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미국은 왜 중국의 핵 개발을 막지 않았나?

대운풍 2018. 12. 4. 08:52

"만약, 1960년대에 우리가 원자탄과 수소 폭탄, 인공위성을 발사하지 못했다면 중국은 대국 대열에 끼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국제적 지위를 누리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덩샤오핑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신장성 위구르 지역의 소금 호수인 뤄부포(羅布泊)에서 흰색 섬광과 함께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중국이 첫 번째 핵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국방 과학 위원회 부주임으로 핵 개발을 총괄하고 있던 장아이핑(張愛萍) 상장은 60km 떨어진 관망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직접 저우언라이에게 전화하여 핵 실험이 성공했음을 보고했다. 보고는 인민대회당에서 대기한 채 안절부절하면서 소식을 기다리던 당 지도부에게 올라갔다. 평소에 입만 열면 핵무기를 '종이 호랑이'라고 부르던 마오쩌둥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이다. 미국이나 소련이 우리가 핵 보유국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위력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와 비슷한 22kt. 이미 수소 폭탄 실험까지 한 미국이나 소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중국은 다섯 번째 핵 보유국의 반열에 들어갔다. 10월 22일 인민일보는 "미 제국주의가 핵폭탄을 보유하는 한, 중국도 보유해야 한다."라는 말로 핵무기 보유를 공식화했다. 3년 뒤인 1967년 6월 17일에는 수소 폭탄 개발에도 성공했다. 위력은 3MT에 달했다. 먼저 핵 개발에 성공했던 프랑스보다도 1년이 더 빨랐다.


(뤄부포에 있는 중국 마란(馬蘭) 핵 실험 기지. 중국은 당나라 시절 실크로드의 길목이기도 했던 이곳에서 1964년부터 1996년까지 32년 동안 총 45차례의 핵 실험을 실시했으며 이로 인하여 영구적인 오염 지대가 되었다. 게다가 중국 특유의 인명 경시와 방사능에 대한 인식 부재로 100만명 이상의 기술자와 군인, 인근 주민들이 피폭되어 그중에서 75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중국의 핵 실험 성공은 세계적인 핵 도미노를 부추겼다. 중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변변한 기술력도 없으며 낙후된 나라도 핵을 만들 수 있다면 더 부유한 나라들이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중국의 숙적인 인도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남한과 일본, 대만이 그 뒤를 따를 참이었다.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중동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너도 나도 핵 개발에 뛰어들면서 핵 전쟁의 위기가 한층 고조되자 결국 미국과 소련의 주도로 1969년 6월 12일 핵 확산 금지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른바 NPT 체제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핵무기는 꾸준히 확산되었다. 인도와 이스라엘, 파키스탄, 남아공이 핵무기를 개발했다. 2006년 10월 9일에는 북한이 지하 핵 실험을 실시하고 공식적으로 핵 보유를 선언했다. 이란 역시 핵 개발을 놓고 여전히 미국과 지루한 힘 겨루기를 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독재 국가일수록 핵무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군사적인 가치보다도 자국 국민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독재자의 치적에 활용하고 내부 결속을 하겠다는 정치적인 목적이 더 크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물론이고 당장 위협을 받는 주변국들 역시 이를 지켜볼 리 없으므로 호된 제재를 감수해야 하지만, 독재자들은 제재로 인한 고통보다 국민들을 결속시켜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익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또한 원자력의 평화적인 이용과 무기화는 종이 한 장 차이이기에 국제 사회가 그 사실을 파악하고 제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튼 중국이 핵 실험에 성공한 날, 미국 정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존슨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중국의 이번 핵 실험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을 결코 등한시하지는 않겠다."라고 했다. 또한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거나 비난을 하는 대신, "이것이 전쟁이 임박했다고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고 하면서 중국 핵 실험의 의미를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오히려 남한과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동맹국들이 이를 빌미로 삼아서 독자적인 핵 무장에 나설까 단속을 더욱 강화했다.


중국이 핵 개발에 나서는 동안 미국은 사실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방관했다. 과연 미국은 중국의 핵 개발 사실을 몰랐던 걸까? 또는 그게 미국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1964년에만 해도 중국은 엄연히 미국의 주적이었다. 비록 스탈린이 죽은 뒤 중국과 소련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곧 중국이 미국의 친구라는 의미가 될 수는 없었다. 매번 UN 안보리에서 대만을 내쫓고 그 자리에 중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련이지 미국이 아니었다. 중국은 입만 열면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맹비난하고 있었다. 베트남을 놓고 중국과 소련은 서로 경쟁적으로 북베트남을 원조했다. 미국이 대만을 원조하고 베트남 전쟁에 끼어든 것도 이들 국가가 미국에게 그만한 경제적, 전략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하고 닉슨의 방중이 성사되기까지는 적어도 7년은 더 기다려야 했다. 중국이 당장 미국 본토에 핵무기를 투하할 수는 없어도 남한과 대만, 일본을 공격할 수는 있었다. 또한 앞으로 핵 기술을 더욱 강화하고 탄도 미사일 개발에도 성공한다면 언젠가 미국을 직접 위협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따라서 미국 입장에서도 중국의 핵 개발은 충분히 위협적이었고 마땅히 막아야 할 일이었다.


한국 전쟁 내내 트루먼과 아이젠하워는 핵 공갈로 중국을 압박했다. 핵무기를 정말로 쓸 계획은 없었지만 전세가 불리하거나 휴전 회담이 지지부진할 때마다 핵무기를 쓰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타이완 위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이 대륙에 인접한 대만 측 섬들을 줄줄이 점령하고 진먼다오와 마쭈도를 위협하자 대만에 B-52 폭격기를 배치했다. 특히 1958년 8월 23일 진먼다오 포격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6척의 항공모함을 비롯한 7함대를 대만 해협에 전개하고 핵 사용까지 언급했다. 마오쩌둥은 겉으로는 핵무기를 종이 호랑이라고 부르면서 "핵 전쟁으로 중국인이 3억 명쯤 죽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고 온갖 허세를 부리면서도 막상 뒤로는 소련더러 중국의 핵 개발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동유럽의 바르사뱌 조약 국가들처럼 소련의 핵 우산에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핵 무장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중국은 장제스 시절인 1930년대부터 중국 물리학회를 중심으로 이미 핵 물리학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많은 유학생들이 미국과 서유럽으로 파견되어 선진 기술을 배우고 현지에서 정착한 인재들도 많이 있었다. 1940년대 말 미국을 유학 중이던 중국인 학생은 6,200명에 달했고 80% 이상이 이공 계통이었다. 그중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대륙을 점령한 중공은 이들에게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부추기며 귀국을 종용하는 한편, 소련과의 기술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3년 2월에는 26명의 과학자들이 소련에 파견되기도 했다.


1955년 1월 15일 확대 중앙 비서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핵 물리학자들을 초빙하여 강연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핵무기 개발을 결정했다. 핵 개발 프로젝트의 암호명은 "02"였다. 정치국 산하에 3인회가 구성되었다. 천윈과 네룽전, 보이보 세 명이었다. 각각 경제와 군부, 행정을 담당하는 최고 수장들이었다. 국무원 산하의 제3국이 신장과 후난의 우라늄 탐사를 맡고 건설 기술국과 중국 과학원은 원자로와 가속기 연구를 맡았다. 1956년 11월 16일에는 국무원 산하에 제3기계 건설부가 조직되어 핵무기 프로젝트의 연구와 우라늄 농축, 무기 제조, 핵 실험 기지 건설을 총괄했다. 중국에서 핵 개발은 군부가 주도했던 서방이나 NKVD의 수장인 베리야가 맡았던 소련과는 달리, 마오쩌둥 직속으로 공산당이 주도했다. 이것은 그만큼 마오쩌둥이 핵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며 중국이 가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원과 자금이 핵 프로젝트에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핵 관련 예산은 급격하게 늘어나 1957년 당시 국가 전체 예산의 37%에 달했다. 이 시기에 중국이 얼마나 많은 예산을 핵 개발에 쏟아부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일부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1956년부터 1969년까지 매년 8억 달러 이상이 투입되었으며 중국 GNP의 10%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미국은 "맨하튼 계획"에서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자금력은 물론이고 영국의 도움을 얻고 독일에서 망명한 과학자들을 활용했다. 소련은 어떤 의미에서는 맨하튼 계획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미 국무부 내의 첩자들을 대거 활용하여 기밀을 빼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유럽 국가들에게서 풍부한 우라늄을 공급받고 독일에서 포로가 된 과학자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NATO의 중요한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훨씬 불리한 처지였다. 자금도 부족하고 인재도 없을 뿐더러, 기술력도 빈약했다.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핵 개발 초반에는 소련의 지원을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1955년 1월 17일 소련은 중국과 동유럽의 위성국들에게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중국에게 연구 목적의 가속기와 원자로, 핵물질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기술자를 파견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에 오면서 점차 중소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공산주의 진영 내에서의 패권 싸움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이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스탈린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흐루쇼프를 공공연히 무시하자 흐루쇼프 또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흐루쇼프는 핵 개발 지원 약속을 취소하고 모든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마오쩌둥 역시 처음부터 각오했던 바이기에 소련의 철수와는 상관없이 자체 개발을 밀어붙였다. 1958년 4월 후난성의 첸시앤 광산에서 첫 번째 우라늄 채굴을 시작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새로운 우라늄 광산을 개발했다. 1960년 9월에 우라늄을 정제하고 1964년 1월 우라늄235에 대한 90% 농축에 성공했다. 핵폭발에 필요한 격발 장치와 고폭 장치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1964년 8월 드디어 3발의 핵무기를 제조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0월 16일 핵 실험을 실시했다. 마오쩌둥이 처음 핵 개발을 지시한 지 9년 9개월 만의 일이었다. 핵 투발에 필요한 탄도 미사일도 개발되었다. 1964년에 개발된 둥풍-2는 사거리 1,250km로 남한과 일본을 사정거리에 두었으며 1966년의 둥풍-3는 필리핀을, 1969년의 둥풍-4는 괌과 모스크바까지 사정거리에 넣었다.


중국의 핵 개발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미국과 소련은 뭘 했는가? 중국의 핵 개발은 일차적으로는 대만과 일본이 가장 위협을 받지만 미국과 소련 또한 무관할 일이 아니었다. 중국이 핵을 개발하면 공산주의 진영의 핵전력이 한층 강화될 뿐더러,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의 국가들 또한 자극을 받아서 핵 개발에 나설 것이 뻔했다. 인도, 이스라엘, 스웨덴, 일본은 이미 핵 기술을 갖추고 있었고 이스라엘, 이집트, 브라질, 파키스탄, 호주, 대만, 인도네시아, 남한, 이탈리아, 서독 또한 핵 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나라들이었다. 자칫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뒤흔들릴 수 있었다.

(1965년에 열린 중국 핵 실험 규탄 대회. 중국의 핵 개발은 당장 그 위협을 직접 받는 인도, 남한,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의 위기의식을 높이고 미국에 대한 불신과 독자적인 핵 개발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은 핵 확산을 반대하면서도 그 잣대는 자국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그야말로 이중적이었다.)


미국은 1950년대부터 중소 양국의 핵 기술 협력을 꾸준히 주시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핵 보유에 나서자 이를 저지하는 대신 오히려 소련을 견제할 요량으로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듯이, 소련 또한 중국이나 바르샤바 동맹국의 핵 개발을 도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미국의 수단은 인공위성과 U-2 정찰기였다. 미군에 의하여 훈련된 "블랙 캣" 팀의 대만 조종사들은 타오위안 기지에서 출격한 뒤 중국 영공을 침투하여 핵 시설을 촬영했다. 또한 고해상도의 카메라를 탑재한 코로나, 겜빗 인공위성 역시 각종 영상 정보를 제공했다.


마오쩌둥이 처음 핵 개발을 지시했을 때만 해도 미국은 중국이 소련의 지원 없이 자체적인 기술로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에서 20년은 걸릴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중국은 MIT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미사일 개발에 참여한 바 있었던 첸쉐썬(錢學森)을 귀국시킬 속셈으로, 미국에 한국 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 11명과의 교환을 제안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로서는 중국인 한 사람보다는 11명의 자국 국민을 되찾는 것이 당연히 정권의 지지도를 높이기에 이득이라고 여기고 덥썩 받아들였다. 중국으로 돌아간 첸쉐썬은 중국의 핵 개발과 탄도 미사일 개발, 인공위성 발사에 큰 기여를 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중국의 핵 개발은 훨씬 늦어지거나 어쩌면 미국, 소련이 적극적으로 방해하여 결국에는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1960년 이전에만 해도 안이하기 짝이 없었던 미국도 케네디 행정부에 오면서 점차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미국 국가 안전 위원회는 1959년 9월 중국이 1963년 이전에 핵무기를 보유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1964년 4월 대만을 방문한 덜레스 미 국무 장관은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1964년 말이나 1965년 초에 중국이 핵 실험을 강행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태도는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1961년 9월 국무부는 중국이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핵 능력이 미국에 도전할 정도는 아니며 미국의 안보를 직접 위협하기보다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다소 약화시킬 정도, 라고 평가했다. 국방부 역시 중국의 핵 실험이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한마디로 중국이 핵을 만든다고 해도 미국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런 모습은 1962년에 소련이 미국의 턱밑에 있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단거리 전술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하자 당장 노발대발하여 쿠바 위기가 벌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미국의 안보가 위협받으면 다른 동맹국들이 어찌되건 3차 세계대전조차 불사하겠다면서도 동맹국의 안보가 위협받으면 그게 미국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마지못하여 움직이는 것이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였다.


미국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 선에 도달했는지, 중국의 군사력과 군사 전략이 어떠한지, 핵 개발의 목적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째로 정보가 불충분했고, 두 번째로 복잡하게 돌아가는 냉전 구도 속에서 워싱턴 행정부에게 중국의 핵 개발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중국이 우라늄 광산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음에도 중국은 플루토늄으로 핵무기를 만들 것이며 중국의 기술력을 고려했을 때 빨라야 1968년이나 1969년 이후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워싱턴 행정부 내부에서도 중국이 언제쯤 핵무기를 만들 수 있을지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우라늄을 농축하여 핵무기를 만들었고 미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무기화에 성공했다. 존슨 행정부는 중국이 핵 실험을 실시한 뒤에야 플루토늄이 아니라 우라늄 폭탄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중국의 핵이 미국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감하고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소련과의 공동 압박이었다. 한때 일촉즉발이었던 쿠바 미사일 사건이 흐루쇼프의 양보로 일단락되자 미-소의 관계는 해빙 무드가 되었다. 케네디는 흐루쇼프와 핵 군축 담판을 벌이면서 서독이 핵 무장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중국의 핵 개발을 미-소가 공동으로 억제할 것을 제안했다.


"나는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데 찬성합니다. 하지만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그게 소량이라도 우리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될 것입니다. 흐루쇼프에게 중국의 핵 보유 능력을 제한할 방법을 강구토록 촉구해야 합니다." - 1963년 7월 핵 실험 금지 회담에서 케네디가 국무 장관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케네디의 구상은 미-소 이외에 핵 보유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또한 흐루쇼프는 그때만 해도 중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오히려 중국이 핵무기를 가지게 되면 더욱 자기 절제력을 가지게 되어 주변국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편을 들었다. 흐루쇼프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도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중국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케네디 역시 굳이 흐루쇼프를 적극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따라서 외교적인 압박 카드는 시작도 전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두 번째는 무력 제재였다. 중국의 핵 개발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대만이었다. 1963년 9월 장징궈는 워싱턴을 방문하여 번디 국가 안보 보좌관에게 중국의 핵 개발을 경고하면서 대만은 중국의 핵 시설을 파괴하기 위하여 특수 작전을 구상 중이며 미국이 기술과 수송 지원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케네디 정권은 피그만 사건의 전철을 밟을 수 있으며 300명이나 500명의 특수 부대원을 공중에서 침투시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1963년 12월에는 합참이 멀티-소티 공격 계획을 수립하여 전투기 공습으로 중국의 핵 시설을 파괴하는 방안과 핵무기로 공습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실제로 중국의 핵 시설은 외부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공습에 매우 취약한 상황이었다. 설령 완전 파괴에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몇 년의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또한 무력 제재는 중국인들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줄 뿐더러, 핵 개발을 꿈꾸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경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의 암살, 1964년 10월 12일 흐루쇼프의 실각 등 복잡한 국내 사정이 겹치면서 미국과 소련 지도부에게 중국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소련의 태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소련의 협조 없이 미국 단독으로 중국을 공격하는 것은 자칫 3차 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의 핵 개발은 그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없었다. 또한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를 나쁘게 할 수 있고 중국이 핵 보유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1964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존슨 행정부는 자칫 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존슨은 베트남전 개입을 부르짖는 공화당 측의 베리 골드워터를 "전쟁광"이라고 매도하면서 아시아의 전쟁에 미국 청년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중국에 대한 무력 카드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존슨은 막상 선거에 승리한 뒤에는 자신의 말을 180도 뒤집고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미국을 완전히 수렁에 빠뜨리게 된다.



1964년 9월 15일 화요일 점심 회의에서 존슨 행정부가 내린 결론은 "그냥 놔둔다"였다. 중국의 핵 실험은 묵인하되, 소련과 함께 중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여 추가 핵 실험을 억제하겠다는 지극히 소극적인 방침이었다. 중국의 핵 실험이 임박한 1964년 10월 초 장제스는 주 타이페이 미국 대사에게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섬나라에 불과한 대만은 단 한 발의 핵무기만으로도 파괴될 것이며 미국이 보복에 나선다고 해도 때가 늦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미국이 나서지 않겠다면 대만이 중국의 핵 시설을 파괴할 테니 미국은 장비만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존슨 행정부는 이 또한 거절했다.

존슨 행정부는 중국의 핵 실험을 전후하여 전투기에 의한 공습, 비밀 요원을 투입하여 핵 시설 파괴, 지휘부 제거, 소련군과 공동으로 중국을 공격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 그중에는 남한으로 하여금 북한을 공격하여 중국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었다. 솔직히 소련이 중국의 편을 들지 않는 한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중국을 응징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미국이 중국의 핵 시설을 공습했을 때 중국이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당시에 중국이 보유한 미사일은 사거리가 350km에 불과했고 그 숫자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중국이 핵 실험을 한 직후인 1964년 12월 미 군축청(Arms Control and Disarmament Agency)의 조지 라스젠스는 존슨 행정부가 중국의 핵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면서 아직은 중국의 핵 능력이 미약할 때 최소한의 비용으로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슨 행정부는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에게 중국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고 나중을 내다보기보다는 당장의 선거가 중요했다. 미 국무부는 중국의 핵 시설 정보가 부재한 상태에서 제대로 타격을 가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시했고 국방부는 소련과의 경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쪽이었다. 중국을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묻혀 버렸다. 덕분에 중국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핵 개발에 성공했다.

오히려 중국의 핵 실험이 성공한 뒤 존슨 행정부는 중국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면서 NPT 체제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다. 1969년 중소 분쟁이 격화되고 소련은 중국에 대한 핵 공격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이 중국에 대한 핵 공격을 시도할 경우, 미국 또한 이를 묵인하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포기했다. 중국을 구한 것은 미국이었다. 갈수록 베트남의 수렁에 빠지는 상황에서 존슨은 중국과 화해하여 베트남전을 해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바램은 닉슨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1972년 2월 21일 베이징을 전격 방문한 닉슨은 중국을 미국의 새로운 동맹국으로 삼았다. UN에서 대만은 하루아침에 쫓겨나고 중국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승자는 중국이었다. 대만의 핵 개발은 미국에 의하여 엄중히 금지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다. 중국과 화해는 하되, 대만은 여전히 미국의 세력권으로 남기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는 양안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중국과 대만 양쪽 모두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핵 개발을 할 때에는 아직 핵 확산 금지 조약이 체결되기 전이었지만, 미국과 소련은 핵 확산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다. 강대국들은 물론이고 약소국들까지 핵무기를 손에 쥘 경우 미국과 소련의 핵 우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데다, 우발적인 사고나 국지적 충돌이 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의 그늘 아래에 있는 동맹국들이나 중동의 반미 국가들의 핵 개발은 강력하게 억제하면서도 자국의 이해관계에 필요한 경우에는 적당히 모르쇠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이라크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만으로도 무력 침공을 강행하면서도 정작 핵무기 보유가 확실한 북한에 대해서는 외교적인 엄포와 협상 이외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남한과 대만의 핵 개발은 모든 수단을 다하여 억제했지만 미국의 전략에 중요한 인도,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묵인하면서 NPT 가입을 종용하지도 않았다.

북핵 위기가 시작된 지 장장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지지부진한 채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대화로 해결하자는 클린턴의 방식은 도리어 북한에게 시간을 벌어 준 꼴이 되었다. 북한은 핵 실험과 함께 핵 보유를 공식화했다. 이라크, 이란, 리비아의 예처럼 핵은 보유하기 전에 제거해야지, 일단 보유에 성공하고 나면 전면적인 침공이라도 감행하지 않는 한 제거할 방법은 없으며 훨씬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포기할 가능성은 있는가? 남아공처럼 정권이 민주화되고 지도자가 비핵화의 의지가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넬슨 만달라를 제외하고 어렵사리 확보한 핵무기를 포기한 나라는 없다. 유일한 카드는 경제 제재이지만, 이미 빈곤에 익숙한 나라를 더 가난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들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서로의 복잡한 이해타산 때문에 미국이나 UN이 경제 제재를 결정해도 막상 모든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아니므로 그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이란, 리비아, 파키스탄 등 핵 개발 의혹이 있을 때마다 경제 제재를 시도했지만 상징적인 의미 이외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북한에 대해서도 굴복은 커녕, 누가 이기는지 보자 하는 식으로 북한을 더욱 기세등등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더 강력한 핵 실험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출처: 네이버 욱이님 블로그


출처 : 이종격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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