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7년간의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전쟁은 종결된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조선에서 10만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아갔다
그 중에는 조선에서 천대받던 기술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도공
그들은 조선에서 신량역천의 대접을 받았다
도공을 포로로 잡아간 일본의 많은 영주들은 조선과 달리 도공들을 귀하게 대접했다.
특히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매우 수준 높은 기술이었고 값이 비쌌다.
일본으로 간 대표적인 도공은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에 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 사로잡혀 큐슈로 건너가
현재까지도 도조(陶祖)로 불리는 이삼평이 있다. 큐슈의 아리타 마을은 지금도 도자기 마을로 유명하다.
이삼평의 사당
큐슈에 있던 이삼평은 아즈미아마에서 백자를 만드는 백령토 산지를 발견했고
일본에서 백자를 생산하는데 성공한다
1607년 조선의 선조는 일본 에도성에 쇄환사를 파견한다
두 나라가 새로 화친을 맺으려 하는 지금, 사로잡힌 남녀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어야 전대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속히 명령을 내려 즉시 쇄환하되 한 사람의 남녀도 빠뜨리지 않아야 앞으로 두 나라의 교제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해사록>1월 12일
쇄환사로 일본은 조선에 포로를 돌려보내기로 했지만 조선으로 돌아가려한 조선인은 10만여명 중 9천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도공의 경우는 많은 일본 영주들에게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음으로 조선으로 돌아가는 이가 거의 없었다
얼마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자 기술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다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있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명의 계속된 내전과 명청 교체의 혼란기에
중국에서 도자기를 구할수 없게 되자 일본에게 도자기를 대량 주문한다
이 때부터 서양에서는 일본풍의 도자기가 유통되기 시작했으며
청나라 건국 후에 청나라 생산되어 유럽으로 보내지는 도자기도 일본풍의 도자기가 많았다
일본은 유럽으로 보내지는 이 값비싼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대량 생산되는 판화를 대충 구겨 완충제로 사용했다 이 판화는
우키요에였다
일본 에도시대(江戶, 1603~1867)에 서민계층을 기반으로 발달한 풍속화. 우키요에의 ‘우키요’는 덧없는 세상, 속세를 뜻하는 말로 미인, 기녀, 광대 등 풍속을 중심 제재로 한다. 목판화를 주된 형식으로 대량 생산하여 서민의 수요를 충당했다. 근대 풍속화의 시작이라고 할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는 출판 문화의 흥행에 따라 소설 삽화에 판화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키요에 [浮世繪]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월간미술)
당시 서양의 그림의 주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데 몰두했다. 형태와 색채 모두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 했다.
비주류였던 인상파 화가들이 푸대접을 받으며 가난하게 산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다.
곰브리치는 자신의 저서 서양미술사에 인상주의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서술한다.
"19세기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눈으로 세계를 보도록 도와주었던 두가지 동맹자가 없었던들 아마도 인상주의의 승리는
그처럼 빠르고, 그처럼 철저하게 이루어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동맹자 중 하나는 사진술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채색판화였다"
도자기의 완충재로 함께 유럽에 건너간 우키요에는 서양의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고흐 - 탕기 영감의 초상
이 그림은 가난한 고흐가 물감을 외상으로 주거나 그림으로 돈을 대신 치르도록 해준 탕기 영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러준 탕기 영감의 초상이다 그 뒷면에 우키요에를 모사했다.
고흐 - 자화상
귀를 자른 것으로 유명한 그림 역시 뒷면에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다
좌) 히로시게의 가메이도의 자두나무 , 우) 고흐의 모작
좌) 히로시게의 아다케 대교에 내리는 저녁소나기 , 우) 고흐의 모작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고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암과 그림자는 없애버리고 일본 판화처럼 자유롭고
평평하게 색을 칠하려고 해." 라고 말했다.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4백여 장에 이르는 일본 판화를 수집했다.
빛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모네가 자신의 부인인 카미유를 그린 그림
모네는 작품 소재로 일본의 전통의상이나 일본풍의 기물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 벽을 일본 판화로 장식하였으며, 말년을 보낸 파리 교외 지베르니에는 일본풍의 정원을 만들어 수련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네의 대표작 피리부는 소년
유럽의 사실묘사와 우키요에의 느낌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도자기와 차(茶), 부채, 우키요에 판화 등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문화 및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그들은 일본 미술품의 장식적인 요소를 차용하는 수준에서 점차 그 양식과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표현하는 양태로까지 나아갔다.
19세기 말 유럽의 화가들 가운데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이러한 서구 미술 속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을 프랑스의 미술비평가인 필립 뷔르티(Philippe Burty)는 1872년 '자포니즘 Japonisme'이라는 용어로 정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포니즘 [Japonism]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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