육병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문대를 나와 금융권에서 펄펄 날아다녔던 육병수다.
그를 못믿는건 아니다.
하지만 당장에 큰 재산이 걸려 있으니, 불안해 견딜수 없는거다.
최근엔 회사 사정도 안좋아지고 있다.
변방으로 쫓겨난 몸,
정리해고 공고가 뜬다면 헌동은 분명 1순위다.
이미 회사에서 마음이 떠난 헌동은,
이 상황을 타개하게 해줄 유일한 사람이 병수라 생각했다.
일단 마누라에겐 비밀로 했다.
헌동이 보증 서준 사실을 알면 분명 난리를 칠거다.
일이 잘풀리면 그때가서 이야기할 생각이다.
- 형님~ 요즘 표정이 안좋으시네요~
김탕구가 찾아왔다.
커피를 헌동앞에 내려 놓는다.
- 뭐. 그냥 그렇지.
- 그거 아세요? 어제, 포청천 그 인간 '끽' 했대요.
손날로 목긋는 시늉을 하는 탕구.
헌동 이전 부서의 포청천 부장이 짤렸단 뜻이다.
- 하. 아주 개처럼 부리다 그냥 뒷통수를 까는구나.
- 포청천이 출근해서 자기책상 치워진거 딱 보고는 ...
- 야야야, 그만해, 남일 같지가 않다. 이런 조까튼 세상.
'욕을 하게 만드는 세상이 구나. 하!'
전장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다.
온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고 있는 것 같다.
여기껏 견뎌왔던 온갖 부담감들이
일제히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다.
분명 마흔 다섯이 오기전에, 헌동은 회사를 나가야될거다.
지금이야 사정이 나쁘진 않지만,
퇴사후엔 여기저기를 전전하겠지.
일용직 노동자, 아파트나 주차장 수위, 공공근로 인력,
아니면 파지를 주으러 다닐 수도 있고 말야.
혼자 산다면 편의점 알바나, 물류창고 일을 해도 상관없다.
허나 헌동만 바라보고 있는 목구멍이 세개나 더 있지않은가.
열아홉이 끝나던 그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시작된,
생존을 위한 남자들의 질주는 멈출줄을 모른다.
멈추고 싶어도 자꾸만 뒤에서 우르르 달려오니 방향을 틀 수도 없다.
이 땅위의 남자들은 누구나 그렇게 고달픈 레이스를 하다가,
열외하나 없이 죽음에 골인.
허무하지.
'하, 시바..'
정신없이 보내온 30대가 왠지 후회 스러운 헌동.
가족과 알콩달콩,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고, 즐겁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헌데 지금의 자신은 '회사원'과 '가정부양 기능사'를 오가는 투잡맨일뿐,
시간이 갈 수록 더, 가정의 중심부에서 멀어지고 있는것 같다.
집에 돌아온 헌동은 개와 마주 하고있다.
어디서 들었는데,
개나 고양이나 뭐 이런 금수들은,
너무나 순수해서 사람들이 못보는 것을 본다던가,
아니면 자신이나 주인이 죽을 날을 안다고 했다.
개의 눈을 본다.
쌔 까만게, 정말 순수 그자체다.
- 야, 개.
멀뚱 멀뚱 헌동을 바라보는 개.
- 니가 생각하기엔, 내가 어떻게 될거 같냐.
내가, 잘 될거 같냐, 아니면 쫄딱 망할거 같냐.
내가, 사표를 내야 될거 같냐, 아니면 처자식보고 참아야 될거 같냐.
내가, ... 시발... 뭐하는 짓이냐.
'하... '전국원양자원' 딱 고점까지 갔을때 팔걸. 닭집이라도 크게 할건데.'
마누라가 들어온다.
- 뭐야, 요즘 어딜 그렇게 다녀.
- 뭐. 나는 놀러좀 다니면 안돼?
- 어휴, 지 남편 똥꾸멍 빠지게 돈벌러 나가는건 모르고...
- 생색 좀 내지마, 나는 집안일 안해?
- 됐어 밥이나 줘.
- 좀 늦으면, 알아서 차려 먹어!
저... 저년이...
마누라는 요즘 밖으로 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더 퉁명스러워지고, 짜증스러워 졌다.
생활비는 그대로 주고 있는데 밥은 대충 먹자고 하고,
뜬금없이 외식을 하러 가자고 할때도 있다.
그때는 헌동의 카드로 긁고.
생활비 어떻게 쓰고 있냐고 묻지도 못한다.
- 허이구, 그 쥐꼬리 만한 돈 어디 빼돌릴데도 없네요.
하니까.
마누라도 참, 변하긴 변했다.
20대의 홍미경
30대의 홍미경
그리고 지금의 홍미경은 너무나도 다르다.
사람은 변하는게 아니라, 자기 다워진다고 했던가?
마누라는 점점 장모다워지고 있다.
요즘 장인을 보면, 사리를 흩뿌리고 열반에 드실것 같다.
헌동, 자꾸 가슴이 답답했다.
한치앞이 안보이는 미래가 답답했고,
당장 어깨에 짊어진 부담감이 줄지 않아 답답했고,
한시도 끊이지 않는 자식 걱정에 답답했다.
말로 설명 못할 수많은 이유때문에 답답했다.
그리고 그 답답함에 못이겨 숨막혀 했던 어느날,
참을수 없는 메스꺼움에, 일하다 말고 토악질을 수차례 했던 그 어느날.
헌동은 병원을 찾았다.
육병수의 잠적소식을 접하고 난 후 였다.
5-5. 아프니까 결혼이다.
헌동은 절망적이다.
백방으로 육병수의 행방을 찾아다녔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이... 개새끼! 이 씨빨쌔끼!'
헌동의 가슴은 숨죽은 파김치가 되었다.
곧 재산에 대한 가압류가 들어오면
채무 변제를 위해 이사를 가야할거다.
가장 큰 재산인 집을 잃게 되는거다.
마누라 한테는 아직 이야기 하지 못했다.
일단은 온갖 차선책을 동원해 상황을 호전시키고 싶었다.
사설 탐정을 찾았다.
- 예이~ 예이~ 고객님 그사람이 얼마나 땡겼다구요?
어~우 많이도 땡겨갔네, 걱정마세요!
저는 전직 형사 출신이구요~, 인간회수율은 80%가 넘습니다.
동종업계 최고 아니겠습니까?
네네, 그럼요. 그럼요. 그럼요.
일단 다이가 그정도로 크면 착수금이 x00정도 들것 같거든요.
뭐, 손해보신 재산도 회수해드릴수 있읍죠.
아주 비틀어 쥐어짜면 무조건 나오게 되어있읍죠. 네네~
그럴 경우 본사무소에 인센티브를 좀 떼주셔야 할겁니다. 네네~
네,네 걱정마세요.
하하! 네, 알겠습니다. 네~ 왕상봉 이였습니다~
분명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을거다.
다들 육병수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터.
그 중에 그 누구 하나라도, 잠수 중인 육병수의 머리채를
끌어올려주길, 간절히 바랬다.
일단 보유하고 있는 일부 현금은 안전했다.
이 현금에 어떻게든 돈을 더 보태서 집을 지키고 싶었다.
그 집은 헌동에게 보통 집이 아니었다.
부동산 거품을 헤집고 들어가 얻은,
보물이었다.
그 자체로 헌동의 30대였고,
소중한 가족의 둥지였다.
동창회 주소록을 뒤져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염치불구하고 선배나 후배에게 부탁해 보기도 했다.
매번 거절 당하긴 했지만, 자존심 운운할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헌동도, 부모님이나 형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네, 형네도 그리 넉넉치 않을뿐더러,
가족에게 만큼은 못난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 많이 바빠? 요즘 많이 늦네?
- 으.. 응 고,곧 회사에 내부심사가 있어. 먼저 자 여보.
집에서 조각잠을 자고 나오거나
밤늦게 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편하지 않았다.
육병수를 찾지않고, 집에 머무르는 것이.
회사에서 마찬가지, 업무에 집중할수 없었다.
한번 잘못 찍은 도장.
그야말로 하한가의 연속이었다.
- 흥신소죠? 네, 저 김헌동인데요. 아직 소식 없나요.
- 아~ 고객님~, 아무래도 그양반 외국으로 날라버린것 같은데요~
영 방법이 없는건 아니지요.
네네~ 이런 케이스는 착수금을 추가해주셔야 합죠. 네네~
몇일째 단서 하나 못캐낸 헌동.
'도대체 어디있는거냐, 이 두더쥐새끼야..'
절망적인 헌동.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곧 압류행사가 시작될 거다.
이젠 평수를 줄여 이사를 가는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누라가 염병을 떨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얘기하는 수밖에.
오랜만에 일찍 귀가한 헌동.
- 어~ 아빠 일찍 왔네?
해철이 거실에 퍼질러 앉아 피자를 먹고 있다.
혼자 시켜 먹은것 같다.
- 엄마는 어디가고? 밥 안해주고 나갔니?
- 응, 또 친구들 만나러 간거 같애.
대신 나 용돈 많이 주고가 히히.
헌동은 분노할 힘도 없다.
다만, 이제 갓 10살이 된 어린 아들이
저렇게 지 엄마가 차려준 밥상대신, 바깥음식을 먹고 있는게 가슴아프다.
헌동은 머리가 아프다.
며칠후에 은행측의 채권행사가 들어오면,
이 집은 더이상 김헌동과 홍미경의 것이 아니게 된다.
가압류 전에 집을 미리 알아보고 이사를 준비해야 한다.
일단 마누라가 들어오면 상의를 해야 한다.
집 평수를 대폭 줄이던지, 아니면 외곽쪽 전세로 나가던지 결정해야 된다.
헌동은 마누라를 기다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고단함에 잠깐 잠이 들었다.
그리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마누라가 들어온다.
자정이 되기 딱 15분전이다.
마누라는 짐짓 놀라지 않은척 하는것 같다.
- 어... 이, 일찍 들어왔네? 오늘은.
헌동은 고래 고래 과음을 지르고
마누라를 자빠트려, 옷을 갈기 갈기 ?어버리고 싶다.
손끝이 가늘게 떨려 온다.
최대한 이성의 끄트머리를 놓지 않으려 애쓴다.
- 할 얘기가 있어.
- 뭔데. 내일 하면 안돼? 나 피곤해.
- 일단 앉아봐.
- 해. 듣고 있으니까.
건성 건성 대답하는 마누라.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하나 하나 정리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 ... 우리 이사 가야 될거 같아.
- 뭐, 무슨 소리야.
- 상황이 안좋아 졌어. 가야해. 상황 좀 나아질때까지
살만한 곳을 좀 알아보자. 평수좀 줄여서.
- 뭔일 생겼어? 안가면 안돼?
오밤중에 무슨 이사야.
- ... 지금 당장 가자는게 야냐... 하지만 곧 가야돼.
- 뭔일 저질렀어? 알아서 해결해. 피곤하게 하지말고.
아니, 돈관리 잘 하겠다며?
쥐꼬리 만한 생활비로 살림하게 할땐 언제고...
쳐다 보지도 않고 빈정대는 마누라를 보고,
헌동은 치솟아 오르는 부아를 참지 못한다.
- 이 씨발! 진짜 가자면 가는거지 말이 많아!!!!!
헌동이 버럭 소리를 지르니 , 화들짝 놀라는 마누라.
어안이 벙벙하다.
이렇게 소리 지른 적 없던 남편이었다.
- 왜, 왜... 소리를 질러!
그리고 울면서 들어오는 아들.
- 흐으앙, 엄마아빠 싸우지마아~
흥분을 감출수가 없는 헌동은
그대로 집을 나와 버렸다.
세상앞에 온갖 욕을 다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육병수를 찾으면 사지를 토막내버리고 싶다.
담배를 한번 깊게 빨아도 그 깊이가 무너진 억장에
닿지를 못한다.
온 사방의 걱정거리들이 헌동의 머리 속으로 날아드는것 같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근심한다.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
그리고 헌동은 또 생각한다.
그래, 아직 마누라가 실감할 만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결혼 생활동안 검소함의 표본을 보여줘 왔던 헌동이었다.
남편의 이사얘기가 경제관념 부족한 마누라에겐 크게 와닿지 않았을거다.
한버더 양보하자 생각한다.
거리를 한참 서성이다, 새벽녘에 집으로 들어온 헌동.
이야기는 내일하고,
일단은 눈을 붙이기로 한다.
그렇게 침대로 드는데,
'...?'
마누라가 없다.
전화를 해본다.
꺼져있다.
'이 새벽에...'
아침이 될때까지 뜬눈으로 기다린 헌동은,
장인과, 마누라가 찾아갈만한 친구년들 전부에게 모조리 전화를 걸었다.
찾지 못했다.
또다시 떠오르는 불길함.
'밤늦게 수신된 낯선 남자의 메시지, 최근 들어 귀가가 늦어지는 부인'
헌동의 여남은 답답함이 모두 분노로 바뀌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다시 수화기를 드는 헌동.
손이 떨리고, 이가 갈린다.
아니, 온몸이 떨리고 있다.
- 여보세요. 네 저 김헌동인데요.
- 오~ 네네 고객님~ 왕상봉입니다~
육병수씨 사건은 아직 가닥이 안잡히는...
- 아뇨, 그거 말구요.
말을 끊는 헌동.
- 와이프 행적을 좀 캐고 싶어서요.
한 남자의 결혼생활이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7-1. 피타보라스 마지막 법칙
미경의 변
안녕하세요, 윤변호사님. 네, 제가 홍미경이에요.
솔직히 저는 이혼, 바라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남편이 저런식으로 나오는데.
애초에 남편이 저를 속이지만 않았어도, 이런일은 없었을거에요.
바람폈냐구요? 아뇨. 그건 아니구요...
저 몰래, 어떤 사람 보증을 서줬지 뭐에요?
뭐 부분보증 같은게 있나봐요? 제가 이쪽으로는 잘 몰라서...
암튼 여태껏, 알뜰하게 살림하며 모은 돈을 다 날려버렸지 뭐에요.
그래놓고는 이사를 가야되니, 마니, 하면서 죽는 소리 하는데,
저는 알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구나 했죠.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내더라구요.
처음엔 어찌나 놀랐는지,
남편이 화를 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나갈때
엉엉울었어요. 상처받아서.
10살난 아들도 거기 있었는데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것 뿐만 아니에요, 남편은 제 뒤까지 캐서 바람핀거 아니냐며 몰아세웠어요.
실제로 딴남자를 만났냐구요? 그냥, 아는 동생이었어요.
나이도 쌔까맣게 어린친구인데, 무슨 바람이 나겠어요.
저도 처음엔 저도 제가 유부녀니까 별 관심도 안줬어요.
그런데 집에서 너무 외롭고 힘든거에요.
남편은 맨날 늦게 오고, 저는 집에 강아지 말고는 놀 친구도 없었거든요.
워낙 말도 재밌게 잘 걸어주고, 사근사근 하게 대해주는 친구라, 고민도 털어놓을겸
만난거지, 손끝하나 안 닿았어요.
그 친구도 그랬어요. 생각보다 말이 너무 잘통해서 만난다고.
별 뜻없으니까 오해말라구요.
전요, 결혼 10년동안 친구도 몇번 제대로 못만났다구요.
제 나름대로 가정에 헌신했다고 생각해요.
반면에 남편은 어땠는지 아세요?
맨날 밖으로 나돌고, 야근이다 뭐다 핑계 대가면서 집에도 안들어오는데,
혹시 알아요?
밖에서 허튼짓 하고 다녔을지?
전요, 솔직히 가슴이 너무 아파요.
남편도 분명 노력을 했겠죠.
그런데 보세요.
결혼 초기부터 경제권도 안넘겨주더니
홀딱 재산을 까먹었잖아요.
네? 재산기여도요? 아니, 제가 그렇게 알뜰살뜰 살림했으면
당연히 그게 기여 아닌가요?
음..남편 성격상 위자료나 재산분할 가지고 쪼잖하게 물고 매달리진
않을거 같긴한데,
지금 반반 갈라봤자 얼마 되지도 않을 재산, 크게 욕심도 없구요.
다만, 저는 저희 아들 꼭 제가 키우고 싶구요,
우리 해철이 키우는데는 쪼들리지 않게
좋은거 입히고 싶고, 좋은거 먹이고 싶네요.
해철이도 분명 저와 살고 싶어 할거에요.
꼭 제가 키우고 싶어요. 우리아들.
헌동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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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갤럼들아. 나, 이혼한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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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넘은 아재다. 고추 안선다.
시발. 진짜. 나는 아닐줄 알았는데. 진짜 좆같다.
결혼 10년차다. 사실 우리부부는 평소에 그리 큰 트러블이 없었다.
가끔 싸우긴 했어도. 거의 내가 참고 넘어가면 마누라도 더이상 달려들지 않고
잠잠해졌었다.
오히려 그게 불화를 키운건지도 모르지.
대화가 많이 없었다는거.
어떡하냐, 먹고사느라 밖으로 뛰어다니기 바쁜데...
이혼하는 마당에 사실, 뭐 남자가 이러쿵 저러쿵 변명할게 있겠냐.
솔직히 이렇게 글쓰는것도 웃기고, 내 꼬락서니는 더 웃긴다.
그런데 한가지 걱정이 있다.
원래 협의 이혼할려고 했는데, 마누라가 꼭 지가 아들을 키워야 된단다.
솔직히 나는 우리 아들, 저런 정신나간 여자한테 맡기고 싶지 않다.
마누라는 분명 바람을 피웠다.
내가 느낌이 조깥아서 흥신소 시켜서 밟았는데, 역시 어린놈 하나 만나고 있더라.
근데 하필 만난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서로 문자만 좀 야릇하게 받고,
결정적인 증거는 못잡았다.
아... 시발 그때 내가 흥분안하고 좀만 참았으면....
우리집은 그리 부자는 아니었는데 또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얼마전에 내가 사고를 쳐서 시발...
10년을 악착같이 모은돈인데.
집을 내놔야 될 상황이 온거다.
아직 변두리에 전세주택 하나 구할 돈이 있긴한데,
솔직히 내 잘못이 크긴하지.
이건 진짜, 내가 존나 잘못한거다.
그렇게 집에서 남편 대접 못받고,
마누라 한테 바가지 박박 긁혀도 참고,
내 가정, 내가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는데....
심지어는 몇년동안 섹스도 못했다.
손끝만 닿아도 별 발광을 해서.
하, 야, 진짜 인간적으로, 홧김에 내가 먼저 이혼얘기 꺼냈지만,
한번이라도 잘못 인정하고 사과할줄 알았다.
아니, 내 상황이 좋았으면 기를 쓰고 매달렸을걸?
처음에 결혼할때도 마누라가 덜컥 애가져서 결혼한거지만
난 일단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 한거라고 생각했다.
뭐냐 근데 이게.....
온갖 호사란 호사는 같이 누리면서 떵떵 거릴땐 언제고,
막상 악재 뜨니까 손절에 미련도 없는거 아니냐 이상황?
한편으론 엄청나게 섭섭하다.
이제는 자존심을 떠나서 일단 마누라가 딴 맘품은거 자체로 나는 같이 못살겠다.
하........... 시발.
나도 회사에서 좀 위태위태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헛된욕심 안부리고 잘 살았을건데.... 아 시바.. 가슴 존나 아프다.
하나더 말하자면,
마누라 형편없는 경제관념에, 경제권 쥐고 있었으면 집안 박살 났었을거라
생각하거든?
솔직히 결혼할때도 우리부모님 돈받아서 시작하긴 했지만
그거를 내가 엄청 꼼꼼하게 관리했었다.
물론 운도 좀 따랐지만.
그래도 나는 말이다,
반반이 아니라 지금 가진 재산 다 마누라 한테 줄수도 있다.
아들을 내가 키운다는 전제하에....
내 아들 어떡하냐.
양육권 분쟁 생기면 일단은 여자한테 유리하다고 변호사가 그러든데...
자식들은 엄마 손에 키우는게 맞냐?
내가 키우고 싶다.
오늘처럼 술마신날은 더 보고 싶어서 어쩌지.
우리아들....................
7-2. 헤븐스템프, 이혼수속
김헌동은 홍미경과 이혼을 했다.
재산을 양등분 하는 조건의 협의이혼 이었다.
10년간의 결혼생활은 그리도 허무했다.
육병수가 뒤통수를 치고 잠적했던 그해,
인도에 떨어진 은행 악취가 유난히 심했던,
그 가을의 막바지 즈음이었다.
- 우워~ 시발 춥구나... 무슨놈의 추위가 이렇게 빨리 온다니.
헌동은 장을 보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헌동의 원룸은 이혼전에 살았던 아파트와 지척에 있다.
회사도 가깝고, 동네도 조용하고 편의시설도 많아서
따질것이 없었다.
흥얼 흥얼 노래를 부르는 헌동,
찌개를 렌지 위에 올리고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내고 있다.
- 안~녕 토미~ 난니가~ 쭹말 쪼아~ 호랑이 기운이 소~옷아나!♬
밥을 먹고, TV를 보고, 잠이들고,
다시 일어나 출근을 하는, 그런 일상의 반복이다.
밥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뭐 자질구레한 가사일을 헌동이 더 할뿐이지,
결혼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것 같다.
아들 생각이 많이 나는것 말고는 꽤 괜찮은 생활이라 생각한다.
전처가 멀리까지 이사가 버려,
아들을 자주 못보는것이 사실 좀 짜증 스럽긴 하다.
아들은 지 엄마를 따라갔다.
아니,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부부가 양육권 소송에서 이기기위해, 기를 쓰고 덤벼들던 와중,
헌동은 아들 해철의 상처입은 눈빛을 보고 말았다.
아들은 결별을 앞둔 자신의 부모를 올려다 보며
세상 가장 슬픈 표정을 지었다.
결국, 헌동은 아들을 전처에게 보내며,
아들 잘 키워달라는 의미에서 위자료도 두둑히 얹어줬다.
우선 금전관계를 떠나,
다만 아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좋은 부모노릇을 못해준 것 같아서...
그 해가을,
세상 가장 가까웠던 '여자'와 가장 '멀리' 헤어지면서
헌동은 생각했다.
'그래, 최선을 다했다. 이제 행복하게 살자'
헌동은 회사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물론 스트레스는 많이 받는다.
징계 해제는 커녕,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 제일 윗칸에 있다는 말이 들린다.
사기를 당하고, 이혼까지 하게 되면서
회사일을 더 신경 못 쓴게 사실이긴 하지.
그래도 일단은 끝까지 다녀볼 생각이다.
양육비를 꼬박꼬박 챙겨줘야, 아들이 잘먹고 잘 클테니까.
땔를르르르르르
- 네 고객대응 지원팀 김헌동입니다. 예. 네 고객님.
네, 아 드라이기를 구입하셨는데 작동이 안된다는 말씀이세요?
아, 그러면 어쩌구 저쩌구 블라블라.............
최근 어려워진 회사 사정으로 인해 부서 인력이 감축되었다.
과장직책을 달고 있긴 하지만, 바쁠때는 전화상담도 직접한다.
땔를르르르르르
-네 고객대응 지원팀 김헌동입니다.
- 여보세여
- 네, 고객님.
- 저기여.
- 네. 말씀하세요.
- 남자에여?
- 하하, 저 말씀 이신가요? 네 남자 맞습니다.
- 재밌나여?
- 아. 아닙니다. 고객님.
- 누나 상담사 없나여?
- 네, 무슨일로 그렇시죠?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해결해드릴수 있는데요.
뚜뚜뚜
땔를르르르르르
- 네 고객대응 지원팀 김헌동입니다.
- 아니, 제가요. 그회사 제품을 샀는데... 이게 안되요 고장났나?.
- 아. 어떤제품을 구입하셨죠?
- 알아서 뭐하게요.
뚜뚜뚜
이런 씨발 새끼들!!!!!
일선에서 감정노동을 하게 될줄은 몰랐는데...
심적 피로도가 굉장히 빨리 쌓이는 업무다.
- 과장님, 요즘은 살이 다시좀 찌셨네요.
유미애는 최근 헌동이 있는 부서로 옮겨왔다.
새로온 과장과 트러블이 생겨 징계를 먹은거라 했다.
이 '새로 온 과장', 그래 그 '낙하산 과장'이다.
'유미애 성격에 뭘 못참고 그러질 않았을건데... '
헌동은 의아했으나,
한편으로는 부서를 옮겨와서도 업무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주는 유미애가 든든했다.
- 미애씨 농담도 할줄아네.
- 농담 아닌데요.
- 미애씨도 이뻐졌어. 연예인 닮았네.
- 누구요.
- 음.. 전지현? 하하. 농담.
- 농담 아니네요.
이년도 징계먹더니 상태가 안좋아 졌네.
- 그.. 그래.
- 과장님, 실례되는 질문 하나 해도 되요?
- 뭔데.
- 어때요. 이혼.
- 음? 이혼? 음... 이혼이라...
이혼...
헌동은 몇 달전,
'이혼'이라는 결별선언 위에 서 있던 자신을 떠올려본다.
- 마음 다 정했니?
- 응, 미련없어.
헌동과 미경은 거실에서 마주 하고 있다.
아마, 이 밤이 그 집에서 보낸 '가족'과의 마지막 밤이었을 거다.
헌동은 한숨을 무겁게 내 뱉고는 말한다.
- 좋아, 알겠어. 빨리 정리하자.
- 그래, 일단 재산분할 부터 정리해줘.
미경은 작은 차가움의 파편까지 다 끌어모은듯 냉정했다.
그런 미경을 보며 헌동의 기분은 더 가라앉았다.
스스로 차분해 지자고, 그리고 냉정해지자고 되내었다.
- ... 일단 운이 좋았어, 우선 보증인들 간의 계약관... 아니 이런건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당신도 알다시피 이 아파트는 더이상 우리것이 아냐,
그리고, 아파트를 압류당하고도 변제 안된 채무액이 있었어.
- 쉽게 말해, 그렇게 말하면 몰라.
- 은행에서 아파트를 가져갔는데, 그래도 빚이 남아있었다고.
그래도 운좋이 좋아서, 그걸 다 갚았고,
가지고 있던 현금의 일부분을 지킬수 있었어.
결론적으로 지금 빚은 없고, 지방 전세 아파트 하나 얻을 만한
돈이 남았어.
헌동의 속은 부글 부글 끓고 있었다.
말귀를 잘 못알아먹는 마누라 때문이 아니라,
마누라와 마지막 까지 이런 날선 대화를 해야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이미 상황은 돌이킬수 없을 만큼 와버렸다.
- 어떻게, 그 돈을 그렇게 다 날려먹은거야?
- 그 점은 정말 미안해. 나도 이렇게 될줄은 몰랐어.
당신이 원한다면 계좌 오픈할게.
나도 다 우리...
잘되자고 그랬던거지, 나쁜뜻은 없었어.
라고 말하려다, 끝내 뒷말을 잊지못했다.
- 됐어. 정확히 반반 나눠줘. 양육비 입금 까먹지 말고.
그날 헌동은 미경에게 언제까지 집을 비우라는 언질 만을 주고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챙겨놨던 짐을 모두 부모님댁으로 부치고 난 후였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휑해진 반쪽짜리 보금자리를 나오며
헌동은 이를 앙다물었다.
애써 슬픔을 참는 남자의 오기였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 남자의 비참함이었다.
- 네, 아버지, 아뇨, 괜찮아요. 일단 며칠만 여관에서 자고
방 구할거에요. 네, 그때되면 짐 찾아 갈게요.
네.. 알겠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혼자가 된 그날,
헌동은 밤새 불켜진 여관방 천장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잠들지 못했다.
이혼.
좋은거면 너도 나도 하겠지....?
미애씨,
나도 분명 홀가분 한게 있긴 하지만,
절정에 다다른 쾌감, 평화, 그런건 아냐.
그냥, 구속이 심하던 유부남일때를 떠올리면서
위안 삼는 카타르시스 그정도?
처음엔 그런 생각도 들었지, 이혼 도장을 딱 찍기 전에 말야.
그래, 나는 자유롭겠지.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날수 있겠지.
이젠 내 행복과 내 삶을 위해 살자.
이 평화, 천국까지 영원하길!
영원하길! 하며 멋쩍게 하하하 웃는 헌동을
유미애는 아무표정없이 바라봤다.
퇴근 후, 헌동은 친구놈과 가볍게 한잔했다.
술을 조금 마셔놓으면 외로운밤, 잠들기가 좋다.
가로등 몇개에 의지한 어두운 골목길.
오늘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왠지 산뜻하네!
- 나는 외롭지 않다.
이 어둠속에서, 외롭지 않아.
이 평화, 얼마만인가 그렇지 않니 김헌동?
하하하! 노래나 한소절 해볼까~
음음,
새~벽냄새 스~밀때~ 포장~ 마차를 나~와~♪
작~은 나의 방에 드니~
골목길에 나지막히 퍼지는 중년남자의 저음은
구슬피 평화롭다.
숨막~히는♪ 공허...
'...?'
헌동은 잠깐 멈춰섰다.
어두운 골목 쪽에서 인기척을 느낀듯 해서.
사람 지나다니는데 노래 부르면 쪽팔리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안보인다.
'...뭐지? 착각인가?'
음음, 다시 다시..
작~은 나의 방에 드니~♪
숨막~ 히...
다시 느껴지는 기척
- 응? 뭐야~
두리번 거려보는 헌동.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그리고는
다시 흥얼거리려 입을 딱 떼려는 순간,
골목 안쪽에서 사부작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슬금 슬금 기어나오는것 같다.
헌동이 눈을 꿈뻑 거리며 자세히 보니
무슨 걸레 뭉치같은게 움직인다.
더 자세히 보니,
누더기 개 한마리다.
- 엥...?
그런데 알게 모르게 친숙한 느낌.
막대기에 걸어놓으면 영락없는 대걸레,
온통 털이 다 엉키고 구정물에 젖어있지만,
헌동은 왠지 자기가 알고 있는 그 '개'인것만 같다.
- 야, 개새끼야.~ 일루 와봐~ 쫑쫑
조용히 불러보는 헌동.
제자리에서 꼬리만 살랑거리는 누더기 개.
헌동은 골목길 바닥에 잔뜩 수그린다.
- 야, 개야 ~ 임마, 너 나 알지? 일루와~ 일루와~
조금씩 다가오는 개.
- 야! 뽀삐야~너지? 일루와 임마~ 하하하~
언제 그랬냐는듯, 주저 하지 않고 달려오는 강아지.
꼬리를 흔들고 반갑다고 난리치는 강아지는 뽀삐였다.
구정물에 떡이된 뽀삐를 헌동은 끌어안았다.
- 야~ 하하하~ 너 여기서 뭐하냐~
헌동은 구린내나는 누더기 강아지 뽀삐를
번쩍들어올렸다가 다시 껴안고 입을 맞췄다.
외로운 밤, 어두운 골목길에서 재회한
'가족'이었다.
7-3. 뽀삐야 죽지마
어느새 봄이 왔다.
헌동은 별일 없이 무난하게 잘 지내고 있다.
올해 연봉이 삭감되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사니 조금은 여유롭다.
아들 양육비 보내주고, 저축을 하고
또 여기 저기 쓰지만, 그냥 저냥 지낼만 하다.
물론 부양'가족'이 한 녀석 더 생기긴 했지만,
교육비가 안드는 놈이라 부담은 없다.
일주일에 한번씩 아들을 꼭 만나러 간다.
아들이 나중에 아빠를 낯설어 하게 될까봐 그게 제일 겁난다.
- 이야, 형님 그래도 잘 꾸며 놓고 사시네요~ 하 싱글라이프 부럽다!
김탕구가 놀러왔다.
- 부럽긴...
- 어이구 ~ 니가 뽀삐구나~ 완전 귀엽네 하하~
탕구, 달려나온 강아지를 안아올린다.
- 야 말도 마라, 처음에 봤을땐 그냥 먼지귀신인줄 알았다.
- 와~ 용케 공무원 아저씨들 한테 안잡혀갔구나~
- 눈치 빠르기가 사람같어.
- 그래도 용케 아는척 했나봐요~ ㅋㅋㅋㅋ
- 그럼. 안면 트고 산지 거의 10년째 아니냐 하하.
이혼수속을 진행하면서
헌동과 미경은 살림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안 쓰는거 팔고, 버리고, 각자 필요한 물건 챙기기에 바빴던 것.
그래도 전처가 이 강아지를 버리고 갔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같은 이불 덮고 10년을 잤지만, 참 야속한 년, 이라고 헌동은 생각했다.
지 딸처럼 키우더니.
- 야, 탕구야, 쿨미애는 시집 안간다니?
헌동이 맥주를 들이키며 별 뜻없이 묻는다.
- 글쎄요. 영 못난 얼굴은 아니긴한데, 성격이 ~히히히
- 성격? 뭐 어떤데.
- 아시잖아요. 사람이 도통 업무 얘기말고는 하질 않는거.
요즘은 쿨미애 말고 콜드미애라던데요.
- 음... 그정돈가?
헌동은 얼마전 자신과 농담을 주고 받던 유미애를 떠올려본다.
'그래, 영 웃음기가 없긴 하지...'
- 뽀삐야, 아빠 리모콘 갖다주라.
총총총 뛰어서 리모컨을 물고 오는 강아지,
- 이야~ 그냥 사람같네요~
- 야, 말마라, 얘라도 있으니 퇴근하고 바로 집에 오지,
그전에는 술 안취하면 집에도 안왔어~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는지, 그냥 막내딸 같다야.
- 하하하하, 예전에는 집구석 개새끼니 뭐니 하시더니~
- 그.. 그랬던가? 하하
지금의 헌동에게, 이 강아지의 의미는 그 이전보다 훨씬 남다르다.
헌동이 가정을 지킬때, 함께 그 파수꾼 역할을 해준 고마운 존재,
비록 헌동이 가정을 버렸지만,
그리고 그 가족이 흩어졌지만,
저홀로, 끝까지 연의 미련을 부여잡고 있던 존재.
태어나고, 생의 대부분을 헌동의 가족과 함께한 이 강아지는,
가족을 잃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본능적으로 헌동과, 미경과, 그리고 해철을 찾아 헤매었겠지.
이 팔뚝만한 존재가 가졌을, 가족에 대한 끝없는 갈구를 생각하니,
헌동은 왠지 마음이 아렸다.
'니가... 나보다도 낫다.'
- 형님, 근데 강아지 키울줄 아세요?
- 너는 나를 오삭둥이로 보냐? 키우면 키우는거지 뭐.
탕구는 하하 웃더니,
강아지가 사람쓰는 샴푸를 써서 피부병이 생긴것 같다고 했다.
병원에 데리고 가보란다.
머쓱해진 헌동, 다음날 근처 동물 병원을 찾았다.
옥동자를 닮은 민머리 수의사가 능글스럽게 웃고 있다.
- 오우 오우 ~ 강아지가 털이 많이 길었네요. 어이구 배부른거좀 봐.
- 엥? 네?
뜻밖의 사실을 알게된 헌동.
강아지가 임신을 했단다.
길거리를 혼자 헤매던 그 와중에 연애를 한 것 같다.
이미 만삭이라는 말에 헌동은 놀란다.
'그것도 모르고 그리 부려 먹었으니...'
- 네, 일단 언제 출산할지 모르니까, 바쁘시면 병원에 맡겨두고 가세요.
강아지를 맡겨두고 집에 돌아온 헌동은 왠지 또 쓸쓸하다.
티비를 보다가 꺼버리고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강아지의 새끼라...거참...'
그리고 이내 전화기를 든다.
- 어이~ 미애씨 뭐해 바빠?
- 아뇨. 왜 그러시죠?
- 아, 혹시 강아지 좋아해?
- 그저 그래요.
- 한마리 줄까?
- 왜죠.
무.. 무미건조한 계집 같으니라구...
- 하하, 별뜻없어, 우리집 강아지가 곧 새끼를 낳는데 말야.
나 혼자서 다 못키울거 같아서 말야.
- 생각해 볼께요.
- 그래 그래, 주위에 강아지 키울사람 있으면 말좀 해줘.
몇마리나 태어 날진 모르겠지만 말야,
참고로 태어나는 새끼들은 믹스견일 확률이 커.
전화를 끊고 ,
헌동은 창밖을 내다봤다.
연일 이어진 꽃샘추위로 사람들은 여전히 두꺼운 외투를 여미고 다닌다.
아직 이렇게 추운계절,
곧 돌아올 '가족'이 있음에 안도하는 헌동.
담배를 하나 꺼내 물다가 다시 집어 넣는다.
'그래, 이젠 진짜 끊어야지.'
다음날도 칼퇴근을 미리 미리 준비하는 헌동,
주위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게 된지 오래다.
물론 이 부서 사람들도 다 비슷한 처지니까.
- 요~ 오~ 오늘은 카레를 먹을까~ 5분카레~
- 과장님.
흥얼 흥얼 사무실 밖으로 나서는 헌동을 불러세우는 유미애.
- 어 왜?
- 저, 키울게요. 나중에 꼭 한마리 주세요.
- 어, 그래 그래, 약속한거다. 딴말하기 없기.
- 네. 근데, 어떻게 생겼어요? 견종이 뭐에요?
- 아~ 그냥, 하얗게, 아마 말티즈?
- 뭐에요. 사진 없어요?
- 하하. 없어.
어이없음이 묻어나는 무표정의 유미애.
- 아아, 그러지 말구 나 따라가자~ 지금 안그래도 동물병원 들리려던 참이야.
곧 출산이라 맡겨놨거든~ 혹시알어~ 오늘 생명 탄생의 신비를 보게 될지?
유미애는 몇번 끄덕 끄덕 거리더니 헌동을 따라 나섰다.
헌동은 유미애와 같이 병원으로 가는동안,
뽀삐의 재주와 빠른눈치등등을 마치 군대 무용담 처럼 자랑했다.
'앙증맞고' '귀엽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뽀삐를 묘사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침이 마르게 떠벌렸다.
- 그럼! 그럼! 이미 내가 계단을 올라올때 부터 짖고 있더라니까!
나 오는줄 알고! 캬~ 그래서 내가, 뽀삐야~ 원룸에서 시끄러우면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짖으면 안돼~ 했더니!
글쎄 그걸 알아 먹고 안짖는거야!
두고봐, 틀림없이 뽀삐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난 강아지들은 똑똑할테니까.
- 그렇군요.
- ...
아오.. 김빠지는년.
딸랑딸랑
병원문을 열고 들어가는 헌동과 유미애
- 쿨미애씨 잠깐 기다려봐.
- ... 쿨...
- 저기요. 저 뽀삐강아지 주인되는 사람인데요.
별일 없나요. 출산 안했죠?
프런트엔 유미애만큼 무표정인 여자가 앉아있었다.
헌동이 말을 거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원장실로 들어간다.
유미애는 발을 딱 모으고 올곧이 서있다.
흐트러짐 같은게 안보인다.
그런 유미애를 보며 왠지모를 답답함이 전해지는 헌동.
- 아 미애씨는 남자 친...
헌동이 미애에게 말을 거는 와중에
옥동자 수의사가 슬그머니 나온다.
얼굴엔 전보다 더 어색하고 느끼한 미소를 띠고 있다
- 아이고 아이고, 오셨어요.
- 아~네 선생님, 저희 강아지 언제쯤 출산 할까요? 지금 볼수 있나요?
- 아... 실은 말이죠....
병원 바깥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설익은 봄볕에 이르게 피어난 꽃잎들이
애초롭게도, 꽃샘추위의 한가운데서 흩날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빨리 종종걸음을 옮겨,
각자의 집, 각자의 보금자리, 그리고 가족의 품을 찾아가고 있었다.
학업과 업무와, 경쟁에 지친 이들은,
더 상처입고, 더 지칠새라
그리 서둘러 가족의 품을 찾아가는데,
지난 겨울 목련송이 처럼 헌동을 찾아왔던 강아지 뽀삐는
바람이 그렇게 매섭게도 불던 어느 봄날,
헌동의 품을 떠나 벚꽃처럼 흩날리고 말았다.
남은 '가족'을 또 떠나보내게 된 한 중년남자는
흰 타일이 깔린 서늘한 동물병원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지켜보며,
소리없이, 올곧한 눈물을 흘리던 한 여자가 있었다.
치명적이게 차가운 봄 날이었다.
7-4.독거
- 알겠어. 미안해. 그래. 오늘 부쳐불게. 그래. 미안해.
헌동은 미경과 통화 하는 중이다.
양육비 입금이 하루만 늦어져도 전화가 온다.
회사 사정때문에 월급이 자꾸 늦게 나와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퉁명스럽게 끊는 전처지만 헌동은 이해한다.
퇴근길,
어김없이 들려있는 소주 두병.
요즘 부쩍 술을 많이 마신다.
담배도 많이 피운다.
끊기가 힘든것 같다.
얼마전엔 부모님이 다녀가셨다.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냐며 핀잔을 주셨다.
걱정말라고 말씀드렸다.
전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다고.
강아지 뽀삐가 하늘나라로 떠난 그날 저녁,
헌동은 곱게 싼 그 주검을 인근 야산에 묻으며
이제 정말 혼자가 된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어두운 밤, 그 강아지와 다시 재회했던 그때 그전보다 더.
친구들이 가끔씩 놀러오긴 하지만
다들 가정에 묶여있는 몸들,
오래 머물러 있진 않는다.
이젠 홀로 술에 취해 잠이드는게 너무 익숙하다.
- 술..이... 한.. 잔 생각...나...는 밤... 같이....
취해서 눈을 감은채로 어떤노래 라도 부르면,
금새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뜬다.
처음엔 아침도 잘 챙겨 먹었는데
요새는 그냥 공복에 물한잔 먹고, 담배한대 피우고 출근한다.
아는 지인들 사이에는 이미 이혼남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중매가 들어온다.
중매랄것도 별거 없다.
그냥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돌싱여자를 만나는 거다.
대부분 애가 줄줄이 딸려 있고, 혼자 애들 키우기 힘들어
혼인시장에 다시 나온 아줌마들이다.
들어오는 중매에 두어번 나가보고 그 후로는 거절했다.
헌동은 아직 별 흥미가 없다.
여자, 라는 존재에.
하지만 외롭다.
집에 혼자 돌아가면 그 발걸음이 외롭고,
문을 열면 엄습해오는 그 집냄새가 외롭고,
밥을 먹으면 오물오물 하고 삼킬때의 그 목넘김이 외롭고,
화장실에서 거울 보며 양치 할때 그 칫솔질이 외롭고,
끝내 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그게 가장 외롭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헌동.
아들을 만나는것.
지금으로써는 헌동의 유일한 낙이다.
저기 멀리 아들이 달려온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것 같다.
- 아~~빠~~
- 해철아 뛰지마~~
- 나 피자! 피자!
- 그래 피자 먹으러 가자~
비록 부모가 이혼을 했지만, 아들은 아직 많이 밝다.
이전 보다 말수가 약간 줄어든것 같긴 하지만,
항상 웃고다니는 아들을 보니 약간은 마음이 놓인다.
- 그래서, 그래서 ? 뽀삐가? 아빠 앞에 딱 나타난거야?
- 응 그랬다니까~ 쩌~ 멀리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막 뛰어오는거야 글쎄!
- 흐응... 뽀삐... 보고 싶다.
- ... 그, 그래? 좋은 사람이 데리고 갔을거야.
아들에겐 거짓말을 했다.
강아지 뽀삐를 길에서 잠깐 마주치긴 했는데,
잠깐 인사를 하는것 같더니만 금새 다른사람을 따라 가버렸다고.
사실대로 새끼를 낳던 도중에 죽었다고 말해봤자,
납득하려 들지 않을것이 뻔하니까.
말티즈 자체가 이미 작은견종인데,
뽀삐는 사람들 취향에 맞게 더 작게 개량된 경우라
원래같으면 교배를 권할 말한 상태가 아니었단다.
그 기름떡진 민머리 수의사 말로는.
- 니 엄마는... 잘 지내니?
- 응? 엄마? 왜 보고싶어?
- 아, 아니 하하하 그건 아니고.
- 음... 엄마는 ... 남자친구 생긴거 같애... 응
해철이 우물우물 피자를 씹으며 말한다.
- 남자친구?
끄덕 거리는 해철.
'엄청나게 빨리도 사귀는 구나.. 이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헌동도 이미 마음이 떠나긴 했지만,
전처의 광속같은 갈아타기에 왠지모를 야속함을 느낀다.
콜라를 한모금 마시는 헌동.
아들은 그걸 보더니,
- 아빠! 히히 손떨어 덜덜~
헌동은 얼른 손을 내리고 어색하게 웃는다.
- 하하, 좀 춥나보네? 하하
요즘들어 술을 입에 달고 살긴 하지만,
자식놈 앞에서 술마시고 취한걸 보여준적은 없었다.
그런걸 보여주는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다짐을 했었다.
헌동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들 녀석을 바래다 주고 집으로 돌아가는길,
어느 애견? 앞에 멈춰선 헌동은,
유심힌지 무심힌지 모르게 가게 안쪽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러고는 이내 시선을 거둬내 발걸음을 집쪽으로 재촉한다.
- 그래, 당분간은 혼자도 좋지.
이 혼자라는것은 얼마나 독단적이면서도 편리한가.
헌동의 걸음은 조금씩 유쾌해진다.
요호~
요호~
요호~
혼자라서 즐겁다!
즐거워서 혼자다!
8-1. 잘 놀다 갑니다.
헌동은 몇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아직 여름도 안왔지만,
이번 휴가때는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어 미리 계획을 짜는 중이다.
이렇게 매일 매일 쳇바퀴만 돌다가는
정말 알콜의존증에 우울증까지 더해져 폐인이 될것 같다.
- 음.. 음... 바닷가... 음.. 산행? 음... 아니면 해외로 나갈까?
혼자가는 여행이 되겠지만,
그래서 좀 적적하긴 하겠지만,
어디라도 가야 될것같다.
'산이나, 바다 아니면 에메랄드 빛 해변이 있는 멀리 타국도 좋고.'
사실 헌동은 오묘하게 기분이 좋다.
이번 여름휴가비가 자기 주머니로 바로 들어오니까 말이다.
이젠 휴가비가 나와도, 낑낑대면서
이걸 어떻게 나눠쓰지, 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헌동은 지금
혼자니까.
이혼 후 생긴 몇가지 장점중에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돈,
이 돈 관리의 융통범위가 굉장히 넓어진거다.
차는 없으니, 집세만 내면 되고,
보험료는 혼자분만 내면 되니 부담도 덜하고,
아무튼 온갖 지출이 확줄어드는게 눈에 보인다.
전처한테 보내주는 양육비를 빼고 나면
지출은 어떻게 하든 헌동 마음대로!
이혼하고 다른건 모르겠는데,
돈쓰는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헌동도 처음엔 실감을 못했다.
외로움을 잊으려 소주 두병, 컵라면 하나로 궁상 떨던 어느날,
그 거친 소주의 목넘김을 견뎌가며 인상을 잔뜩 찡그리던 헌동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싸구려 술, 싸구려 안주를 먹고 있는거지?'
'이제 좋은거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거 아닌가?'
'돈, 아끼면 뭐해, 어차피 이렇게 살다 가는거'
'그... 그렇지? 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수 있는거지?'
'난...'
왠지 코앞에 있는 녹빛깔이 서글픈 소주병을,
좀더 근사한 문양이 새겨진 이국의 술병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길로 집근처에 있는 양주 바(Bar)를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망설임 없이,
메뉴판에서 유난히 눈에 띄던 발롱타인 21년산을 주문했다.
가게로 들어오는 헌동의 군내나는 행색을 보고
처음엔 모른척 눈을 돌리던 야시꼬리한 차림의 바텐더들이,
하나 둘씩 헌동 앞에 마킹을 붙기 시작했고,
헌동은 이에 마음껏 술을 베풀었다.
너도 마셔라.
그래 너도 마셔라.
부어라 마셔라, 하며,
헌동은 유부남 시절 때의 석달치 용돈이 될 액수를
그 하룻밤만에 써버렸다.
오빵~ 잘가~, 하고 인사하는 이쁜이들을 뒤로한채,
가게를 유유히 빠져 나오던 헌동은 생각했다.
'좋... 좋은데?'
얼굴에 웃음이 번져가는 헌동.
집으로 돌아 오는 그의 표정엔 여러가지 감정이 회오리처럼 뒤섞인듯 했다.
슬프지만 기쁘게, 나쁘지만 좋게, 무겁지만 가볍게 한발 한발 집으로 향했다.
아직 선선했던 밤의 입김을 일부러 더 호호 불어봤다.
지난 기억에 속삭이듯.
열심히 살아왔지만, 가정을 지키지 못했고
노력했지만, 인정 받지 못했고
사랑했지만, 사랑받지 못했던
그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며
헌동은 눈시울을 적시면서도,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어쩌면 사회통념이 한 남자에게 뒤짚어 씌웠을지 모를
결혼이라는 굴레와 책임감의 인과율.
마치 가상세계를 허우적 거리던 어떤한 남자가
빨간약을 먹고 태초의 카오스에 압도당하듯,
술에 취한 헌동은 그렇게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울면서 웃으며 밤거리를 활보했다.
하나 하나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
데이트 하다가 돈이 부족하면 어떡하지 하고 고민하던 자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생활비를 주고, 이것저것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도
쉽게 안모이던 돈을 고민하던 자신
사기를 당한뒤 어떻게든 가정을 지켜보려 발버둥 치던,
가장의 모습을 한 자신.
결국 돈
돈
돈
이제는 다, 내꺼다.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만원짜리 한장 마음대로 못쓰고
마누라의 감시를 타이트 하게 받던 유부남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수많은 부조리와 싸웠는가.
결혼할때 지원받은건 생각안하고
우리 부모님 용돈좀 더 드렸다고, 그걸로 트집잡아
뭐라 하질 않나,
형네 조카 생일이라 별 생각 없이 상품권하나 줬는데,
왜 몰래 주느냐고,
자기도 친정 부모님 여행보내드려야 겠다고 바락바락 우기질 않나,
지 남편입는건 티셔츠를 하나사도 지하 가판대 이월상품 대충 집어오면서
지가 입는건 한벌을 사도 겁나 따져요.
또...
'하.. 이제 와서 떠올려봐야 뭐하겠나'
다시 갑갑한 생각이 들던 헌동은,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무거워 지려던 표정을 애써 요리 조리 움직여 활짝 웃어본다.
'그래! 이제 와서 떠올려 봐야 뭐하겠나!'
'지금은 이렇게 좋은데!'
경쾌한 걸음을 옮기는 헌동.
뭔가 알게 된듯한 헌동.
마음에 생긴 여백에 뭔가를 쓰고 있는 헌동.
그날 밤의 헌동은 마음한켠에 이렇게 썼을거다.
'이젠 아프지 않다!'
그 후부터 헌동은 일부러 더 여유를 부렸다.
자주는 아니지만, 전보다 부모님 용돈도 더 두둑히 드리고
얼마전에는 둘째를 본 형내외에게 명품 쇼핑몰 상품권도 선물해줬다.
'이래도 크게 부담이 없으니!'
노바디 캔 터치.
헌동은 이번 여름 휴가를 푸켓에서 보내기로 했다.
어쩌면 생애 몇번 안남은 해외여행이 되겠지.
마지막이 될수도 있고 말야.
하지만, 후회는 없을것 같다.
이렇게 아빠 김헌동, 남편 김헌동이 아닌
나, 김헌동으로 살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빛처럼 다가온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헌동.
요즘은 집에서 외국맥주나, 보드카, 진, 럼주같은걸 마신다.
가끔 좋은 술을 마시고 싶을때나 흥이 필요할땐
양주바나, 노래방 솔플을 즐기기도 하고.
오늘의 메뉴는 진토닉에 연어구이!
-그럼 그럼! 이정도는 먹어줘야지!
룰루 랄라, 마트를 빠져나오는 헌동.
그리고 털레 털레 슬리퍼를 끌며 집으로 향하는 길.
조금씩 미지근해 지는 봄바람을 즐기고 있는데,
뜻밖의 이벤트가 헌동에게 날아들었다.
"까톡"
'파란불: 잘지내?'
전처, 홍미경이다.
8-2. 파란불
헌동은 지체없이 전화를 걸었다.
- 어 왜? 엊그제 돈 부쳐줬는데?
- 아,, 아니 그냥, 뭐하고 지내나 싶어서.
뭐야 갑자기, 하고 생각하는 헌동.
- 나야 뭐 그냥 그래.
- 그래? 요즘 바빠?
- 왜? 할말있어?
- 없진 않은데, 당신 바쁘니까...
- 아냐, 요즘 완전 칼퇴야. 말해 지금 안바쁘니까.
- 그.. 그래? 그러면 이번주 토요일 어때?
뭐야. 왜 만나자는거야.
- 그래 그럼, 일없으면 그날 저녁쯤에 전화할께.
집으로 돌아온 헌동.
연어를 구워 TV앞 탁자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진(Gin)을 열어 얼음이 담긴 컵에 콜콜콜 붓고,
탄산수도 콜콜콜,
체리주스도 콜콜콜,
입에 탁, 털어넣는다.
'하! 이혼의 맛'
헌동은 왠지 만족 스럽다.
돈 2만원도 안드는데, 이런 행복을 이나이 먹고 처음 알다니.
회한과 기쁨의 눈물이 밀려올거 같다.
이 행복이 안개처럼 옅어질까봐 되려 두렵긴 하지만.
더할 나위 없다.
더 롱런하는 행복을 위해,
술 담배를 조금씩 줄여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젠 혼자 잠드는것도 적응이 되었다.
강아지를 한마리 분양 받아올까 생각도 해봤지만,
또 죽어버리면 그 아픔을 감당 못할것 같다.
사실 헌동은 뽀삐가 죽고난뒤 ,
한동안 집에만 오면 통곡을 했다.
그 허전함을 채워주던 강아지의 반가움이 그립기도 해서 울었고,
마냥 짐승으로만 생각했던 개한마리가 자식이었음을 알게 되어 울기도 했다.
이런 '혼자'라면 이젠 견딜수 있을것 같다.
아니, 즐길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 곁에 있다가 떠나가버려 남겨진 '혼자'는
싫다고 생각하는 헌동.
요즘 헌동네 회사는 참 널널하다.
별 호재가 없나 보다.
회사 입장에서야 좋은일이 아니지만,
사원들에겐 그나마 숨돌리는 타이밍.
더욱이 디씨전자의 대표 유배지인 헌동네 부서는 분위기가 완전 나일롱이다.
- 과장님 얼굴이 누렇게 뜨셨어요.
유미애가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헌동에게 말한다.
- 유미애씨 요즘 나한테 관심있어?
- 음. 그런것 같기도 하고.
'엥?'
뭐야.. 이년..
저 모아이같은 표정을 봐서는 진의를 알수가 없다.
농담인가?
- 하하, 참. 이봐 남자친구 없어? 뭐해 그 창창한 봄날에.
- 없어요.
- 뭐야, 데이트라도 해줘?
- 네.
- .. 뭐, 뭐야.
그렇게 얼떨결에 유미애와의 토요일 저녁을 약속한 헌동.
유미애의, 토요일 저녁이 좋겠네요. 하는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 냉철함 가득한 분위기는 가끔 남자인 헌동마저 압도한다.
부탁,제의 천재 유미애...
- 하하.. 뭐야 하, 할말 있는거? 나 토요일에 잠깐 약속있거든, 누구봐야되서.
그것만 마치고 갈게.
- 누구요?
- 있어. 파란불.
이내 곧 봄이 완연히 찾아왔다.
반팔소매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솔솔솔 들어온다.
공원에 솟아 오르는 작은 분수도 이젠 차가워 보이지 않는다.
퇴근길 발걸음이 가볍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책임감이란, 곧 불행이었나.
한번 씨익 웃는 헌동.
그렇게 토요일이 찾아왔다.
헌동은 전처에게 전화를 걸어 늦은 오후에 약속을 잡았다.
전처, 홍미경은 생각보다 일찍 나와있다.
- 어~ 왠일이야~ 일찍 나왔네~
전처는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짓는것 같다.
- 으..응, 잘 지냈어?
- 응, 나야 뭐... 왜, 양육비 부족해? 좀 더 줄까?
- 아, 아냐 그런건 아니구.
- 그럼 왜?
- 응, 그냥 왠지 한번 만나서 밥이나 한끼 하고 싶더라구.
염병, 지가 살거도 아니면서...
- 그렇구나.
헌동은 무덤덤하다.
-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떨어져 살지만, 제일 가까운 부부였잖아.
미경이 어색하게 말했다.
헌동은 왠지 미경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알것만 같다.
아주오래전의 기억처럼.
- 뭐, 그렇지. 남자 친구 생겼다며? 축하해.
- 남자친구!!? 아냐, 그런거 없어!! 해철이가 또 이상한말 했나보네 하하...
요즘 회사 잘 다니구 있지?
필요이상으로 당황하는 미경.
말을 재빨리 돌리는걸 보면 있긴 있었나 보다.
지금 이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 그럼. 그렇니까 양육비를 꼬박꼬박 붙여주지. 너는 일해?
- 아니, 난 뭐 지금 어딜가서 일을 하겠어.
경력도 경력이지만 나이가... 당신은?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그래, 대화가 왠지 그쪽으로 갈거 같더라.
- 여보, 아니지, 미경아.
- 응? 왜?
어색하지만 활짝 미소 지으며 대답하는 미경.
- 당신은 나한테 파란불이야.
- 파란불? ^^
더 활짝 웃는 미경.
좋은건 줄 아니..
답답한 여편네.
- 손절이란 뜻이야.
난 이미 가정을 못지킨 한명의 패배한 가장이고,
그 패배 뒤에 느꼈어.
아무리 말못하는 짐승이지만 수년을 옆에서
마음의 위안이 되어준,
그 강아지 한마리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여자.
한번의 실수로 가정을 조각냈지만,
그래도 십수년을 그렇게 사랑해 마지 않았고,
가족을 지키려 온통 사방을 헤매다,
결국 수렁에 빠져 허우적 되던 한 남자,
그 남자에게 손한번 뻗지 않고 냉정하게 떠나버린 그 여자,
과감히 손절이라고.
이젠 별일 없으면 연락 안했으면 좋겠다.
헌동은 유미애와의 약속장소로 나왔다.
늦을까봐 헐레벌떡 뛰어왔는데,
이미 먼 발치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유미애.
- 뭐야, 오래 기다렸어?
- 네.
- 하하. 어디 갈까, 이 좋은 봄날에.
- 음. 글쎄요.
- 미애씨.
- 네?
- 우리 한강이나 갈까?
8-3. 따뜻한 봄날의 한강
해가 저무니 바람이 조금씩 선선해진다.
딱 기분 좋을 만큼이다.
헌동과 유미애는 한강변을 걷고 있다.
- 미애씨.
- 네. 말씀하세요.
- 하하 왜이렇게 사람이 경직 되어있어?
- 음. 꽤 어릴때 부터였던거 같아요.
- 하하, 모든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네...
두사람은 곧 말없이 걸었다.
헌동은 주위를 가만히 둘러보고 있다.
강변을 달리는 사람들,
잔디밭에 꼭 붙어앉아 있는 연인들.
배드민턴도치고 자전거도 타고,
바쁜 삶의 와중에서 붙잡지 못했었던 풍경들.
헌동은 대충 짐작해 본다.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즐기고 저마다의 행복속에 젖어갈때,
저기 다리위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뛰어 내렸을까.
죽음과 삶이 평화롭게 맞닿아 있는곳, 한강.
먼 훗날 저곳에서 삶을 마감하는것도 좋지 않을까?
저 교각을 묘비 삼아서 말야.
'음...'
헌동은 숨을 한번 들여 마셔본다.
- 하~ 이 도시의 밤공기가 이렇게 기분 좋았나~
- ...
말이 없는 유미애.
- 하하, 미애씨 걷는거 별로야?
- 과장님.
- 응?
유미애는 답지 않게 머뭇 머뭇 거린다.
그 차가운 표정에 작은 파도가 이는것 같다.
- 저, 과장님 때문에 부서 옮긴거에요. 과장님은 좋으신분 같아요.
처음엔 그냥 좋은 사람 같았는데, 지금은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조용 조용 말을 하지만, 목소리의 떨림이 느껴진다.
유미애의 눈은 그렁거리기 까지 한다.
- 이.. 이봐.. 난...
- 저요. 이렇게 굳어있고, 이렇게 딱딱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고,
정말 좋은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것이, 표현 못할 만큼 좋습니다.
뭐야. 이소름돋는 말투는...
유미애와 헌동은 그렇게 멈춰섰다.
유미애의 빛나는 눈이 강변의 조명만큼 밝았다.
- 하하, 미애씨, 난 방금 전처를 만나고 왔어.
미애씨 하는 말이 무슨말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난 미애씨랑 10살 차이도 넘게 나는 이혼남이야.
- 네.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때 동물병원에서 죽은 강아지를 끌어안고 우시던
과장님의 뒷모습을 보고, 지켜 주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그것 뿐이에요. 전 계획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입니다.
이것도 계획하고 나왔지만... 과장님의 마음은 계획할수가 없었네요.
헌동은 눈앞에 있는 이 말쑥한 아가씨를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어떤일을 해도 로봇처럼 감정없이 해내던 유미애.
지금처럼 이렇게 말을 길게하며 감정을 전달 한적도,
지금처럼 이렇게 결의에 차 보인적도 없었던것 같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또 그렇게 마주보고 서있었다.
아무 말없이 한참을.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생동감있게 움직이는데
두사람의 시간만 멈춘듯 했다.
그리고 헌동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애씨,
난 사실 기뻐, 유미애씨 같은 '여자'가 나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모두가 힘든일을 하기 싫어하고, 편한것만 찾고, 자기 잇속만 차리고,
의무보다는 권리에만 혈안이 되어있는데, 미애씨는 안그러잖아?
한번의 결혼 실패를 겪으면서 생각했어.
이 땅위의 남자들은 얼마나 더 낮아져야 하나.
이 땅위의 남자들은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나.
이 땅위의 남자들은 얼마나 더 희생해야 하나.
남자들의 의무는 점점 더 커져 가는데
남자가 아닌 사람들의 책임감은 더 작아져 간다고 생각했어.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하면서 자기네들 한테 유리한 것은 꼭 손에 쥐고 있는
그런 사람들, 그리고 여자들, 난 미웠어.
그리고 결심했지.
비겁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그래,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누구 남편이라서 행복한게 아니라,
내가 나라서 행복한 그런 삶을 살겠다고.
난 그렇게 그런 사람들과, 그런 현실에서 도망쳤고, 지금도 도망치고 있어.
시대가 바뀌었으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야 되지 않겠어?
나는 언젠가는 그런 사람들이 내 다음 세대에 나타날거라 생각했어.
배려와 상생의 의미를 아는 세대.
'일부'만이 아닌, '대다수'가 그런세대.
그런데 벌써 나타나고 있는것 같아.
미애씨는 내 다음 세대야.
그 병들었던 구시대의 사람들을 대신할,
건강한 다음세대.
그 세대를 꼭 멋지게 살아줘!
헌동은 유미애의 어?를 두번 두드리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의 행복을 진정으로 기원했다.
유미애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헌동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다,
나지막히 속삭였다.
- 하. 이 도시의 밤공기가 이렇게 기분 좋았나.
그리고 옅게 미소 지었다.
8-4. 상장폐지 내인생
헌동은 지금 '그 곳'으로 가고 있다.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위의 자욱 자욱을 모두 기억하려 애쓴다.
'그 곳'에 가면 친구들에게 해줄 말이 많거든.
어느날 어떤 친구가 해준말이있다.
지구 반대편에는 '파나마'라는 곳이 있단다.
그곳엔 100년도 훨씬 넘은, 엄청나게 큰 운하가 있는데,
전세계의 선박들이 끊임 없이 모여든다고 한다.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또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기 위해.
파나마운하를 거치지 않고서는
남미 최끝단,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야만 양 대양(大洋)을 오고 갈수 있는데,
남미대륙을 완전히 돌아가야되니
여간 수고롭지 않을 수 없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겠지.
맨 처음 파나마를 가로 질러 또다른 큰바다를 처음만난 선원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좀더 빨리 왔네.'하고.
그 옛날
이름 모를 인부들이 두 바다의 장벽을 뚫어낸 이 사건으로
후대의 뱃사람들은 많은 삶의 시간을 아꼈을 거다.
그리고 바다위에서 정처없이 헤매며 보냈을 시간을
어떤식으로든 더 가치있게 쓰지 않았을까?
아주 오래전, 헌동은 생각했다.
인간이 바다의 장벽을 뚫어 삶의 존귀한 순간들을 지켜낸것 처럼,
자신도 어느날 삶이 정처없이 부유할때,
또는 이제 어디 한군데 의지하기도 미안해져,
그저 체념과 침묵만을 지키며 죽음이 이끄는대로 한걸음씩 이끌려갈때
차리라 삶의 그러한 최후의 장벽에 맞서, 그것을 뚫어내고 싶다고.
헌동이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 김헌동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때부터.
최선의 행복을 쫓아 살되,
삶의 마지막을 죽음의 냄새가 드리운
작은 골방에서 쓸쓸히 마감하지 않겠다고.
죽음조차 숭고할수 있는 선택을 하겠다고.
30년전 그때,
얼굴이 뽀얗던 '다음세대'의 여자를 곁에 세워두고
담담하게 다짐했었다.
여기가 내 마지막이 될거라고.
그리고 세월이 흘러 더 웅장하게 솟은,
과거의 이 교각을 내 묘비로 삼겠다고.
하나하나 되짚어 간다.
이미 떠나버리신 부모님.
늘 아들 걱정에 노심초사 하시던 그 모습.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10년간의 결혼 생활.
웃기도 많이 웃고, 주저않기도 했었지.
그리고 나의분신, 나의아들.
사랑하는 나의아들...
모두 잘 있어.
부디 행복해.
그리고 이제,
나는 존엄하게 떠납니다.
내인생의 이정표가 되어준
이말을 인사처럼 남겨두고.
아프니까,
아프니까 결혼이다.
그간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원래 주갤에서 어그로 주작썰이나 풀던 놈이었는데,
이번엔 아주 심하게 풀었네요.
아, 그리고 외압 받은거 아니냐, 하시는 분들 계시던데요,
애초에 어투 자체를 설정에 뒀던 겁니다.
최대한 있을법한 일들을
최대한 친숙한 어체에 맞출려고 하다보니
20대인 헌동과 30대, 40대의 헌동이 말투가 조금씩 달라진거지
설렁탕먹고와서 그런건 아닙니다;;;
예를들면 20대의 보혐자가 40대의 가장 헌동으로 변하면서
좀더 무거운 어투를 쓰게 된겁니다.
시간의 경과나, 심리적 친밀감에 따라 지칭하는 바를 달리 한거죠.
여친?-마눌련-마누라-전처
개새끼-개-강아지-뽀삐
뭐 이런식으로요.
그러니 큰 오해를 안하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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