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중세의 상업혁명: 서유럽의 도약

대운풍 2017. 7. 28. 16:36

<유럽 중세 시리즈>

1. 중세 시대 유럽의 위생과 청결

2. 중세 시대 유럽의 종교적 관용




'상업혁명'(Commercial revolution)이라는 개념은 로버트 S. 로페즈(Robert S. Lopez)가 그의 저서인 『The Commercial Revolution of the Middle Ages, 950-1350』을 통해 학계에 유행시킨 것으로, 10세기로부터 14세기에 걸쳐 나타난, 주로 무역 분야에 의해 견인된 서유럽의 경제 팽창 및 발전 현상을 일컫는 개념으로, 이는 주로 북부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탈리아 상업 세력의 형성


이탈리아의 무역상들은 8~9세기부터 그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8세기 서유럽은 프랑크의 리더십 하에 안정을 찾고 있었고, 삼포농법의 발명으로 대변되는 농업 분야에서의 경제적 발전도 성취하고 있었다. 이에 서유럽 시장에서 사치품의 수요가 늘어났고, 이탈리아 무역상들이 이로부터 경제적 기회를 포착했다.


크게 볼때, 당시 지중해 무역권은 세 개의 권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서유럽을 대표하는 카롤링거 제국권, 전통적으로 선진적인 경제를 형성하고 있는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권, 그리고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지중해 남부의 아랍권이었다. 비록 남은 기록이 얼마 없긴 하지만, 초창기의 무역 네트워크가 어느 방면으로 형성되었는지는 명백해 보인다.


아드리아 해 인근 지역들은 제대로 통합되지 못한 카롤링거 제국의 지벌들 혹은 바이킹, 사라센, 마자르의 압박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훨씬 덜했다. 이에 아드리아 해 지방의 상인들이 초창기 상업혁명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고, 지중해에 위치한 세 개의 권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한편 사라센 해적이나 게르만 왕·공국들에 의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리구리아 해 인근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늦게 무역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0세기경 제노바와 피사를 필두로 한 서지중해의 도시들이 이 해역을 지배하고 있던 사라센인들에 대해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해양-군사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새로운 상업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제노바와 피사는 곡물과 원자재를 수입하기 위해 사르디니아에 무역 기지를 마련했고, 시칠리아에 진출하여 그곳의 이슬람 상인과 유대인 상인들을 경쟁에서 밀어내고 이 섬을 다시금 이탈리아 경제권으로 끌어왔다. 그리고는 남프랑스와 무슬림 지배하의 스페인, 북아프리카의 항구에 접근하였고, 마침내 동지중해로 진출하여 베네치아인들과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의 고급화


중세 전성기라 불리는 시대인 12세기와 13세기에 유럽 도시들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빠른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산업 생산 및 지역 간 교역의 증대로 귀결되었고, 이는 상업 발전의 주 유인으로 작용하였다.


새롭게 형성된 수요를 충족시키고 이로부터 상업적인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이탈리아 상인들은 동방으로부터 비단, 종이, 금속제품, 도자기, 양탄자와 같은 공산품과 아랍 중개상의 손을 거친 향신료, 향료, 향수, 약재, 설탕, 보석 등 럭셔리한 교역품들을 구매했다. 한편 경제적으로 낙후한 유럽 출신인 그들은, 근동 시장에 저가 제품들을 팔았다. 주로 털가죽, 목재, 광물과 같은 원자재나 노예가 그들이 취급하는 상품들이었다. 금속이나 무기류, 모직물과 같은 공산품들도 초기 이탈리아 상인들이 취급하는 수출품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긴 했지만, 그리 높은 비중이 아니었으며 단가가 높은 상품들도 아니었다.


이러한 양 지역간 무역 양상은 (현대적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무역수지 적자라는 문제를 유럽 지역에 야기시켰다. 초기에 유럽인들은 귀금속 광산 개발과 이슬람 선박 약탈 등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방책들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몇몇 선구적인 도시들은 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에 주목하였다.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인 루카(Lucca)는 유럽에서 최초로 실크 산업에 뛰어들었다. 오랜기간동안 비잔티움산 비단은 유럽에서 최고의 직물 중 하나로 호평받아왔고, 날개 돋힌 듯 팔렸다. 루카 공화국의 상인들과 지도부는 자국에서 비단 산업을 육성하여 제노바 상인들로부터의 수입을 대체하고자 하였다. 초창기 루카산 실크의 품질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루카의 신산업은 12세기 중엽에 이르자 뿌리를 확고하게 내리는데 성공하였다.


(14세기 루카산 비단)


12세기 말이 되자, 루카의 실크 산업은 이탈리아를 넘어 해외로 수출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실크를 팔기 위해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루카 상인들은 샹파뉴 정기시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이탈리아 상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초기 루카의 산업계는 원료인 생사를 근동에서 수입해 왔지만, 얼마 안 가 루카의 인근 농촌들이 양잠업을 도입하였고, 얼마 안 가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에서 양잠업이 행해졌다. 또한 루카의 직공들이 이주함에 따라 피렌체와 같은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도 실크 산업이 자리를 잡았다. 14세기가 되자, 이탈리아의 견직물 업자들은 무슬림 취향에 맞는 디자인의 고급 실크를 생산하여 근동 시장에 팔기 시작했고, 이는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패턴은 다른 산업 분야들에서도 발생하였다. 원래 이탈리아인들은 레반트 지방에서 고품질의 종이들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마르케 지방을 중심으로 제지 산업이 육성되었고 13세기가 되자 결국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탈리아산 종이를 레반트에 수출하게 되었고, 레반트의 종이 산업은 붕괴되었다. 1191년에 키프로스를 정복한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고, 나중에는 시칠리아에도 사탕수수 농업을 도입함으로서 이슬람권으로부터의 설탕 수입량을 크게 감소시킬 수 있었다. 15세기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품질의 유리공예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상업혁명기에 유럽 도시들이 육성한 '수입 대체 산업'들의 상당수 분야들은 '수출 산업'으로 발전하였고, 이렇게 등장한 수출 산업들은 세계 경제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결국 1400년경이 되자 지중해의 경제 질서는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인들이 유럽산 고급 상품을 비잔티움과 중동 시장에 수출했고, (여전히 중동 상인들이 향신료나 향료, 보석 등을 취급하기는 했지만) 반대로 고급 상품들이 이탈리아 상인들의 수입 품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든 대신 곡물, 건과일 등 저가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공헌자: 북부 유럽


'상업혁명'은 결코 이탈리아 상인들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알프스 너머 북부 유럽에는 독자적인 상업 네트워크를 가진 경제권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은 이탈리아 상인들에 의한 일방적 착취를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었다.


특히 저지대 남부의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 지역)와 브라방 지역은 발전된 모직물 산업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상인들도 그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취급하길 원했다. 이에 남부 유럽과 북부 유럽간 교통량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프랑스의 상퍄뉴(Champagne) 정기시가 국제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10세기경 지역 농산물 거래 시장으로 출범한 상퍄뉴 시장은 상업혁명 시대에 저지대 남부, 이탈리아 북부의 직물과 동지중해로부터 수입해 온 사치품들이 거래되는 유럽 최대의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277년에 제노바인에 의한 최초의 대서양 항해를 신호탄으로 상파뉴 정기시는 몰락했고, 이를 계기로 북부 유럽과 남부 유럽을 매개하는 상업 중심지가 상파뉴에서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들로 옮겨졌고, 이탈리아 상인들의 영불 해협 인근 지방에서의 영향력은 높아졌다. 그러나 이탈리아 상인들은 영불 해협 너머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북부 유럽은 정치적으로 중세 전성기 이탈리아의 경제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데, 십자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십자군을 레반트 지방으로 수송할만한 해양 능력을 보유한 세력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밖에 없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선박을 이용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이렇게 세워진 십자군 왕국들은 그들에 대한 지원의 대가로 상업적 특혜를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제공했다. 이는 이 시기에 이탈리아 상인들이 급성장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십자군 사업으로 돈맛을 본 이탈리아 상인들은 자금 대출을 유인으로 유럽 대륙의 귀족들을 십자군의 길로 꼬드겼다. 최초로 잉글랜드를 방문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다른 목적이 아닌 잉글랜드인 기사들과 성직자들에 대한 출정 자금 대출 제안을 목적으로 방문했을 정도였다.




결론


소위 '상업혁명'이라는 개념, 혹은 이가 가르키는 현상은 오랜기간동안 그리 중요하지 않게 다루어져 왔으나 이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유럽, 그리고 세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상업혁명은 상업, 산업 기술과 노하우 뿐만 아니라 항해술과 천문학 등 제반 기술들의 진보를 촉발했고, 이는 훗날 대항해시대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상업혁명은 조직화된 대량 생산 산업이 형성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였고, 이를 발단으로 하여 수백년간 축적된 산업적 전통은 훗날 산업혁명이라는 포텐셜을 터뜨렸다. 1000년 전, 부를 얻기 위해 바다로 나선 이탈리아의 모험 상인들의 활동이 날개짓이 되어 훗날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 것이다.




출처: 부흥 카페 유포니님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로마공화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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