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정몽주 "피눈물을 흘리며, 신이 하늘에 묻겠습니다."

대운풍 2017. 11. 8. 13:02
이 글의 출처는 PGR21 사이트 신불해님의 글 입니다.







고려 말은 극도의 정치적 대혼란기였습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외적이 셀수도 없이 쳐들어와 민생이 칼날에 유린되었고, 몽골의 침입과 그 칼로 인해 재편된 비정상적 정치 체계는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큰 모순을 낳았습니다. 무언가 고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 알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이런 복잡한 모순 중에 대표적인 부분을 하나 소개하자면... 원 나라 간섭기의 고려 사회에서 개혁을 하자고 부르짖고 폐단을 고치고자 한다면, 결과적으로 이는 자주적인 움직임으로 이해 받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일 것입니다.



실제로 고려 중후반기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몇번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폭정을 펼치던 충혜왕이 쫒겨나고 충목왕이 즉위하며 전대에 대한 반성 분위기와 더불어 개혁 논의가 벌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개혁 논의를 지원하고, 그 개혁 논의를 추진하는데 가장 큰 기반이 된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바로 원나라 황제 순제와 그 아내인 기황후였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당시 개혁파의 중추였던 왕후나 이제현 등은, 원나라 황제인 순제와 기황후의 전언을 개혁 논의의 주된 명분으로 삼았고, 개혁 논의에 반발이 있을때마다 '황제의 명령' 이라는 요소를 소위 말하는 치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논의가 지지부진해지면 직접 원나라로 가서 황제를 만나기도 했구요.


그리고 이 개혁 논의가 일단락 된것도, 기황후의 기씨 일족의 사람인 기삼만이 장형을 받고 맞아 죽자 상황이 바뀌어 반개혁파가 개혁파를 누르게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이게...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개혁파는 '원나라 황제' 의 명령을 앞세워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면서 막강한 권문세족과 맞상대 합니다. 권문세족의 기득권과 싸우고 싸우다가 그 근원까지 가다보면 나타나게 되는것은 원나라의 정동행성(征東行省)인데, 이 정동행성은 원나라 조정의 중서성에 속해 있습니다.



대체 이게 뭘까요? 원나라와 확실하게 선을 그으려고 시도를 해본 공민왕 이전에 추진된 개혁정책은 바로 그런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힘은 원나라 황실인데, 당연하게도 그 힘을 빌려서 개혁을 하려고 하다보면 결국 원나라의 조직을 건들게 됩니다.



말하자면 결국 대리점 싸움입니다. 모순의 큰 원인의 힘을 빌려 그 모순을 제거하려고 했으니,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질테니 여기선 줄이겠지만, 이런 점만 보더라도 고려 말기 정치의 복잡함과 꼬일대로 꼬인 상황의 어려움은 어느정도 전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혁을 기치로 내세운 공민왕이 겪었을 어려움이 어느정도였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차라리 적이 확실하다면야 목소리 높이고 맞서 싸우면 됩니다. 하지만 피아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안개 속에서 헤메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내부적 상황만으로도 그런데, 외적은 끊임없이 쳐들어왔습니다. 결국 공민왕은 현실에 짓눌리고 찌들렸고, 점점 패배로 나아갔습니다.






공민왕 시기 숱한 외적의 침입중에서 '일상' 의 영역에서 모든것을 마비 시켜버렸던 것은 단연 왜구의 침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가장 거대한 일격' 은 홍건적의 침입이었습니다. 무려 수십만에 달하는 홍건적이 중국에서 몰려들었던 겁니다. (사실 고려에 온 이 '수십만' 의 홍건적 조차 전체 홍건적 세력 중에선 일부에 불과했지만)



수도마저 홍건적에게 점령되는 최악의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노비들까지 당근으로 유혹하며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자란 남자는 어떻게든 끌고 와 20만이라는 군사를 긁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개경 포위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최악의 위기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거둔 대승리. 아니, 승리를 떠나서 단시간 내에 엄청난 대병력을 집결시킨 계획과 추진력 역시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세운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신돈의 정세운.




최악의 위기에서 말도 안되는 추진력이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당초 산만한 지휘 체계를 일원화 시키기 위해 정세운이 '전권' 을 일임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정세운은 공민왕에 의해 총병관이 되어 모든 명령을 통제했고, 명령을 어기는 사람은 독자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으며, 심지어 본래 일을 결정하는 기구인 도당의 권한도 뛰어넘었습니다.




...정세운이 도당()으로 가 분연히 소리를 높였다.

“나는 극히 한미한 출신으로, 나 같은 자가 재상이 되었으니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죽령(嶺) 이남의 거주자로 주상을 호종한 사람들에게는 양곡을 지급하지 않고 종군하도록 결정이 이미 내려졌는데, 지금 왜 시행되지 않는가? 국가 기강이 이와 같으니 어찌 난국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이어 유숙()에게, 자신이 내일 출정할 것이니 가서 군대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유숙이 전 부대가 이미 죽령()의 대원()에 당도해 있다고 보고하자, 정세운은, “부대가 늦게 집결하면 공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엄포를 놓자 유숙이 즉시 가서 집결을 독촉하였다.

- 고려사 정세운 열전



왕이 권천우(權天祐)를 보내어 의복과 술을 내려주자, 정세운이 그 편에 다시 아뢰었다. “장수 가운데 적을 잡았다는 보고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먼저 포상할 일을 결정하지 마소서. 저도 비록 적을 포획하더라도 보고를 감히 올려 역마를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이며 큰 전투가 끝난 후 모든 전황을 보고하여 올리겠습니다." - 고려사 정세운 열전



 소개된 이야기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정세운은 도당의 중신들을 꾸짖고 그 일원들에게도 대놓고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들도 처벌하겠다!" 고 하는 가 하면, 공민왕이 전쟁 중 공을 세운 인물에게 상을 보내자 "먼저 상 주는것을 의논하지 마시라." 는 등 그야말로 전시 총지휘관으로 행동했습니다. 이런 절대적 권한을 신하에게 위임하는 것은 왕 입장에선 대단히 위험천만 하지만, 당시 공민왕은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조치로 인해 단시간 내에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고, 최악의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 4일 뒤, 정세운은 살해당합니다.


정세운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정세운과 함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세 사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본적으론, 왕이 내린 명령서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왕이 내린 명령서는, 정세운과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 공민왕에 대해 충성 경쟁을 하던 김용의 조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김용은 거짓명령서를 그들에게 전함과 동시에, 안우에겐 평소 정세운이 그를 시기하고 다녔다는 말도 늘어놓았습니다. 이런 간계에 안우와 이방실은 정세운을 바로 죽이려고 했고, 다만 김득배만이 신중론을 이야기하며 "일단 정세운을 체포하고, 왕에게 보내 일을 처리하도록 맡기자." 고 했지만 결국 다른 원수들의 등쌀에 못 이겨 정세운을 죽이고 맙니다.



이 정세운 살해 사건은 기록상으로는 김용의 '거짓 왕명' 이지만, 실제로는 공민왕의 음모가 아니었느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공민왕이 뒤에서 손을 썻는지, 그냥 김용의 돌출 행동이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일단 확인되는 것은 공민왕이 끼어들었는지는 몰라도 조정 원로 대신들의 '묵인'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정세운이 죽은 뒤, 도당에서 대신들에게 큰소리 쳤던 일을 꺼내들어 "그때 말과 용모가 매우 거만했으니 이렇게 된 것은 마땅한 일." 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왕을 대리하고 있던 정세운을 죽인 것은 반란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일선 병사들이 아직 3원수의 손에 있었으니만큼 더더욱) 분위기는 이상야릇해졌고, 공민왕의 출두 명령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무언가 확신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렸습니다. 그러다 한달의 시간이 지난 후 결국 안우가 (반란 대신) 공민왕을 만나러 출두했지만, 그는 중문에서 문지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만약 안우가 조정에 들어와 이야기를 꺼내면 김용의 음모(인지 혹은 그 뒷사람의 음모인지는 몰라도)가 밝혀지게 됨으로, 안우는 조정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김용이 보낸 자객에게 철퇴를 얻어맞았습니다. 안우는 죽기 전에 세번이나 주머니를 흔들면서 "조금만 늦추어주어라. 부디 임금 앞에 나아가 주머니 속의 글을 드리고 죽겠다." 고 소리쳤는데, 안우의 주머니에는 김용이 전한 공민왕의 서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우는 그것을 꺼내지도 못하고 또다시 철퇴를 얻어맞고 죽었습니다.



이때 함께 오지 않았던 이방실과 김득배는 도망쳤지만 현상금이 걸렸고, 가족들이 잡혀와 지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행방이 밝혀져 결국 잡혀서 참살 되었습니다. 불과 얼마전 홍건적에 맞서 나라를 지킨 영웅들은 목이 달아난 귀신이 되었습니다. 대다수 일반 사람들에게 이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안우가 죽을 무렵)안우의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 살 남짓했는데, 저잣거리에 나가 놀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지금 우리들이 편안히 먹고 자는 것은 세 원수(元帥) 덕분이다.”라고 했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 고려사 안우, 김득배, 이방실 열전



그러나 '정치가' 들의 입장에선 달랐습니다. 앞서 말했듯 정세운이 죽을 무렵 "당연히 죽을만 했다" 는 말이 나오기도 했고, 안우가 죽을 무렵에 안우를 죽인 김용은 홍언박(洪彦博)·유탁·염제신(廉悌臣)·이암(李岩)·윤환(尹桓)·황상(黃裳)·이춘부(李春富)·김희조(金希祖) 등의 대신들과 함께 왕의 교지를 받들어 김득배, 이방실을 잡아 죽였습니다. 



즉, 이 일은 모두에게 공감대가 형성 되었던 일입니다. 김용은 자신의 라이벌을 죽였습니다. 정세운 등을 경계한 대신들은 이것을 관망했습니다. 그리고 공민왕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거나 최소한 묵인했습니다. 그 결과, 공민왕은 전쟁을 막아내었고 전쟁을 막아낸 '위험인물' 들이 자연스레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는 득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로 어떤 정치적 영향이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비록 저잣거리 사람들이 "우리가 살게 된 것은 세 원수 때문이다." 라며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 과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런 모든 일들은 그저 불가피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극도의 모럴 해저드 상태에 상태에 놓인 고려 말의 정치적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해를 집어치우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정몽주 였습니다.







당시 25살의 젊은 기린아였던 정몽주는 본래 김득배의 문생(門生) 이었습니다. 김득배가 죽자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청해 시체를 거두고 수수습했고, 스스로 글을 지어 그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정몽주가 쓴 이 제문(祭文)은, 죽은 김득배에게 바치는 제문이라기보다는, 젊은 정몽주 본인이 느낀 시대에 대한 절망감 그 자체나 마찬가자인 내용입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嗚呼皇天! 我罪伊何? 嗚呼皇天! 此何人哉? 盖聞, 福善禍淫者, 天也, 賞善罰惡者, 人也. 天人雖殊, 其理則一. 古人有言曰, ‘天定勝人, 人衆勝天.’ 天定勝人, 果何理也, 人衆勝天, 亦何理也? 往者, 紅寇闌入, 乘輿播越, 國家之命, 危如懸線. 惟公首倡大義, 遠近嚮應, 身出萬死之計, 克復三韓之業. 凡今之人, 食於斯寢於斯, 伊誰之功7)歟? 雖有其罪, 以功掩之, 可也. 罪重於功, 必使歸服其罪, 然後誅之, 可也. 柰何汗馬未乾, 凱歌未罷, 遂使泰山之功, 轉爲鋒刃之血歟? 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 吾知其忠魂壯魄, 千秋萬歲, 必飮泣於九泉之下. 嗚呼, 命也如之何, 如之何?”



아아, 황천이여! 




나의 죄가 무엇입니까? 




아아 황천이여! 




이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듣건대,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림은 하늘이며,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를 벌하는 이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하나인즉, 옛 사람들이 말하길, 




 ‘하늘이 정한 운수는 사람을 이기나, 사람들의 중론은 하늘을 이긴다.’고 말했습니다. 




허나 하늘이 정한 운수가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이치이며, 




사람들의 중론이 하늘을 이긴다는 것은 또한 어떤 이치입니까?




지난날 홍건적이 침입하여 임금이 서울을 떠나셨습니다. 국가의 운 명이 한 가닥 실 끝에 달린 것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오직 공이 먼저 대의를 앞장서 부르짖자 온 나라가 호응하였으며, 몸소 만 번을 죽을 계책을 내어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오늘날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잠자는 것이 과연 누구의 공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써 덮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만일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그 죄를 자복시킨 연후에야 베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흘린 말의 땀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고, 




그 개선의 노래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거늘, 




태산 같은 공로를 어찌하여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습니까? 




이것이, 




제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묻는 바입니다.




나는 그 충성스럽고 장한 혼백(魂魄)이 필시 아득한 후대에까지 구천(九泉)의 지하에서 눈물을 삼킬 것임을 잘 압니다.




아아, 운명이란 것이여,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이 정몽주의 비통한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글은, 일찍이 사마천이 태초의 역사 첫머리를 기록하며 자문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 혹자는 말한다. 천도(天道)는 특별히 친한 자가 없으며, 항상 선인과 함께 한다고.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선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인을 쌓고 깨끗한 행동을 하였는데도 그들은 굶어죽고 말았다. 70명의 문도 중에서 공자는 안회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안회는 굶기가 일쑤였고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이것이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여 베푸는 것이란 말인가? (....)


나는 심히 당혹감을 금치 못하겠다. 도대체 천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 사기 백이숙제 열전 中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금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답을 구합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공을 세운 정세운과 삼원수를 죽이고, 묵인하고, 방조하고, 동의한 김용 및 대신들과 공민왕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해관계를 바꾸고, 상황에 따라 가치 판단을 달리 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정몽주는 자신 역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면서도, 그 현실을 넘어 질문 합니다. 


하늘은 인간과 만물을 낳았으니 인간과 하늘은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 이 역사의 비극들은 어찌 된 것인가? 과연 하늘은 존재하는가? 우리의 이해가 잘못된 것인가? 하늘이 인간을 이긴다 하고 인간이 하늘을 이긴다 하면, 하늘과 인간은 다른가?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영원한 가치의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가치는 상대적일 뿐이고,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는 말인가?


젊은 성리학자로서 정몽주는 행위에 불변의 원칙을 가져다주고 삶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탐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게 없다면 인생이 그날 살다 대충 수습해서 살다가는 하루살이같이 부질없이 않겠습니까.


그런데 젊은 정몽주의 눈 앞에 놓인 절망적인 세상은 그렇게 조화롭지 않습니다. 이것은 늘 정당한 길을 걸어가는 법을 배운 그가 학문으로 배운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배운 학문, 그가 배운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것이 내가 피눈물으로서 하늘에 묻는 바." 라고. 



보통 그럴 경우 눈 앞에 놓인 길은 두가지 입니다. 첫번째는 그대로 현실 속에 가라앉는 겁니다. 김용, 대신들, 그리고 공민왕처럼 말입니다. 두번째는 아예 현실을 버리는 겁니다. 옛날 중국 왕조 등이 바뀌거나 대혼란이 있을때 아예 은거하는 은자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몽주는 현실 속에 가라앉지도 않았고, 현실에서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명(命) 이로구나!" 라고 탄식할 뿐입니다.



그런 정몽주가 이성계와 매우 가깝고, 일정 시점까지 오히려 이성계 일파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고려를 지키는 삶을 산것은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고려를 무너뜨려야 하는게 옳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 이치적으로 이성계에게 협력하는게 나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정몽주는, 25살의 나이에 이치에 맞지 않는 하늘에 부르짖었던 정몽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정몽주는 죽은 뒤에 후대의 성리학자로부터 오히려 조선의 건국자들보다도 더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송시열은 정몽주에 대해 "조선 문명의 창성을 열어놓아서 우리 동방 사람으로 하여금 망극한 은혜를 받게 했다." 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말하는걸 보면 기독교의 길을 열어놓은 예수의 죽음을 묘사하는것과 진배 없는 수준입니다. 말하자면 정몽주는 한 사람의 성리학자로서 완성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실 속에 가라앉거나, 현실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삶 자체가 그 가치를 그대로 지킨 한 사람.... 자기가 성리학자라고 생각하는 후대의 선비들이 그 모습을 흠모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비록 맹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지만, 자기가 살던 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에 협력하게 된 정도전의 입장은 어떨까요?



정도전의 삼봉집을 보면, 일정 시점을 기점으로 정도전이 자신이 배운 학문에 대해 회의를 품는 모습이 나옵니다. 自詠(스스로 읋다) 라는 글을 보면,



요순 같은 임금 만들려고 공부했건만 / 窮經直欲致吾君

머리 희도록 엉터리라 한탄할 줄 내 어찌 알았을까 / 童習寧知歎白紛

미친 나의 이 말은 태평성대엔 아무 소용이 없었고 / 盛代狂言竟無用

남쪽으로 쫓겨나 친구들과도 헤어졌다 / 南荒一斥離羣群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 수 없어 / 致君無術澤民難

왕통이 그랬듯 책이나 파고 지내려 했건만 / 擬向汾陰講典墳

십년 풍진에 전쟁도 너무 많아 / 十載風塵多戰伐

유생들은 영락해져서 구름처럼 흩어져버렸다 / 靑衿零落散如雲


유술이란 알고 보면 자기 일에 졸할 뿐이라 / 自知儒術拙身謀

병법에 뜻을 두어 손ㆍ오를 배웠었네 / 兵畧方師孫與吳

세월은 흘러가고 공은 끝내 못 세우니 / 歲月如流功未立

책상 위 『음부경』만 먼지 자욱하였다 / 素塵牀上廢陰符


라면서, 상당한 회의감을 보이는데, 보통 정도전의 '절명시' 로 이야기 되는 '자조' 가 나오는 시기도 대략 이 시점입니다.


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성리학) 공력을 다해 살면서

不負聖賢黃卷中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三十年來勤苦業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에 한번 취해 그만 허사가 되었네.


일전의 글에서 전 정도전의 이 '자조' 가 절명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성계를 만난 직후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했는데, 그 해석대로라면 자조라는 시의 내용은 이렇게 됩니다.



 '삽심년 동안 학문의 길을 가면서 이 나라 고려를 부흥 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 나는 이성계라는 인물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본래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은, 이 길은 아니었는데....'



조국을 위해 학문을 공부하던 유생이, 되려 다른 선택을 하면서 나라를 뒤집으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사실 이건 내 본의는 아니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하고 씁쓸해 했다는, 흡사 다크나이트 같은 묘한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회의감을 드러내며 '정몽주의 길' 을 포기한 정도전이지만, 그 중간중간에 아쉬움도 없잖아 느껴집니다.



그리고 삼봉집에서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토지 분배가 고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원망은 모두 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일로서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것인데도 신으로서는 변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일이 크고 원망이 깊은 것이야 비록 신이 모르는 것이라도 신이 어떻게 스스로 모면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신이 최원(崔源)을 중국에 보낼 때에 죽었으면 안으로 선군(先君 공민왕)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바로잡아 드렸을 것이고, 위로는 천자(天子)를 속이지 않았을 것이며, (원나라와의 관계 회복에)서명(署名)하기를 싫어하던 사건에 죽었으면 넉넉히 위신(僞辛)이 현릉(玄陵 공민왕)의 자손이 아님을 밝혔을 것이며, 오랑캐의 사신을 물리칠 때에 죽었으면 위로 군부(君父)의 악명(惡名)을 벗기고, 아래로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시군(弑君)의 죄를 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신의 몸은 비록 죽었어도 이름은 살아 있을 것이니, 어찌 영화로운 일이 아닙니까? 


─ 삼봉집, 제 7권, 습유(拾遺) 전(箋)




일단 삼봉집에 실린 이 언급은, "나는 이 일(개혁) 하면 내가 욕 먹을지 뻔히 안다. 왕(이성계) 께서는 '다 내가 앞에서 욕 먹을테니 걱정 말아라.' 라고 하지만 실제로 일이 벌어지면 나만 욕 먹을 뿐이다." 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와중의 내용이라 좀 더 과격한걸 고려해야 하겠지만, 내용을 보면 흥미로운것이 정도전 본인도 자신이 죽고 나면 어떤 말을 들을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는 점이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개혁을 원하던 고려 말의 신진 유신들은 그 마지막 갈래에서 분열되었고, 이후 희생된 정몽주는 송시열로부터 "선생이 나신 것은 고려의 행복이 아닌, 우리 조선의 행복이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나의 상징, 어떻게 보자면 조선이라는 나라, 그 문명의 상징으로 남아 '무결한 인간' 이 된 반면에, 정도전은 무덤없는 인간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정도전은 그로 인해 자기가 목적했던 바를 이루어 내었지만, 그 대신에 정몽주처럼 하나의 순결한 상징이 되기엔 너무 먼 지점까지 와버렸고, 본인도 그걸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라고 주장할때 자기가 죽었다면, 원나라에의 관계 회복을 거부해서 수난을 당한 때에 진작에 죽었다면, 그야말로 성리학자로서 완성된 삶을 살고 죽었을텐데 하고 말입니다.



정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내 몸은 죽어도 (뜻을 지킨 성리학자로서)이름은 살아있을 것이라고. 바꿔 말하면 정도전은 자기가 그때 안 죽었으니 그런 식으로 이름이 남지 않을거라는걸 어렴풋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성리학적 기반 위에 세워진 조선 왕조가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현대의 역사적 평가로는 '그때 죽지 않았기에' 정도전의 역사적 평가는 비교도 안되게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살던 정도전 본인으로서는, '몸을 희생하여 인을 이루는' 최적의 자리를 놓쳐버린 것을, 그래서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을 조금 아쉬워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메르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