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 서구의 침탈이 점점 강화되는 가운데,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구의 근대식 군대를 상대로 본격적으로 싸운 전투입니다. 비록 수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고전을 했지만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들을 몰아내는데는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요 전투는 강화도 내륙의 거점에서 벌어졌고 정작 바다에서의 방어를 담당해야하는 조선 수군이 직접 요격에 나서는 등의 역할은 없었습니다.
그보다도 당시 제너럴 셔먼호를 비롯하여 이양선의 출몰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음에도 조선 수군의 존재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조선 수군이 이들을 상대로 싸운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었겠느냐, 라는 회의감은 있지만 아예 존재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에는 의문이 있을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조선 후기의 군사제도를 다룬 책이나 논문 역시 대부분 육군에 포커스를 두고 있고 수군에 대한 부분은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이는 학계에서 조선 수군에 대한 관심사가 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수군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조선 수군은 뭘 하고 있었는가. 임진왜란은 수군의 활약이 가장 컸다고 해도 좋을 만큼 조선 수군의 전력과 비중은 막강했음에도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쇠락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17세기~18세기에 오면 중국과 인접한 서해안쪽으로 정체 불명의 선박들이 출몰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조선은 이를 "황당선(荒唐船)"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죄다 서양의 범선은 아니며 대부분은 중국쪽 선박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들의 출몰은 조선에게는 중대한 위협이었기에 역대 임금들은 지방관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 것과 해안선의 방비, 수군의 강화를 지시하였습니다. 또한 숙종 10년에는 황해도에 "해서별기위"라는 기병부대를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유사시 신속하게 출동하여 적을 저지하기 위한 일종의 특별 기동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병으로는 광대한 해안선을 방비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 시기 조선의 해양방어정책은 원칙적으로 육군을 중심으로 했으나 수군 역시 임진왜란 때와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수군 교리는 남해안 일대에서 수군의 주력을 집중시키고 일본군의 대규모 침입에 대응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소규모 적선의 침입에는 대응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다 서해안 쪽으로 황당선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여 해안가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신속하게 추격하거나 영해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서는 수군의 전반적인 개편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양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 수군진이 새로이 설치되고 군선도 상시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군함의 선체 역시 이전에 비하여 좀 더 대형화되고 수군의 교리 역시 조선의 안보적 환경이 변화한 것을 반영하여 대형함 외에도 속도가 빠른 중소형함을 대량 건조하여 전술적 유연성과 대응 능력을 높이는 등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경기도의 경우, 수군진만 있을 뿐 단 한척의 군선도 배치되지 않았지만 영조 말기에 오면 거북선 1척을 포함하여 54척에 달하는 대소군선이 배치될 정도입니다. 또한 이와 별도로, 남해안에서도 일본 선박이 꾸준이 출몰하고 있는데다 일본에 대한 경계 또한 늦출 수는 없었기에 통영에 있는 삼도수군 통제영의 병력을 확충하고 남해안 일대의 수군진을 개편 증설했으며 한산도, 거제도 등 전략적 요충지의 방비를 강화하였습니다.
< 영조 시기 지역별 군선의 배치 현황>
실제로 영조 24년(1748년) 11월 6일 황해수사가 "황당선 6척이 오차포 앞바다에 출몰하여 오차포 첨사가 군선을 출동시켜 포를 쏘아 이들을 즉시 쫓아내었다"라고 보고하는 등, 이 시기에는 조선 수군이 "이순신의 후손"답게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조선의 영해를 엄중히 방비하여 이국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현종부터 숙종, 영조 시기까지는 군주의 강한 의지와 리더쉽 아래 조선의 국방은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문제는 정작 양이선이 본격적으로 출몰하여 조선을 위협하게 되는 19세기에 오면 오히려 군사력이 쇠락하게 된다는 것이죠. 첫번째는 재정적인 문제. 영조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균역법을 실시하고 1인당 군포 2필을 절반인 1필로 감축하였습니다. 이는 당장 군포에 의존하던 지방 아문들에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세입 세수가 일원화되어 있어 국세청에서 세수를 확보하고 기획 재정부가 국회의 심의를 거쳐 정부부처에 나눠주지만 당시 조선의 조세구조는 지방 관아가 자기 관할지에서 세수를 거두어 들이고 부족분을 중앙에서 충당하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앙 정부의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영조도 나름대로는 부족분을 충당해주려고 이런저런 대책을 마련했으나 이것으로는 역부족이었고 병사들의 급료 지급조차 어렵게 됩니다. 특히 군포 납부에 의존하던 수군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영조가 균역법을 강행한 것은 "백골징포"라는 말이 나올 만큼 군역의 부담이 일반 백성들에게 과중했기 때문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주겠다는 선의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세수 감소에 대해서는 영조로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양반들에게도 똑같이 군포를 징수하고 힘있는 자들이 아전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군역을 면제받는 등의 행위를 막는 것이지만, 21세기인 지금도 정치인, 고위 관료들의 병역 면탈이 문제가 되는 현실에서 하물며 근세 이전의 봉건 시절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균역법의 실시와 군사비의 확보라는 이중의 딜레마 사이에서 영조와 정조는 집권 내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둔전을 확대하고 새로운 수입원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고민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개혁 없이 지엽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민생이 안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군역을 피하여 도망치는 자들이 늘어나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이중삼중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균역법은 그 취지와 상관없이 백성의 부담은 경감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군사력만 약화시킨 꼴이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정조가 죽은 뒤 군주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세도 정치가 열렸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영정조 시기에는 임금이 나름의 현실 인식과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금이 허수아비가 되고 조정의 권력이 일부 권신들에게 집중되자 관료들의 기강은 문란해졌고 현실 정치보다는 내부 정쟁과 복지부동, 윗선에 연줄 대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물론 일부 관료들 중에는 현실에 대한 위기 의식과 개혁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지만 기득 세력의 강력한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습니다.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의 군사력은 점점 약화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됩니다. 영정조 시기에는 연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면서 그런대로 군사력 유지에 노력했지만 순조 때에 오면 군사 훈련은 사실상 중지되고 각종 토목 공사 등 노역에 동원되는 것이 갈수록 빈번해졌습니다. 물론 군인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행태는 조선 전 기간 내내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에 있죠. 특히 권력층은 자신의 저택을 축조하는 사적인 일에도 함부로 군인들을 동원하여 많은 원성을 샀습니다. 백성들이 군역을 피하여 도주한 것도 실상 이런 노역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0년 가까이 건설한 군대가 하루아침에 유명무실해진 것은 아니며, 순조, 헌종 치세만 해도 적선이 침입할 경우 군선을 급파하여 이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요격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대규모 군사훈련은 못하더라도 각 아문 차원에서 병사의 점고나 무기고의 점검, 사격 훈련 등 최소한의 점검은 유지되었죠. 그러나 문제는 병장기와 달리 군선은 바다에 정기적으로 나가지 않을 경우 쉽게 노후화되어 유사시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정약용도 정조에게 이런 점을 지적하면서 "평소에는 모래 사장 위에만 있다가 어쩌다가 출동할 일이 있어서 1천명이 배에 달려들어 끌어내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으며 만약 조금 움직였다 싶으면 부서져 버렸다"라며 군선의 노후화가 매우 심각하다는 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수군의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재정적인 문제, 백성들의 고통 부담 등을 이유로 정조 말기부터 점점 군사 훈련이 축소되어 순조 때에 오면 사실상 수군 훈련은 육지에서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 순조 시기 전국의 군선 배치 현황 >
군선의 건조는 막대한 돈과 인력이 들어가는 것이므로, 이 비싼 군선을 해안가에 그냥 놀리다가 썩어 없어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조는 치세 말기 군사 훈련 대신 군선을 평시에는 조운선이나 상선으로 활용한다면 배를 놀리지 않을 것이고 유사시에는 다시 군선으로 사용하면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이는 이전에도 군선을 조운선으로 활용한 예가 있다는 것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디어 자체는 그럴싸하나 어디까지나 아이디어일 뿐, 군선과 조운선이 엄연히 다르다는 점, 군선을 조운선으로 쓸 경우 정작 급박한 상황이 터졌을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점 등 현실적인 문제점이 지적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논의만 있었을 뿐, 실제로 추진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군선을 놀리는 것에 대한 다른 대안을 제시할 방법도 없었기에 군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노후화되어 고종 치세에 오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됩니다. 또한 아편전쟁에서 영국 해군에게 완패를 당한 청나라는 조선에게 구식 군선으로 서구의 범선에 대항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면서 지상에서 적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하였습니다.
따라서 고종 치세에 오면 사실상 해양 방어는 포기한 채 해안가의 방비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경기도 해방을 맡은 경기 수사는 방어사로 품계가 격하되고 육군과 수군의 총지휘를 맡은 진무사의 휘하로 편입됩니다. 수군 역시 본연의 임무인 직접 바다로 나가서 싸우는 대신, 초계 임무와 해안 경비 등으로 축소됩니다. 군선의 일부는 조운선으로 개조되고 고종이 직접 포상하기도 했습니다.
고종 초기에 오면 이양선의 출몰은 갈수록 늘어나고 행패를 부리는 일도 점점 빈번해 졌지만, 군선의 노후화가 심하여 이양선이 해안가로 접근해도 조선 수군은 군선을 출동시켜서 이들을 쫓아내기는 커녕 해상을 초계하는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육군 역시 5천여명의 훈련도감을 비롯하여 중앙군은 전투력이 거의 유명무실하여 궁궐의 경비 정도만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지방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반적으로 군사력 공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병인양요 당시 조정은 강화도로 병력을 증원하려 했지만 관군이 유명무실하다보니 평안도와 함경도의 민간 포수들을 징발해야 했고 이들도 전투가 끝난 뒤에야 겨우 한양에 도착할 수 있어 실전에는 투입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병인, 신미양요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을 위협했던 제너럴 셔먼호의 사건처럼 적선이 강을 따라 올라와서 조선의 심장부를 위협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였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평안감사였던 박규수는 서구식 대포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토성의 설치와 신형 군선의 건조, 요해지에 방어진의 축조, 포수의 징발 등을 건의하였습니다. 또한 신헌((申櫶)은 군비 확충과 유명무실한 속오군을 대신하여 농민들을 체계적인 군사조직으로 구성하는 민보의 설치, 중앙군의 정예화 등 전반적인 국방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신헌은 병조판서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를 맡은 당대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통이었습니다. 나중에 조미수호조약 체결에도 조선의 대표로 참여합니다.
대원군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는 한편, 서구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평양 앞바다에 수장된 제너럴 셔먼호를 인양하여 조사하거나 신형 화약 무기를 제조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또한 이를 위해 중국에서 신무기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이 신형 무기이지 어차피 기술적인 한계로 재래식 화기를 개선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근본적인 대안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위정자가 나름의 문제 의식과 의지가 있다고 해도 현실적인 벽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군사력의 증강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결국 국가 체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개혁이 뒤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양반 계층의 완강한 저항을 깨뜨리고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대원군은 기득 세력과 대치하다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고종 역시 아버지 못지 않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야심차게 개혁을 추구했지만 그 역시 기득 세력의 벽에 부딪쳐 대부분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따라서 고종 치세에 해양방어론은 해안 방비를 강화하는 등 주로 육지에서 적을 저지하는 것이었고 수군을 재건하는 등의 노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수군은 배에 올라타는 대신 육지로 올라와서 해안 경비를 섰으며 출동하더라도 소형 선박을 이용한 초계 임무에 머물렀습니다. 그나마 이조차 군사력의 유명무실화로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 수군은 어쨌든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에게 용감하게 도전이라도 했지만(물론 전멸당했지만) 조선 수군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대원군과 고종은 전국의 군사력을 전반적으로 손대기보다는 자신의 친위군을 강화하는데 국한하였습니다. 운요호 사건 이후 고종이 쇄국을 포기하고 강화도 조약에 동의한 것도 더 이상 다른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 수준이 임진왜란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19세기식 근대 외교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나마 단단히 닫아두었던 빗장마저 열자말자 외세의 침입은 더욱 격화되죠.
<참고자료>
19세기 海防論 전개과정 연구 : 申櫶의 海防論을 중심으로, 최진욱, 2008년
朝鮮後期 水軍制度의 運營과 變化, 송기중, 2016년
출처 : 네이버 부흥 카페 욱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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