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짐승들과 소녀들의 이야기

대운풍 2017. 6. 3. 22:03


출처 : pikicast  - 아카이브(님)글


 개인적으로 퍼온글을 잘 올리지 않으나, 검색도중 잊지 말아야할 글이 있기에

같이 보고자 가지고 왔습니다.


콘돔을 매일같이

씻어야만 했던 소녀들




 

엄마, 아빠에게 투정 부리고 재롱부릴 꽃다운 나이에





 

        

 

낮에는 자신을 범한 짐승이 사용한 콘돔을 안팎으로 깨끗이 씻고,





 
        

  

밤에는 씻긴 콘돔을 다시 사용하는 낯선 짐승들에게 범해지는 소녀들이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은 소녀들에게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이유와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이유로 어디론가 데려갔다.





 
        

  

이 새빨간 거짓말에 설득되지 않은 소녀들은 협박, 폭력, 납치, 유괴를 하여 타지로 끌고 갔다.






 
        

   

사람이 아닌, '황군을 위한 암캐'가 될 소녀들은 회전목마를 탄 아이처럼 자꾸만,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본 소녀들은 최소 5만 명,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되며, 소녀들은 기차가 이끄는 대로 향했다.




 

   

소녀들의 도착지는 전범국이 중국과 동남아 등 각 주둔지마다 설치한 위안소.





 
           

그곳에서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인간이기를 포기한 전범국의 짐승들이었다.





 
           

소녀들이 도착한 곳에서 해야 했던 것은 공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들에게 소녀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짐승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짐승들에게 소녀들은 전범국 천황의 '하사품'이었고, 합법적 강간의 대상이었다.



 
        

   

소녀들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언젠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메마른 희망이 산산조각 나기 전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




 
           

비참하다는 표현도 사치스러운, 지옥 같은 생활의 연속.




 
        

   

매일같이 낮에는 콘돔을 씻어 소독해 말리고, 밤에는 짐승들을 보았지만 소녀들은 구렁텅이 속에서 희망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짐승들은 자유롭게 소녀들의 자유를 가져갔고,




 
           

소녀들의 성을 짐승처럼 유린했고,



 
           

매우 손쉽게 희망을 짓밟았다.



 
           

방에선 짐승들이 매일 벨트를 땅에 떨구며 요란한 쇳소리가 울렸고,



 
           

혼자 남은 소녀들은 매일 고개를 떨구며 숨죽여 울었다.




 
           

뿐만 아니라, 짐승들은 성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소녀들의 몸에 수은 등 각종 제제들을 투여하여 생식의 기능을 잃게 하면서까지 투약 효과를 지켜봤고,




 
           

의학과 전범국의 발전을 위해 목숨과 맞바꾸는 생체실험 대상으로 소녀들을 죄책감 없이 '사용'했다.




 
           

전범국의 실험체가 된 꽃들은 짐승들의 이빨에 희망의 끈이, 목숨의 끈이 잔인하고도 쉽게 뜯겼다.




 
        

   

전범국의 위안부 존속을 위해 일본 정부 못지않게 일본 기업의 역할과 도움이 컸다. 그리고 그 기업의 중심에는 무한정으로 콘돔을 납품했던 오카모토 주식회사가 있었다.




 
        

   

1개월에 수만 개의 콘돔이 필요했던 전범국을 위해 오카모토 주식회사는 공장을 24시간 가동하며 '돌격일번'이라는 콘돔을 무제한으로 찍어냈다.




 
        

   

목적과 사용처를 모두 알면서도 끊임없이 생산해냈고, 회사는 양심과 콘돔을 충성스럽게 전범국에게 오롯이 팔아 80여 년이 지난 현재 업계 1, 2위를 다투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콘돔을 찍어낸 숫자의 수만 배가 소녀의 몸에,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낙인찍혔다.




 
           

광복 후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살아돌아온 상처투성이 소녀들은 '몸을 굴린 창녀'로 취급받았고,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습지로 들어가 입을 닫고 고개 숙여 살았다.




 
        

   

전범국은 60년이 넘도록 증거가 없으니 잘못이 없다고 시종일관 주장해 고개 숙인 꽃들의 소리 없는 절규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1991년, 광복절 하루 전날인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절규의 침묵은 깨졌고, 이후 피해 소녀 238명이 고개를 들어 꽃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소녀들은 용기를 내 1992년 1월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시작, 처음에는 부끄러운 역사를 왜 들춰내냐며 현장에서 봉변도 당했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이 꽃들의 해가, 비가, 땅이 되어주었다.



 
        

   

아직도 몸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낙인과, 더 잔인하게 남아있을 마음속의 낙인을 금전적 보상이 아닌 진심 어린 '사죄'로 보상받고 싶던 소녀들.




 
        

   

꽃다운 소녀들의 어여쁜 청춘과 처참했던 평생, 여전히 지옥 같을 내일은 전범국의 진정한 사과, 소녀들의 동의 없이 얼마 전 고작 10억 엔의 보상에 팔렸다.

 

        

   

돈이 아닌 '사과'를 받고 '명예 회복'을 위해 시작한 소녀들의 수요 집회. 24년이 지난 4월 20일, 여전히 '사과'와 '명예 회복'을 위해 1227번째 집회가 열렸고




 
        

   

무궁화는 활짝 피었지만, 아직도 피지 못한 꽃을 두 손에 꼭 쥐고 이번 주 집회가 마지막이길 바라는 소녀들은 이제 44명 남았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후쿠시마 등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오카모토 주식회사 콘돔의 판매량이 시장의 1, 2위를 차지하는 한국은 여전히 그 회사의 VIP이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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