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2차 침입은 일반적으로 잘 다뤄지지 않습니다. 서희의 외교적 수완이 돋보인 1차 침입 때나 귀주대첩이라는 커다란 승리를 거둔 3차 침입 때와는 달리 고려가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린 전쟁이거든요. 수도는 불타고 임금은 도망가고, 상황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군분투한 장수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한 것은 양규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란이 침입한 1010년 11월부터 1011년 1월까지의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지요. 그런데 이 3개월 간의 전공이 무시무시합니다.
거란의 황제 성종이 친히 이끄는 40만 병력(정말 이정도 병력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이 압록강을 넘었을 때, 양규는 강동 6주 중의 하나인 흥화진(현재의 의주 근방)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최전선인 만큼 거란은 전 병력을 동원해 이곳을 공격했지요.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흥화진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종은 회유책을 씁니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정변을 일으켜 임금을 폐한 강조를 잡으러 왔을 뿐이니, 흥화진을 넘기고 항복하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겠다고 한 것이지요. 이때 비단과 은도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규 휘하의 장수들은 끝끝내 성종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무력도 회유책도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성종은 어쩔 수 없이 일부 병력을 이곳에 남겨 흥화진을 포위한 뒤 주력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지요.
양규의 진짜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양규는 700기 가량의 결사대와 함께 거란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거란군에게 점령당한 곽주성을 탈환하지요. 당시 곽주성에는 6천의 병력이 주둔 중이었다고 하는데, 양규가 어떤 계책을 써서 성을 탈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곽주성 탈환이 중요합니다. 당시 거란군은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병력을 궤멸시키고 서경성(평양)을 공략 중이었습니다. 병력차도 크고 고려군의 사기도 떨어진 상태이니만큼 충분한 시간만 있었다면 서경성은 거란의 손아귀에 떨어졌겠지요.
그러나 양규가 곽주성을 탈환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 보급선을 하나 둘씩 끊어버리니 거란군은 당장 곤란해집니다. 서경성의 방어는 여전히 단단하고 군량은 떨어져가고...
여기서 성종은 결단을 내립니다. 서경성도 지나치고 곧바로 개경으로 진군한다는 것이지요. 후방을 완전히 포기하고 400km 이상의 고립을 감수한 것이지만, 고려의 주력 병력은 이미 궤멸된 상태니 만큼 야전에서 거란군의 진군을 막을 것은 없었습니다. 결국 고려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몽진을 결정하지요.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하고 현종을 뒤쫓았지만 상황이 여의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말마따나 군대는 잘 먹어야 진군하는 법입니다. 대규모 병력인 만큼 전투에 질 리도 없겠다, 후방이 멀쩡했다면 군량을 보급 받으면서 남쪽으로 쭉쭉 진군할 수 있었겠지만, 양규의 활약 때문에 후방보급이 불가능했고 현지에서 약탈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요. 다 이겨놓은 싸움인데 체크메이트를 외치지 못하는 겁니다.
거란군은 현종의 뒤를 수십리 바깥까지 쫓았지만 더 이상 굶주림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성종은 회군을 결정하지요. 물론 그냥 얌전히 돌아가는 건 아니고 고려인 수만을 납치해서 포로로 끌고 갑니다.
퇴각하는 거란군이 청천강 유역에 진입했을 때부터 양규는 귀주에 주둔 중인 김숙흥의 부대와 함께 거란군을 괴롭힙니다. 병력차가 압도적인 만큼 정면대결을 한 건 아니고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펼친 거지요. 물론 양규의 목적은 지친 거란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고려인들을 구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투 한 번 할 때마다 최소 1천 이상의 고려인들을 구출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맹활약을 하던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는 애전(곽주 근처로 추정)이란 곳에서 성종의 본대와 마주합니다. 정찰의 실수로 마주친 것인지, 아니면 최대한 많은 고려인을 구출하기 위해 일부러 적진 한 가운데로 뛰어든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여하튼 성종의 친위대인만큼 병력도 많았고 훈련도도 높은 거란군의 정예들이었지요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는 거란군의 대병력에 포위당합니다. 패배는 기정사실과도 같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지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분전을 펼치던 고려군은 결국 전멸합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양규는 아무런 지원도 없이 자체병력만으로 일곱 번을 싸워 수많은 적의 목을 베고 3만의 고려인 포로를 구출했다고 합니다. 비록 최후의 결전 때 모두 전사했지만 거란은 그 이상의 피해를 입어야했지요.
양규는 사후 '삼한후벽상공신'의 칭호를 받는데, 이건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칭호입니다. 양규를 건국공신급으로 대우한 것이지요, 그의 아들인 양대춘은 훗날 재상의 자리까지 오르고 후손들은 대대로 대우받았다고 합니다.
출처 : 5분 한국사 이야기 (카카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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