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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0대 사건
1. 역사의 여명: 20,000-10,000BC
200만년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출현(아프리카)
50만년전 호모 에렉투스(북경,자바원인) 출현.
4만년전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이 유럽과 중동에서 나타남.
3만년전 선사시대 예술이 이시기에 나타남.
2만년전 인간들이 베링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부터 미주대륙으로 이동.
1만2천년전 야생동물을 길들이기 시작.
1만년전 가장 오래된 도시인 예리코市가 중동에 세워짐
역사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선사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우리들의 역사를 형성하는 사건들로 넘어가게 되는 정확한 순간을 집어낸다는 것은 - 비록 불가능 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길고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인류는 50만년 전부터 지상에 존재했다. 얼마 전 발견된, 과학자들이 현대인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유인원을 닮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뼈는 4000만년이나 그 연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30,000년 전에 대부분의 대륙에서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집단으로 생활했다는 증거도 있다. 암석화나 암각화는 적어도 10,000년 이상 그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스페인과 프랑스의 동굴에는 18,000년이나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벽에 그려진 정교한 그림들이 있다.
그렇다면, 만약 인간들이 수천세기동안 지구에 존재했다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을까? 역사의 시작은 아마도 사람이 거주하는 셰계의 모든 지역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역사는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와 함께 시작되었고, 다음으로는 이것이 줄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야기꾼들은 아마도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로 꾸민 이야기를 기억하고서 이를 다시 전달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의 여러 문화권에 신화와 전설이 생겨났다.
이러한 초창기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사라지긴 했지만, 몇몇은 전해내려와서 점차 오늘날 우리가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고대 전설로 발전했을 것이다. 역사의 여명은 전설이 최초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질 때 부터 밝아온 것이다.
2. 사회조직의 발전: 6000 BC
9000 BC. 중동의 초승달 지역에서 작물재배 시작.
8000 BC. 죠몽문화가 일본에 등장.
7000 BC. 불에 구운 도자기가 처음 등장.
7000 BC. 남아메리카인들은 야생식물을 순화시키기 시작.
5000 BC. 이집트인들은 평형저울을 사용하기 시작.
5000 BC. 중국에서 용산(龍山), 앙소(仰韶)문화가 시작.
4000 BC. 소의 가축화가 이루어짐.
4000 BC. 메소포타미아에서 바퀴가 개발됨.
BC 20,000 년 경 처음으로 집단 또는 무리를 형성했다. 이 집단들은 야영지에서 함께 살았는데, 이러한 야영지는 보통 일시적으로 머물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유목을 했기에, 정해진 주거지가 없었다. 그들은 계절에 따라 이동했고 그들의 식량원을 따라다녔는데, 야생동물과 철따라 나는 야생 식물도 먹고 살았다.
식량원이 되는 식물과 동물들을 사람들이 처음으로 경작하고 사육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BC 8000 년 경 중동 지방에서 부터였다. 그들은 들과 밭을 경작하는 법과, 양떼들과 가축을 모으는 법을 배웠다. 곧,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주변 지역-현재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은 지금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랑생활을 그만두고 한곳에 모인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고대 메소포타미아(그리스어로 "강 사이의 땅"이란 뜻)지역이었는데, 이 정착지들이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또한 이 비옥한 초생달 지대는 BC 6000년 경에 이르러 "문명의 요람"이 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정착해서 함께 살면서 사회집단이 발달하였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과 이러한 사회를 통치해 나갈 정부제도를 만들었다.
3. 문자의 탄생: 3500BC
3500BC. 빵 제조법이 이집트에서 등장.
3000BC. 이집트와 크레타에서 밀랍 양초를 사용하기 시작.
3000BC. 청동기가 중동에서 널리 쓰임.
3000BC. 메소포타미아에서 전차를 사용하기 시작.
3000BC. 수메르에서 쐐기문자를 사용하기 시작.
3000BC. 노와 돛으로 움직이는 갤리船이 지중해에서 사용되기 시작.
3000BC. 미노아 문명이 크레타섬에서 절정을 이룸.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을 그리거나 쓰는 능력은 인류라는 종족의 특징이고, 이것은 우리와 세상의 다른 생물간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의 하나이다. 인간은 BC 35,000년 전부터 바위 위에 상징물을 그리고 색칠했으며, 이러한 그림들은 수세기동안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32,000 여년 후, 약 BC 3500년쯤에, 사람들은 간단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문자-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말하는데 사용되는 음소(音素)를 나타낼 수 있고, 문장을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체계를 일컬어 표음 문자라고 한다.
최초의 표음문자는 고대 수메르인들이 고안한 쐐기(설형) 문자이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전역에서 폭넓게 쓰여졌으며, 또한 이집트의 신성 문자(히에로글리프 hieroglyphics)보다 앞선 것이었다. 히브리와 아랍의 문자들도 바로 쐐기문자로부터 유래했으며, 이것은 또한 그리스 문자의 선구(先驅)이기도 했는데, 오늘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등 대부분의 서양 언어에 쓰이고 있는는 로마 문자가 바로 이 그리스문자로부터 나왔다. 러시아와, 그밖의 슬라브 국가에서 쓰이는 키릴 문자도 역시 고대 그리스 문자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중국의 문자는 고대 중동지방의 문자들보다 다소 늦게 생겨났는데, 이것은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문자의 근간으로 차용되어 쓰여졌다.
4. 파라오, 이집트 통일왕국의 건설: 3100 BC
3100BC. 메네스왕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 이집트 왕조의 시작.
3000BC. 페니키아의 도시인 바빌론이 활동적인 항구와 무역센터가 됨.
3000BC. 트로이市에 처음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
3000BC. 메소포타미아에서 수금(竪琴)이 발명됨.
2800BC. 영국의 스톤헨지 유적이 세워짐.
2700BC. 인더스 문화가 인더스 계곡에서 출현함.
2686BC. 이집트 구왕조가 시작됨.
2333BC. 최초 한국의 왕조인 단군왕조가 성립.
2300BC. 힛타이트족이 소아시아 지방으로 침입함.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나타난 최초의 도시들은 도시국가의 형태를 띠었다. 그곳에서는 자급 자족과 성벽 안에서의 자치가 이루어졌으며, 그 도시들의 영향권은 기껏해야 그 도시국가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거나 경작하던 주변 농지와, 도시에 의존해서 살아가던 주변의 마을까지 밖에 미치지 않았다. 군주의 통치는 보통 그가 언덕에서 바라 볼 수 있는 지역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약 BC 3300년 경 나일강 주변의 마을과 촌락들이 상 하 이집트로 두개의 왕국을 형성하면서, 이러한 양상에도 변화가 왔는데, BC 3100년 이집트의 파라오 메네스는 두개의 이집트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세계 최초의 제국을 형성했다. 25,000년이나 지속되었던 파라오의 통치 아래에서 형성된 이집트의 문화는 이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문화와도 다른 것이었다.
각각의 마을과 도시들은 더 이상 자급자족할 수 없었고, 상호 의존적이 되어갔다. 파라오의 궁전이 이 사회의 부와, 정치적, 종교적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파라오는 단순한 왕 이상이 존재가 되었으며, 신으로서 숭배받기에 이르렀다. 거대한 도시 건설과 거대한 토목공사 계획들도 착수되는데, 한 예로 BC 38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35개가 넘는 거대한 피라밋이 파라오의 무덤으로서 세워졌다. 피라밋들 중 가장 큰 것은 케옵스 파라오(paraoh Cheops 2700BC-2675BC)의 통치기에 세워진 것으로, 45층짜리 빌딩과 맞먹는 높이이다.
이집트인이 세운 피라밋과 그 외 거대한 구조물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문명지가 어디였던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으로, 제국의 중앙집권화로 인해 예술과 과학-특히 수학과 천문학-이 이전까지 세상에 알려진 그 어떤 수준보다도 높이 발전하는 것이 가능했다.
5. 함무라비 법전: 1740 BC
2000BC. 켈트족이 유럽에 등장.
1900BC. 미노아의 선형 A문자가 크레타에서 발달함.
1900BC. 앗시리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
1900BC. 힛타이트인들은 철의 제련을 시작.
1900BC. 소돔과 고모라 시가 지진으로 황폐화됨.
1800BC. 청동기 제조법이 유럽으로 전파됨.
1800BC. 앗시리아인들이 소아시아에서 힛타이트족에게 쫓겨남.
1800BC. 와스텍족이 마야로부터 분리.
1800BC. 웨섹스 문화가 영국에서 성립.
1792BC. 함무라비가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통치를 시작.
1766BC. 은나라가 황하 유역에서 세워짐.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함에 따라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할 규칙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초기 문명권에서는 규율이 별로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에 대한, 또는 재산권에 대한 침해와 같이 명백한 범죄행위들에 관한 것들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들과 이집트의 왕국이 형성됨에 따라 규율들은 보다 복잡해졌으나,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군주가 제정한 것들이었으며, 군주제와 왕국을 위해서, 백성들의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최초의 진정한 법전이 반포된 것은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1792BC-1750BC)의 치하에서였다. 함무라비 왕은 "질서와 정의를 지상에" 부여한 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1901년 프랑스의 고고학자에 의해 고대 바빌론의 폐허속에서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은 거대한 석판에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는데, 석판에는 282개의 법 조항이 남아있고 그 외 35개 조항은 마멸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알수있다.
법전은 일정한 범죄에 대해서, 그 범죄에 해당하는 일정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자기 소유의 제방을 수리하지 못한 사람은, 땅이 침수되어 버린 이웃에게 보상하도록 되어 있었고, 허가없이 술집에 들어간 여자 승려는 산 채로 화형당할 수 있었으며, 미망인은 남편의 재산을 그의 아들과 똑같은 비율로 상속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법전에서는 또한 채무자가 그의 아내나 아이들을 3년동안 채권자에게 빌려주면 채무를 소멸시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이 법전에는 정부 구조를 명문화 시키는 규정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는 이법전이 단순한 법령집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왕이 또한 최고 성직자였으므로, 법전은 바빌로니아의 종교생활에 관한 규율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처음으로 법률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왕이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포되고 법전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대부분의 근대 사회가 실행한 법적 제도의 선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 시나이 산의 모세: 1250 BC
1700BC. 크레타 섬의 크놋소스, 파이스토스 궁전이 화재로 파괴됨.
1674BC. 힉소스 왕조가 외국인으로서 이집트를 다스림.
1650BC. 린드 파피루스가 최초의 수학책으로서 출판됨.
1600BC. 그리이스의 중장보병이 전투에서 보호 장갑을 사용하기 시작.
1600BC. 은나라의 갑골이 점치는데 사용됨.
1500BC. 페키니아인들이 북아프리카의 탄지에르市를 세움.
1500BC. 힌두교의 베다가 이시기에 씌여짐.
1450BC.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이 그리스 본토에서 온 침략자들에 의해 멸망함.
1361BC. 투탄카멘이 이집트의 왕이 됨.
1200BC. 샤빈 문화가 페루에서 발전함.
대부분의 고대 종교들-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그리스, 그리고 후에 로마의 종교와 같이-은 다신교인데, 이는 그 숭배자들이 태양신, 달의 여신 등등 많은 신과 여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야훼라고 불리는 유일신을 믿었던 일신교를 신봉하는 특이한 집단이 하나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히브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12지파였으며 유태교를 그들의 종교로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 일신교는 명백히 소수의 신앙이었으나, 오늘날은 일신교가 전 세계적의 종교인 과반수 이상이 믿는 핵심교리가 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유태교 경전들, 특히 토라(torah)-이것은 기본적으로 크리스트교의 구약과 같은 문헌이다-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에 기인한다.
유태인의 역사에는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유태인과 크리스트교인의 교리에 가장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예언자 모세(1300-1280?BC)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를 받은 사건이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인에게 패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갔었는데, 그 후 한번은 모든 히브리인 사내아이들을 죽일것을 명하는 칙령이 선포되었다. 모세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갈대로 만든 바구니에 넣고 나일강에 띄워보낸 탓에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는 파라오의 딸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궁전에서 양육되었다. 그가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 그는 그의 민족을 해방시켜 달라고 파라오를 설득해서, 마침내 파라오 람세스2세(1292BC-1225BC)는 마지못해 승락하기에 이르렀다. 모세는 이집트로부터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나왔는데, 지금 이스라엘 지역인 원래 그들이 살았던 땅으로 가는 길에 시나이 사막에서 40년을 방랑했다고 한다. 성경에 의하면 BC 1250년 경 시나이산 위에서 신이 모세에게 나타나, 십계로 알려져 있는 한 묶음의 법조항이 수록된 두개의 석판을 그에게 주었다. 모세는 이를 그의 백성에게 가져갔고, 그들은 이것을 유태교의 기본적인 도덕율로 받아들였다. 그 후 크리스트교가 십계명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오늘날 16억이 넘는 세계 인구의 신앙적 근간을 이룬다.
<십계>
1. 나는 종살이하던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너희 하나님 여호화이다. 너희 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라.
2. 너희는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의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에 절하거나 그것을 섬기지 말아라. 나 여호화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미워하는 자를 벌하고 그의 죄에 대하 여 그 자손 삼사 대까지 저주를 내리겠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 키는 자에게는 그 자손 수천대까지 사랑을 베풀 것이다.
3.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라. 나 여호화는 내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자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4. 너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걸을 거룩하게 지켜라. 6일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7일째 되는 날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므로 그날에는 아무 일 도 하지 말아라. 너희나 너희 자녀들이나 너희 종이나 너희 가축이나 너희 가 운데 사는 외국인도 일을 해서는 안된다. 나 여호와는 6일동안 하늘과 땅과 바 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쉬었다. 그러므로 내가 안식일을 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5.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줄 땅에서 너희가 오래오래 살 것이다.
6. 살인하지 말아라.
7. 간음하지 말아라.
8. 도둑질하지 말아라.
9. 너희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아라.
10. 너희 이웃집을 탐내지 말아라. 너희 이웃의 아내나 종이나 소나 나귀나 너희 이웃이 소유한 그 어떤 것도 탐을 내서는 안된다.
7. 페니키아인의 항해와 식민지: 1200BC
1200BC. 철 제련 기술이 이시기에 완성됨.
1190BC. 트로이 전쟁이 발발함.
1100BC. 페키니아인들이 스페인의 카디즈를 발견.
1100BC. 미케네 시가 함락됨.
1085BC. 이집트가 둘로 분할됨.
1027BC. 주나라가 은나라를 이어 세워짐.
1020BC. 이스라엘의 사울왕이 처음으로 왕국을 세움.
1000BC. 다윗왕은 팔레스타인인을 격퇴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세움.
1000BC. 마운드 빌더족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나타남.
900BC. 켈트족이 고올 지방에 살기 시작함.
900BC. 남아메리카대륙에서 산 로렌조가 권력을 잡음.
814BC. 페니키아인들이 카르타고를 세움.
초기의 인류 문명은 지리적으로 근접한 문명 외에는 다른 문화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거대한 문명이 일어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인들은 남쪽으로는 누비아인들,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인들과 접촉했었고,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북쪽과 동쪽으로, 페르시아인 그리고 다른 문명들과 접촉을 했다. 물론 몇몇 진취적인 사람들이 그들 나라의 정치적 영향권을 넘어서서 여행을 하긴 했지만, 제국의 건설이나, 원거리 무역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다.
이것에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이 페니키아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지금 레바논 지역인 지중해의 동쪽끝에 위치한 해안지역에 살았는데, 뒤로는 산을, 앞으로는 바다를 마주한 이들은 배타기를 업으로 삼았다. 그들은 세계 최초로 막강한 해상 교역국이 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막강한 나라로 있었다. 그들은 또한 고대 중동에서는 최초로 유럽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증진시키려 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항해는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페니키아인 이전에는 어떤 사람들도 당시 말 그대로 "지구의 끝"이라고 보여지던 곳까지 그들의 교역망을 확장하기 위해서 의식적인 노력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페니키아의 함대-상선은 물론 군대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던-는 지중해의 양 해안의 거의 모든 항구를 방문했다. 함대는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서 대서양까지 항해를 했고, 북유럽의 항구와 아래로는 아프리카의 해안까지 갔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실재로 북아메리카의 해안까지 도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페니키아인들은 또한 사이프러스에서 코르시카와 스페인에 이르는 땅들을 식민지화했고, BC 810년에는 카르타고(오늘날의 튀니지)를 세웠는데, 이것은 후에 전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 중 하나로 성장했다.
페니키아인은 단순히 상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리공예를 또한 발전시켰고, 유리그릇제조법을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투명한 그릇과 반투명한 그릇을 대량으로 만들어 낸 최초의 사람들이었고, 이것은 그후 그들의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8. 로마의 건국: 753 BC
887BC. 중국에 광동市가 세워짐.
850BC. 이탈리아의 투스카니 지방에서 빌라노반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함.
800BC. 그리스의 코린트市가 세워짐.
750BC. 그리스 작가 호머가 활동을 시작함.
750BC.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식민지를 확장하기 시작함.
729BC. 앗시리아인들은 바빌론을 점령함.
722BC. 연나라는 북경을 수도로 삼음.
722BC. 앗시리아는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함.
715BC. 스파르타는 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메세니아를 정복함.
700BC. 스키타이인들이 안장을 고안해 냄.
로마제국은 아마도 19세기 이전의 유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체(政治體)였을 것이며, 그 이후로도 그러할 것이다. 로마제국은 현재의 스코틀랜드에서 지브롤터까지, 그리고 라인란트에서 흑해, 터키 그리고 북아프리카 전체까지, 지중해로부터 사하라 사막까지 서유럽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상 지중해의 바닷 물이 밀려오는 모든 해안은 로마의 영토였다.
로마의 정치구조, 로마의 문학 그리고 심지어 로마의 문자까지 이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후속문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제국이 있기에 앞서,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 구석에 도시 국가 로마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BC 753년에 세워진것으로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는데, 이 사실은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해 확인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두명의 형제 아물리우스와 그의 형 아스카니우스가 있었는데 아스카니우스는 라비니쿰(지금의 중앙 이탈리아)의 왕이었다. 아물리우스는 그의 형과 형의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 이 계획은 아스칼니우스의 딸 레아 실비아가 쌍동이를 가질 때 까지는 성공했었다. 아물리우스는 그녀를 감옥에 보내고 쌍동이를 티베르 강에 버릴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아서 늑대에 의해 길러졌고, 목동이 소년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늑대로부터 "구해냈다." 목동과 그의 아내는 그들에게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그들이 어른이 될때까지 길렀다. BC 753년 (경)에 두 형제는, 현재 로마에 있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새로운 도시를 새웠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빈번한 다툼으로 인해 결국 로물루스가 그의 동생을 죽였다.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이름지워진 이 도시는 괄목할만 하게 성장하여, 로물루스는 인근 땅들을 강압이나 정복에 의해 병합하는 것도 포함한 제국 건설 정책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1000년간 지속될 제국의 시작이었다.
9. 불교: 528BC
688BC. 복싱이 올림픽 경기에 포함되었다.
671BC. 앗시리아인들은 멤피스를 점령하고 이집트의 일부를 지배하였다.
660BC. 비잔티움이 세워졌다.
600BC. 이란에서 조로아스터敎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594BC. 아테네, 솔론의 개혁
586BC. 유대인들의 바빌론 유수가 시작.
561BC. 페이시스라투스가 아테네의 참주로 등장.
550BC. 노자(老子)가 도교의 기반을 닦음.
543BC. 스리랑카의 콜롬보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
많은 신자를 거느린, 조직화된 다섯개의 커다란 세계 종교들 중에서 둘-유태교와 힌두교-은 그 기원이 태고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중 유대교는 랍비가 히브리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신을 따를 때 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치긴 하지만, 일정한 창시자가 없다. 나머지 셋-불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은 특정인에 의해 역사적 시간 속에서 모두 창시되었다.
불교는 북부 인디아에서 싯다르타 고타마라는 사람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그는 BC 563년에 전사계급인 크샤트리야에 소속되어 있는 왕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힌두교의 기본 경전인 베다에 있는 철학과 문학에 일찍부터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점차 그는 힌두교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고통받는 자가 되어가지고, 세속의 고난으로부터 영혼의 구제를 약속하는 다른 종교적 철학을 발전시키기로 결심했다.
29살에 싯다르타는 일련의 계획을 가지고서, 그의 궁전, 아내, 아들로 부터 떠날 것을 결심하고, 모든 세속적 소유와 인연을 끊은 후 "진리"를 찾아 출발한다. 그는 많은 성인들을 방문했고, 단식과 명상으로 많은 해를 보냈다. 그의 목적은 모든 육체적 욕망-배고픔을 포함하여-을 극복 할 수 잇는 방법을 찾고, 그의 마음을 완전히 조절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가 추구하던 진리는, 그가 보리수 아래 않아서 불교도에게는 "해탈"이라고 알려진 것을 깨닫던 BC 528년 5월의 어느 밤이 되어서야 찾을 수 있었으며, 이 한 순간에 삿다르타는 갑자기 고통이 정복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힌두교의 기본 교리 중 하나는 윤회라는 것이다. 죽은 모든 생명체의 영혼이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순환은, 영혼이 곤충에서 동물로 인간형태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면서 영원히 반복된다. 만약 인간이 그의 일생에서 사악했다면 그는 낮은 형태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또다른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 윤회는 끝이 없지만, 싯다르타는 해탈속에서 명상과 헌신이라는 正道(다르마)를 따름으로써 영혼이 완전한 마지막 상태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열반은 유태-크리스트교에서 천국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의 "부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의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갔다. BC 483년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이 승단을 만들었고, 곧 불교 철학은 아시아에 퍼져나가서,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인도보다 더 많은 비율의 신도들이 생겨났다. 오늘날 거의 세계에는 약 3억의 불교 신자가 있으며, 그 중 99.5%는 아시아에 있다.
10. 그리스의 페르시아 격퇴: 479 BC
518BC. 다리우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를 수도로 건설.
510BC.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 1세는 아테네의 참주인 히파이아스를 제압.
509BC. 로마는 공화국이 되었다.
507BC. 클리스테네스는 아테네에 민주정을 도입.
500BC. 아데나 언덕의 주거지가 북아메리카대륙의 오하이오 계곡에 건설됨.
500BC. 싸포텍族은 남아메리카대륙에 몽테 알반市를 건설.
500BC. 시베리아의 파지릭에서 최초의 손으로 짠 카페트가 무덤에 부장(副葬)됨.
480BC. 싯다르타가 인도에서 죽음.
460BC.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정치적 지도자가 됨.
BC 5세기, 막강한 제국의 세력을 자랑한 이집트의 시대가 머나먼 기억으로 남고 로마제국의 평화로운 시대가 아직 먼 미래에 머물러 있을 무렵, 두개의 강력한 세력이 세상에 나타났는데, 이 둘은 서로 상반된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한쪽에는 그리스가 있었는데, 그리스의 철학과 문학은 유럽 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에는 페르시아제국이 있었는데, 이는 성격상 명백히 동방적인 문명이었다.
키러스대왕(558-528BC)이 페르시아의 부족들을 통일하고 그의 지배의 영역을 지중해로부터 인도의 인더스강까지 확장하면서 페르시아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손자 다리우스(558-486BC)는 521년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는 이집트에 대한 페르시아의 통치를 견고히하고, 페니키아의 함대를 그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그의 다음 목표는 그리스를 정복하고 페르시아제국을 유럽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 도시국가간의 내부적인 불화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내부이견을 옆으로 미뤄두고 다리우스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서로의 군사력을 뭉쳤다. 페르시아인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잘 훈련된 그리스인들은 BC 490 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쳤다.
10년 후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519-465BC)가 더 큰 군대를 이끌어모았다. 해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페르시아 군대는 약 250만명의 군인을 이끌고 그리스로 진군했다. BC 480년 11월 23일,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 함대를 살라미스 섬 부근의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여서 의표를 찔러 격퇴시킴으로써 그리스인은 첫번째의 대승을 거두었다. 크세르크세스는 겨울동안 다시 군사를 모아서 다음 해에 되돌아와 그리스인들과 플라타이아 평원의 전투에서 맞붙었다. 마라톤과 살라미스에서처럼, 계략에 능한 그리스 군대가 또다시 숫적으로 우세하고 강력한 페르시아 군대를 함정에 빠뜨려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플라타이아에서의 크세르크세스의 패퇴는 페르시아 제국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더 이상 확장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페르시아는 안으로부터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다음 세기가 끝날 즈음에서는 알렉산더 대왕(345-323BC) 휘하의 그리스 군대에 의해 정복될 운명이었다.
비록 아무도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플라타이아의 전투에서 절정에 달한 이 전쟁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다리우스나 크세르크세스가 승리했더라면,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을 것이고, 피정복문화가 되었을 위대한 그리스의 과학과 문학은 BC 5세기 후반기 동안 종말을 맞았을 지도 모른다.또한 아마도 로마에 대한, 그리고 이후 유럽 문화에 대한 그리스 문명의 심대한 영향도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BC 479년 여름의 어느 긴 하룻동안 유럽 역사의 방향-그리고 본질-이 정해졌던 것이다.
11. 그리스의 황금기: 450-332 BC
450BC. 라 텐느 시기가 중부 유럽에서 시작.
447BC.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이 시작.
445BC. 로마에서 귀족과 평민간의 결혼금지가 없어짐.
425BC. 소포클레스의 희곡 [외디푸스왕]이 완성됨.
411BC. 아테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가 [역사]를 완성함.
404BC. 이집트는 페르시아로부터 독립.
404BC.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그리스의 맹주가 됨.
역사의 이정표는 도미노와도 같다. 뒤에 생긴 사건은 앞에 생긴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 살라미스와 플라타이아 전투는 그것들이 그리스 문명을 소멸의 위기에서 구해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그리스 문화의 커다란 번영을 가능케했고, 이는 근대 서구 문명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을 배출해냈다.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많은 문화권 내에서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 작가, 이론가가 있었지만, 이 기간 아테네에서 이러한 위대한 지성들이 유례없이 집중되어 나타나서,서양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처럼 좁은 공간에서 짧은 시간동안 나타난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다시 찾아볼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에서 다른 사람들 위에 우뚝 솟은 세 명의 이름이 있었다. 소크라테스(469-399BC)가 그 첫번째인데, 그는 플라톤(427-347BC)의 스승이었다. 플라톤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를 가르쳤다. 이러한 창조적인 연속성으로 인해 서구 철학사상의 탄생에 깊이와 충만함이 더해졌다.
소크라테스에게는 그의 재치있는 말솜씨 때문에 제자들이 많이 따랐는데, 그는 또한 많은 사람이 서구 철학의 아버지로 생각하는 뛰어난 철학가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목적을 위해 산다고 믿었고, 옳고 그른 것이 주변환경과 다른사람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상적인 정부의 목적이 사회의 공공선을 목적으로 통치할 현인을 양성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다.
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여서 그의 책 '공화국'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윤리, 덕, 이성이 균형을 이루는 완벽한 국가"를 상정하고 있다. 그는 도그마를 받아들이는 것 보다도 지혜를 추구하는 것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뿐만 아니라 의학까지도 공부했으며, 우리 주변 세계의 여러 측면과 인간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체계적인 방법을 차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랙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마침내 가서는 13세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 의해 크리스트교 신학과 조화를이루게 된다.
12. 의학에 대한 과학적 접근: 400 BC
403BC. 중국에서 전국시대 시작.
400BC. 영국에서 메이든 캐슬에 있는 힐포트를 건설함.
399BC.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함.
386BC. 테베와 아테네 연합군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재개
341BC. 페르시아는 이집트를 재정복.
339BC.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는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격파.
근대 서구 철학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놓여진 기반 위에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의학 역시 그 기원을 그리스 문명의 황금시대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460-377BC)는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의사는 "일반적인 인간의 본질과 개개인과 각각의 질병의 성질의 본질을 고려해야 한다"는 개념을 최초로 고안해 냈다. 다시 말하자면, 의사는 단지 한정된 증상에만 촛점을 맞추기보다는 전체 인체 메커니즘 안에서의 상호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당시의 선구자였다. 그는 명백하게 시대를 앞서나갔다. 세상의 의료행위 대부분이 무당과 요술장이에 의해서 다루어지던 시대에 살았던 그는, BC 4세기에 활동하던 의사의 것이라기 보다는 20세기의 그것에 보다 가까워 보이는 생각들을 전개시켜나가면서, 의학과 의학윤리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저술했다.
히포크라테스는 부러진 부분은 정상적으로 고치기 위해서 곧게 똑바로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부러진 부분의 끝을 잡아당겼다가 부분들이 서로 맞게 되면 천천히 풀어주도록 했다. 항상 그는 의사가 부분적인 골절을 넘어서서 환자의 전체적인 반응까지 볼 것을 역설했다.
"운동은 신체를 단련하고 움직이지 않는것은 몸을 쓸모없게 만들기" 때문에 초기 단기에서 그는 운동을 권유했다. 오늘날 이 처방법은 아직도 의사들이 "사용하지 않아서 생기는 기능퇴화"(atrophy of disuse)를 피하는 방법으로 따르고 있다. 과학적으로 봐서, 히포크라테스의 업적은 어느정도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서 혈액 순환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명백하게 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를 위해 대부분의 과학적인 발견들을 남긴 한편, 그는 이론적 기초와 방법, 과정을 공식화시켰는데, 이를 통해 앞으로의 수세기동안 의학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실재로 히포크라테스는 문자 그대로 근대적인 의료 행위의 틀을 세웠다. 그가 쓴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여전히 근대 의료윤리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 환자에 대한 의사의 책임,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치료해야 할 의사의 의무와 같은 기본적인 신조가 들어있다.
13.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323 BC
338BC. 로마는 라틴 동맹도시들을 격파함.
336BC. 필립2세는 암살되고 알렉산더 대왕이 즉위함.
333BC. 알렉산더는 시리아, 페키니아, 이집트를 정복함.
333BC.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왕 다리우스3세를 격파함.
332BC. 알렉산더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움.
BC 5세기에 페르시아인들이 이루려다가 실패한 것을 BC 4세기에 그리스의 한 장군이 이루는데 성공했다. 이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고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뻗쳐 있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일이었는데, 그는 알렉산더 대왕(356-323BC)이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마케도니아의 필립은 BC 336년 암살당하기 직전까지 모든 그리스를 그의 통치 아래 두었다. 어린 알렉산더는 아테네에서 , 아버지뿐 아니라, 스승이었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20세에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이미 위대해 지도록 운명지어 져 있는 인물이었다. 알렉산더가 단지 13년 동안만을 통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세에 그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어떤 나라보다 더 큰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가 BC 333년에 이수수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558-486BC)를 격퇴시킨 후 페르시아 제국은 붕괴되었다. 그가 33살이 될 때 까지, 알렉산더는 그가 필립으로부터 상속받았을 당시 제국의 땅의 50배나 넓은 영토와 20배나 많은 사람을 다스렸다. 이 영토는 그리스, 이집트, 이전 페르시아 제국의 전부와 우리가 오늘날 중동이라고 생각하는 지역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그는 북쪽으로는 다뉴브, 동쪽으로는 인도의 갠지즈 강까지 진군했고, 심지어 나일 강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원정대를 보내기까지 했다. 323년 그가 죽으면서, 그는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제국건설가로 평가받았다. 심지어 거의 2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이러한 그의 업적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대여섯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알렉산더 제국에서 진정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점은, 최초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자유로운 사상 교환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대부분의 지도자와는 달리, 알렉산더는 정복민의 사상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정치 구조로부터 배운 생각들을 그의 제국에 도입했다. 한편, 그리스의 미술은 인도의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33살의 이른 나이로 병들어 죽기 전에, 알렉산더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란 도시도 세웠는데, 여기에 있는 거대한 도서관은 천년동안 존재했으며, 알랙산드리아는 세계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해갔다.
14. 아소카의 계몽군주: 270 BC
321BC. 찬드라굽타가 마우리아 왕조를 세움.
300BC.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가 활동함.
300BC. 선사 에스키모족인 오크빅족의 문화가 알라스카에서 발달
300BC. 사마리아인이 유럽쪽 러시아에서 스키타이인들 이후에 나타남.
290BC. 사비느인이 로마 시민으로 편입함.
280BC.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페러스 등대가 알렉산드리아에 건설.
273BC. 로마와 동맹군은 에트루리아의 카에레市를 정복.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 사람들이 집단이나 무리를 형성하고 있을 때, 한 인물이 지도자로 나타났다. 그는 우리가 리더쉽이라고 일컫는, 지력과 힘의 조화가 두드러졌기에 사람들을 이끌 수 있었다. 유랑의 무리가 돌아다니는 것을 멈추고 도시를 건설함에 따라, 지도자는 보다 전능한 존재가 되어가면서, 피치자들로부터 분리되어갔다.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심지어 신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다. 왕의 권위는 막대한 것이었고 왕은 포고를 통한 전형적인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왕이 말한 것은 그 나라의 법이 되었다. 어떤 통치자들은 자애로왔으며, 어떤 통치자들은 횡포한 잔인함을 보였으나 대부분의 왕들은 철권통치를 하였다.
인도에서는 아소카(?-232BC)라는 이름의 왕이 살았는데, 그는 BC 273년 부터 232년 까지 마가다라는 왕국을 다스렸다. 그의 제국은 마침내, 현재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쉬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도지역의 대부분을(남쪽 끝은 제외하고) 포함하게 되었다. BC 261년에 그의 군대는 200,000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유난히 끔찍했던 전쟁에서 말링가스를 쳐부쉈다. 공포와 고통을 경험한 아소카 왕은 소름이 끼쳐서, 이러한 댓가를 치루고서는 어떠한 군사적 승리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ㄲ닫고, 불교로 개종해서 국가정책으로서의 군사정복을 포기했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희생제물을 금지하고, 그의 군대를 오직 방어 상태로만 유지했다.
그러나 공격적인 대외정책의 폭력성에 대한 단순한 조치를 넘어서서, 아소카는 국내 정책을 다시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공공 사업 계획과 그가 다스리는 백성의 복지에 기여할 제도를 만드는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소카는 양심적인, 아마도 세상에서 최초로 등장한 참된 "계몽"군주였다.
15. "최초의 황제"가 이룬 중국 통일: 221 BC
264BC. 로마에서 검투사 결투가 행해지기 시작.
250BC. 아소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선포.
240BC.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 둘레를 계산해냈다.
239BC. 헬리혜성의 출현이 최초로 기록되었다.
221BC. 필립 5세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215BC. 만리장성의 건설이 시작됨.
로마제국의 힘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후의 유럽의 상황처럼, 중국은 서로 경쟁적인 관계에 놓인 군주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봉건적 도시 국가들의 집합체였다. 이러한 나라들은 주나라에 나타나 널리 퍼진 공공 문화에 의해 서로 공통된 양상을 보일 뿐이었는데, 이 주나라는 BC 770년 이후 양쯔강 유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지속적인 문화적 영향을-정치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후 중국에 미쳤다.
아마도 이 시기-그리고 그 이후에도- 중국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향은 라틴어식 이름으로 Confucius라고 잘 알려진 철학자 공자(551-479BC)의 글들이었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아직도 5,200,000 명의 사람들에게 종교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의 철학은 개인은 물론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조화로운 사회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죽은 후, 중국은 전국(戰國)시대(약 403-221BC)로 정치적으로 분열된다. 이 시기는 진(秦)나라(221-210BC)가 들어서면서 끝나게 되는데, 진나라의 통치기에-"최초의 황제"로 알려진- 강력한 시황제(259-210BC)가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중앙집권화된 정부 형태를 도입했고, 호구조사를 실시했으며, 화폐와 문자, 법률, 도량형을 통일했다. 그는 또한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인간 손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큰 건축 사업이었다. 한편으로 시황제는 유교를 근절시키려고 애쓴 권위주의적인 독재자로 불리는데, 여기에 대한 반대에 부딛쳐서 그는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시황제의 통치 이후 한나라가 등장하였는데, 한나라는 시황제의 중앙집권제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시황제가 금지시켰던 유교를 점진적으로 다시받아들였다. 한나라는 중국 특유의 관료(만다린)에 의한 사회적, 정치적 체제를 확립했는데, 이것은 1949년 공산당이 권력을 잡기전까지, 심지어 만주왕조인 청나라(1644-1922)에서도 중국 사회의 기반인 채로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 자체는 400년이 넘게 220AD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예술과 과학-문학과 그림에서부터 천문학과 수학에 이르기까지-이 폭넓게 번성하였다.
16. 초강대국으로서의 로마의 흥기: 202 BC
241BC.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남.
238BC.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포획함.
219BC. 한니발은 스페인의 사룬툼에 있던 로마인을 공격
218BC.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함.
218BC. 로마는 스페인에 전쟁선포. 2차 포에니 전쟁 발발
212BC.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로마군에 의해 살해당함.
210BC. 진시황 사망. 실물크기의 군인 모형과 함께 매장.
206BC. 로마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에 승리.
202BC. 진(秦)나라 다음으로 한나라가 유방에 의해 건국.
201BC. 마리니사는 북아프리카에 누미디아 왕조를 세움.
200BC. 고올人들은 파리에 정착지를 세움.
200BC. 페루의 나즈카 문명이 번창하기 시작.
로마는 BC 753 년에 세워졌다. 그로부터 500년에 걸쳐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만 지배적인 정치세력이었으나, 그 이후에 이르러서 이탈리아 반도 넘어서까지 그들의 영향력을 주장하게 되었다. 로마의 세력권이 이탈리아 밖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로마는 이전에 접하지 못한 보다 심각한 경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스가 동쪽으로 문명의 요람과 페르시아 제국 너머로 눈을 돌린 반면, 로마는 서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거기에는 서부 지중해의 강력한 나라, BC 814년 페니키아인에 의해서 세워진 카르타고가 있었다. 로마는 그 세력권을 넓혀감에 따라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되었으며, 이 세력투쟁의 승리자가 서유럽과 궁극적으로는 전 지중해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경쟁은 포에니 전쟁(Punic Wars)의 과정을 통해 결판났는데, 영어로 "퓨닉 punic"이란 말은 카르타고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푸니쿠스 Punicus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 말 자체도 페니키아인을 나타내는 그리스 말인 포에닉스 Phoenix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264-241 BC)은 대부분 바다에서 벌어졌으며,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제 2차 포에니 전쟁(219-201BC)은 전사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군사 작전중 하나를 포함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246-142BC)은 219년 현재의 스페인 지역에서 로마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로마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237-183 BC)는 한니발의 의표를 찔러서, 한니발이 로마 문턱에 다다랐을때 스페인을 재탈환하고 카르타고 본토를 정복하러 떠났다. 한니발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되돌아왔으나, BC 202년 10월 19일 카마 평원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했다.
제 3차 포에니 전쟁(149-146 BC)은 용두사미의 꼴로 끝나버렸는데, 이 기간에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정복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바로 BC 202년 자마의 전투에서 거둔 로마의 승리로부터, 이후 6세기동안 절대적 통치를 계속하게 될 로마제국의 패권이 시작되었다.
17.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통치
185BC. 마우리아 왕조는 브리하드나타의 암살로 멸망함.
184BC. 카토는 로마의 감찰관이 됨.
168BC. 로마는 페루세수스왕을 격파하고 마케도니아 왕조를 멸망시킴.
146BC. 3차 포에니 전쟁 발발
146BC. 로마는 그리스의 아가야 동맹을 격파함.
140BC. 한 무제가 즉위
127BC. 프톨레미는 천문학 책인 알마게스트를 서술
111BC. 한나라는 안남국을 세움.
89BC. 로마의 시민권은 전 이탈리아로 확대.
80BC. 술라는 에트루리아를 공격. 에트루리아는 멸망
73BC.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 발생.
이야기, 시,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연극무대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어버린 율리우스 카이사르(102-44BC)는, 비록 그가 살아있을 당시 로마가 아직 공화정이었고, 황제의 관직이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만들어지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로마 황제로 일컬어진다.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쳐부수면서, 로마는 자신이 가능한 한 많은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할 "명백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명백한 운명을 깨달았던 로마의 지도자였다.
귀족가문의 아들인 카이사르는 로마군에 입대하여, 용맹을 나타내는 가장 높은 메달인 떡갈나뭇잎관(시민의 영관)을 받으며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로마에 돌아와서는 정계에 뛰어들어 34살에 국가 재무관이 되었으며, 9년 후에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많은 중요한 개혁을 도입했으며,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그의 눈은 항상 절대 통치자의 단독 지배라는 이상에 명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카이사르는 그가 제국을 넓히기 위해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이끎으로써 그의 인기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군대를 지휘해서 BC 55년에는 골지방(지금의 프랑스)을 정복하는데성공했다. 이후 2년동안의 과정에서 그는 브리튼 섬을 침략해서 예속시켰고, 게르만족과 싸우기 위해 라인강을 건넜다. 그는 강력한 영웅이 되어서 로마로 돌아왔으나, 예루살램을 복속시키고 수석집정관의 자리에 있었던 폼페이우스(106-48 BC) 와의 정치적 마찰을 빚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요구했으나, 그것이 그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로마에서는 법에 의해서 장군들은 그들의 군대를 로마시내 안으로 데리고 들어 올 수 없었고, 루비콘 강 북쪽에 군대가 머물도록 되어 있었는데, BC 50년, 카이사르는 법을 무시하고, 쿠테타를 일으키기 위해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쫓아내고, 공화정을 없애버렸으며, 그와함께 그 자신이 그가 항상 계획해 온 것 처럼 절대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BC 44년 3월 15일 불만을 품은 동료들에 의해 암살당할 때 까지 계속 로마를 통치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사실상, 유럽의-역사의 진로를 바꾸었다. 로마 그 자체내에서는 그는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사실상의 황제직을 만들었으며, 이 황제직은 그의 조카 옥타비아누스(63BC-14AD)가 그의 숙부의 죽음으로부터 14년 후 권력을 잡았을 때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카이사르가 정복을 시작했을때, 로마는 지중해의 강대국이었으나, 그가 죽을 무렵에서는 유럽 최초의 초강대국-세계 최초의 초강대국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이 되어있었다.
18. 로마제국의 탄생: 30 BC
37BC. 고구려 건국.
30BC. 이집트는 로마에 편입.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의 종말.
28BC. 안드라祖 북인도 통일.
27BC.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황제로 즉위.
19BC. 로마는 고올지방의 님므에 퐁뒤 가르를 세움.
19BC.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벌을 끝마침.
18BC. 백제왕국 세워짐.
BC 44년 암살당하기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사실상 제국이었던 당시 로마의 국경을 확장시켰고, 로마 최초의 절대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카이사르의 조카 옥타비아누스(63BC-14AD)가 BC 27년 권력을 잡을 때 까지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삼촌의 지지자와 경쟁자 양측 모두로부터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레피두스(?-13BC)와 카이사르가 신뢰하던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83-30BC)와 함께 삼두정치에 참여하여 통치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 삼두정은 이후, 공화국의 부활을 바랬던, 카이사르의 암살 공모자 중 두사람인 가이우스 카시우스(?-42BC)와 마르쿠스 야니우스 브루투스(85-42BC)에 의해 야기된 내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을 물리친 후에 삼두정은 그들의 통치권을 지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유럽,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그 지역의 군주가 로마의 통치권 아래 복속되어 있었는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69-30 BC)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 국제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권좌를 세웠다. 그는 그의 세 아들을 그의 후계자로서 지명했으며, 종종 그의 아내에게 사치스런 선물을 했다. 이러한 소문이 옥타비아누스에게까지 도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격앙되어 전쟁을 선포했다. 양측은 BC 31년 악티움 전투에서 만났고 이곳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패배했다. 그들은 그들 군대의 패잔병들과 함께 이집트로 도망갔으나,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가까이서 추적하고있었다. 그들의 목표 달성에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BC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자신을 로마 황제라고 칭하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택했다.
악티움은 로마와 세계사에 있어서 전환점이다.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졌더라면 세계 세력의 중심은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갔을 것이며, 제국의 성격도 극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며, 이것은 옥타비아누스 치하에서 이룩된 잘 훈련되고 중앙집권화된 군주정보다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제국으로 머릿속에 그렸던 것과 같은 세계의 다양한 이념이 혼합된 세계주의적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라틴어와 로마자는 전 유럽에 있어서 기본적인 언어와 글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크리스트교도 실제로 그러했던 것 처럼 성공적으로 널리 확산되지 못했었을 것이다.
로마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기 이전에 제국이 되었으나 로마를 로마 제국이라고 공포한것은 바로 그였고,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그당시의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의 시기를 통치하고 있던 것도 바로 그였다. 그렇게 로마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한명의 강력한 지도자 아래 통일됨으로써 제국은 문화적으로 상업적으로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예술과 문학은 로마의 도시에서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로마시와 제국 전체를 통틀어서 도로, 다리, 수로, 원형경기장, 아파트 그리고 공공건물을 건설하기 위해 거대한 건축 계획이 착수되었다.
19. 예수 크리스트의 생애: 4 BC-29 AD
6BC.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
9 왕망이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움.
14 아우구스투스 죽음. 티베리우스가 왕위를 상속함.
25 後漢이 세워짐.
45 쿠산왕조 성립
79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폼페이시 묻힘.
184 황건적의 난
201 일본의 여제 징고가 섭정으로서 일본을 통치함.
220 후한 멸망. 삼국시대 시작
326 사산조 페르시아 성립
당시 로마의 팔래스타인 땅이었던 베들레햄에서 BC 4년에 태어난 예수 크리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전파된 종교를 창시했다. 오늘날 16억의 크리스트교도가 세상에 있으며, 이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약간 못미치는 수이다. 예수가 태어났을 당시의 유태인의 전통은 단지 한명의 신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고대 종교들에 비해 독특했다. 나아가 유태인들은 야훼라고 알려진 그들의 신이, 모세가 그들을 BC 1250년경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켰던 것 처럼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메시아, 또는 구원자를 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트교도들은 예수가 메시아였을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의 은총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영원한 낙원 혹은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지상의 인간들을 위해서 죽기위해 보내진 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는다.크리스트교의 추종자들에게 예수 크리스트의 탄생은 셰계사에 있어서 일대 획기적인 사건인 것이다.
크리스트교도들은 BC 4세기 이전 시대의 유태교의 경전들을 받아들였고, 이것들은 크리스트교 성경의 구약이 되었다. 두 종교는 유태인들이 예수 크리스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이 점에서 갈라선다. 크리스트교의 신약에는 그의 제자-주로 마테오, 마르코, 루카, 요한등-들의 기록에 따라, 크리스트 자신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로마 팔레스타인 지방의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와 그의 남편인 젊은 목수 요셉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교회 신자들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요셉이 단지 예수의 양아버지였다고 믿는다. 예수는 그가 29살 되던 해에 가르침을 시작하였고, 예수를 신의 아들, 메시아와 동일시하던 예언자인 그의 사촌 요한(세례자 요한 5BC- 30AD)에 의해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예수의 가장 잘 알려진 메시지인 산상설교는 평화, 정직, 소박, 인내, 온화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도덕률에 대한 크리스트교 신앙의 본질을 요약하고 있다.
그가 팔레스타인에서 설교하던 3,4년동안 예수는 많은 기적을 보이고, 많은 추종자를 모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카리스마적인 젊은 설교자를 그들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중 특히 관계(官界)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적대시 하게 되었다. AD 29년 혹은 30년경, 예수는 예루살램에서 체포되어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토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 예수는 골고다라고 불리는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밖혀 죽었다.
크리스트교 신앙에 따르면, 그의 몸-영혼과 일체된-은 3일 후 죽음으로 부터 부활했고,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후 40일에 걸쳐 종종 나타났다. 그 후 이들 추종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로마 제국과, 그 바깥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20. 콘스탄티누스의 크리스트교 공인: 325
313 고구려, 한사군을 몰아냄
316 5호 16국 시대가 시작
320 인도에 굽타왕조 성립
330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 비잔틴 제국의 시작.
350 훈족이 페르시아와 인도에 침공
372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됨.
407 최초의 몽고제국이 아바르족에 의해 세워짐.
452 베니스가 훈족에 쫓겨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3 세기 후, 로마제국은 이전의 어떠한 사회도 누려보지 못한 번영을 누렸다. 때때로 일어나는 국경지방의 분쟁만 빼고는, 로마제국은 안정되어 있었으며, 그 군대의 힘도 막강했다. 즉,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세상을 지배했다.
크리스트교가 성장하고 확장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 질서와 상대적인 평화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종교들은 문화의 형태로 세대를 지나면서 계승되어 왔었는데, 이와는 달리 크리스트교는 활발하게 다른 종교들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것은 중동지방에 뿌리를 두고서, 그리스와 이집트로 퍼져나갔다. 크리스트교 선교사들, 특히 크리스트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67AD)와 현재는 성 바오로로 알려진 타르수스의 사울이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을 제국의 모든 지역, 심지어 로마 본토에까지 전파했다.
처음에는, 크리스트교는 로마인들에 의해 관대하게 받아들여졌으나, 이것이 점차 보다 널리 퍼져나가고, 로마제국의 통합에 위협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서, 황제들은 크리스트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콜롯세움에서 로마 관중들의 즐거움을 위해 사자들에게 던져진 크리스트교인들의 비참한 장면들은 눈에 익은 광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크리스트교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 크리스트교는 처음에는 지하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고, 4세기가 시작할 무렵에 가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280-337AD)자신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다. 크리스트교는 콘스탄티누스가 AD 306년에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박해의 대상이었으나, 그의 통치 아래에서, 그것이 수용되고 장려되기 까지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심지어 동,서방 교회간의 교리에 관한 주요한 내부 논쟁을 중재하기까지 했다. 그는 AD 325년 에 니케아에서 대규모 공의회를 주최하여 두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를 초대했는데, 이 공의회에서는 그들의 이견이 해소되었다. 이 모임에서 작성된, 양 교회가 모두 동의한 니케아 강령에는 기본적인 크리스트교의 신앙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는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트교가 외부의 탄압이나 내부의 분쟁으로 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서, 크리스트교를 사실상 온 제국을 통해 국교로서 만들어버렸다.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트교를 보존햇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까지 만듦으로써, 이것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발전 할 수 있는 모든 기본적인 중요한 조치를 다 취했다. 그가 만약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문화사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21. 로마 제국의 멸망: 476
411 성 오거스틴, [신국론] 씀.
433 아틸라, 훈족의 지도자가 되다.
439 북위, 화북을 통일
455 인도의 스칸다굽타는 훈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황제가 됨.
460 마야 도시문명이 남 멕시코에서 번창함.
486 클로비스 왕은 고올에서 로마를 물리치고 메로빙거祖를 성립.
527 유스타니아누스 황제 등극.
기원후 4세기 말엽에 이르자, 로마인들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그들의 제국을 경영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제국은 영국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지중해 해안의 모든 지역에 걸쳐있었다. 제국의 변경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하거나 전갈을 보내는데 걸리는 시간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로마에서 공포된 칙령이나 법령이 제국의 외곽지역에 도달하는데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도 지방에 대한 통제와 지역간 교류가 미약하기는 했지만, 이것들이 이때에 이르러 점차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북유럽에서 온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같은 종족들이 수년에 걸쳐 제국의 국경을 약탈했다. 심지어 이탈리아까지 야만인들의 침공에 시달렸다.
4세기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는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수도를 고도인 비잔티움으로 옮겼으며, 이 도시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개명되엇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죽었을때, 그의 아들들은 제국을 분할하였고, 제국을 두고 자주 다투었다. 분쟁의 최종적인 결과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동로마제국과 로마를 중심으로한 서로마제국으로의 분할이었다.
서로마제국이 그 자신의 중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함에 따라, 북부의 유럽인들은 점차로 제국의 조각난 파편들을 정복하기 시작해서, 이탈리아의 많은 부분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이르렀다. 서고트족의 왕이었던 알라릭은 AD 410년에 로마를 침략해서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훈족의 아틸라는 AD 433년에 로마의 북쪽지방을 공격했다. AD 475년 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선출되었을 때, 그는 한떄는 철옹성이었던 로마의 잔영(殘影)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476년에 게르만족의 왕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포로가 되었을 때에, 결국 505년전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 선포되었던 제국에서 태양이 마침내 지게된 것이었다.
22. 모하메드와 이슬람의 여명
531 카스루 1세가 페르시아의 왕이됨. 사산조 페르시아는 절정기에 달함.
537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 완성됨.
538 불교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파.
570 모하메드, 메카에서 출생.
589 수(隋)나라 성립
594 유럽대륙에서 541년에 일어난 페스트가 끝남. 유럽인구는 절반으로 감소.
600 멕시코 보남파크에 마야의 중심지가 세워짐.
600 와리市가 페루 중심부에 세워짐.
618 당조(唐祖)가 관료제를 중국에 세움.
637 아랍 군대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격파함.
오늘날, 이슬람은 세계인구의 17%인 800만명이 믿고 있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널리 퍼진 종교적인 신앙이다. 이슬람도 유대교나 크리스트교처럼 일신교이다. 이슬람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알라라고 부르는 유일신을 믿는다. 이슬람교도들은 "알라이외에 신은 없다. 모하메드는 신의 선지자일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는 570년경에,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메카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이 어릴적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하메드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부양되었다. 그가 여전히 아이였을 때, 그는 상인이었던 그의 아저씨를 따라서 중동을 여행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였으며, 그들의 사상이나 관습에 친숙해졌다. 그는 유대-크리스트교의 유일신 사상에 끌리고 있었다. AD 610년, 메카 근교에서 명상을 하고 있을 때, 아라비아 반도의 다신교를 믿는 이들에게 일신교를 설교하라는 신의 가르침에 관한 일련의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의 성전(聖典)인 코란도 쓰기 시작했다.
그가 그의 믿음을 따르는 제자들을 얻자, 메카의 정부는 그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모하메드와 그의 추종자들을 도시의 한 구석에 몰아넣고, 만약 모하메드가 그의 설교를 철회하지않고, 그의 추종자들이 모하메드와 유일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굶겨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동안에 이웃하고 있는 메디아에서는 두 개의 대립적인 도당들이 모하메드와 그의 믿음에 흥미를 느끼고, 그를 그곳으로 오도록 초청했다. 그래서 모하메드는 AD 622년 7월 16일에 메카로부터 탈출한다. 모하메드가 탈출한 이 날짜를 '헤지라' 라고 하는데, 헤지라는 이슬람교의 출발점이다.
메디나의 지배자로부터 환영을 받은 후, 모하메드는 이슬람 신앙을 적대 부족들 에게 확산시키는데 사용할 군사를 양성했다. 그는 AD 630년에 되돌아와서, 메카를 정복하였다. 그가 죽음을 맞았던 해인 632년경에는 그의 군대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개종시켜 놓았다. 그가 죽은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이슬람교는 군사적인 힘에 의해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고 온 중동을 가로지르면서 확산되었다. 8세기 중엽에는 이슬람에 의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통치되는 영역이,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중동을 지나 중앙아시아 깊숙히까지 펼쳐져 있었다.
23. 샤를마뉴가 서로마황제로 대관받다: 800
646 일본의 타이카 개혁.
650 멕시코 중앙의 테이티와칸족이 몰락함.
661 회교의 순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이 시작.
668 신라의 삼국통일
700 앵글로 색슨의 서사시인 베오울프가 씌여짐.
700 아프리카의 가나 제국이 흥기함.
711 무어인들이 스페인에 침입함.
751 메로빙거祖 끝남. 피핀은 카롤링거祖 성립.
789 바이킹, 영국에 대한 공격 시작.
790 페즈市, 모로코에 세워짐.
800 서아프리카에 카넴보르누 제국이 성립.
800 말래카 해협에서 스리비자야 제국이 강성해짐.
843 카롤링거祖 베르덩조약으로 분할됨
AD 476년 로마제국이 붕괴한후 몇세기동안, 로마제국의 잔재들이, 지금은 전설상의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독립된 군주들이 다스리는 세력의 중심지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테오도릭 대왕(Theodoric the Great: 454-526 AD)은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을 지배했으며, 클로비스(Clovis)는 오늘날의 프랑스인 프랑크지역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 the Great)는 동로마제국을 비잔티움에서 다스리고 있었으며, 아더왕(King Arthur)은 영국의 캐멀롯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통일성을 잃고, 빈번히 충돌하는 왕국들로 이루어진 누더기가 되면서, 유럽은 문화적으로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암흑시대라고 흔히 묘사되는 중세가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인 무어족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던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분열이 되어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크리스트교라는 공통의 유대를 통해서 통일되어 있었다. 로마에 있는 크리스트교 교황의 본부가 유럽의 정신적 중심으로 남아있었고 한편, 북부 유럽에서는 프랑크족이 강한 군사력과 세속적인 세력으로서 출현하였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26세의 샤를마뉴(Charlemagne : 영어로는 Charles the Great)가 그들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나타났다. 그는 742년부터 814년까지 살았는데, 오늘날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가장 강력한 맞수는 이탈리아의 왕인 데시데리우스(Desiderius)였는데, 그는, 교황 아드리안 1세가 샤를마뉴 선왕이 남긴 어린 아들을 프랑크 왕국의 일부를 다스리는 왕으로 삼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데시데리우스를 물리친 후에, 샤를마뉴는 대부분의 북부 이탈리아지역을 프랑크왕국으로 병합했다. 그때 샤를마뉴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는데, 그들사이의 광범위한 전략들이 양립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샤를마뉴의 목표는 옛 로마제국규모의 제국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었고, 교황 아드리안 1세는 지배적이고, 통합된 정치권력이, 교회와 결합되어 있기를 바랬다. 또 그는 이슬람이 무어의 군사력에 의해 확장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럽이 크리스트교 왕국을 수호하고, 확장시키기를 원하고 있었다.
교황의 정신적인, 정치적인 축복에 힘입어, 샤를마뉴는 덴마크, 독일, 그리고 중부 유럽을, 이미 프랑스와 대부분의 이탈리아를 포함하고 있던 제국에 편입시켰다. 그는 또한 무어족으로부터 스페인을 재탈환했다. 그가 로마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AD 800년의 크리스마스에, 뜻밖에도 샤를마뉴는 아드리안의 계승자인 교황 레오 3세(Pope Leo III: 751-816 AD)에 의해 그 자신이 로마황제로 대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325년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서로마제국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비록 AD 812년에 가서야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서 인정되기는 하지만, 통합되어 있고, 근본적으로 평화적인 상황이었던 팍스 로마나를 유럽인들이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하면서, 샤를마뉴는 재빨리 제국의 대부분 신민들에게 존경을 얻게된다. 이로 인하여, 샤를마뉴의 지배는 암흑시대의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이 있었던 순간이라고 불리워지게 된다.
24. 신성로마제국을 재건한 오토 1세: 962
862 러시아의 노보고로드가 루스 바이킹족에 의해 세워짐
867 콘스탄트노플 대주교인 포티우스는 로마 교회의 분열을 주도함.
906 당나라 끝남. 내전이 시작됨.
911 바이킹의 우두머리인 롤로는 프랑스 노르망디를 불하받아 정착.
918 고려 개국.
939 안남人은 베트남을 중국에서 분리시킴.
950 고전기 마야 문명이 소멸함.
960 송나라 건국.
샤를마뉴 제국은, 샤를마뉴 자신이 의도했던 계승자인 루이 경건왕(Louis the Pious : 778-840 AD)에게로 이어졌다. 그러나 루이 경건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 사이의 내전은 제국을 붕괴시켜서 조각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공백은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채워졌는데, 교회의 정신적인 권위뿐만아니라, 정치적인 권력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은 암흑시대(Dark Ages)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샤를마뉴의 빛나는 통치 이전의 분열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모두 서로 적대시하는 파벌들에 의해서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독일에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했다. '새잡이왕 하인리히'라고 알려져 있는 하인리히 1세( 876?-936 AD)는, 막강한 힘의 원천인 오토 1세( 912-973)라는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를 남기면서, 독일의 제후령들을 합병시켰던 강력한 지도자였다.
오토 1세는 샤를마뉴의 광대한 제국에 포함되었던 땅들을 재통일하려했다. 샤를마뉴가 그러했듯이, 오토 1세의 권위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질서를 회복할 강한 북부 유럽을 바라는 교황의 욕망에서 생겨났다. 교황 요한 12세(Pope John XII)는 이탈리아의 왕인 베렝가와 전쟁중이었으며, 그래서 만약 오토 1세가 베렝가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면, 오토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직함과 왕권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업이 성취되자, 오토 1세는 AD 962년 2월, 제위에 등극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생각은 샤를마뉴와 함께 생겨났고, 지금은 오토 1세에 의해서 부활된 것이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그가 죽은후에 불과 27년동안 존속했을 뿐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토 1세의 죽음 후에도 8세기 이상 살아남았다.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이에 인접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15세기까지 힘과 권력을 계속해서 휘둘렀으며, 1806년까지 그 이름이 존속했다.
의도했던데로, 신성로마제국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유럽의 중심을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결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몇 세기동안, 새롭게 출현했던 강대세력은 신성로마제국의 바깥 쪽에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등이 바로 그런 세력이다.
그러나 독립된 왕국들에 남아있던 자치권은 신성로마제국내 명실상부한 권력 중심이 출현하는 것을 방해했다.
25. 헤이스팅스 전투: 1066
979 송은 중국대륙을 통일함.
987 가롤링거祖 끝탐. 프랑스의 카페왕조 성립.
988 키에프의 블리지미르 1세는 동방정교를 도입.
1000 잔지바르족이 아프리카에 정착함.
1014 하인리히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함.
1018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를 병합.
1035 아라곤왕국과 카스틸랴 왕국 성립.
1050 에드워드 참회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세움.
1054 동방정교와 로마 카톨릭사이의 대분열 생김.
1073 교황 그레고리 7세는국왕 서임권을 없앰.
영국이 19세기에는 힘의 절정기를 맞아 당시까지 알려져있던 세계의 대부분을 거느린 대제국을 통제했다. 그러나 로마제국 시대에만 하더라도, 영국은 단지 거칠은 변방일 뿐이었다. 영국의 겔트족들은 끈질기게도 그들의 독립을 유지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영국이라고 알려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5세기까지 로마제국에 의해서, 그리고 그 후에는 앵글로 색슨족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5세기에는 바이킹족들도 역시 영국에 전초기지를 만들었다. 9세기까지, 앵글로색슨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이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던 26년간을 제외하고는 828년부터 1066년까지 그들은 지배를 계속했다.
1066년에 헤롤드2세는 그의 처남인 에드워드 참회왕을 계승했다. 에드워드는 헤롤드에게 공개적으로 왕좌의 이양을 약속했으나,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의붓형제인 노르망디의 윌리암은 헤롤드가 그 자신을 영국의 왕으로서 지지하기로 했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자신 역시 왕위를 가져야 한다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윌리암은 노르망디와 프랑스의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북부에 있는 노르망디로부터 영국해협을 건너서, 영국을 침공했다. 헤롤드는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암을 맞닥뜨렸다. 헤롤드의 보병부대들은 말을 타고 중무장을 한 노르망디의 군사들을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했다. 윌리암의 기병들은 색슨족의 보병들을 마구 유린했으며, 그 날이 저물어갈때는, 헤롤드와 많은 그의 부하들이 죽었으며, 헤롤드의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있었다.
윌리엄은 크리스마스 무렵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정복자 윌리엄이라고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그의 중요한 승리를 되풀이하려 했지만, 윌리암은 무력에의해 영국을 성공적으로 침범한 역사상의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노르만의 침범은, 영국에 유럽대륙의 예술과 문학의 영향력을 미쳤다. 비록 영국이 영어를 사용하는 상태로 남아있기는 하였지만, 유럽이 제공하였던 최상의 것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영국문명의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영국문명은 이어서 북아메리카의 문명을 정의하고 창조하는데 기여하였다.
26. 십자군 원정: 1096-1270
1086 토지사용, 보유 대장인 둠즈데이북이 영국에서 만들어짐.
1094 앗시시 교단이 생김
1100 나이지리아의 카노는 하우사 도시국가 중 강성해짐.
1117 중국에서 최초로 나침반을 항해에 사용.
1130 스테인드 글래스가 최초로 교회장식에 쓰임.
1150 볼로냐 대학에 최초로 의학부가 생김.
1154 앙주의 앙리가 영국의 헨리 2세로 즉위. 플란타지네트 왕조 시작.
1170 고려의 무신정권 성립.
1180 크메르 제국은 캄보디아에서 절정기를 맞음.
1206 몽고의 테무친은 스스로를 징기스칸(세계의 지배자)라 칭함.
1210 프란체스코 교단 생김.
1227 징기스칸 사망. 제국은 4분할됨.
1260 쿠빌라이 칸, 몽고의 황제로 스스로를 선포함.
1271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폴로는 중국에 이르는 여행을 시작.
AD 475년 서로마제국 멸망후에,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있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성지로 가는 길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AD 610년에 예루살렘은 페르시아인에 의해 점령당하는데, AD 630년까지 그들은 그곳을 지배하게 된다. 동시에 모하메드는 무력의 힘에 의해 이슬람에 확산되고 있던 그 자신의 철학을 설교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AD 638년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8세기초까지 그들은 스페인에서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을 정복했다. 그들은 성지를 방문하고자 하는 순례자들에게 계속해서 관대했으며, 심지어는 샤를마뉴 대제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쉬드가 동맹을 맺기도 했다.
1017년에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로마누스 디오게네스는 투르크에게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다. 이것은 동로마 제국의 붕괴와 총체적인 혼란을 초래했다. 이때, 투르크는 효과적으로 유럽인들의 성지순례를 차단하고 있었다. 1095년 클레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반2세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같은 크리스트교 지역의 기사들에게 성지를 수복할 수 있을 군대를 일으키라고 요구했다. 1096년의 첫번째 시도는 빈약하게 조직되었고 따라서 참담한 실패인 듯했다. 그러나 용감한 십자군들은 1097년에 돌아왔고, 2년후에는 예루살렘을 재수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1099년에 선언되었고, 1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으로 간주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45년동안 지속되었으나, 1144년 투르크에 의해 침략당했다. 제 2차 십자군은 1145년에 실패하였고, 3차 십자군도 1189년에 같은 전철을 밟았다. 1200년에서 1204년 사이의 제 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지는 못하였으나, 프랑스의 기사들은 동방 정교회 아래에 놓여져있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1262년까지 살아남게 되는 로마 크리스트교 왕국을 건설하였다. 계속 이어진 1212년과 1270년 사이의 4번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어느 것도 첫 십자군 원정이 이루었던 것 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대부분 완전한 실패였다. 아마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212년의 소년 십자군이었다. 성지에 갔던 50,000명의 소년중에 단지 201명만이 살아서 귀향할 수 있었다.
유럽에 있어서 십자군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일련의 군사적 패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방과의 접촉을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을 투르크의 지배하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십자군은,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은 물론이고, 유럽인들에게 더 확대된 시각을 가져다 주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많은 이들이 십자군은 궁극적으로 르네상스를 앞당겼던 촉매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다.
27.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 1215
1215 몽고는 진을 격파하고 북경을 점령.
1222 파두아 대학이 이탈리아에 세워짐.
1234 고려에서 불경인쇄 시작.
1242 로저 베이컨은 화약 제조식을 기술함.
1248 크리스트교도들이 스페인을 거의 탈환.
1257 소르본느 신학부가 파리대학에 설치.
1261 미카엘 8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비잔틴제국을 다시 세움.
1273 루돌프 1세가 독일의 왕이되면서 합스부르크왕조를 성립.
1279 쿠빌라이 칸은 원나라를 세움.
역사상에는 선한 군주들과 악한 군주들이 있었다. 친절하고 자비심 많은 군주들도 있었고, 사악하고 원한이 많았던 군주들도 있었다. 그러나 13세기까지는 대부분 절대군주들이 존재했다. 심지어 함무라비나 아소카같은 계몽군주의 경우에 있어서도 왕은 왕이고, 그의 칙령은 그 지역의 법이었다. 기본적으로 교회가 발한 칙령을 제외한 유럽의 법은 왕의 자유 재량으로 제정되어서, 대대로 계승되었다. 왕은 그가 원하는만큼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나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인 사자심왕 리차드를 1199년에 계승한 잉글랜드의 존왕이 잔혹한 지배자였다. 존은 탐욕스럽고, 믿을 수 없었으며, 무능력했다. 그는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유지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가차없이 세금을 부과시켰던 영국의 귀족들을 비롯한, 교황 이노센트 II세로부터 영국의 모든 국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야기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존의 지배를 반대하는 계층은 실로 다양했다. 결국 귀족과 영주들은 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것은 세금부과에 의해 유지되던 정부에 대해서, 귀족이나 지주들의 보다 확장된 지배권에 대한 요구를 존왕이 동의하기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자신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귀족이나 지주들은 마침내 그들의 요구에 대한 왕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마지못해, 존왕은 1215년 6월 15일 러니메드라고 불리는 윈저궁에서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 헌장은 권리에 대한 63개의 권리에 대한 개요로 구성되어 있었고, 왕의ㅁ 과도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이러한 자유를 결코 부여할 수 없다."며 존왕은 조소했다. 그러나 왕은 귀족들의 압력속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사인할 수 밖에 없었다.
헌장은 여전히 영국의 법률체제의 주춧돌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실 북아메리카를 포함한 세계의 많은 곳에서도 법체계의 근간을 이룬다. 대헌장은 배심원에 의한 심리권을 포함해서, 형벌은 범죄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내리고, 세금은 공평성과 비례성에 맞추어 부과되도록 하는 등의 다양한 개인권리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오래 지속된 마그나 카르타의 의의는, 왕이 더 이상 법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민들처럼 그 땅의 법이나 관습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확실히 한 점이다.
28. 징기스칸과 그의 제국: 1227
1248 독일의 쾰른 대성당 걸설.
1249 알퐁소 3세는 포루투갈에서 무어인을 몰아냄.
1252 스톡홀름이 스웨덴에 세워짐.
1260 파리는 직조공업의 중심지가 됨.
1264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를 물리침.
1266 앙주의 샤를르 1세는 나폴리와 시실리의 왕이 됨.
1274 몽고는 일본을 정벌함.
1284 제노아의 함대는 피사를 물리치고 지중해의 맹주가 됨.
13세기에, 중국인들은 단지 유럽인들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어느 한사람에 의해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었는데, 징기스칸과 그의 유목민 무리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부터 온 것처럼 보였으며, 온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중국이나 유럽문명에 관해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몽고의 전쟁군주 징기스칸은, 아마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대의 지도자로 군림했는데, 그는 유르트에서 자고, 빠르고 억센 몽고의 종마를 타고 다녔다. 12세기 후반에 그는 몽고족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몽고제국의 잠재적인 역량에는 한계가 없어 보였다.
몽고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넓은 광야에 사는 유목민들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그들은 서로 싸우거나 중국제국의 변방 마을을 노략질하는 것으로 스텝지방내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본거지의 주변부 너머에 사는 사람들만이 그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뿐이다.
기원전 200년경에 건설된 중국의 만리장성은 대체로 몽고인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도 몽고인들이 거주하는 춥고 높은 사막지대로부터 수천마일 떨어져서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이러한 성벽도 공간적인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징기스칸은 첫 목표를 타르타르족으로 잡았다. 그들을 물리친 후에 그는 중국이 있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중국에는 금나라가 멸망 직전이었으며, 따라서 약탈적인 몽고인들에게는 중국은 손쉬운 대상이었다. 징기스칸은 1214년 북경을 점령했고, 1219년에는 대부분의 중국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정복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서쪽의 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무장된 기병의 거대한 물결로 알이름을 떨친 "몽고족"들은 러시아를 거쳐서, 페르시아 제국을 먹어치운 후 폴란드와 헝가리를 삼켜버리면서 모든 유럽을 위협했다. 이후 8년의 기간동안, 징기스칸은 세계가 이전에는 미처 보지못했던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나갔다. 단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대영제국만이 징기스칸의 제국보다 조금 컸을 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 혹은 페르시아의 황제들와는 달리, 징기스칸의 정복에 대한 생각은, 점령해서 이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유린하고, 약탈하고, 그리고 그의 앞길을 놓여있는 것은 무엇이나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가 완전히 인간 생명을 경시했다는 사실은, 온 유라시아 대륙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목민 부족의 승리는 징기스칸의 통솔력과 그의 몽고통일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오가디칸이 징기스칸의 사후에 그를 계승하고 정복을 계속했지만, 몽고의 위압적인 힘은 궁극적으로 활력을 잃고, 유목민들은 중앙아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몽고제국이 역사속에서 가져왔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서로 지구의 반대쪽에 살던 사람들-유럽인과 중국인-에게 상대방에 대한 자각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은 중동과 유럽 사이의 고대의 대화를 다시 열어주었다. 그러나 몽고와의 접촉후에야 유럽인들은 극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29.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마르코폴로
1290 에드워드 1세는 영국에서 유태인을 추방.
1290 오스만 1세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성립.
1291 스위스 연맹(스위스)가 성립.
1293 마야파히트 왕국이 자바에 성립.
1294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대성당이 세워짐.
1300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유럽에 등장
1312 만사 무사는 서아프리카의 말리 왕국의 왕으로 즉위.
1325 아랍 지리학자 이븐 밧투타는 탐사를 시작.
1331 모스크바의 크레믈린이 최초로 언급됨.
1337 영국과 프랑스간에 100년전쟁 시작.
13세기까지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상은 몽고인들에게 겪었던 끔직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따라서 몽고권 밖에 있는 다양한 중국문화에 관한 지식은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문화들간에 상호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를 못했다. 그들의 문자, 언어, 문화적 전통은 독립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당시에는 중국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며, 1269년 니콜로 폴로와 그의 형제 마페오 폴로가 중국까지 다녀와서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였던 베니스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도시 중의 하나였는데, 이 도시 출신의 두 형제는 무역사업을 위해 흑해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투르키스탄-후에 舊소련의 중앙아시아 공화국이 된다.-에서 온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주선으로 이 이탈리아에서 온 두형제는 중국의 몽고황제인 쿠빌라이칸의 궁정에서 온 사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폴로형제가 중국을 방문해서, 유럽인들을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들의 황제를 만나도록 초청했다. 폴로형제들의 이야기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던 쿠빌라이칸은, 유럽의 기독교와 예술, 문학을 중국에 소개해 줄 선교사의 파견해주기를 그들 형제를 통해 교황에게 요청했다.
1269년 형제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친구들은 그 엄청난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1271년 그들은 중국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이번에는 아직 10대인 니콜라스의 아들, 마르코를 동행하기로 했다. 쿠빌라이칸은 이 아이를 좋아하였고, 그를 대사로 임명하여, 티벳이나 버마 뿐만 아니라 중국내에서의 많은 임무에 그를 파견했다. 마르코폴로는 이제까지의 아시아를 본 어떤 유럽인보다도, 아니 아시아를 보려고 꿈꿔왔던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아시아 지역을 둘러 보았다.
마르코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서 20년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그는 아시아의 언어와 관습을 배웠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폴로가 1295년 베니스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또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믿지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중국에서 배운 것들을 보여주자, 그의 동료 베니스인들은 결국 그 사실을 확신했고, 폴로 일행을 환영하고 칭송했다.
그들이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많은 경이로운 물건들은 유럽인들이 그 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으로부터 스파게티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르코 폴로의 저서인 '마르코 폴로의 여행'은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기행문일 것이다.
대륙을 통한 여행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유럽과 극동의 교역은 아주 느리게 발전했다. 그러나 이용가능한 교역 루트를 자세히 소개한 책을 마르코 폴로가 펴내자, 그 길이 열리게 되었다. 사실 2세기 후의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의 항해는 중국으로 가는 보다 쉬운 길을 발견하고자하는 욕망에 의해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30. 흑사병: 1348-1350
1345 아즈텍 인들은 테노치티트란(멕시코 시티)를 세움.
1346 영국은 끄레씨에서 프랑스군 격파.
1368 중국의 명나라 성립.
1370 바스띠유 성의 건설이 시작됨.
1378 대분열 시작. 로마와 아비뇬에서 두 교황이 등장.
1380 러시아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몽고인을 격파.
1381 영국에서 농민 반란이 시작.
1386 영국의 초서는 켄터베리이야기의 집필 시작.
1392 조선왕조 시작.
1394 타이는 캄보디아를 침공.
1415 죤 후스는 이단심판을 받고 화형당함.
20세기의 항생물질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의 몇 세기동안에는, 항상 질병들이 만연했었고, 전염병들은 끊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40세를 넘지 않았고, 유아사망비율은 오늘날보다 훨씬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세기 중반에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은,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재앙이었다.
흑사병 이전에 발생했던 전염병들은 대개 맹렬하기는 했지만 단기간으로 끝나버리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염병들이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 제한되어서 기승을 부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흑사병 창궐의 결과는 참혹했으며, 시칠리와 스웨덴까지 그리고 영국에서 스페임에 이르기까지의 온 유럽에 걸쳐 퍼져있었다.
이 병은 피부밑에 생기는 검은빛의 피물집에 의해서 감염이 확인되었는데,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물집들은 대개 고열과 강한 통증, 그리고 임파선이 붓는 현상을 동반하는데, 결국은 죽음을 초래한다. 치료될 수 없었던 폐렴이나 매독도 자주 출현하였다. 질병들의 원인이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신의 재앙이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임상적으로 흑사병은 선페스트였는데, 이것은 갈색 쥐들에 의해서 옮겨지는 벼룩이 물었을 때 혈관속으로 주입되는 바실라스 페스티스 Bacillas Pestis라는 세균때문에 발병하는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어떤 이들은 자살을 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질병의 확산을 멈추게 하려는 시도로서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 태워버리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흑사병의 물결을 막아보려는 종교적인 노력이 실패하면서, 교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였고, 그래서 '흑마술'같은 反종교적 행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흑사병에 의한 사망자는 2천 5백만에서 3천 5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전체 인구의 1/3정도가 1348-1350년 사이에 죽었다. 어떤 작은 도시들은 그들 주민의 90%를 잃기도 했다. 독일의 함부르크는 그들 시민의 2/3을 잃었으며, 영국은 인구의 반 이상을 잃었다. 전 가족이 몰살당하기도 했으며, 그렇지않은 가족들조차도 살아남은 아이들이 다른 가정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유럽의 경제는 극적인 변화를 하고 있었다. 심각한 노동력의 부족은 높은 임금과 제품생 산에의 높은 비용,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물가상승을 초래했다. 많은 회사들이 파산했고, 토지 소유자들은, 그들의 가게를 돌보거나,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곧잘 그들의 재산을 상실했다. 노동집약적인 봉건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유럽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킨 대변동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경제뿐만아니라 종교적인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가 질병앞에서 무능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흑사병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앞당기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비록 흑사병이 1350년 이후에는 덜 가혹했지만, 이후에도 여러해 계속 되었다. 흑사병을 통한 희생자가 많았기 때문에, 유럽의 인구가 1347년의 수준에 도달하는 데에는 200년의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31. 인쇄술을 소개한 구텐베르그
1429 잔다르크는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고 영국군을 격파함.
1431 타이군은 크메르의 수도 앙코르에 침입.
1434 코시모 드 메디치는 플로렌스의 권력을 장악함.
1438 잉카제국이 페루에 성립.
1448 헝가리인들은 투르크를 물리침.
1450 아라비안 나이트가 이시기에 기록됨.
1450 스뽀르자 기만이 밀라노의 권력을 장악함.
1453 오스만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비잔틴제국은 멸망함.
1453 프랑스군은 보르도를 탈환. 100년전쟁 끝남.
1455 영국에서 장미전쟁 시작.
1464 순니 알리는 서아프리카에 송가이 왕국을 세움.
1469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왕은 카스틸랴의 이사벨라여왕과 결혼.
1473 로마의 시스틴 성당이 건설됨.
1478 로렌조 메디치는 플로렌스를 통치함.
1480 이반 3세는 타타르족을 물리치고 러시아를 통일함.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책과 같이, 특정한 문서의 수많은 인쇄물사본들은, 우리가 오늘날 필수적인 기초기록으로서, 아니면 글로 쓰여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당연시 하는 것이다.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했을 때부터 15세기 중반까지, 약 5000년동안 문자로 쓰여진 모든 기록들은 중국의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세계 도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만약 초기 원고의 여러 예들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손으로 쓰여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던 광대한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세의 유럽에서는, 많은 수도원의 수사들이 성경 및 다른 중요한 기록들의 필사본을 만드는데 일생을 바쳤다.
인쇄 -기계를 이용하여 쓰여진 기록을 여러 개의 목사본으로 만드는 과정- 는 조각한 돌에 문자나 단어를 세기고, 잉크를 묻힌 후, 종이나 다른 곳에 그 초상을 찍는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필승(必昇)은 일반적으로 인쇄기를 발명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진흙을 구운 다음 그안에 문장을 새겨 넣어 만든 것으로, 그의 첫번째 기록을 인쇄했다. 피챙의 이러한 방법은 1298년 왕젠(Wang Zhen)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왕젠은 문자를 딱딱한 나무에 새긴 뒤에 책은 물론 심지어는 신문까지도 인쇄했다.
이후 몇세기동안 유럽인들의 중국 교역이 점차로 확대되고 번성하면서, 곧 인쇄술이 서구에 알려지게 되었다. 1423년 폴란드의 알파벳 인쇄 숙련공인 로렌스 얀스준 코스터 (Laurence Janszoon Coster)는 금속을 사용하여 문자를 진흙판에 인쇄했다. 이러한 방법은 손으로 옮겨적는 방법으로부터는 놀라운 발전이었으나, 그래도 보편화되기에는 무리였다. 1436년에 39세의 독일인 요한 구텐베르그는 보다 빠르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인쇄할 수 있는 기계(the printing press)를 이용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피챙의 고안이었던 움직이는 형태를 받아들여서 재발명해냈다. 여러 방식으로 조합될 수 있는 문자들을 전체 면에 배열하는 것이다. 구텐베르그는 1456년 독일의 마인즈에서 첫 대량 인쇄를 통한 성경을 발행했다. 그리고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모든 유럽에 기계에 의한 인쇄가 확산되었다.
구텐베르그는 단순히 인쇄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 의사소통의 역사에 있어서, 그 이전의 어떠한 것보다도 더 훌륭한 충격이었으며, 이후 500년동안 발생했던 어떤 것보다도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위대한 혁명을 출발점이 된 인쇄 기계 사용이라는 발전을 이끈 촉매역할을 한 것이다.
32.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1482 포르투갈인은 아프리카의 황금해안(가나)에 정착.
1485 영국에서 종획운동이 시작함.
1485 보티첼리는 플로렌스에서 비너스의 탄생을 그림.
1486 아즈텍인은 멕시코에서 오자카市를 세움.
1488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희망봉을 최초로 발견.
1498 칫솔이 중국 치과의사에 의해 고안됨.
1504 바부르는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세움.
콜롬부스의 미대륙 도착은 인류 역사를 형성했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확실히 콜롬부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산살바도르의 해안에 상륙했을 때 9백만명의 원주민들이 이미 서반구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큼, 동반구에 대한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두 개의 반구는 서로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르고, 독립적이었다. Leif Ericson의 지휘하에 일단의 바이킹들이 AD 1000년에 노바 스코티아에 정착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신들이 새로운 반구에 상륙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결국 콜롬부스는 양 반구사이의 교류의 시대를 열어놓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가 서반구와 동반구라는 커다란 땅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콜롬부스의 시대 이전까지 유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학설은, 지구는 마치 접시처럼 평평하고, 만약 대양쪽으로 계속 항해를 해나간다면, 그 끝의 가장자리에서 추락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덩어리로 된 세계는 물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이 전부였다.
콜롬부스는 이탈리아의 항구도시인 제노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구는 구형이며, 동쪽이나 서쪽으로 계속해서 여행한다면 , 원래의 출발한 장소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 이론을 입증할 실재적인 근거가 또 있다. 15세기까지 마르코 폴로의 자취를 따라 교역하던 베니스의 상인들에 의해 활발해진 극동과의 교역은 유럽에서 매우 번성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폴로의 대륙횡단 교역로는 아주 멀고 어려운 여행이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믿는, 콜롬부스 같은 항해사들은 서쪽으로 항해하는 방법에 의해 극동에 도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콜롬부스는 그의 모험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정부를 찾아다녔다. 그는 제노아와 베니스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그의 제의를 거절당했다. 그는 다시 페르디난드 5 세와 스페인 까스틸랴의 여왕 이사벨라에게 갔으며, 이들은 세척의 배 -니나, 핀타, 산타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세 척의 배-와 항해를 위한 선원들을 제공했다. 콜롬부스는 1492년 8월 6일 항해를 시작했으며, 그의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던 5주간의 시간을 보낸후에 10월 12일 서인도제도의 산살바도르에 원정대를 상륙시켰다.
그는 1493년 3월 15일 스페인으로 귀환했고, 1493년과 1500년 그리고 1502년 식민지 건설을 위한 일련의 항해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1506년 가난과 천시속에서, 그가 여전히 아시아를 발견했다고 죽는 순간까지 믿고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정력적으로 탐험과 식민화에 노력을 기울여, 한세대안에 서반구 동쪽 해안의 대부분을 탐사하게 되고, 콜롬부스가 실제로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33. 르네상스
1495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밀라노에서 최후의 만찬을 그림.
1498 루이 12세는 샤를르 8세를 이어 프랑스의 왕이 됨.
1498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 상을 만듦.
1498 포르투갈 탐험가인 바스코 다가마는 인디아에 도달함.
1500 네덜란드의 히에로니무스 보슈는 지상 광명의 낙원을 그림.
1501 이탈리아의 아메리소 베스푸치는 브라질을 탐험.
1503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림.
1504 라파엘로는 성녀의 결혼을 그림.
1506 이탈리아 건축가 브라만테는 성베드로성당의 설계를 시작함.
1508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성당의 벽화를 그림.
역사적으로, 르네상스는 대략 1500년을 중심으로 25-50년 정도 계속된 시기였다. 이 시기의 특징은 유럽을 중세의 지적 암흑상태에서 벗어나게 한 예술, 사상, 그리고 문학의 찬란한 개화라고 말할 수있다. 이것은 중세가 자연적으로 발전하여 뻗어나간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혁명으로, 중세 사상과 전통의 경직성에 대한 반동이었다.
르네상스라는 단어는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재생 혹은 부활을 뜻한다. 르네상스로 알려진 이 시기는 그리스, 로마문명("고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의 황금기 문명의 재발견으로 간주되었다. 사실,르네상스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전문학을 읽고, 고전사상을 다시 탐구하기도 했지만, 르네상스의 진정한 핵심은 수많은 기술혁신과 발명에 있다. 유럽 전역에서 대학들이 생겨났고, 여러 사상이 급격히 보급되어 나갔다. 요한 구텐베르그는 1450년에 실용적인 인쇄기계를 발명했고, 출판업이 탄생했다.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는 로테르담의 재치있는 네덜란드인 교부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인데, 그의 인본주의 사상들은 관대하고 진보적인 르네상스사상의 축도(縮圖)이다.
인쇄기계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르네상스가 그렇게 빨리 발생했고 유럽전역에 걸쳐 일어났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예술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중 상당수가 이 시대 사람들이었다. 이탈리아에는 산드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부나루티, 페루지노, 라파엘로, 티치아노 베셀리, 그리고 위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었다. 이 예술가들은 자연의 모습과, 빛과 그림자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그 모습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함으로써 예술을 혁신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알프스 이북에도, 같은 정도로 인상적인 예술가들이 있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 루카스 크라나흐, 알프레히트 뒤러,한스 홀바인, 한스 멤링이 그들이다.르네상스는 시각예술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플레미쉬의 작곡가인 죠스껭 데 프레는 긍휼미사곡(Miserere mei, Deus: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을 작곡했는데, 이곡은 초기 대위법의 진수로 여겨진다.
이 모두는 콜롬부스가 1492년 그의 영웅적인 첫항해를 달성했을 당시에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미켈란제로나 뒤러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시작한 원정대가 지구를 한바퀴 돌았을 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과학분야에서는, 르네상스기 혹은 그 직후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혁신시키고 있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사람들이 믿고 있던 바와는 반대로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요한 케플러는 행성운동의 법칙을 설명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던중, 목성의 위성들과 토성의 띠를 발견했다. 윌리암 길버트는 1600년에 전기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고, 안드레아 베살리우스는 최초로 근대적 외과 기술을 사용했다.
르네상스는, 서양 예술과 문화의 많은 측면에서 그 진로에 급격하고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하나의 이정표적 사건이었다.
34. 종교개혁
1511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신성동맹을 조직함.
1511 포르투갈인은 최초로 시암(태국)에 도달.
1512 셀림 1세는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됨.
1514 스페인 정복군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지휘아래 쿠바정복.
1516 토마스 무어는 유토피아를 씀.
1519 쵸콜릿이 음료로서 스페인에 도입됨.
1519 헤르난 코르테즈는 아즈텍의 지도자 몽테주마와 조우함.
1520 포르투갈 항해가인 마젤란은 마젤란 해협을 발견.
예수 그리스도 사후, 그의 제자들은 오직 예수의 말씀과 사상으로만 무장한 채, 세상으로 나아갔다. 초기에는 크리스트교도들이 고난과 박해에 부딪혔지만, AD 325년에 이르러서는, 크리스트교가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그이후 몇세기에 걸쳐서 로마교회는 정신적 권위뿐 아니라 정치적 힘까지 행사하게 되면서,서로마 제국의 붕괴가 남긴 공백을 메웠다.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대개 부패하기 마련이고,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건하고 지적으로 뛰어난 성직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권력남용이 있었다. 그중 중요한 것중 하나가 면죄부 판매였는데, 여기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교회에 돈을 지불하면 신의 심판을 면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동안에는 교회정책에 비추어 보아 이단이라 생각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문을 받거나 처형당했다.
14세기에 이르면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프라하의 존 후스같은 존경할만한 종교인들이 부패한 교회 관습에 반대하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으며, 교회 자체내에서도 점증하는 불만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사인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반박문을 붙인 1517년 10월 31일, 결국 이러한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면제부의 악용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에서, 루터는 마인츠의 알프레히트 대주교를 면죄부 판매에 대한 사기행위로 비난했다.(그 주교는 돈을 착복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루터는 또한 면죄부 판매행위를 전반적으로 비난하였다.
루터는 이단(공식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일련의 믿음이나 의견에 집착하는 사람들)으로 고발되었으며, 1521년에 파문(교인 명부에서 삭제당하는 것)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을 지키려는 그의 용기는 특히 독일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루터의 지도에 따라 교회를 탈퇴했다. 로마교회에 대해 전면적으로 저항했기때문에, 그들은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다. 루터 자신은 크리스트교 가르침을 포용하지만, 로마 교회의 정치적인 권위를 부정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을 조직했다. 결국에는 많은 프로테스탄트 단체들이 생기게 될 것이지만, 루터의 크리스트교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루터파라고 불렀다. 오늘날 루터파는 스칸디나비아반도, 독일의 대부분, 북아메리카의 일부분에서 지배적인 종교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이 혁명은 로마교회를 파괴것이 아니라, 사실상 로마교회를 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루터는 크리스트교의 대안적인 형태를 만들었을 뿐아니라, 로마교회로 하여금 권력의 남용을 스스로 억제하도록 만들었다.
35. 스페인의 신세계 정복
1523 스페인 정착촌이 베네주엘라에 건설.
1524 중부 유럽에서 농민 전쟁이 일어남.
1531 종교전쟁이 스위스에서 발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쯔빙글리가 전투에서 죽음.
1532 토머스 크롬웰이 영국의 호국경이 됨.
1533 프란시스코 피자로는 잉카를 정복.
1536 쟝 칼벵은 기독교 교리론을 출판.
1542 헨리 8세는 케서린 왕비를 처형함.
1556 무굴 제국의 악바르는 왕에 즉위함.
1558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왕에 즉위.
1584 러시아의 이반 뇌제(雷帝) 죽음.
유럽의 역사는 정치, 경제 세력들의 흥망으로 가득차 있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무렵,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3000년전의 페니키아나 400년 뒤의 영국과 매우 유사하게 강력한 무역국가로 가는 문턱에 서있었다. 스페인은 재빨리 움직여 신세계를 개척했고, 한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남단을 도는 항로를 이용하여 극동지방과 교역을 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149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에 도달하였고 곧 아시아로가는 항로가 열렸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은 서반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도 역시 재빨랐다. 그래서 교황은 양국의 요청에 따라 신세계를 스페인 영역과 포르투갈 영역으로 분할했다. 포르투갈에게는 불행하게도 1494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서반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으므로, 양국이 합의한 남북 분할 경계선은 포르투갈이 신세계의 극동부만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지역이 훗날 브라질이 된 것이며, 오늘날 이 나라는 서반구에서는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지역으로 남아있다.
스페인인들은 신속하게 나머지 아메리카 지역을 경략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특히 엘도라도-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신화국인 황금의 도시로 불리는-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복 과정에서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신세계에서 가장 고도로 진화한 두 개의 문명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멕시코의 테오티후아칸을 중심으로 한 아즈텍 제국과, 오늘날의 볼리비아지역에 해당하는 티티카카호수 이남-티아후아나코를 중심으로 한 잉카제국이 그것이었다. 이 두 문명은 약 천년을 이어왔는데, 거대한 도시들-테오티후아칸은 1500년 당시에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을 건설했고, 수학,천문학과 그밖의 과학들에 통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16세기 유럽의 전쟁기술을 터득하지는 못했다.
1521년 8월 14일 테오티후아칸에서 말을 타고 화기(火器)를 소지한-두가지 모두 남아메리카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헤르난도 코르테스가 이끄는 비교적 소수의 정복자들이 테오티후아칸에서 아즈텍의 지도자였던 몬테쥬마의 군대와 만나 이를 격퇴했다. 정복된 아즈텍 제국에서 코르테스가 보여주었던 잔혹함에는 1535년 잉카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만이 필적할 수있을 것이다.
이 두 아메리카 토착 제국들이 정복자들에게 패배한 것은 구세계와 신세계 제국들간에 일어난 최초의 중요한 충돌이었으며,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 충돌로 신세계의 광대한 광물자원이 스페인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것이 향후 100년간 스페인을 세계 최강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승리는 스페인 제국의 확대를 더욱 촉진했으며, 결과적으로 서반구 사상 최대 규모의 제국 출현을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날 서반구에서 5억명이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어도 영어 사용인구의 1.5배는 되는 것이다.
36. 근대 북아메리카의 창조.
1588 스페인 무적 해군은 영국해군에게 패배함.
1590 힌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함.
1591 송가이 왕국은 모로코군에 패배.
1598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의 짜르로 즉위. 혼란기가 시작.
1600 지오르다노 부르노는 로마에서 이단으로 화형당함.
1601 예수회의 전도사로서 마테오 리치는 북경에 도착.
1601 누르하치는 만주족을 통일.
1602 동인도회사가 설립됨.
1603 이예아쓰는 도쿠가와 막부를 세움.
1618 신교와 구교간의 30년 전쟁 시작.
16세기 내내 1492년 콜롬부스가 "발견"했던 신세계는 유럽의 진출과 식민화의 표적이 되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서인도 이남지역를 분할한 최초의 세력이었다(포르투갈은 오늘날의 브라질을 차지했으며, 스페인은 나머지 거의 전부를 차지하였다). 탐험가인 헤르난도 코르테스는 멕시코에 발판을 구축하여 16세기 초반에 남아메리카를 약탈했다. 16세기 후반에는 스페인은 플로리다에 진출했으며, 네덜란드인과 프랑스인은 그보다 북쪽,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의 동부지역에 전진기지를 세웠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미국지역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될 것이지만, 영국인들은 다른 나라들에 뒤이어 북아메리카대륙에 가장 큰 규모로 진출했다.
1497년, 존 캐보트가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해안을 탐험했고, 프란시스 드레이크경은 1572년이후 서반구 해안선의 상당부분을 탐사하였다. 그러나 초창기의 영국탐험가들은 신세계 자체보다는 중국으로 가는 무역로를 찾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또 다른 위대한 보물 탐험가였던 월터 롤리 경은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이 그랬듯이 북아메리카에서도 금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랬지만 금을 찾으려던 노력과 1584-1587에 걸쳐 영구적인 식민지를 건설하려던 계획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서양 연안의 좁은 지역을 영국영토라고 선언하고, 그의 친구이자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기념하여 버지니아라고 명명하였다.
1607년 영국인들은 마침내 세계 최대의 영어 사용국으로 발전할 씨를 심었다. 존 스미스 선장은 버지니아 지역의 제임스 타운(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에 정착지를 세웠다. 이 식민지는 여러번 거의 실패할 뻔했지만, 식민지인들은 계속 버티어 나갔다. 1619년에는 제임스 타운 주민들이 북아메리카 최초의 대의체(代議體)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후일 일반화된 정부 형태의 선구였다.
1620년에는 스스로를 순례자(Pilgrims)라고 부르던 일단의 영국인들이 오늘날의 메사추세츠 지역의 플리머스에 또 다른 정착지를 세웠다.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와서 정부의 간섭없이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식민지를 세웠다. 플리머스는 최초로 유럽의 정부로부터 특허장을 받지않은 평범한 유럽인들이 세워 성공한 북아메리카 정착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후 300년을 거치는 동안, 제임스 타운과 플리머스에서 소수의 단호한 정착민집단으로 출발했던 것이 세계 최강의 정치,경제적 세력으로 성장했다.
37. 아이작 뉴튼의 발견
1621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 설립.
1623 압바스 1세는 투르크로부터 바그다드 정복.
1627 청나라는 조선 침입.
1630 부탄은 티벳으로부터 독립.
1636 보스턴에 하바드 대학교가 세워짐.
1637 르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출판.
1639 도쿠가와는 일본의 쇄국을 시작함.
1644 올리버 크롬웰의 모범 군대는 왕당파의 군대를 격파함.
1644 만주족은 북경을 점령하고 청나라를 세움.
1649 차알스 1세가 처형당함. 영국 공화정이 성립.
1665 장 밥띠스뜨 콜베르는 루이 14세의 재무장관이 됨.
그는 아마도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과학자였다. 그는 확실히 아르키메데스 시대와 아인슈타인 시대 사이에 살았던 유럽의 과학자중 가장 위대한 이였다. 24세 이전에 아이작 뉴튼은 미적분학을 고안하고 빛의 스펙트럼을 발견했으며, 중력이론을 저술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중력개념은 그가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있을 때 떠올랐다고 한다. 그런 평범한 사건으로부터 복잡하고, 보편적인 법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확실히 천재였다는 찬사가 될 것이다.
뉴튼은 또한 반사망원경을 발명했는데, 그것은 빛이 큰 오목거울에서 작은 평면거울을 거쳐, 유리를 통과하는 일없이 직접 눈으로 반사된다는 점에서 보다 단순한 굴절망원경과 달랐다.
1667년 그가 25세였을 때, 뉴튼은 영국 캠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미 주요한 몇가지 이정표를 경험했던 젊은 시절의, 기념비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의 3원칙을 발견한 것은 그가 캠브리지에 있을 때였다.
1. 관성의 법칙: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의 움직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할 때, 정지해 있었다면 계속 정지해 있을 것이고 움직이고 있었다면 일정한 속 도로 계속 운동할 것이다.
2. 가속도의 법칙: 물체의 운동량의 변화율은, 크기와 방향에서, 그 물체에 작 용하는 힘에 따른다.
3. 작용.반작용의 법칙: 모든 작용에는 그 반대방향으로 같은 크기의 반작용이 존재한다.
1687년 그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을 출간했다. (원래 라틴어로 저술되어 출판되었기에) 프린키피아the Principia로 알려진 이 저서에서, 뉴튼은 우주의 구조와 행성의 운동를 설명하고, 태양과 행성, 달의 질량을 계산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는 지구가 구형임을 증명해 놓았는데, 뉴튼은 지구가 완전한 球가 아니라 타원형-자전의 원심력에 의해 극부분이 약간 평평한-임을 증명했다.
마르코 폴로나 콜럼버스가 우리 조상들의 세상에 대한 지리적인 시야를 확대시킨 것 처럼, 뉴튼은 하늘의 유성에서 뒷뜰의 사과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체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데 있어 이전의 (혹은 아인쉬타인 이전까지의)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이루어놓았다. Principia는 너무 복잡해서 단지 진지한 자세를 가진 과학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일단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나서는 아래와 같은 싯구를 남긴 영국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더 포프와 전적으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속에 묻혀 있었다.
신이 말하기를 뉴튼이 있으라!하자 모든 것이 밝아졌다.
38. 인신 보호 영장 제도(HABEAS CORPUS): 1679
1666 청교도들은 뉴저지에 코네티컷 정착촌을 세움.
1667 영국 시인 죤 밀턴은 실락원을 집필.
1670 스텐카라친의 지휘아래 돈 코사크인들은 러시아에서 반란일으킴.
1673 라이프티쯔는 미분, 적분법 발견.
1680 새들러스 웰즈 극장이 런던에서 문을 엶.
1688 영국 청교도에 의한 명예 혁명 일어남.
1696 러시아는 캄차카 반도를 병함.
1703 러시아의 피터 대제는 세인트 페테스부르크를 세움.
1713 유트레히트 조약이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끝냄.
1748 엑스라 샤펠조약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끝냄.
왕과 지배자와 관련된 시민들의 권리는 수세기를 통해 점차 다양해져갔다. 그리스에서는 상당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던 민주주의의 형태의 정치제도가 만들어졌지만,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자신의 말이 곧 법이라고 믿고서 나라를 다스려나갔다. 이러한 것은 1215년 영국의 존왕이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면서 다소 변화하게 되었는데, 마그나카르타에서는 "자유민은 자신의 동료들의 사법적 판결이나, 이 땅의 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연행되거나 구속되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중심에 깔려있는 원칙은, "당신은 신체를 가진다."라는 뜻의 라틴어인 habeas corpus(인신 보호 영장 제도)이라고 알려진 것으로서, 이 말은 인간이 죄의 증거없이 그의 의지에 반해서 감옥에 수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1628년 영국의 챨스 1세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왕의 신성한 권리(Divine Right of Kings)를 근거로 반대파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반대파 법률가들은 인신보호영장제도 habeas corpus를 들어 이의를 제기했느나, 감옥의 간수들은 왕의 특명에 의해 인신이 구속 될 수도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으며, 재판관들은 왕이 곧 법이라는 근거에서 왕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독재자 찰스 1세는 1649년 폐위되었으며, 전제정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1660년의 전제정 복고후 오랜 시간이 지난 1679년이 되어서야 의회는 찰스II세에게 특별법으로서 인신보호영장제도 habeas corpus를 받아들일 것을 명령했다.
오늘날 대부분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법체계는 인신보호영장제도 habeas corpus의 원칙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의 헌법에도, "반역이나 외국의 침범과 같은 공공 안전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신보호영장제도 Habeas corpus의 권리는 언제나 유효하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권한은 남북전쟁중에 링컨에 의해서 정지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의회가 대통령의 이러한행위에 대해 반대했으나, 1863년 의회는 인신보호영장제도 Habeas corpus를 제한시키는 권한을 대통령이 가질 수 있도록 의결했다.
인신보호영장제도 Habeas corpus는 범죄재판체계에서 아주 기본적인 원칙중의 하나로서, 보통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찰이나 검사들의 기본적 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다.
39. 캐나다에서 프랑스의 패배
1756 프러시아의 선공으로 오스트리아와 7년전쟁 개전.
1761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 공의 궁정 작곡가가 됨.
1763 프랑스는 인도에서의 영국의 종주권 인정.
1766 영국의 케븐디쉬는 수소를 처음으로 분리해냄.
1766 인지법이 아메리카인들의 거센 반발로 철폐됨.
1768 러시아-투르크칸 전쟁이 재발.
1769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의 성능개량을 위한 응축기의 특허를 출원.
콜롬부스가 서반구의 존재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각을 열어준후 2세기 동안, 강대국들은 여기에 그들의 지배영역을 만들었다. 스페인은 지금의 미국 남쪽에 대해서는,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던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영국은 지금의 미국 동부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북쪽의 모든 땅과 영국영토의 서쪽으로부터를 지배했다.
비버는 그레이트 레이크와 세인트 로렌스강 주변의 지역에 매우 번성하고 있었는에, 프랑스 측은 비버의 모피가 아주 높은 품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얼마가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모피교역을 놓고 큰 충돌이 일어났다.
1670년에 찰스 2세(1630-1685)는 허드슨만 회사에게 특허장을 주었는데, 이것은 세인트 로렌스강 북쪽 영역의 자원개발에 대한 영국의 노력에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다.
1756년에 유럽에서 7년 전쟁이 일어났는데, 영국과 프러시아가 프랑스와 그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러시아, Saxony, 스웨덴, 그리고 후에 동맹국이 된 스페인과 싸우는 형태였다. 이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이 얽힌 부수적인 사건으로 관련된 것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분쇄보다 far-reaching의 결과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조지 2세는 젊지만, 현명한 제임스 울프장군을 프랑스의 마뤼케 루이 조셉 드 몬칼므장순에 대항하는 영국 국군을 통솔하도록 파견했다. 울프장군의 임무의 절정은 프랑스 도시 퀘벡을 놓고 싸운 전투였다. 영국은 케벡으로 가는 보급을 막기위한 세인트로렌스강의 봉쇄에 성공했으나, 몬칼므장군은 중무장된 요새도시가 난공불락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요새는 영국군의 공격을 1690년과 1716년에 좌절시켰다.
울프 자신은 이 공격에서 죽음을 당했으나, 그의 계획은 진행되었고, 그의 군대는 캐나다 프랑스의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몬깔므장군도, 실재로 그들의 사단을 전투에서 이그는 동안 두 지휘관이 모두 죽었다는 의미에서 이 전투를 유일한 것으로 만들면서, 역시 전사했다.
프랑스 인들은 케벡에서 초강대국의 지위에 있는 , 자신감에 찬 영국군을 물리쳤는데 , 이 승리는 이미 유럽인들이 정착하고 있던 대부분의 북아메리카에 대해 의심할 바 없는 우위권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점은 세인트로렌스강 이남의 13개 식민지에서 불고 있던 불안정성때문에 오래가지는 못할 운명이었다.
40. 쿡 선장의 항해
1769 아크라이트는 기계식 방적기를 발명함.
1770 영국 의회는 타운젠드 법을 철회함.
1772 폴란드를 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가 3분함.
1774 최초로 대륙의회가 소집됨.
1776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발표.
1776 에드워드 기본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발표.
1776 포템킨은 러시아 흑해 함대를 건설.
영국의 선장 제임스쿡은 콜롬부스부터 시작된 발견의 시대에 존재했던 위대한 항해사들 중 제일 마지막을 장식했던 사람이다. 그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그누구보다 훨씬 더 넒은 지역을 탐사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영국의 영토로 선언하기도 했다.
왕립 해군에 몸담았던 4년동안, 쿡은 그 자신이 항해에 관한한 천재임을 입증했다. 1768년 그는 원정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임무는 남태평양에서 금성의 자오선 통과를 관찰하도록 영국의 천문학자들을 데려가는 것이었으며, 관찰후에는 자치령 확대를 위한 이 지역의 탐험을 하는 것이었다. 쿡은 뉴질랜드를 방문해서, 전 해안선에 걸친 해도를 처음으로 알아냈고, 뉴우기니를 방문했으며, 1770년에는 뉴 사우스웨일즈라는 이름의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부해안을 영국에 편입시켰다. 그의 첫 항해동안 쿡은 그 이전의 어떤 다른 탐험가보다도 넓은 영역을 탐험했다.
1772년에 쿡은 다시 항해를 시작했는데, 이 항해에서 남극대륙을 지도에 그린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1776년의 세번째 여행에서는 하와이-그가 샌드위치 군도라고 불렀던-를 발견했으며, 오레곤에서 알래스카에 이르는 북아메리카의 해안을 탐사했고, 베링해협을 거쳐 북극해를 항해했다. 쿡선장은 1779년 그의 세번째 항해기간에 하와이에서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은, 그가 죽기전에 이미 시작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의 정착과,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양안이나 주위에 있는 수많은 땅들을 탐험한 최초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41. 산업혁명: 1774년부터
1776 질풍 노도 문학운동이 독일에서 시작.
1776 토머스 페인은 상식(Common Sense)을 출판.
1777 기독교, 한국에 전래
1778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 미국을 원조.
1778 라 스칼라 오페라 하우스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문을 엶.
1779 남아프리카의 호사스족과 네덜란드인간의 전쟁 발발
1781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출판.
1783 영국은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을 승인.
산업혁명은 아마도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듯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인류역사의 행로를 바꿔 놓은 사건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산업혁명은 기계와 그 기계의 가능성-인간의 물리적 능력(상품을 생산하는 능력이든 신속히 움직일수 있는 능력이든 간에)을 확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들의 혼합물이었다.
산업혁명의 첫번째 불꽃은 영국에서 직물산업이 기계화되면서 일어났다. 리처드 아크라이트 경(Sir Richard Arkwright:1732-1792)과 제임스 하그레이브스(James Hargreves:?-1778)가 발명한 방적기 덕분에 이전까지는 家內에서 이루어지던 작업들이 더 크고 훨씬 더 효율적인 공장으로 옮겨 갔다. 산업혁명의 여명기에 새로운 기계들과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다른 기계들에 동력을 공급해줄 한가지 기계가 없었다면 대부분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증기기관이었다.
최초의 실용성있는 증기기관-스스로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은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가 고안해 내었다. 와트는 그 이전에 만들어 졌던 증기기관들을 연구하고, 여러부분을 개량했는데, 열손실을 막기 위해 응축기를 분리시키고 피스톤의 수직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꾼 것등이 그것이다. 그의 첫번째 증기기관은 1769년에 완성되었다. 곧이어 와트의 발명은 선반과 방적기같은 공장설비를 자동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초엽에는 증기동력의 광범위하게 응용되어 기관차와 기선등이 출현했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트레비틱(Richard Trevithick:1771-1833)이 1802년에 최초의 실용적인 기관차를 만들었다. 한편 1807년에 최초의 실용적인 기선을 건조한 이는 미국인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1765-1815)이었다. 1830년대에 오면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증기철도가 운행되고 있었고 기선이 정기적으로 대서양을 오가고 있었다.
영국은 최초로 산업혁명을 겪은 나라였는데, 부분적으로는 산업의 동력원인 증기기관의 연료료 쓰이는 석탄이 풍부했던 덕택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에 오면 프랑스,독일과 북부 유럽의 대부분이 산업화되어 있었다. 미국은 19세기 초반에 산업화를 겪었지만 국토가 너무 넓어 완전한 산업화가 지장을 받았다. 이 장애요인이 전국적인 철도망의 발달로 극복될 때 대서양 건너편의 이 신생국은 산업강국으로서 영국을 능가하게 될 것이었다. 그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산업력은 국가의 중요도를 측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1920-60년대의 미국에서 1980년대의 독일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성공 뒤에는 정치적 우월성이 뒤따랐다.
42. 미합중국이 독립을 선언하다: 1776
1776 스위스 은행가 자끄 네케르는 루이 16세의 재무장관이 됨
1777 라파예뜨 장군은 대륙회의에 원군을 보냄.
1781 윌리엄 허셀은 천왕성을 발견.
1783 영국군은 최후의 보루인 뉴욕에서 철군.
1783 러시아는 3세기만에 크리미아 반도를 획득.
1783 몽골피에 형제는 최초로 사람이탄 열기구를 띄움.
1786 싱가포르, 페낭, 말래카를 영국이 획득.
1787 루이 16세가 조세문제 해결을 위해 명사회 소집.
1788 오스트리아는 러시아편에서 러시아-터키전쟁에 참전.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1607년에 최초로 버지니아의 제임스 타운에 세워졌다. 이 정착촌은 황량한 벌판에 놓인 빈약한 발판이었다. 그 이후 150년을 거치면서 다른 정착지들이 생겨나 번창했고 드디어는 도시로 성장하여 그 안락함과 세련성에서 유럽의 도시에 견줄만 하게 되었다.
이 영국의 13개 식민지에서 여러 세대가 태어나게 되자, 이 아메리카의 도시들에 살면서 영국어를 말하고 영국에 세금을 내지만 한번도 영국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더나아가 많은 이들은 자신은 고사하고 부모와 조부모들조차도 영국에 가본 적이 없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영국인이라기 보다는 아메리카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바라보았을 때, 국왕 조지 3세는 아메리카인들이 단순히 해외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이고 따라서 영국에 세금을 낼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안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메리카인들에게는 이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대표없는 곳에 과세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고 외쳤다. 영국은 본국에 반항하는 식민지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1775년 4월 19일, 보스턴 인근에서 벌어진 벙커힐 전투(Battle of Bunker Hill)로 양측은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대결이 5년 반에 걸친 미국혁명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의 시작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유일한 국민정부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13개의 개별 식민지정부들은 단일한 대륙 회의(Continental Congr ess)의 개최하여 서로 협력하는 데 동의하였다.
1776년 7월 4일에 코네티컷, 델라웨어, 죠지아, 메릴랜드, 메사츄세츠, 뉴 햄프셔, 뉴 저지, 뉴욕, 노스 캐롤라이나, 펜실베니아, 로드 아일랜드, 사우스 캐롤라이나 그리고 버지니아의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만나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 서명했는 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사회의 중요사건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한 국민이 다른 국민과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정치적 속박을 끊고 세계 안에서 자연법과 하나님의 법에 따라 부여된 자유와 평등한 지위를 차지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을 때, 인류 일반의 공정한 견해에 의하여 그 국민은 분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를 분명히 해야한다. 우리는 다음의 원리를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의 창조자로부터 부여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그것은 생명,자유,그리고 행복의 추구이다."
스스로 독립국이라고 선언한 뒤, 이 신생국은 그 지위를 얻기 위해 영국과 싸워야 했다. 독립전쟁은 길고 어려웠다. 결정적인 전투는 1781년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서 벌어졌는 데, 여기서 죠지 워싱턴 장군(General George Washington :1732-1799)이 찰스 콘월리스 장군(General Charles Cornwallis :1738-1805)이 이끄는 영국군을 격파했다. 1787년 신생국은 헌법을 채택하였고 죠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43. 프랑스 혁명: 1789-1793
1789 예레미 벤텀이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관한 서설을 출판.
1789 조지 워싱턴이 초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
1792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가 암살당함.
1792 러시아와 프러시아는 폴란드에 침입.
1794 로베스삐에르 처형됨. 공포정치가 끝나고 테르미도르 반동이 시작.
수세기 동안 세계의 정치사는 정권을 타도하거나, 타도를 시도하는 야심가들과 군림하는 군주들과 왕국들의 무수한 예로 가득차 있었다. 18세기 말에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Common people)이 그들을 지배하던 군주정에 반대하여 일어섰고...그리고 승리했다. 주변부국가에서 일어난 연관성없는 예들 정도가 아니라, 이것들은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주요국가에서 일어난 중요한 혁명들이었다.
우선,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고 새로운 국가로 등장했다. 다음으로,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국왕들의 전제정치에 지친 프랑스인민들이 1774년 부터 부르봉의 제 5대 국왕으로 통치하고 있던 루이 16세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중산층과 빈민들 모두가 오랫동안 귀족의 통치와 특권에 불만스러워 해왔지만 그들의 분노에 불을 붙여 혁명으로 이끌어간 촉매가 된 것은 루이가 귀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준다고 선언한 일이었다.
1789년 7월 14일 거대한 군중이 파리의 감옥인 바스띠유(Bastille)를 휩쓸고 점거했다. 그때 베르사이유(Versailles)궁전에 머물고 있던 루이 16세는 인민들이 스스로를 프랑스의 시민이지 더이상 프랑스왕의 신민이 아니라고 선언했을때 깜짝 놀랐지만 무력했다. 루이 16세는 너무나 오랫동안 현실과 접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어느 정도로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못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었던 오스트리아 태생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Marie Antoinette)는, 인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분노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럼 케이크를 먹으라지!"하고 말했다.
혁명이 가속화함에 따라 프랑스,특히 파리에서 무정부상태가 벌어졌다. 국왕,왕비와 그 가족들은 의회에 억류되었다가 나중에는 수감되었다. 마침내 1792-3의 겨울에 그들은 하나하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오스트리아,프러시아와 영국등 주변국의 군주들은 이제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로 알려진 위원회가 통치하고 있는 신생공화국을 침공하겠노라고 위협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러시아가 공격을 시작했다. 프랑스 공화정은 프러시아를 패퇴시켰을 뿐 아니라 네덜란드로 반격해 들어가 사보이(Savoy)를 점령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국왕을 타도했던 중앙연정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국민공회는 1795년 총재정부(Directoire)로알려진 또다른 위원회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공화정을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다.
1799년 프랑스 제 1공화정은 실패했다. 비록 공화정이 1848년이 될 때 까지는 회복되지 못하고 1871년 이후에야 돌아와 영구적인 것이 될 것이지만 부르봉의 절대왕정은 영원히 가버렸다. 결국에는 유럽의 모든 절대왕정을 붕괴시킬 개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었다.
44. 여성의 권리를 향한 첫걸음: 1789-1792
1790 레오폴트 2세는 죠셉 2세에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됨.
1790 필라델피아가 뉴욕을 대신하여 미국의 임시수도가 됨.
1791 오스트리아는 벨그라드를 투르크에게 반환함.
1791 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가 초연됨.
1791 미국의 10개의 헌법 수정조항이 비준됨.
1792 워싱턴이 대통령에 재선됨.
1793 프랑스 혁명가 장 폴 마라가 암살됨.
대헌장의 시대에서 미국 독립선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신의 자유,선거권 그리고 개인적 자유라는 이슈들은 유럽국가들에서, 후에는 북아메리카에서도 주된 쟁점이었다. 점차로 국왕의 권력은 제한되었고, 인민의 권리가 인정되고 있었다. 영국은 선거에 의한 의회와 입헌군주제를 수립했고, 18세기 말에 오면 미국과 프랑스 모두 독립적인 공화국이 되어 있었다. 민주주의가 흥기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남성들은 선거권을 획득했고 그것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인정되고 있던, 힘들게 얻은 모든 권리들은 남성들만이 향유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중요치 않거나, 심지어는 단지 남자들의 소유뮬일 뿐인 상황이었다. 유럽의-그리고 사실상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관습적인 이론은 "여자가 있을 곳은 가정"이며 관공서나 공공정책이 결정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18세기 말의 언제쯤인가 부터 남성과 여성의 법적 불평등이 부당하다는 인식이 자라나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 올림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가 여권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을 출간했다. 이것은 그녀가 프랑스 혁명가들이 인권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에서 명백히 빠뜨린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같은 해에 프랑스 국회에 제출된 여성 참정권 청원은 거부되었다. 그리고 사실상 나폴레옹하에서 공포된 법률들은 프랑스 여성에게서 이전에 그들이 누렸던 많은 자유들을 박탈해 갔다.
같은 때에 메리 월스톤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1759-1797)라는 영국의 여자 가정교사가 프랑스혁명과 올림프 드 구즈의 항의에 고무되어 여권의 옹호(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en)를 출간했는데, 이것은 여권운동에서 기념비적인 문헌으로 남아있다. 월스톤크래프트는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교육기회를 가져야 하며, 하녀와 가정교사 외의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어야 하며, 의사가 되고 자기자신의 사업을 가질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여권은 ,오랫동안 부정되어 왔었지만, 뜨거운 이슈가 되었고 사그러 들지 않을 것이었다.
여성이 교육받을 기회가 확대되기는 했지만 19세기에는 진보의 속도가 느렸다. 미국에서는, 수잔 안토니(Susan B. Anthony:1820-1906)가 反노예제 운동과 여성참정권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20세기 이전까지 여성은 민주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의 하나인 '투표할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여성들은 1902년에 투표권을 획득했고, 영국 여성들은 1918년에, 미국여성들은 1920년 8월 26일에 수정헌법 19조를 통해 권리를 획득했다. 단, 와이오밍주는 1869년에 여성 참정법을 통과시켰다. 프랑스 여성들은 1945년에 마침내 투표권을 얻었다.
45. 나폴레옹이 유럽을 지배하다: 1799-1813
179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파리의 봉기를 진압함.
1796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실론섬을 획득.
1797 베네치아 공화국이 와해됨. 오스트리아가 지배.
1799 란지트 싱은 북서부 인디아에 시크 왕국을 세움.
1799 로제타석이 이집트에서 발견됨.
1800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인 볼타는 최초로 전지를 발명.
1801 알렉산드르 1세가 러시아의 황제로 즉위.
1806 나폴레옹, 대륙봉쇄령을 내려서 영국 화물선의 통행을 금지.
1810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반스페인 봉기가 일어남.
1810 멕시코의 신부인 미구엘 이달고는 반스페인 봉기를 이끔.
1811 볼리바르와 미란다는 베네주엘라 의회를 이끌어 독립을 선포.
시저의 시대부터 히틀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누구도,심지어 신성로마황제들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1769-1821)만큼 완벽하게 유럽을 지배했던 사람은 없었다.
1789년과 1799년 사이의 10년동안 프랑스는 실제로 무정부상태 또는 위원회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나폴레옹은 프랑스 공화국 군대의 젊은 장군으로 급속히 성장하였고 혁명에 뒤따른 혼란기 이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가장 강력한 정치인이 될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에 맞서 일련의 빛나는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은 1798년에 이집트를 침공하였고 카이로로, 곧이어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이 사건들은 프랑스 대중들을 크게 고무시켰고, 1799년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귀환했을 때,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받아들여 졌다.
한편, 프랑스는 십년동안 단일한 지도자가 없는 상태인 채로 있었고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허약하고 비효율적인 총재정부는 붕괴직전이었다. 나폴레옹이 자연스레 국가 지도자로 선택되었다. 1799년 11월에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을 제 1통령으로 하는 통령정부(Consulate)로 대체되었다. 이제 그는 프랑스의 지배자였지만 그는 더나아가 샤를마뉴 제국 규모의 제국을 꿈꾸었다.
나폴레옹은 1804년까지 제 1통령으로 통치했다. 그의 막강한 인기때문에 프랑스 국민은-1792년에 부르봉 왕가를 내몰았던-나폴레옹이 통령정부를 제국으로 바꾸는 것을 허용했다.1804년 5월 18일, 나폴레옹은 파리의 노트르 담 성당으로 교황을 초청하여 그를 프랑스황제로 대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절정의 순간에 그는 교황의 손에서 제관을 받아 스스로 황제의 관을 썼다.
나폴레옹은 즉시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프랑스,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영국,러시아,그리고 프러시아가 그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 침공을 계획했지만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805년 아우스테를릿츠(Austerlitz)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는 빛나는 전술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나폴레옹은 이어서 일련의 경이적인 승리들을 거두었는 데, 1806년 예나(Jena)에서 프러시아를, 1807년 프리들란트(Friedland)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했다. 이 시기에 이르면 그는 그의 목표를 달성하여 샤를마뉴의 제국보다도 더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프랑스,폴란드,이탈리아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모든 지역-오스트리아와 구 신성로마제국의 독일국가들을 포함하는-을 지배하고 있었다.
영국은 그의 최대의 적으로 남아있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 유럽대륙간의 교역을 대부분 차단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1810년, 러시아가 그의 봉쇄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자 그는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실제로 1812년 12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혹독한 겨울날씨가 보급선을 위협하여 그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군사적 재난이 나폴레옹 통치시대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의 동맹국들과 그의 영역내 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독일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제국은 붕괴했다. 1814년 4월 11일에 그는 퇴위하여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한때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사람이 이제는 작은 돌투성이섬에 살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가장 큰 공헌은 근대적인 민법 체계인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으로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법의 기초로 남아 있다.
46. 워털루 전투: 1815
1813 반란군은 베네주엘라에 침입, 카라카스를 점령. 볼리바르는 해방자라 자신 을 칭함.
1814 루이 18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
1815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100일천하를 시작함.
1816 이탈리아의 롯시니는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를 초연함.
1816 아르헨티나는 독립을 선언.
1818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판.
1819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이 개관함.
1821 그리스는 대 터키 독립전쟁이 시작함.
1822 포르투갈의 황태자인 돔 페드로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
1822 프랑스의 샹폴리옹은 로제타석의 문자를 해독함.
10년 이상의 영광끝에 온 프랑스제국의 붕괴와 1814년 나폴레옹의 퇴위는 프랑스를 혁명기간에 겪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총체적 혼란상태에 빠뜨렸다. 놀랍게도 이 시점에서 부르봉 왕정이 다시 들어섰다. 하지만 루이 18세의 통치는 10개월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은 유배기간중에 점점 견딜 수 없게 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파리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는 데 이것은 주로 향수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프랑스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15년 3월 10부터의 짧은 100일 동안 시계는 10년 전으로 되돌아 간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오랜 라이벌들,특히 영국은 그가 왕좌에 복귀한 것을 전혀 달가와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곧 공격받을 것이며 제국을 재건하려면 재빨리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속한 승리가 유럽국가들을 한줄로 선 도미노처럼 넘어 뜨릴 것이라는 데에 도박을 걸어야 했다
대규모의 영국/프러시아/네덜란드 군대가 프러시아의 게파르트 레버레히트 폰 블뤼혀 장군()과 아서 웰리즐리(),웰링턴 공작()의 통솔아래 벨지움에 집결했다. 처음에는 상황이 나폴레옹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의 잘 무장된 대규모의 군대는 블뤼혀와 웰링턴사이에 쐐기를 박아 넣었고 6월 16일에 리그니에서 프러시아군을 쳐부쉈다. 영국군은 워털루라는 작은 마을로 후퇴했고 나폴레옹은 6월 17일에 이곳에서 영국군을 따라잡았다. 나폴레옹은 6월 18일에 웰링턴을 공격할 준비를 했으나 간밤에 내린 비가 대포를 정위치로 옮기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나폴레옹은 오전 11시에 마침내 공격했고 전투는 10시간 동안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오후 늦게 블뤼혀의 잔류병력이 웰링턴에 합세하였고 이것이 전세를 돌리는데 기여했다. 6월 19일 아침이 되자 프랑스군은 패퇴하였고 50,000명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파리로 후퇴하여 나흘 뒤에 두번째로 퇴위하였다. 그는 영국에 항복하고 남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보내져 여생을 보내다가 1821년 5월 8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워털루는 유럽사에서 주요한 전환점중의 하나인 데, 그 까닭은 만약 나폴레옹이 승리했다면 그는 그의 제국을 재수립하고 다시한번 프랑스를 19세기유럽의-그리고 아마 세계의-지배세력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였으므로, 프랑스는 다시는 나폴레옹아래서 누렸던 힘과 영향력을 되찾지 못하게 된다. 그는 유럽의 프랑스제국을 상실하였고 또 북아메리카에서는 그보다 더 큰 영역-루이지애나-을 미국에 매각해 버렸다. 워털루는 영국의 평화(Pax Britannica),한 세기이상 영국이 세게의 지도적인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는 시기의 시작을 알렸다.
47. 사진술의 기원: 1824
1823 미국은 먼로 독트린으로 아메리카대륙의 고립정책을 발표.
1825 중미 연합은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
1826 암페어는 전기 동력학이론을 출판함.
1829 세르비아는 밀로스 왕자 아래서 자치지역이 됨.
1830 벨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기위한 운동을 시작.
1830 그리스는 투르크로부터 독립.
1830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일어나 샤를르 10세는 폐위됨.
1831 페러데이는 전자기 유도 이론을 발표함.
1831 러시아의 푸쉬킨은 거작 유진 오네긴을 완성.
1833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출판됨.
1836 볼리비아의 대통령 산타 크루즈는 페루를 침공하여 페루-볼리비아 연합을 결성.
수세기 동안, 인류는 현실의 이미지를 펜과 붓을 가지고 기록했다. 고대인들은 그들이 사냥하는 동물의 그림을 그렸다. 중국과 르네상스기 유럽에서, 화가의 기술은 "미술"이 되었는 데, 그것은 미술가가 완전히 똑같이 모사한 것만이 아니라 극적인 그리고 동적인 감각을 포착해 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계적 수단을 통해 직접, 그자리에서 이미지를 보존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꾸었다. 이 꿈이 실현되면 이것은 과학적 성과 이상의 것으로, 우리가 주위환경 뿐아니라 우리자신을 인지하는 방식에 전환점을 이루게 될 것이었다.
그 꿈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데, 이 장치에서는 햇빛이, 물체에서 반사되어 작은 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이나 상자속으로 들어와, 물체의 반전된 상을 반대편 벽위에 투영하게 된다. 1717년에 독일의 의사인 슐츠()가 염화은에 빛을 쬐면 검게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1824년, 요셉 니세포르 니엡스()가 노출시키기전에 금속판을 역청으로 코팅하면 햇빛으로 인화된 像을 영구히 고정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로 나온 사진이 헬리오타입()이라 불렸다. 1829년에는 니엡스가 루이 자끄 다게르()와 동업하여 이 방법을 완성시켰다. 1839년에 다게르는 다게레오타입() 처리과정을 내놓았다. 1879년 뉴욕, 로체스터의 죠지 이스트만()이 감광유제 코팅 장치를 발명하여 사진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889년, 이스트만은 연속적인 사진 음화를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도록 유제를 입힌 셀룰로이드 필름을 팔기 시작했다. 이 카메라 안에 감겨 있는 "필름 두루마리"라는 개념은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대중적 사진술의 기초이며 결과적으로 활동사진(motion picture)이 발전할 토대를 마련했다.
활동사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이스트만이었지만 그 근본이 되는 현상-잔상효과는 15세기에 이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알고 있던 것이었다.19세기에 발명가들은 회전하는 바퀴나 원판위에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을 볼 수 있는 여러가지 휴대용 장치를 만들어 냈다.1889년, 윌리엄 프리즈 그린()과 미국의 토마스 앨버 에디슨()이 각각 영사할 수 있는 투명한 필름에 여러 개의 상을 찍어 내기로 결심했다.
에디슨은 최초의 활동사진 촬영용 카메라인 그의 키네토그래프()와 최초의 활동사진 영사기인 키네토스코프()에 이것을 응용했다. 두가지 모두 1891년에 특허를 받았고, 키네토스코프는 1893년 뉴욕에서 핍쇼(구멍으로 들여다 보는 구경거리) 장치로 첫선을 보였다.에디슨은 해외에서는 이 발명품들의 특허를 얻는 데 실패했는데, 그때문에 프랑스의 오귀스뜨()와 루이 뤼미에르()형제가 에디슨의 키네토그래프의 개량형에 해당하는 시네마토그라피()를 만들어 낼수 있었다. 1895년 3월 22일, 파리의 그랑 까페에서 극장 벽위에 최초로 커다란, 전면적인 활동사진의 영사가 있었다. 에디스은 계속 그의 처리공정을 다듬어 바이타스코프()라는 자신의 영사기를 만들었는 데, 이것을 가지고 1896년 4월 23일, 뉴욕시의 바이얼 뮤직홀에서 최초로 활동사진의 극장 상영을 했다.
사진술이 근대문화와 상업의 모든 면에 미친 충격은 심대하다. 사진이나 영화가 없었다면 현대의 대중매체가 얼마나 달랐을까 상상해 보라.
48. 장거리 통신의 黎明: 1838
1838 보어인 지도자 앤드리스 프레토리우스는 줄루족을 격파함.
1838 프랑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사회학을 처음 소개함.
1840 우루과이에서 적색파와 백색파간에 내전이 발발함.
1840 프랑스의 프루동은 [가난은 무엇인가]를 집필.
1840 상하 카나다는 하나로 통일됨.
1842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함. 영국에게 항구를 개항함.
1845 감자 재배의 실패로 아일랜드에 기근이 시작됨.
1846 독일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의 정수]를 발표함.
1847 아프리카의 노예국가인 리베리아는 독립을 선포.
1848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출판함.
19세기에 이르러, 증기기관이 육상과 바다 모두에서 교통수단의 속도와 이동거리를 증대시킴에 따라, 장거리에 걸친 즉시적인 통신수단이 명백하게 필요해졌다. 더 빨라진 배와 기차에 앞서, 보이지 않는 먼곳과 재빨리 통신하는 문제가 시급해졌다. 1791년, 에브 클라우드 셰프()는 시각 전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는 데,이것은 그가 눈에 보이는 신호를 차례로 이어 전달하도록 일련의 탑을 사용한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셰프의 시스템은 일렬로 늘어서 120개의 탑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파리에서 지중해사이의 메시지를 한 시간도 안걸려 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가장 빠른 기수보다도 훨씬 빠른 것이었다.
이 시스템들은 모두 시각 신호에 의존했다. 전신()은 통신의 중요한 혁신이었는 데, 왜냐하면 이것은 서로 시야가 미치지 않는 두사람 사이의 즉시적인 통신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전기를 이용해 부호화된 메시지를 보낸다는 아이디어는 18세기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74년 스위스의 죠르쥬 류이 르사쥐()는 알파벹의 각문자에 해당하는 개별적인 전선을 이용하여 신호를 전송하는 기계를 개발했다. 그의 시스템은 1753년 출간된, 단지 "C.M"이라고만 알려진 신비한 스코틀랜드 발명가의 저술에 근거한 것이었다.
르사쥐 이후에 전신을 개량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프랑스의 샤프(),독일의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와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그리고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 볼타()등이 이런 시도를 했다. 이들이 수행한 시험에 근거하여, 여러개의 실험적 전신선이 세워졌다.
그러나 최초의 실용적인 전신 시스템은 미국의 발명가 새뮤얼 모스()에 의해 개발되었다. 또한 모스는 모르스 부호()를 고안했는데, 이것은 전기접촉을 일으키는 키를 연속적으로 두드리는 것(탭:Tap)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알파벹의 각 문자는 짧은 탭()과 그보다 긴 탭()으로 구성되었고, 이 시스템은 국제적인 전신 "언어"가 되었다.
모스는 1838년 2월 21일에 마틴 반 뷰렌 대통령에게 최초의 시험 전신을 보냈고, 1843년에는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상업 전신선이 놓여 졌다. 그뒤 2년 동안에 미국과 유럽의 주요도시 대부분이 전신으로 연결되었고, 1850년대에는 영국과 스웨덴이 해저 케이블로 대륙과 연결되었다. 유럽과 미국은 1858년, 뉴펀들랜드와 아일랜드사이의 해저 케이블로 결합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이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에게 90단어의 메시지를 보냈다.
즉각적인 장거리 통신의 도래는 인간이 시간과 거리를 보는 관점을 변혁시켰다. 1838년 이후, 정보를 이전보다 빨리 먼곳으로 전달할수 있게 됨에 따라,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는 점점 줄어 들었다.
49. 혁명의 해: 1848
1848 가리발디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독립전쟁에 참가.
1849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혁명을 진압.
1849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인 미하일 바쿠닌이 시베리아로 추방당함.
1850 영국 작가 차알스 디킨스는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발표.
1850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
1852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로사스는 반란군에 패배.
1852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제2제정 시작.
동시발생이라는 역사상의 드문 사건 가운데 하나로, 1848년의 유럽대륙은 모든 나라의 상황이 혁명의 인화점에 도달해 있었다.
1848년 이전에, 영국은 이미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1640년대에 영국은 내란으로 무너져 찰스 1세가 1649년에 폐위되고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공으로 집권했다. 크롬웰이 죽은 지 2년 뒤인 1660년에 찰스 2세를 국왕으로 하여 입헌군주정이 제자리를 찾았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이 왕정을 전복하고 난 뒤, 처음에는 혼란에 빠졌다가 1799년에 나폴레옹시대로 1815년에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848년에 이르면 이탈리아,오스트리아와 독일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다시한번 혁명 직전에 와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 팽창주의의 혼란기가 끝난 후, 유럽의 다른 열강들-오스트리아,영국,프러시아와 러시아-은 힘을 합쳐 신성 동맹()을 결성했다. 이 생각은 1815년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의 주도하에 열린 비엔나 회의()에서 나왔다. 사실, 메테르니히의 뛰어난 정치수완은 오스트리아를 유럽의 중심무대에 세워 놓았고, 그래서 그 이후의 30년간이 "메테르니히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성 동맹의 구성원들은 또한 대동맹()이라 불린 군사동맹을 맺었는데 1818년에는 프랑스도 여기에 참여했다. 이 동맹들의 목적은 동맹내의 어떤 구성원도 다른 국가보다 강력해지지 못하게 하고 모든 동맹국에서 세습 군주정을 유지할 것을 서약함으로써 유럽의 평화와 질서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산업혁명이 유럽사회의 조직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 오기 시작했다. 군주가 지배하는 "인민"은 이제 더이상 단순히 시골 농민만이 아니라 공장노동자,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기업가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종류의 시민들은 세습귀족계급에게 노예취급을 받는 데에 분개했다.
혁명은 1848년 2월 23일,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왕정이 붕괴되었고, 12월에는 루이 나폴레옹()이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스스로를 프랑스 제 2공화정의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곧이어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지만 여전히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지역의 도시들도 끓어 오르고 있었다. 공화정체제하의 통합이 바람직한 목표로 보였다.
동시에, 오스트리아 제국 전역으로 부터의 이민에 질식되어, 비엔나가 봉기하였고 메테르니히 자신도 영국으도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마지못해 그의 국민들에게 여러 권리를 인정했지만 혁명은 프러시아와 독일의 여러나라들 뿐아니라 그의 제국 전역으로 계속 퍼져 나갔고, 페르디난트는 강제로 그의 아들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양위하고 퇴위당했다.
1848년의 혁명들이 준 충격파는 엄청났다. 1852년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일을 빼고는 프랑스는 두번다시 군주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것이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메테르니히의 시대가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대륙의 많은 군주정이 1918년까지 살아 남을 것이지만, 그들의 시대는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50.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1849
1853 중국의 반란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태평왕국의 수도로 선포함.
1853 산타 아나 장군은 멕시코의 독재자가 됨.
1853 미국은 뉴멕시코와 아리조나를 병합.
1854 미일간의 통상조약이 맺어짐.
1854 영불은 러시아에 전쟁선포.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
1857 프랑스 소설가 플로베르는 [보봐리 부인]을 출판.
1858 인도의 지배권이 동인도회사로부터 영국 국왕으로 옮겨짐.
근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량이주가 시작된 것은 존 마샬()이라는 사람이 우연히 옐로우 페블(금덩어리)을 발견하면서 부터였다. 남북전쟁을 빼고는 이 사건이 19세기 미국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건국 초기의 수십년 동안, 미국은 실제로 원래의 13개 식민지와 애팔래치아의 "황무지"와 오대호 지역의 "북서부"안의 인근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803년에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영토가 거의 두배로 늘기는 했지만, 이 지역의 대부분은 그레이트 아메리칸 데저트(대황무지)로 알려진 광대하고 지도조차 없는 지역이었다. 더 멀리 서쪽으로는 스페인과 멕시코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와 남서부 주들에 해당하는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미국 이주민들이 조금씩 조금씩 계속해서 오레곤과 캘리포니아로 유입됨에 따라 멕시코의 캘리포니아에 대한 지배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1846년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선언했고, 같은해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오레곤을 매입하고 멕시코에 전쟁을 선언했다. 2년 뒤인 1848년에 멕시코는 오늘날의 네바다,유타,콜로라도,아리조나,그리고 뉴멕시코와 더불어 캘리포니아를 미국에 할양했다. 이때쯤에는 그 지역에서 미국인 인구가 멕시코 인구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여전히 캘리포니아는 "문명세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오지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곧 바뀌게 된다. 1848년 1월 24일, 캘리포니아의 시에라 네바다 구릉지대의 사크라멘토 근처에 있는 존 수터스 밀()의 목수인 제임스 마샬이 비상하게 큰 금덩어리를 발견했다. 계속 찾아 보니 광석이 더 발견되었고, 곧 "저기 언덕에 묻혀있는 돌속에 금이 있다 There's gold in them thar' hills"라는 말이 중부 캘리포니아 전역에 메아리쳤다.
1849년에는 금광 발견 소식은 동부해안까지 도달했고,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50,000명 이상의 "포티 나이너(49년의 이주민)"들이 대륙을 횡단하거나 배를 타고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 캘리포니아로 밀려 들어왔다. 무게가 거의 100파운드(45kg)에 육박하는 금덩어리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골드 러시의 첫 5년동안 시에라에서 채굴된 금의 총량만해도 세계 나머지 지역의 총 생산량을 능가했다.
샌프란시스코는 금광지역으로 가는 관문으로서, 계속 중요성을 더해 갔고, 그 항구는 "골든 게이트(금문:金門)"로 알려 지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몇달 만에 800명에서 25,000명으로 늘어 났고 캘리포니아가 연방에 가입한 1850이 되면 주의 인구는 수터스 밀에서 금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두배 이상이었다. 골드 러시로 인한 경제적 파문은 전세계의 금융시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골드 러시로 촉진된 대량이주는, 거의 하룻밤사이에 대륙의 서해안에 미국 문명을 건설함으로써, 미국사의 행로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51. 진화개념의 기원: 1859
1859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와 싸우는 이탈리아의 카부르를 지지.
1860 에이브러험 링컨은 최초의 공화당 출신 대통령으로 선출됨.
1860 가리발디 장군은 시실리와 나폴리에 침공함.
1860 뻬이징 조약이 맺어짐.
1860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영국과 전쟁을 시작함.
1861 이탈리아는 빅토르 엠마누엘 2세를 왕으로 통일됨.
1861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함.
1861 미국의 남부주 연합은 연방탈퇴를 선언함.
인류역사 내내, 세계가 실제로 언제 시작되었는 가를 정확히 알아내려고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 졌다. 20세기 이전에는, 현대의 기술들을 이용할 수 없었으므로, 서구학자들은 성경을 문자그대로 해석하는 데 의존하였는 데, 그것은 물론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학자들은 시간의 폭에대한 모든 언급을 셈하여 세계가 BC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결정지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게가 45억년 전에 생겼으며 진화과정의 일부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이론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자들로 알려져 있으며,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진실로 믿는 사람들은 창조론자들로 알려져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세계 자체가 창조된 것인가 혹은 언제 창조된 것인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언제,그리고 어떻게 창조되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서로 다투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모든 종(種)들-아메바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이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고 믿는다. 진화론자들은 한 종이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할 수 있으며 두개의 유사하지만 다른 종들-사자와 호랑이 같은-이 수백만년 전에는 공통의 조상을 가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날에는 당연한 소리로 들리는 후자의 견해는 BC 5세기의 그리스에서 이미 주장되었던 듯 하지만, 19세기에도 여전히 제대로 된 진화이론이 없었고, 분명 아무도 구체적으로 그런 이론을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구체적인 진화의 이론을 공식화한 사람은 찰스 로버트 다윈()이라는 젊은 영국인이었다. 학창시절에 평범한 학생이었던 다윈은 캠브리지를 졸업한 직후에, 비글호가 수행하는 5년에 걸친 조사 원정에서 무보수 박물학자로 일할 기회를 받아들였다. 비글호는 1831년 12월에 영국을 떠나 1836년 10월에 돌아왔다. 긴 항해기간동안 비글호의 승무원들은 남아메리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그리고 항로상에 있는 수많은 섬들을 조사했다.
정력적인 다윈이 그의 진화이론을 체계화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이었다. 그는, 갈라파고스같은 외딴 섬들에서는 종들이 본토의 유사한 종들에 비해 현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그들이 같은 조상을 가졌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환경으로 인해 다르게 진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 나아가 그의 자연선택()이론을 다듬었는 데, 그 이론에 따르면 종들은 자연이 특정환경에 가장 잘 맞는 동.식물을 "선택"하기 때문에 진화하는 것이었다. 다윈이 그의 이론을 공식화하는 데 20년이상이 걸렸지만, 1859년 드디어 그의 책 '종의 기원'이 출간되자 이 책은 생물학의 이론과 경로에 급진적인 충격을 가하여 세계의 역사와 자신이 사는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52. 미합중국의 분열: 1861
1862 프랑스 물리학자 푸코는 광속측정에 성공함.
1862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 황태자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황제로 선포.
1862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재상에 임명.
1863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됨.
1863 이스마일 파샤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아래 있는 이집트를 통치함.
1863 프랑스는 막시밀리안의 지원아래 멕시코 시티를 점령.
1864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됨.
1864 덴마크는 프러시아에게 패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독일에게 넘어감.
1864 이오니아해 군도가 영국으로부터 그리스에게 어감.
미합중국이 탄생했을 당시, 그것은 말그대로 단지 명목상으로 통합된 주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원래의 개념은 이 개별 주들이 스스로의 일에 대해 광범한 자치권을 가지고, 국민정부는 외교정책,공용통화와 공통의 우편제도에만 관여한다는 것이었다. 이 개별적인 주들이 발전함에 따라 다른 사회.경제적 체제가 등장했다. 북부의 주들은 열광적으로 산업혁명을 받아들인 반면에 남부의 주들은 대체로 농업경제로 남아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을 수입하여 강제로 농장에서 일하도록 하는 노예제()가 북부에서는 1804년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목화재배가 지역경제의 중추였던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불가결한 생활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1840년대에 이르면 노예제가 합중국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정치적 이슈가 되어 있었다.북부에서는 전국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남부는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노예제 폐지론자()에게는 이것이 도덕적 문제였다. 그들은 노예제가 단순히 잘못된 일이라고 믿었다. 대부분이 사실상 노예를 소유하지 않고 있던 남부인들에게, 이것은 오로지 "주권()"-헌법에 보장된 대로 개별주가 자신의 내부문제를 다스릴 권리-의 문제였다. 노예제문제는 연방에 새로 가입하는 주가 "노예주"가 되야 하는가 "자유주"가 되야 하는 가하는 문제로 더욱 복잡했다. 예를 들자면 그때까지 가입한 주중에 가장 큰 두주가 각각 달랐다. 텍사스는 1845년에 노예주로 가입했고 캘리포니아는 1850년에 자유주로 가입했다.
1850년대에 이르면 남부의 주들이 합중국에서 탈퇴하여 별개의 국가를 만들 가능성에 대해 공공연히 논의하기 시작했다. 1860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이 의견차이가 터져 나왔다. 공화당 후보였던 일리노이의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제폐지에 호의적이었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연방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가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재빨리 움직여 취임식도 하기 전에 연방을 탈퇴했다. 1861년 2월 4일, 앨라바마,플로리다,죠지아,루이지애나,미시시피 그리고 텍사스는 앨라바마의 몽고메리에서 만나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합중국헌법과 유사한 헌법을 채택했는 데, 노예제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만 달랐다. 아칸소,노스캘리포니아,사우스캘리포니아,테네시 그리고 버지니아가 남부연합에 가담했고 나중에 버지니아의 리치몬드(워싱턴에서 불과 하루거리였다)가 남부연합의 수도로 선정되었다.
링컨은 연방을 복귀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겠다고 단언했지만, 1861년 4월 12일 남부연합이 먼저 섬터요새()의 미육군 주둔부대를 공격하여 첫 전투를 시작하였다. 국가보존의 전쟁이 어떻게 한 국가-또는 두 별개의 국가-가 보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두 견해사이에서 시작되었다.
53. 연방의 보존: 1865
1865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집필.
1866 멘델은 유전의 법칙 발표.
1867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의 주도아래 북독일연맹을 창설.
1867 프랑스군은 멕시코에서 철수함.
1867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 1권을 출판함.
1868 크로마뇽인의 인골이 남부 프랑스에서 발견됨.
1868 슐라롱콘이 시암 왕국의 왕으로 즉위.
1861년 2월 4일, 11개의 남부주들(앨라바마, 아칸소, 플로리다, 죠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텍사스 그리고 버지니아)이 스스로 독립적인 남부연합임을 선언했을 때, 이 사건은 합중국의 통일성과 링컨대통령처럼 연방의 보존을 바라는 이들에게 타격적인 재난이었다. 그러나 북부에는 또한 즉각 군사행동을 취하면 남부연합을 재빨리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전체인구와 무장전투력에서 북부는 남부를 3대1 정도로 능가했고, 북부의 제조업과 산업의 생산능력은 남부의 9배였다. 그러나 1861년 7월 21일, 불런에서 벌어진 최초의 중요한 무력충돌에서 남부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남북전쟁이 짧지도 쉽지도 않을 것임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뒤이은 2년에 걸쳐, 연방군은 계속 공세를 취하려고 시도했지만 남부연합의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은 전술에서 일관되게 그들을 앞질렀다. 리가 끊임없 워싱턴을 위협한 데 반해 연방군단은 리치몬드의 공격범위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사령관과 전술가로서의 리의 탁월함은 링컨이 유능한 연방군 사령관을 찾지 못한 것과 어울려 연속적으로 놀라운 남부군의 승리를 가져왔다.
한편, 연방해군은 남부의 항구들을 봉쇄했고, 북부의 산업은 연방의 자원손실을 재빨리 보충했다. 남부군은 용감하고 뛰어난 지휘관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을 오래 끌게 되면서 지쳐 가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의 전세는 1863년 7월, 가장 치열했던 충돌로 기억되는 두번의 전투에서 역전되었다. 리의 군대는 북부를 침공하려다가 펜실베니아의 게티즈버그에서 저지되었고 연방의 율리시즈 심슨 그랜트 장군은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미시시피 빅스버그의 남부군 요새를 점령했다.
그랜트는 승세를 몰아 1863년 11월 25일, 테네시의 차타누가에서 남부군을 격파했다. 링컨이 마침내 리에 필적할 만한 장군을 찾아낸 것으로 보였고 그가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전쟁의 최종국면에서, 그랜트는 워싱턴으로 부터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고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은 남부의 심장부로 깊숙히 쳐들어 갔다. 셔먼은 1864년 9월 2일에 아틀란타를, 12월 20일에 사바나를 장악했다. 그리고는 북쪽으로 되돌아갔다. 리치몬드는 이제 그랜트와 셔먼사이에 단단히 잡혀 있었다.
리가 1865년 4월 9일, 마침내 버지니아의 아포마톡스 코트하우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했다.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내부적 재난이었다. 연방군은 364,511명의 병력을 잃었고 남부연합은 133,821명을 잃었다. 사실 2차 대전을 포함한 어떤 전쟁에서보다 남북전쟁에서 많은 미국인이 죽었다. 미국에서 노예제는 영원히 폐지되었고 통일된 국가라는 링컨의 꿈은 마침내 확고해 졌다.
불행히도 링컨 자신은 살아서 그가 힘들게 얻은 평화의 결실을 맛보지 못했다. 그는 1865년 4월 15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실직 배우이자 남부의 동조자인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암살되었다.
54. 일본이 세계공동체에 합류하다: 1868
1868 쿠바에서 스페인 통치에 대항한 10년전쟁이 일어남.
1868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이 수상이 됨.
1868 그랜트가 18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
1869 카나다의 루이스리엘이 적강(赤江) 반란을 이끔.
1869 필라델피아의 의류 노동자들이 노동기사단을 조직.
1869 러시아 작곡가인 무소로그스키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발표.
1869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됨.
19세기 중반까지도 일본은 여전히 봉건왕정으로 수세기동안 사회구조가 거의 변하지 않고 있었다. 일본은 BC 660년 이래로 스스로를 텐시(天子)-"하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황제들의 자손이 지배하고 있었다. 섬나라였으므로 일본은 지리학적으로 아시아본토-그리고 사실상 외부세계 전체-로 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세계사의 주류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었는 데, 황제들은 바로 이 상태를 더 좋아했다. 일본사회는 매우 폐쇄적이어서 이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1636년의 칙령은 일본인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1842년 이후 몇몇 항구에 외국 선박이 정박하여 물과 보급품을 구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외국상인들은 일본내에서 사업을 벌이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 전적인 고립상태는 변화하도록 운명지워져 있었다. 1853년 7월 8일에 미해군의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 제독()이 중무장한 포함대와 밀라드 필모어 대통령의 메시지를 가지고 에도 만으로 항해해 들어왔다. 일본은 미국과 교역하도록 항구를 개방하거나 전쟁을 무릅써야만 했다. 페리는 일본에게 이 최후통첩을 고려해 보도록 반년의 시간을 주었고, 그가 돌아 왔을 때, 카나가와 조약()이 1854년 3월 31일에 조인되었다. 일본이 마침내 세계 공동체에 합류한 것이었다.
1858년까지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일본에 병참기지를 설치했다. 그러나 많은 동요가 있었다. 1868년 4월 6일에 이르러 메이지로도 알려진 젊은 황제 무쯔히또()가 反외세적 활동을 명백히 금지하고 산업혁명의 선진국으로부터 기계와 기계공구를 수입하여 일본을 근대화하는 계획을 시작했다. 페리가 1853년,처음 에도에 내렸을 당시에 일본의 기술수준은 1550년대의 유럽과 비슷했다. 1868년의 메이지 개혁(명치유신)으로 부터 4반세기안에 일본은 산업화되어 기술수준이 유럽과 미국의 수준에 이르렀다.
이것은 세계가 일찌기 목격한 적이 없었던 성과였다. 아마 2차대전의 파괴로 부터 일본이 부활한 것정도가 이에 필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의 지도적인 산업열강으로서 20세기에 들어설 것이었다.
55. 대륙횡단 철도: 1869
1870 미국 기업가 록펠러는 스텐더드 석유회사를 설립.
1870 프랑스 전시 재상 감베타는 포위된 파리에서 열기구로 탈출함.
1870 로마는 이탈리아왕국의 수도가 됨.
1870 보불전쟁이 시작됨.
1870 프랑스 제3공화정 시작됨.
1871 시카고에서 대화재가 발생해서 도시의 1/3이 타 없어짐.
18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와 뒤이은 태평양 연안으로의 대량이주는 북아메리카 대륙을 가로지르는 보다 빠른 교통수단의 필요성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미시시피강과 태평양사이의 광대한 지역은 지나가는데 수개월이 걸리는 황무지였다. 이 육상여정은 너무나 험난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육지로의 횡단에 운을 맡기기 보다는 배를 타고 남아메리카의 남단을 돌아 여행하는 길-거의 8배나 되는 거리-을 택했다.
대륙횡단,또는 "태평양"철도에 대한 제안이 많이 있었다. 나라안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캘리포니아의 사업가들에게는 그 필요가 특히 절박했다. 시카고에서 퍼겟 사운드로 가는 노선이 고려되었고 오마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직접 평원을 가로지르는 노선도 마찬가지였다. 남부 파벌들은 다른 노선보다 온화한 날씨를 들어 텍사스,아리조나, 뉴멕시코를 통과하는 노선을 제안했으나 이 제안은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보류되었다. 대부분은 중앙을 지나는 노선이 가장 좋다는 데 동의했다.
남북전쟁도 또한 대륙횡단철도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1862년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퍼시픽 철도부설법()에 서명했는 데, 이것은 네브래스카의 오마하에서 부터 서쪽으로 철도를 건설할 유니언 퍼시픽 철도회사의 설립을 요구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는 시에라 네바다를 가로지르는 최적 노선의 위치선정조사를 의뢰한 뒤, 특히 모험적인 사업가들의 한 독립적인 그룹이 1861년, 그들의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를 근거로 작업을 시작했다. 간단히 "네 거물()"로 알려져 있는 데, 그들은 찰스 크록커,마크 홉킨스, 콜리스 헌팅톤 그리고 럴랜드 스탠포드였다.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의 철도부설계획은 "퍼시픽"철도 계획으로 통합되었는데,그들의 철도건설 인부들이 시에라 네바다의 동부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작업이 진척됨에 따라 센트럴 퍼시픽의 인부들은 당초 계획보다 빨리 일을 하고 유니온 퍼시픽의 인부들은 느리게 하는 것이 뚜렷해졌다. 그래서 어디서 만나게 되던 두노선이 만날 때까지 건설을 계속하도록 결정되었다. 그 두 계획은 네바다,와이오밍과 유타의 탁트인 공간을 가로지르는 경주가 되었고, 인부들은 하루에 철로를 무려 10마일씩이나 부설했다!
마침내, 1869년 5월 10일, 두 철로의 기관차들이 유타의 프로몬토리에서 만났고 철로의 연결점을 표시하기 위해 황금 대못을 박았다. 한때 수개월이 걸리던 여행이 이제 며칠이면 가능하게 되었다. 두 대양에 접한 주들을 가진 나라가 이제 해안에서 해안까지 강철끈으로 묶였다.
56. 최초의 독일 통일: 1871
1871 파리코뮌 봉기함.
1872 부다市와 페스트市는 결합하여 부다페스트市가 되었다.
1873 1873년의 불황으로 미국은 5년간 경제적 침체기를 맞음.
1874 영국의 디즈레일리가 보수당 출신의 수상이 됨.
1875 영국은 파산한 이집트로부터 수에즈 운하를 사들임.
1875 스페인에서 알퐁소 12세에 의해 부르봉 왕조가 회복됨.
1876 압둘 아미드 2세는 최후의 오스만제국의 왕으로서 즉위.
오늘날에는, 독일이 유럽의 지리적, 산업적 심장부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독일이 단일한,통합된 국가로 존재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이다. 로마제국시대에 게르만 부족들은 언어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완고하게 독립적으로 남아 있었다. 부족들이 신성로마제국-항상 독일의 명목상의 지배자가 다스렸다-의 일부로 명목상 통합된 후에 조차도 그들은 계속 독립적인 국가들로 남아 있었다. 이 대체로 형식적인 명칭은 1806년, 나폴레옹이 자신의 제국의 일부로 독일 국가 연방을 구성하는 해까지 살아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방이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대항세력의 기반이 되었다.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할 때에 이르면 중세에 300개이상이었던 독일 국가들이 39개로 통합되어 있었다. 이 국가들 중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같은 강국들도 있었고 바바리아나 작센같은 좀 작은 국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이후에 독일을 통일하려는 노력들은 항상 어느 나라가 통합된 독일의 지배적 실체가 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의 경쟁으로 끝났다.궁극적으로 프러시아가 독일 국가들가운데 최강국으로 등장했고, 오스트리아는 1938-1945사이의 기간을 제외하곤 줄곧 통일독일과 별개로 존재했다.
독일통일의 경로를 설정하는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드 폰 비스마르크()였는데, 그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의해 분데스탁(독일 국가들의 의회)에 파견될 사절로 임명되었다. 그뒤에 그는 프랑스주재 프러시아대사로 일했다. 이 경험들이 그에게 나중에 도움이 될 값진 통찰력을 주었다. 1862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형제이자 상속자인 빌헬름 1세()가 비스마르크를 프러시아의 재상으로 지명했다. 간단히 "철혈 재상"으로 알려지면서, 비스마르크는 1871년에서 1890년까지 계속 독일제국의 수상으로 재직했다. 1886년에 이르면 비스마르크는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을 프러시아의 통제하에 통합해 놓고 있었다.
한편,루이 나폴레옹(1852년 이후에는 나폴레옹 3세)은 프랑스의 동쪽국경을 라인강까지 확장시키고 많은 독일 국가들을 프랑스제국으로 통합하기를 바랬다.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비스마르크의 주도면밀한 계획 덕택에, 프러시아는 공격에 잘 대비되어 있었다. 독일은 반격을 개시하여 크리스마스에는 파리까지 이르렀다. 보불전쟁()은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프러시아는 이제 독일을 통일할 정치적 힘을 갖고 있었다. 1871년 1월 18일에 독일제국이 선포되었고,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재상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후 거의 20년동안 유럽대륙 최강의 군주정 배후에 있는 의심할수 없는 실세로 남아 있게 된다. 독일 자체는 1945년까지 통일된 채로 있게 된다.
57. 리틀 빅혼의 전투: 1876
1871 신미양요 발생.
1876 한-일간 강화도 조약 체결.
1876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학 원리]를 출판함.
1876 디아즈 장군은 멕시코의 독재자로 권력을 장악.
1876 독일 고고학자 슐레이만은 미케네 유적을 발굴.
1876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여황제의 칭호를 얻음.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반구에 첫발을 디딘 때부터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스페인이 중앙 및 남아메리카의 토착제국을 무자비하게 멸망시킨 데 비해,북아메리카에서의 충돌은 게릴라 전에 더 가까웠는데, 영국 식민지 가장자리의 국경지대에서 계속 되었다.
인디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그들을 무시하는 것과 특정 지역으로부터 그들은 몰아내는 것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1830년의 인디언 이동 법()은 모든 아메리카원주민을 미시시피강 서쪽 땅으로 이동시킬 것을 요구했고, 1837년에 미국 남동부에 살았던 모든 부족들의 영구적인 거처로 인디언 보호구역(현재는 오클라호마주)이 만들어 졌다. 이 강제적인 이주는 점점 많은 수의 정착민들이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하면서 일어날 피할수 없는 문화간의 충돌을 잠시 연기했을 뿐이었다.
블랙풋, 샤이안, 크로우, 수우족같은 평원 인디언 부족들과 아파치같은 남서부의 부족들은 주로 유목민들로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까지 그럭저럭 유럽인들을 피할 수 있었다. 두 집단간의 충돌은 이주민들의 행로를 따라 이따금 일어 났다. 그러나 1866과 1868년 사이에 붉은 구름의 전쟁(관련되 오글랄라 수우족 추장의 이름을 따서)으로 알려진 일련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다. 이 충돌을 끝맺은 조약은 몬타나와 인근지역에 있는 그들의 전통적 사냥지와 교환하여 수우족에게 다코타지역의 블랙 힐에 광대한 유보지를 보장해 주었다.
8년 뒤, 블랙 힐에서 황금이 발견되어 이주자들이 평원으로 몰려 들었고, 다시 전쟁이 터졌다. 수우족은 몬타나로 되돌아 왔고, 그들을 유보지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미육군이 파견되었다. 육군의 對인디언 작전은 공격을 죠지 쿡장군, 존 기번장군 그리고 알프레드 테리장군이 이끄는 세갈래로 나누어 협공할 것이 요구되었다. 테리의 휘하에 죠지 암스트롱 커스터()라는 허세가 심하고 젊은 인디언 토벌대장이 있었다. 커스터는 명예를 바라고 그의 제 7기병연대가 수우족과 가장 먼저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 7기병대가 최초로 접촉을 했고, 커스터는 즉각 공격했다. 그러나 3000명이 넘은 수우족과 샤이안족이, 아마도 수우족 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을 훙크파파 수우족의 시팅 불 추장()의 지휘하에, 리틀 빅혼강의 강둑위에 집결해 있었고 ,거기에는 전쟁에서 미군이 조우한 것중 가장 큰 진지가 있었다. 커스터와 그의 215명이 부하들은 다른 협공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45분만에 전멸되었다.
1876년 6월 25일에 있었던 이 리틀 빅혼 전투는 인디언 최대의 승리를 대표했다. 인디언들이 이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지게 될 것이었다. 미군은 더 많은 병사와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이 결국 미국원주민들을 격퇴하리라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몇년안에 평원 부족들은 강제로 유보지로 보내졌다.1886년에 이르면 여전히 미군에 저항하던 마지막 인디안, 아리조나의 제로니모 추장이 이끄는 아파치족이 항복했다. 그러나 1876년 일어난 미군의 끔찍한 패배는 미대륙이 더이상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유목생활과 현대문명의 발전을 동시에 수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58. 개인 통신의 여명: 1876
1876 미국의 백주년 기념 박람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됨.
1877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트렌스바알을 병합함.
1877 영국에서 최초로 윔블던 테니스대회가 열림.
1877 일본군은 무사의 반란을 진압함.
1877 터키의 발간국가들에 대한 의협으로인해 노토전쟁 발발.
1878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는 터키로부터 독립을 선언함.
1878 베를린회의에서 러시아가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얻은 땅을 반환할것을
결정.
1878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쩨고비나를 획득.
1879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은 [인형의 집] 발표.
1880 보어인들은 트렌스바알의 영국인에게 봉기를 일으킴.
아마도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전화보다 더 크게 혁신시킨 통신수단은 없을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것은 소리-특히 인간의 목소리-를 여러가지 주파수의 전기신호로 바꿨다가 다시 원래의 목소리와 같은 톤으로 되돌리는 시스템이다. 1831년, 영국인 마이클 패러데이()는 금속의 진동을 전기신호로 바꿀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것은 전화의 기술적 기초였지만, 1861년까지는 아무도 이 시스템을 소리를 전송하는 데 이용하지 않았다. 그해 독일에서, 필립 라이스()가 소리를 전기로, 그리고 다시 전기를 소리로 바꾸는 간단한 장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완의 장치였으므로, 이것은 대부분의 주파수를 전송할 수 없었고, 결코 완성되지 못했다.
실용적인 전화기는 사실상 미국에서 각자 따로 일하던 두 사람-스코틀랜드 태생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엘리사 그레이()에 의해 발명되었다. 놀랍게도 두사람 모두 1876년 2월 14일, 뉴욕특허청에서 그들의 고안품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는 데, 벨이 불과 두시간 차이로 그레이를 앞질렀다! 비록 그레이가 1874년에 최초의 강철 진동판/전자석 수신기를 만들었지만, 그는 벨이 해냈을 때까지는 제대로 작동하는 송신기를 고안해 낼 수 없었다. 벨은 그레이가 의기소침해 있는 동안 여러 형태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실험하며 끊임없이 작업했다.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최초로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전화통화가 있었던 것은 1876년 3월 6일 이었는 데, 그때 벨은 어느 방에서 다른 방에 있던 조수를 불렀다. "이리로 오게,왓슨," 벨이 지시했다. "자네가 필요해." 왓슨은 벨이 고안한 송신기에 연결된 수신기를 통해 그 요청을 들었고, 그 뒤를 따른 것은 벨 전화회사설립의 역사였다. 이 회사는 점점 커져서 세게 최대의 전화회사가 되었다.
교환으로 알려진 최초의 전화 시스템-전화를 가진 많은 사람들사이의 통신망의 실용적인 수단이다-이 1877년, 코넥티컷의 하트포드에 설치되었다. 두 주요도시를 잇는 최초의 교환소는 1883년, 뉴욕과 보스턴사이에 설치되었고, 미국밖의 최초의 교환소는 1879년, 런던에 세워졌다.
59. 다음 세기를 위한 動力: 1876
동력의 발전은 항상 인류문화사의 전환점에 연결되어 왔는데, 그것이 환경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능력범위를 확대시켜 왔기 때문이다. 19세기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었던 것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18세기에 발명된-이었다. 20세기의 산업혁명과 비행기,자동차,잔디깎이 그밖의 동력기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실용적인 내연기관의 발명이었다.
19세기 초부터 내연기관을 만들려는 시도가 무수히 많았지만, 최초의 성공적인 모델은 1860년에 벨기에태생의 프랑스인 에띠엔느 르느와르()에 의해 제작되었다. 독일인 니콜라우스 아우구스트 오토()와 오이겐 랑겐은 1867년에 ""기관을 발명하여 내연기관의 연료효율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효율성과 힘의 관점에서 가장 큰 혁신은 매 4번째 행정이 동력행정인 4행정 기관의 발명이었다. 4행정 방식은 1862년 프랑스인 알퐁스 보 드 로샤()가 고안해 냈지만, 그는 실제 작동하는 모델을 만들지는 않았다. 1876년에 최초의 4행정 내연기관을 제작하여 특허를 출원하는 데 성공한 것은 니콜라우스 오토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놓고 보자면, 자동차가 바퀴이후 교통수단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발명이라는 점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동차의 기본적 전제는 간단하다. 보통 소나 말이 끄는 여러가지 타입의 교통수단중의 하나를 고르고, 엔진을 덧붙이면 스스로 움직이는 개인 교통수단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1889년, 독일에서 고틀리프 다이믈러()와 빌헬름 메이바흐()에 의해 이정표적인 차량이 제작되었다. 1.5마력,2기통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이 차는 4단 기어가 달려 있었고, 시속 10마일(시속 16Km)의 속도로 달렸다. 또다른 독일인, 카를 벤츠() 또한, 같은 해에 가솔린으로 가는 차를 만들었다.
가솔린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또는 동력차는 19세기동안 대체로 호기심거리로 남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아주 소량만이 제작되었다. 최초로 대량 생산된 자동차는 1901년의 올즈모빌로, 1873년 부터 가솔린 기관을 생산해오던 미국의 랜섬 올즈()가 만들었다. 현대적인 자동차 대량생산과 현대산업의 일관작업라인의 발명은 미시간,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에게 돌려지고 있는데, 그는 1896년에 처음으로 가솔린 차를 만들었다. 포드는 1908년에 그의 모델 T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1927년에 그것이 단종될 때까지 1,800만대가 일관작업라인에서 생산되었다.
60. 무선통신: 1895
1880 영국의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에 이어 다시 수상이 됨.
1881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는 나로드니끼 혁명분자에 의해 암살됨.
1881 일본 정치가 이따끼 따이스케는 자유당을 세움.
1883 최초의 마천루(10층건물)이 시카고에 세워짐.
1885 콩고 자유국(자이레)는 벨기에왕 레오폴트 2세의 소유가 됨.
1885 인도 국민 의회운동이 봄베이에서 시작됨.
1886 호세 발마쎄다는 칠레의 대통령이 됨.
1889 에펠은 파리박람회를 위해 에펠탑을 설계함.
1889 브리잘의 페드로 2세가 폐위당함. 브라질은 공화국으로 선포됨.
1894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난 결과로 청일전쟁이 발발.
1895 청일간의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짐.
1895 러시아 혁명가 블리디미르 일리히 레닌이 시베리아로 추방됨.
전신과 전화는 둘다 통신기술의 발전에서 거대한 도약이었다. 이 기술의 주된 한계점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선이 파손되거나, 전선이 도달할 수 없다면, 통신은 불가능했다.
1887년, 독일의 과학자 하인리히 헤르츠가 전파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을 최초로 통신에 응용한 것은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구글리엘모 마르코니였다. 이정표적 사건이 1895년에 일어났는데, 그는 1마일 반(2.4km) 떨어진 곳에 무선으로 전자 메시지를 보내는데 성공했다. 1898년, 유진 뒤끄레뜨와 어네스트 로저가 파리시 전역에 무선 송신소를 만들었고, 1899년 3월 28일에 마르코니는 영국의 도버에서 프랑스의 위메뢰까지 31마일(50KM)의 거리를 격하여 최초의 국제 무선 메시지를 보냈다. 1901년 12월 12일, 마르코니는 영국의 폴두와 2100마일(3400KM)떨어진 뉴펀들랜드의 수신소 사이에 최초의 대륙간 무선 송신을 성공적으로 행했다.
1903년, 마르코니는 메사추세츠 사우스 웰플리트에 송신국을 설치하고 WCC라고 명명했다. 헌당식에는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에드워드 7세사이의 인사교환도 포함되었다. 1904년, 마르코니는 커나드 스팀쉽 라인과 동의하여 최초의 선박-육지간의 통신 시스템을 설치했다. 이 시스템은 타이타닉호 침몰사건같은 해난사고가 발생했을 때 인명을 구조하는데 결정적 요소임이 드러났다.
61. 열강이 된 미국: 1898
1895 쿠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함.
1898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홍콩에 대한 99년간의 조차권을 획득.
1898 스페인은 푸에트리코, 괌, 필리핀을 파리조약에 의해 미국에 넘김.
1898 미서전쟁 시작.
1899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과 영국간의 전쟁이 시작.
1900 막스 플랑크는 양자역학을 고안해 냄.
1900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출판.
19세기 영국이 세계 전역에 걸쳐 정치-경제적 제국을 건설하고 있을 때, 미국은 대영제국의 전 영토만큼이나 방대한 미국 영토의 경제발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유럽강국들은 --심지어 벨기에나 포르투갈 같은 소규모 국가도-- 아프리카와 극동지방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1898년에 이르면 자연자원이 풍부한 국토와 끊임없이 팽창하는 경제 덕택에 미국은 경제 초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기준으로 보자면, 미국은 식민제국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서반구 외부의 미묘한 정치적 변화들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초강국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한편 스페인은 19세기에 걸쳐 자국의 지배 아래 있던 모든 남아메리카의 공화국들이 독립을 획득함에 따라 서반구의 제국이 붕괴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1895년 쿠바의 인민은 스페인에 항거해 봉기했다. 이 봉기에 대한 스페인의 야수적인 진압은 미국 언론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고 그 결과 1898년 2월 15일 미 해군 전함 유에스에스 메인(USS Maine)호가 하바나항에서 스페인의 앞잡이라고 알려진 이들에 의해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민은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 나서 메인호의 침몰로 사망한 260인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고 큐바인들을 억압적인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요구했다. 미 해군은 쿠바를 봉쇄하고 필리핀제도의 스페인 선단을 공격했다. 3월 1일 조지 듀이(George Dewey) 장군의 함대는 마닐라곷으로 항행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스페인의 전함들을 격파했다. 이 때 미군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7월 3일 윌리엄 샘슨(William T. Samson) 장군이 이끄는 미 해군 대서양함대는 다시 한번 아무런 손실도 없이 큐바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였다. 동시에 미 육군이 쿠바를 침공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 군대에는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던 티오도어 루스벨트(1858-1919; 재임 1901-1909)가 이끄는 제1차 의용기병대(The First Voluteer Cavalry; the "Rough Riders")도 포함되어 있었다. 7월 17일 스페인군은 패배했다.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은 겨우 114일 동안 지속되었고 미국은 그 전쟁에서 약간의 부상자 외에는 손실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 승리의 결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스페인은 이 전쟁의 결과로 쿠바와 필리핀을 포기했을뿐만 아니라 푸에르토리코와 괌까지도 잃었다. 이 승리로 미국은 세계의 정치적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다.
제국의 발전으로 미국의 경제적 운명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다른 소규모 제국들과는 달리 미국은 이미 그 국경 내에 광대한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미-서전쟁으로 미국은 세계 무대에서 자국의 역할을 명확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과 국제통신의 발달탓에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는 미국은 국제관계와 고립된 상태에 머무를 수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62.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1901
1901 러시아는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획득.
1901 오스트레일리아는 영 연방이 됨.
1901 빅터 베르거와 유진 뎁스는 미국 사회당을 세움.
1902 영국작가 코난 도일은 [셔얼록 홈즈]를 발표.
1902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 앙리코 카루소는 최초의 축음기판 녹음을 함.
1902 영국-보어인간의 전쟁이 끝남.
여성의 권리가 여전히 새로운 것이었을 때, 그녀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통할하는 19세기의 가장 강력한 국왕이었다. 독일인 어머니와 생후 8개월 되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영국 역사상의 어떤 국왕보다 오랫동안 --64년간-- 치세를 누렸다.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은 영국이 정치, 문화, 산업에서 황금기에 달했던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빅토리아 시대 (The Victorian Age) --역자주)
빅토리아는 조지 3세의 네째 아들인 켄트공 에드워드와 독일의 삭스 꼬부르그 고타 공령의 프란쯔 공작의 딸이며 벨기에의 레오폴트 1세의 누이였던 빅토리아 마리아 루이자 공주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 그녀는 18세까지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는 고적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1837년 그녀의 아저씨 윌리엄 4세(1765 -1837)가 사망하자 갑작스럽게 그녀는 대영제국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보호 속에 자라난 그 십대소녀는 자신이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소식을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가진 추밀원(the Privy Council)에서의 첫 모임에 대해 웰링턴공(the Duke of Wellington)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는 빈 왕좌를 메웠을 뿐만 아니라 그 방 전체를 압도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녀의 사촌 삭스 코부르그의 알버트 왕자(1819-1861)와 1840년 2월 10일에 결혼하였고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알버트가 죽고나자 빅토리아는 이후 4년간을 알버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녀가 다스리던 제국을 돌보는 일로 보냈다.
두세기 만에 처음 등극한 영국의 여왕 빅토리아는 강력한 왕이었을뿐만 아니라 국사에도 활발하게 참여하려 하였다. 그녀는 확고하고 능동적으로 통치했고 또 너무나 완벽하게 통치했기 때문에 후에 에드워드 7세가 되는 그녀의 아들이 그녀를 대신해 통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는 그는 60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는 날까지 실로 활동적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권력은 그녀의 치세 후반기 동안 절정에 달했으며 캐나다와 오스티레일리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아프리카로 대영제국의 범위를 넓히는 정책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1876년 그녀가 총애하던 수상인 보수당의 벤자민 다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1)는 의회로 하여금 그녀에게 인도의 여황(Empress of India)라는 또 하나의 명칭을 부여하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기간 동안 대영제국에서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산업혁명과 제국식민지로부터 얻어낸 막대한 부 덕택에 영국은 세계의 문화적, 기술적 중추가 되었다. 런던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풍요로운 도시였으며 그곳에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과학과 문학이 번성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그 황금기는 빅토리아 여왕이 1901년 81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도 여전히 그 절정에 있었던 것이다.
63. 라이트 형제의 첫번째 동력비행기: 1903
1903 퀴리부부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1903 파나마는 콜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
1903 레닌은 볼셰비키 혁명당을 조직함.
1903 미국은 파나마 해협에 대한 영구 지배권을 획득.
1904 막스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출간.
1904 러시아-일본간의 만주 영토분쟁이 일어남.
1905 러시아에서 총파업과 혁명이 발발. 니콜라이 2세는 헌정을 수립.
19세기가 산업혁명으로 특징지워지는 시대라면 20세기는 기술혁명(Tecnological Revolution)의 시대였다. 이 기술혁명은 일상생활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수송기술 분야에서, 20세기인들에게 비행기는 19세기인들의 증기기관차와 같은 것이었다. 고대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새처럼 나는 것을 갈구해왔고 실제로 수세기에 걸쳐 이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꿈을 이루었다는 사람들에 대한 전설과 이야기들이 나타났다. 15세기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실제로 사용할 수도 있었던 비행기계를 고안했으며, 18세기말에 프랑스의 몽고플리에(Montgoflier)형제는 사람이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풍선을 만들었으나 그것은 공기보다 가벼운 가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종이 가능하고 공기보다 무거운 운송수단으로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꿈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것이었다. (공기보다 무겁다는 것은 가스주머니가 아니라 공기역학적 기구들에 의해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운송수단을 의미한다.)
19세기 후반 그러한 기구를 만들어보려는 몇차례의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최초의 성공적인 동력비행은 새뮤얼 피어퐁(Samuel Pierpont)과 스미소니언 협회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문자 그대로) 며칠 후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1903년 12월 17일 노스 캐롤라이나의 키티 홐 반도(Kitty Hawk Peninsular) 근처의 킬 데블 힐(Kill Devil Hill)의 모래 언덕에서 일어났다. 오하이오 출신의 두 사람,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와 그의 동생 어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1-1948)는 어릴 적부터 공기역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고 1896년 그들의 첫번째 무인 글라이더를 만들었다.
1900년과 1902년 사이에 그들은 키티 홐에서 유인 글라이더에 관한 일련의 실험을 행했다. 그들은 성공적인 동격비행기의 열쇠는 비행사가 비행기에 행사할 수 있는 통제력의 정도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려는 고안물은 개조한 연이나 물위의 보트처럼 공기 속에서 통제되는 기계라기 보다는 비행기라고 생각했다. 최초의 라이트 비행기는 직포로 쌓인 복엽비행기로 그 틀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라이트 형제 자신이 고안한 벨트에 의해 동축프로펠러와 연결된 12마력 수냉식 엔진에 의해 추진력을 얻었다. 윌버와 어빌은 1903년 여름에 비행기를 완성하여 12월에 바람을 잘 받을 수 있는 키티 홐으로 가져갔다. 12월 13일 윌버는 첫번째 비행을 했으나 비행기를 모래언덕으로 전진시키는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12월 17일 어빌 라이트가 역사상 최초로 유인 비행기의 동력비행에서 12초 동안 37미터를 비행했다. 날이 저물어 갈 무렵 형제는 각각 두 차례의 성공적인 비행을 했고 윌버는 마지막 비행에서 260미터를 날았다.
1904년 3월 13일에 시작하여 그들의 라이트 2호는 이후 7개월 동안 수차례의 성공적인 비행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라이트 1호와 마찬가지로 2호 역시 비행회수가 늘 때마다 속도가 감소하는 경향을 뚜렷하게 보였으므로 라이트 형제는 다시 설계대로 돌아갔다. 그 결과 라이트 3호는 훨씬 더 믿을 만한 비행기가 되었고 55 킬로미터의 거리를 성공적으로 비행할 수 있었다. 1905년 10월 5일 그것은 38분간 공중에 머무르는 기록을 세웠다.
64. 일본 세계의 열강이 되다: 1905
1905 프랑스의 영토에 대한 야욕이 제1차 모로코 사태를 불러 일으킴.
1905 마티스는 야수파 운동을 전개.
1906 드레퓌스 사건이 드레퓌스의 사면으로 종결됨.
1907 영,불,러 간의 삼국협상이 형성됨.
1908 피카소와 브라크는 큐비즘 운동을 전개.
1908 젊은 투르크 혁명이 터어키의 정치개혁을 가져옴.
1910 한일 합방
1868년 권좌를 차지한 메이지 천황(1852-1912)의 지휘 아래 일본은 모든 시민이 외국인과 접촉을 가지는 것을 금지당했던 폐쇄 사회에서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그들을 배우기를 갈망하는 국가로 변화되었다. 반세기도 채 지나지않아 일본은 중세 봉건제국가에서 근대적인 산업강국으로 진보하였다.
근대화를 위한 메이지 천황의 노력은 처음에 몇몇 지방의 쇼군들로터의 저항에 직면했으나 권력층의 대다수는 일본을 해외무역에 참여하여 얻는 이익이 불익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이지 천황의 통치 이전에 쇼군은 사병들을 거느렸으나 1873년 천황은 독일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육군을 건설했다. 일본이 고립된 왕국이었던 때는 불필요했던 해군 또한 창건되었다. 학자들은 유럽의 헌법과 정부체제를 면밀히 연구했고 1890에는 영국의 체제를 본보기로 삼은 의회(the Diet)가 설립되었다.
이때에 이르면 일본인들은 와전히 고립된 존재에서 자신들을 열강의 일원으로 과시하고 싶어하는 존재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다. 유럽으로부터 일본은 정부, 군사조직 그리고 산업혁명을 배워왔다. 다음 일본은 국경을 넘어 제국을 건설한다는 유럽의 관념을 그대로 본받았다. 항상 대외정책을 수립하지 않는 것을 대외정책으로 삼고 있던 나라에게 아시아 전체에 자국의 세력을 과시한다는 것은 하나의 새롭고 대담한 발걸음을 내디는 것이었다. 일본은 1870년대에 리큐섬을 합병했으며 1894년에는 조선과 만주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싼 청일전쟁에서 중국과 교전하였다. 당시 중국의 광대한 토지, 인구 그리고 자원은 일본의 그것을 훨씬 더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청조는 지역영주들의 형식상의 대표에 지나지 않아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오로지 그 크기와 지리적 위치 탓에 아시아의 초강대국이라는 대접을 받았을뿐 대규모의 전쟁에 대한 준비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은 1894년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아시아 본토를 식민화할 발판을 성공적으로 마련한 셈이었다.
이제 일본이 만주와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에 방해하는 것이라면 오로지 광대한 러시아 제국뿐이었다. 1904년 2월 일본은 극동의 러시아 함대와 기지를 공격했다. 20세기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었던 러일전쟁은 러시아인들의 당혹스런 패배로 끝났다. 징기스 한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의 군대가 연속적인 일련의 전쟁에서 유럽의 주요 열강을 패배시킨 것이었다. 1905년 9월 5일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은 북동 아시아 전역을 통제하게 되었고 근대에 아시아 지역에서 출현한 최초의 열강이 되었다. 이 승리로 또한 세계 공동체에서 일본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할 주요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65.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1909
1911 멕시코의 독재자 디아즈가 몰락함.
1911 청조가 끝남. 중국에 손문이 이끄는 공화국이 탄생.
1911 티벳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
1913 버트란드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수학의 원리]를 출판함.
1913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이 초연됨.
1913 크레타 섬이 그리스의 영토로 포함됨.
1913 불가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으로 제2차 발칸전쟁 시작.
사람들은 한때 지구가 평평하고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비록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이론들은 사론(邪論)이라는 취급을 받았으나 이후 수세기 동안 우리는 지구가 평평하거나 구형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태양계에서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며, 제대로 태엽을 감아준 시계는 어디서나 똑같은 속도로 가고 빛은 항상 직선으로 운동한다고 가정해왔다.
이러한 가정은 아이작 뉴튼(Issac Newton, 1642-1727) 이래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인정받는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이라는 이름의 소심한 독일 태생 물리학자에 의해 완전히 뒤짚혔다. 사실 1909년에 기초적인 형태로 출판된 그의 상대성이론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관찰자가 이동하고 있는 속도에 상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빛의 이동 속도 --우리는 초속 299,330 킬로미터라고 알고 있다-- 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론화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의 핵심은 물질이 에너지로 전환될 때 방출된 에너지는 간단해보이는 E=mc라는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c는 빛의 속도, m은 질량을 나타낸다. 이 공식은 작은 물질도 거대한 양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또한 핵에너지 생산을 위한 원자로와 핵무기를 발전시키는 수단을 수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핵에너지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발견들은 또한 태양이 실제로 불타고 있다면 그것은 벌써 몇해 전에 다 타버렸을 것이라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태양을 포함해서) 별들의 본질을 설명한다. 핵반응에서 아인슈타인은 거대한 양의 빛과 열은 질량을 최대한 잃지 않고도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은 지극히 복잡한 것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상대성을 설명하는 것 중의 하나는 아인슈타인 자신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김으로써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상대성 이론을 독자의 구미에 맞게 제공함으로써 오늘날 독일에서 나는 독일인 과학자라고 불리고 있는데 반해 영국에서는 유태계 스위스 과학자라고 불리고 있다. 내가 과학자가 아니라 몸서리 치도록 흉물스러운 사람이라면 그러한 기술은 반전되었을 것이고 나는 독일인들에게는 유태계 스위스인이, 영국인들에게는 독일인이 되었을 것이다."
66. 프란쯔 페르디난드 공의 암살: 1914
1914 찰리 채플린이 그의 많은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
1914 일본은 삼국동맹에 가담.
1914 파리의 코코 샤넬은 의복 디자인을 시작함.
1914 파나마 해협 완성.
1915 독일군 잠수함이 루시타니아호를 공격. 124명의 미국인 사망.
1915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 발표.
1915 멕시코의 싸파타와 빌라는 카란짜에 대항하여 폭도를 일으킴.
1914년 여름의 유럽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불안한 곳이었다. 공기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한 이래로 지난 99년 동안 유럽에서는 모든 유럽국가가 참여하는 총체전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여전히 --파리로 진군하는 독일군을 볼 수 있었던 1870년의 보불전쟁을 포함한-- 수많은 소규모의 국지전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지배 기간과 이전 수십년에 특징적이었던 대규모의 전쟁은 먼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1815년에 지도적인 유럽 국가들은 비엔나 회의에 참가하여 유럽에는 하나의 초강국이 존재해서는 안되며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엇비슷한 힘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념을 채택했다. 비록 이러한 협정이 일반적으로 어떤 평화로운 환경을 창출하기는 했으나 그 평화 아래에는 긴장이 들끓고 있었다. 그동안 그러한 긴장 속에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두개의 동맹으로 결합하여 초강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3국 협상(the Triple Entente)을 수립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a dual monarchy), 독일, 이딸리아는 삼국동맹(the Triple Alli- ance)를 형성했다. 이 삼국동맹에는 터키가 실제적인 성원으로 참여했다. 공식적으로 동맹이 수립된 후 각국에서는 전력 증강이 이루어졌으며 많은 나라들이 주변 국가와의 긴장을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알자쓰 지방을 되돌려받기를 원했고 독일은 영국의 함대에 도전하고 싶어했다. 정치적 긴장이 팽배한 대륙에서 필요했던 것은 오로지 사태를 폭발시킬 단 하나의 불씨였다. 유럽의 심장부에 자리잡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서로 갈등하는 수많은 인종집단이 한데 모인 하나의 도가니였다. 피할 수 없었던 그 전쟁에 불을 붙인 사건은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되는 남유럽 한 지역에서 발생했다.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가 오스티리아-헝가리제국에 편입되었을 때, 이것은 이웃 세르비아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에서 박해받는 소수민족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이 합병은 그들이 아드리아해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데 이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긴장은 1892년 전쟁으로 분출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는 84세의 프란쯔 요셉 1세(Franz Joseph, 1830-1916)였으나, 황제 배후의 실력자는 그의 아들이며 상속자인 프란쯔 페르디난드(Franz Ferdinand, 1863-1914 ) 대공이었다. 1914년 7월 23일 그와 그의 아내는 제국의 깃발을 휘날리며 자신의 제국이 가진 힘을 과시하고자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의 불안한 수도 사라예보를 공식방문 했다. 그들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근본적으로 세르비아가 직접 그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으므로 한달간의 외교적인 분재 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 포고 하였다. 이에 따라 다른 주요 유럽 국가들이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처럼 차례로 전쟁의 심연에 빠져들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위협했고 또한 세르비아를 지지하고 오스트리아를 위협하던 러시아를 위협했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독일은 러시아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1870년에 독일에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를 바랬던 프랑스는 러시아를 지지했다. 영국은 독일이 유럽에서 팽창해보려는 열망이 자국의 이익과 상충됨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프랑스의 편에 가담했으나 적극적인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독일은 영국이 계속해서 중립을 지킬 것이며 신속한 승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8월 2일 프랑스에 대하여 선전 포고 했다. 이번에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은 자국의 동맹국을 지지하기 위하여 독일에 선전포고 하였다. 이 국가들은 또한 전 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제국들이었으므로 전쟁은 유럽 대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첫번째 세계 전쟁이 되었으며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67. 마르느전투: 1914
1915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에 침공.
1915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독일,불가리아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함.
1915 다다이즘 운동이 시작됨.
1915 미국 해병대는 아이티에 상륙, 20년간의 군정을 시작함.
1916 제임스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발간.
1916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개통. 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노선이다.
프리즈 페르디난드 대공의 암살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이 8월 4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하는 것에서 절정을 이룬 한 차례의 선전포고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 서부전선에서는 프랑스를 맞이해야 하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그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 중 가장 전쟁준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그 사령관들은 그들이 재빠르게 행동한다면 쉽세 승리할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결국 독일이 플랑드르 평원을 가로 질러 프랑스를 공격함으로써 소국 벨기에의 중립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행동은 벨기에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던 영국 --양국의 국왕은 사촌지간이었다-- 이 전쟁에 뛰어드는 촉매가 되었다.
뒤이어 주요 유럽 열강 모두가 역사상 가장 무서운 전쟁에 열정과 흥분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나서게 되었다. 여름 햇볕을 받으며 행진하는 제복과 군기의 화려한 행렬에 매혹된 이들은 새로운 세대의 무기들 --기관총으로부터 유독가스에 이르는-- 이 가진 치명적인 충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대규모 전쟁에서 처음 사용된 이 무기들은 이제 전쟁이 더 이상 기사들의 전투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소국 벨기에는 독일, 오스티리아-헝가리 제국과 대결하고 있었다. 반면 기술적으로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딸리아는 국내 여론에 역행하고 있었다. 이딸리아 국민들은 오스티리아의 이딸리아어 사용지역에 통제권을 다시금 획득하기 위해 자국이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전략은 1870년의 경우와 같이 프랑스를 신속하게 패퇴시키고 이어 유럽 열강들 중 가장 전쟁준비가 덜 되어 있는 러시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벨기에를 두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삼켜버렸고 서부로 밀고들어가 프랑스로 진격했다. 프랑스로의 진격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는 총사령관 알프레드 폰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 1833-1913)이 고안한 전투계획을 수행하는 것으로 그 계획은 군대의 좌익은 메츠에 머무르고 있고 우익은 벨기에를 통해서 빠리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 계획에 따르면 우익에 힘을 집중시키는 것이 필요했으나 그 작전을 지휘한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 von Moltke, 1848-1916)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비록 처음에는 폰 슐리펜의 계획이 성공했으며 지나치게 전쟁이 지나치게 확대되기 전에 우익부대가 빠리에 도착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공격측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주춤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9월 6일에서 9일에 걸쳐 마르느 강을 따라 반격을 감행했을 때, 그들은 독일의 진군을 저지할 수 있었고 독일은 이후 다시는 이전과 같은 기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인들을 봉쇄했으나 그들을 밀어붙이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따라서 60일이내의 빠른 시간에 독일이 승리를 거두리라 생각되었던 전쟁은 유혈이 난무하는 가운데 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68. 러시아 혁명: 1917
1917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발표.
1917 스위스의 칼 융은 [무의식의 심리학]을 발간.
1917 미국은 버진 아일랜드를 덴마크로부터 구입.
1917 미국은 대독일 선전포고를 함.
1917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투르크에 대한 아랍의 반란을 이끔.
1917 발포르 선언으로 유태인들은 발레스티나에서 영토를 얻음.
1917 존즈 법안은 푸에르트리코인에게 미국 시민권을 허여함.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러시아 제국은 세게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제국은 또한 지난 세기 유럽이 경험했던 산업혁명과 사회적 진보들로부터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원시적이고 후진적인 곳이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는 갈수록 그 정도를 더해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1905년에 한 차례의 봉기가 있었으나 짜르 니꼴라이 2세(Nicholas, 1868-1918)는 그것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1914년에 니콜라이는 다시 한번 전쟁에 나섰는데 이번에는 독일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의 군대가 전장에서 패배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그간 쌓였던 문제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식량공급이 점점 더 희귀해 짐에 따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켜 사치스런 삶을 향유하고 있던 귀족들에 대한 분노는 증대되었다.
1915년과 1916년의 수많은 식량폭동 이후 전면적인 혁명이 1917년 발발했고 3월 2일 니꼴라이 2세는 퇴위할 수 밖에 없었다. 뒤이어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려는 몇차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전체 사회,경제 구조는 그 구조가 안고 있는 무게와 1차 대전의 부담 아래 끝내 붕괴하고 말았다. 무정부 상태와 기아가 나라를 휩씀에 따라 러시아는 부유한 귀족의 재산을 빼앗기만 하면 다수가 부유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칼 맑스(Karl Marx, 1818-1883)라는 이름의 독일의 학자이며 자칭 철학자가 설파한 사회주의 교리의 풍부한 토양이 되었다. 가장 과격한 사회주의자 집단은 볼쎄비끼들이었고 이들은 가장 조직화가 잘 된 집단이기도 했다. 그들은 짜르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알렉산더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 1881-1970)가 이끄는 입헌민주주의자들이 정부를 세웠을 때, 볼쎄비끼들은 또한 그들을 공격했다. 1917년 11월 7일 케렌스키는 유혈 꾸데따로 쓰러졌고 볼쎄비끼들이 러시아를 통치할 인민위원회(Council of People's Commissars)를 설립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이 위원회의 수장이며 제국 이후 러시아의 첫번째 수상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Vladimir Ilyich Ulianov, 1870-1924)였다. 그는 니꼴라이 레닌(Nikolai Leni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는 스위스에 살고 있었다.
레닌의 신정부는 많은 저항에 부딪쳤으나 1918년 3월 독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그의 운동에 충성하던 군대들을 국내로 불러들여 그에게 찬동하지 않던 사람들을 침묵시켰다. 1918년 7월 17일 레닌은 폐위된 짜르를 처형할 것을 명했고 그의 권력을 공고히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망한 짜르의 식민지 모두를 새로운 제국으로 통합하여 "소비예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불렀다.
1922년 10월 30일 그는 소비예뜨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를 설립했다. 그것은 칼 맑스의 이념에 기초한 일당 국가였으며 레닌의 공산당은 모든 권력을 휘둘렀으며 모든 부와 재산을 통제했다. 이후의 수십년 동안 수백만의 인명과 방대한 자원이 붕괴하는데 70년이 소요될 잔인한 사회주의 실험을 정당화하려는 헛된 노력에서 희생되었다.
69. 베르사이유 조약(전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전쟁은 낳은 조약): 1918
1918 일차대전의 결과로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화국이 됨.
1918 볼셰비키의 지도지인 레온 트로츠키는 적군(赤軍)을 조직
1918 러시아군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남.
1918 니콜라이 2세는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함.
1918 독일에서 폭동이 일어남. 빌헬름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
1918 바이마르 공화국 탄생.
1918 영국에서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짐.
1919 독일에서 공산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암살됨.
1919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운동을 조직함.
1919 멕시코의 혁명가 싸파타가 암살당함.
제1차 세계대전은 무익한 싸움이었다. 가볍게 시작된 전쟁은 그 어떤 악몽보다 더한 피로 물든 살육전으로 바뀌어 버렸다. 4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800만의 병사와 2500만의 민간인의 생명이 희생되었으며 2000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지상전은 실망스러운 교착상태에 빠져버렸고 주요한 전장은 전쟁 기간 동안 내내 거의 이동하지 않았다. 이것은 서부전선에서 전쟁을 개시한 독일의 공격이 몇주내에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을 밀어부치지는 못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이 거둔 초기의 승리들 또한 수렁에 빠져버렸다. 1917년 러시아의 짜르가 폐위되었을 때, 독일이 인력을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시키고 세력균형을 변화시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 이르렀을 때는 너무나 많은 독일인들이 죽었고 프랑스에서의 동맹군은 매우 견호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이 그 형세를 결정적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었다.
미국의 정기선 뤼스타니아(Luistania)호가 독일의 잠수함에 의해 침몰된 후,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선전 포고 하였다. 1918년 양키들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 전세는 완전히 뒤짚혔다. 1차 대전에서 교전국은 국가자원을 모조리 전쟁에 쏟아부을 수 밖에 없었다. 수백만명이 사망했으며 국내에서는 식량과 물자부족이 광범위한 고통과 사회적 불안을 낳았다. 러시아는 대규모 혁명을 경험했으며 1918년 동안 폭동과 파업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통례적인 것이 되었다.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동맹국은 드디어 공세로 돌아섰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의는 점점 더 늘어가는 사상자에 직면해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고 11월에 이르면 양국은 연합국이 내건 항복조건을 수락하는데 동의했다. 11월 9일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Wilhelm, 1859-1941)은 폐위되었고 네덜란드로 도망갔으며 11월 11일 "열한번 째 달의 열한번 째 날의 열한 시에" 전쟁은 종결되었다.
유럽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평화회의가 파리 근교에 있는 옛 제국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소집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 양국은 방대한 양의 무기와 물자들을 승전국들에 넘겨주어야 했으며 영토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동맹국이 라인강 서부의 독일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으며 또한 그 영토의 부분들이 쪼개져서 세르비아인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 유고슬라비아가 형성되었다. 전쟁에서 가장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던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the Treaty of Versailles)에서 가장 혹독한 조건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약에서 요구된 배상금은 독일 경제를 무력하게 만들었으므로 독일은 전쟁의 공포로부터 회복될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하고 나찌 폭정의 씨앗이 뿌려졌다. 사실상 조약은 너무나 가혹해서 그 자체로서 다음 세게 대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70. 라디오와 텔리비젼(소리와 영상의 전달): 1920-1923
1920 아돌프 히틀러는 나찌黨을 창설.
1920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에 대항한 비협력운동을 일으킴.
1920 러시아 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남.
1921 영국 방송 회사(BBC)가 창설됨.
1922 파시스트들은 로마를 행진함. 엠마누엘 3세는 무솔리니를 수상에 임명.
1923 뮌헨에서의 히틀러의 쿠데타는 실패함. 그는 잡혀서 투옥당함.
1923 로잔느 조약으로 근대 터어키의 국경선이 정해짐.
1924 레닌 사망. 새 지도자인 스탈린은 정적의 숙청을 시작.
전파(radio waves)는 1887년 독일의 하인리히 헤르쯔(Heinrich Herz, 1857-1894)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것은 1895년 쥬글리에모 마르꼬니(Guglielmo Marconi, 1874-1937)가 최초의 "무선" 전신을 보낼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전신에서 처럼 단지 '뚜','뚜우'하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 소리를 담고 있는-- 라디오는 마이크와 3극 진공관(the Audion)의 발명 없이는 불가능했다. 마이크는 복잡한 소리를 복합적인 전자파로 전환시켜주는 기구로 1876년에 알렉산더 그래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7)이 특허를 낸 전화와 같은 것이있다. 미국 과학자 리 드 포리스트(Lee de Forest, 1873-1961)이 1907년 발명한 3극진공관 오디언은 전자파를 보낼 수 있는 전기 튜브였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우리 가정, 사무실, 자동차 혹은 우리 허리띠에 붙여둔 조그만 기구를 켜서 수마일이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우리는 어떤 상자에 스위치를 넣고 즉각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20세기까지 이러한 기술 --라디오와 텔리비전-- 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은 오히려 그것들이 없는 생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용가능한 모든 기술적 요소들을 가지고 드 포리스트는 1910년 1월 13일 뉴욕시의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골기사의 노래」 (Cavalleria Rusticana)를 노래하는 엔리꼬 까루소를 방송함으로써 라디오의 잠재력을 증명했다. 최초의 정규적인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10년이 흐른 뒤에야 웨스팅 하우스가 펜실베니어의 피츠버그로부터 1920년 11월 2일의 대통령 선거결과를 방송함으로써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1922년 영국 방송 협회(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BBC)가 만들어지고 11월 14일 첫번째 뉴스를 방송했다. 화상을 전기로 전환시키기 위한 기구에 대한 실험이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1923년 최초의 실용적인 텔리비전을 만든 것은 스코틀란드인 엔지니어 존 로지 베어드(John Logie Baird, 1886-1946)였다. 1926년 그는 그의 텔리바이저(Televisor)를 공개하였고 이것은 영국에서 최초의 공공 텔리비전 방송에 사용되었다. 1927년 미국의 벨 전화 회사가 전화선을 따라서 워싱턴으로부터 뉴욕에 화상을 방송을 한 것이 미국에서 최초로 텔레비전을 사용한 것이었다. 1928년 베어드는 런던에서 뉴욕에 이르는 첫번째 대서양간 텔리비전 방송을 지휘했다. BBC는 베어드가 개선된 텔리바이저를 시장에 내놓은 1930년에 정규 텔리비젼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배어드의 발명품은 즉각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1939년에 이르면 영국에서는 텔레비젼 시청자가 20000명에 달했다. 프랑스에서는 1935년 TV송신기가 에펠탑 꼭대기에 설치되었으며 RCA는 1936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에 송신기를 설치했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텔리비전은 1940년대말과 1950년대 초에 가서야 일반 가정의 설비가 되었다.
존 베어드는 최초의 컬러 텔리비전 체계를 1928년에 세웠고 벨 실험실은 1929년에 같은 체제를 고안해냈다. 컬러 텔리비전은 이론상으로는 항상 가능한 것이엇으나 라디오와 텔리비전이 전세게에 걸쳐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치게 된 1960년대 말에 가서야 비로소 상업적으로 실용적인 것 되었다.
71. 페니실린의 발견: 1928
1925 레자 사하 팔레비는 이란왕으로 즉위.
1925 로카르노 협약은 1차대전 주동 국가들간의 조약을 마무리함.
1926 장개석은 중국통일을 위해 북벌운동을 조직.
1926 히로이토는 일본의 황제에 즉위함.
1928 장개석은 북경 점령. 국민당 정부가 세워짐.
1928 볼리비아와 파라과이간의 차코전쟁이 영토문제를 기화로 발발.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은 1914년 영국 육군의 의무대에서의 임무를 자원한 세규학자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박테리아가 득실거리는 깊은 상처를 고통스럽게 참아내는 광경과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세균을 박멸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충격을 받았다.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는 항생제와 방부제는 있었으나 그것들은 인간의 세포 역시 파괴했다. 이때문에 그것들은 오로지 외상에만 효능이 있었으나 전시에는 단순한 외상보다 훨씬 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전후에 그는 좀 더 효과적인 항생제에 탐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는 환자에게 손상을 입히는 가성 화학물질이 아니라 인체에 침투하는 세균과 싸우는 생물체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이론화했다. 그는 그러한 인체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물질 혹은 분비액이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었다.
1921년에 이르면 이러한 탐구방향에 따라 그는 몇몇 박테리아에 대해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고 판명된 사람의 눈물에서 나오는 분비액인 리소좀(lysozome)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포도상구균(staphlococcus), 연쇄구균(streptococcus), 임균(gonococcus) 와 같은 가장 위험한 세균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었다. 플레밍은 그의 연구실에서 작은 유리 페트리 접시에 갖가지 유기물질을 놓고 실험을 계속했다. 때때로 이러한 접시들이 공기 중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세균이나 곰팡이 포자에 감염되었고 그는 접시들을 닦아 다시 실험을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1928년 어느 날 그는 포도상구균을 담고 있던 접시 하나에서 박테리아가 특이한 곰팡이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 곰팡이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그 곰팡이가 그것과 접촉하는 거의 모든 박테리아를 분해시켜 버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 곰팡이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이 이제까지는 포착하기 어려웠던 항생제 페니실린을 낳았다.
페니실린은 곰팡이로부터 분리된 후 몇 시간내에 퇴화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플레밍은 이후 10년간을 이러한 경향을 극복해 혈청이 대량 생산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데 보냈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량으로 사용될 수 있는 내성을 가진 페니실린을 개발하려는 작업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943년 일리노이 주 페노리아의 북미지역 연구소에서 곰팡이 멜론(moldy melon)으로부터 페니실리움 크리조게눔(Penicillium chrysogenum)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하여 그 골치아픈 문제를 푸는데 성공하였다. 사용 후 1년만에 페니실린은 전장과 전세계에서 수천명의 생명을 구했다.
1945년에 이르면 그것은 민간 시장에서도 구입할 수 있게되어 질병치료를 혁명화하였다. 같은 해 알렉산더 플레밍경과 그의 동료 두 사람은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72. 불길한 목요일: 1929년 대공황
1929 프랑스 작가 쟝 콕토는 [무서운 아이들]을 출간.
1929 하인리히 히믈러는 히틀러의 친위대(SS)의 대장으로 지명됨.
1929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추방함.
1930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개명됨.
1931 일본은 만주를 점령함.
1931 스페인은 공화국을 선포함. 알퐁소 13세는 폐위됨.
1932 아랍 지도자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세움.
1932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발간.
1932 이먼 발레라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됨.
1932 시암(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입헌정으로 대체됨.
전 세계의 경제추세의 특성은 주기적이서 예측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경기호황과 침체가 서로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어떤 경기침체도 이후 '불길한 목요일'이라고 알려진 1929년 10월 24일에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시작된 경기침체 만큼 더 깊이 경기가 추락하고 더 오랫 지속되며 세계 전역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없다.
1920년대는 전세계 특히 미국의 거대한 경제 팽창기였다. 20세기까지 미국경제는 대개 유럽과 독립되어 있었다. 1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전례없이 유럽열강들과 동맹을 맺게 되었고 미국 상품에 대한 수요 --특히 농산품-- 가 유럽에서 크게 증가했다.
그 결과 미국은 농업 뿐만이 아니라 제조업과 금융업에 있어서도 세계의 지도국이 되었다. 기업과 개인들 모두 전례없이 투자를 증대시킴에 따라 미국 주식시장에서 회사주식의 가치는 급격히 증가했다. 실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돈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많은 주식을 판매하기 위해 중개회사들은 장래의 구매자들이 주식가격의 일부만을 "위탁 증거금"으로 걸고 주식 가치에 따라 나머지 금액은 "차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오늘날 이러한 관행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주식가치는 오로지 오르기만 했고 또 너무나 빨리 상승했기 때문에 그 가치가 곧 구매가격의 두배 혹은 세배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행은 계속되었다. 곧 미국 경제는 거대한 신용팽창 거품현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동안 유럽에서는 전쟁에서 회복한 농부들이 다시 한번 농작물을 수확하기 시작했기에 미국 농장이 좀 더 효율적인 것이 되고 산출량을 늘리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상품에 대한 수요는 수직적으로 급락했다.
주가현황판의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한 1929년 10월 24일 그 거품은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신용은 너무나 팽창했음에 비해 보통주나 실질화폐는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24시간 동안 개인과 법인의 재산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월 스트리트에서는 하루 아침에 무일푼이 된 많은 투자자들이 마천루에서 뛰어내려 죽음에 이르렀다.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파문은 곧 국가 전체 이어 세계 전체가 빠져드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은행은 파산했고 농산물 가격은 붕괴했으며 공장은 문을 닫고 해외교역은 증발해버렸다.
1929년 10월에 시작된 경제붕괴 이후 3년간 계속해서 경기가 하락하기만 했다. 그 결과 3000만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직장을 잃었으며 그 중 반수가 미국인들이었다. 대공황은 10년 이상 계속되었으며 전세대의 삶과 인생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공황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채택된 정부 조치들은 20세기 경제정책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73. 뉴딜 정책: 1933
1932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체드윅은 중성자를 발견.
1932 최초의 입자가속기가 영국의 케븐디쉬 연구소에 건설됨.
1933 에드윈 암스트롱이 잡음을 없앤 주파수 변조방식(FM)을 고안함.
1933 바티스타가 쿠바에서 군사 혁명을 일으킴.
1933 괴벨스가 나찌의 선전 장관으로 지명됨.
1933 노르웨이의 파시스트 퀴즐링은 국민 연합당을 세움.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1964)는 전후의 풍요가 그 절정에 달했던 1928년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년후 20세기의 가장 극심한 세계적 경제 재난에 직면했다. 후버는 정부의 개입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며 경제는 그 스스로 개선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대공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932년 후버가 재선을 위해 경선에 나섰을 때 주식시장의 가치는 그가 4년전 대통령에 선출되었을 때의 10%에 불과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여전히 실업상태에 빠져 정부가 건설적인 행동을 취해줄 것을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후버의 적수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딜레노 루스벨트(Frankline Delano Roosevelt, 1882-19 45)는 국민들에게 그들은 "공포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적극적인" 정부를 제안하였다.
압도적 대승리를 거두고 당선된 루스벨트는 1933년 3월 대통령에 취임했고 단 100일만에 의회를 통해 뉴딜이라고 불리는 그의 대담하고 새로운 경제계획을 성공적으로 밀어부쳤다. 의회는 루스벨트에게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는데 3억 3000만 달러라는 전례없는 예산을 쓸 수 있도록 해주었고 대통령에게 경제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NRA)을 통과시켰다. 루스벨트는 NRA가 사적 부분의 경제성장을 이끌어가리라 기대했으나 대신 그것은 실업계의 지도자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고 1936년 위헌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루스벨트는 계속해서 수많은 혁신적인 --비록 논쟁적의 여지가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뉴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예들 들어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ennesse Valley Authority ;TVA)는 테네시 강에 일련의 수력댐을 건설하여 전기를 생산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극심한 침체를 겪고 있던 지역들 중의 하나였던 그 지역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었고, 공공사업 촉진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이 형성되어 다리건설에서 여행안내서를 쓰는 등의 다양한 공공사업을 통해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1935년 의회는 획기적인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n Act)를 통과시켰다. 이것은 루스벨트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오래도록 그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그의 계획을 둘러싼 끊임없는 논쟁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6년 다시 한번 압도적인 득표를 얻어 재선되었고 1940년과 1944년에 대통령직에 계속해서 당선되었다.
루스벨트는 그가 네번째 임기를 맡은지 1년도 채 못되어 죽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 혹은 이후의 어떤 대통령보다도 오랜 기간동안 미국 대통령직 맡았으며 그의 사회, 경제 개혁의 많은 유산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오늘날 미국 연방예산의 가장 큰 부분이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들의 직접적 후신인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다른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혼합물이다.
74.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 1933-1936
1934 모택동은 [장기의 3월]에 중국 공산당을 이끔.
1934 미국에서 연방 통신위원회(FCC)가 설립됨.
1935 이탈리아는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를 침공
1935 뉘른베르크의 급진법은 독일 유태인의 시민권을 박탈함.
1936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로마-베를린 주축(동맹)을 맺음.
1936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프랑코에게 군사적 지원을 함.
1936 존 케인즈는 [고용, 이윤, 화폐에관한 일반이론]을 출간함.
1936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의 군사적 봉기에 의해 시작됨.
1차 대전이 끝난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연합국이 독일에게 부과한 엄격한 조치들은 독일 국민들에게 극심한 고난과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제국황제 빌헬름 2세 (1859-1941)는 1918년 퇴위되어 독일을 떠났고 그 지도력의 공백을 1919년 바이마르헌법(the Weimar Constitution) 아래 약한 공화국이 채웠다. 강력한 왕정에 의해 통치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독일 국민들은 매우 허약해 보이는 공화국에 실망했다. 그들은 공화국을 그들이 전쟁에서 패한 결과로 그들에게 떠넘겨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 많은 정치적 주변 집단들이 등장했으며 국민들 사이에 깊게 자리잡은 불만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집단들에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자신을 국가사회주의노동당(the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 즉 나찌당이라 부르는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찌들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할 강력하고 중앙집중적으로 통치되는 독일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10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1세 혹은 19세기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세워진 독일 제국을 떠올리게 하는 독일을 건설하는데 그들이 해야할 역할을 그리고 있었다.
나찌당원들 내에는 많은 지도자들과 몽상가들이 있었으나 세인의 주목을 받으며 실제로 당의 지도자의 지위를 차지한 사람은 오스트리아계의 인상을 가득 풍기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라는 이름의 인물이었다. 히틀러는 1차 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으며 이후 뮌찌히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유태인과 다른 소수민족 집단을 열등한 존재라 생각하는 인종적 우월성의 교리로 채색된 독일 민족주의 개념에 사로잡혔다. 그는 나찌당을 설립하는데 조력했으며 바바리아 주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나찌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1923년에 투옥되었다. 투옥되어있는 동안 그는 바바리아뿐만이 아니라 독일 전체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계획을 명료화했다.
점차로 나찌당은 정당한 정치정당으로서 인식되었으며 뛰어난 연설가였던 히틀러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1933년에 이르면 나찌당은 대단히 강력해져서 대통령 폴 폰 힌덴베르크(Paul von Hindenberg, 1847-1934)는 히틀러를 독일 수상으로 임명할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즉각 그의 새 지위를 권력기반으로 삼아 힌덴베르크를 축출하고 독재권을 장악했다. 그는 매우 감소되어 있던 독일의 군대를 재무장하고 팽창시킴과 동시에 유럽에서 독일이 가진 영토상의 이해관계를 다시 주장하기 시작함으로써 베르사이유 조약의 규정들에 공공연하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한 요소는 라인란트 지방의 탈무장화였는데 독일인들은 이 규정을 자신들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라고 생각하였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이 지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명백하게 조약에 도전했다.
영국이나 미국이 이러한 조약위반을 강력하게 진압했다면 히틀러는 물러나서 아마도 사임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의 군대는 여전히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피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라인란트에서의 히틀러의 성공은 독일을 세계의 주도적 군사국가로 만든 완벽한 재무장이란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것은 2차 세계 대전으로 귀결되었다.
75. 2차 대전의 개시: 1939
1937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국공합작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임.
1938 영국 수상인 체임벌린은 "우리시대의 평화"를 선언함.
1938 독일 화학자 오토 한은 핵분열의 원리를 발견함.
1938 영국과 미국은 일본과 싸우는 중국에 원조를 보냄.
1939 이고르 시코르스키가 헬리콥터를 만듦.
1939 최초의 제트기인 He 176이 독일상공을 비행.
1939 최초의 나일론 스타킹이 시판됨.
인류사에서 가장 거대했던 전쟁, 지구상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쳤고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은 이전의 수많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대한 탐욕에 의해 촉진되었다. 이딸리아는 새로운 로마 제국을 건설할 꿈을 꾸고 있었다. 독일은 중부유럽에 자국의 늘어가는 인구를 위한 생활공간을 얻고 싶어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새로운 중추로서의 자기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이들 국가들이 함께 하나의 동맹을 형성했고 이것은 로마/베를린/도쿄 추축(the Axis), 혹은 간단히 추축이라고 알려져있다.
이전에 일본은 1931년 만주를 병합했고 1937년에는 중국을 침공했다. 1500년이 넘는 시간만에 처음으로 로마에 수도를 둔 로마제국의 첫번째 황제가 되려했던 이딸리아의 독재자 베네디또 무쏠리니(Benedit0 Mussolini,1883-1945)는 1935년 에티오피아를 정복했다. 한편 그동안 아돌프 히틀러는 한번에 한발자국씩 영토를 넓히려는 그의 목표를 성취하기 시작했다. 1936년 그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직접적으로 위반하면서 라인란트를 점령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자 그는 더욱 힘을 얻었다. 1938년 3월 그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 독일의 일부로 만들었고 193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얻기 위해 그의 군대를 파견했다. 비록 프랑스와 영국은 강력하게 불만을 표했으나 전쟁을 피하려는 생각탓에 어떤 구체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39년 8월 24일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며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에 대한 전면공격을 시작했다. 사태가 이쯤 이르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최후통첩을 공포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폴란드와 맺은 상호협력조약에 따라 독일의 공격을 저지할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2일간 전쟁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선포했다.
대전은 시작되었다.
76. 영국의 전투
1940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출간.
1940 추방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멕시코에서 암살당함.
1940 이탈리아군은 이집트를 침공하다 격퇴당함. 영국군은 리비아에 상륙.
1940 루마니아의 카롤 2세가 폐위됨.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주축국에 가담.
1940 일본은 주축국에 가담하여 베트남을 점령.
1940 윈스턴 처칠이 영국 수상이 됨.
1940 소련은 발트해 연안국인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를 병합.
아돌프 히틀러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할 당시 독일 육군과 공군은 잘 훈련받고 훌륭한 장비를 갖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군대였다. 전격전(blitzkrieg)라고 알려진 육상과 지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공격은 이제까지의 전쟁에서 나타난 공격 중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공격법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탱크, 기동력있는 군대, 급강하 폭격기 그리고 낙하산부대 모두가 하나의 견고하고 규율잡힌 군대를 이루어 전세계 특히 폴란드 방위군을 어리벙벙하게 만들어 놓았다. 독일은 단 3주만에 폴란드를 정복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폭격기 몇대를 급파했으나 9월 27일 2차 대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겨울내내 연합군과 독일군은 가만히 앉아서 강력하게 방위된 독일-프랑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따라서 거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신문의 익살꾼들은 그 상황을 "교착전"(sitzkrieg)라고 불렀다.
갑자기 1940년 4월 9일 독일이 공격을 재개했다. 다시한번 교착전이 전격전으로 전환된 것이다. 독일군은 재빨리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했다. 5월 10일 독일은 1914년 1차 대전 초에 그들이 벌였던 벨기에와 프랑스에 대한 진격을 복제한 것 같은 서부로의 대공세를 시작했다. 5월 28일 룩셈부르크, 벨기에 그리고 네덜란드가 항복했고 독일군은 프랑스로 몰려들었다. 7월 14일 독일은 파리를 장악했다. 1차 대전에서 4년간에 걸친 지루한 전투에서 성취하지 못한 것을 5주만에 해낸 것이다.
마침내 프랑스가 7월 22일 항복했고 이제 독일의 맹습을 막아내는 것은 오직 영국에게만 맡겨지게 되었다. 오직 20마일의 영불해협만이 뛰어난 독일군과 프랑스에서 모든 장비를 포기한 군대를 갈라놓았다. 7월 4일 35만의 영국,프랑스군이 철수했으며 그들은 프랑스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둔커크(Dunkirk)에서 겨우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의 군대가 영불해협을 건너 영국에 침입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그들에게 "피, 노력, 땀, 눈물 이외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5월 10일 수상 자리에 오른 윈스톤 스펜서 처칠(Winston Spencer Churchill, 1874-1965)을 중심으로 집결했다. 그는 히틀러에게 그의 군대는 해안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모든 마을에서 무자비한 저항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면서 공공연하게 도전하였다. 그러나 독일공군(Luftwaffe) 사령관 헤르만 괴링 원수(Hermann Goring, 1893-1946)는 그의 폭격기들은 영국을 쉽게 항복시킬 수 있으며 계획된 해상 침공을 간단히 승리로 이끌수 있다고 주장했다.
1940년 8월 독일 공군은 영국의 항구, 공장, 도시들에 대해 잔인하고 쉴새없는 폭격을 퍼부었다. 독일군의 손쉬운 승리를 가로막고 있던 유일한 장애물은 까마귀를 공격하는 모기처럼 독일인들에 대항했던 수적으로 대단히 열세였으나 용감했던 영국 공군의 조종사들이었다. 영국은 수적으로 네배가 많은 독일 공군의 맹습에 대항할 전사가 천명도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공군은 그들이 한대의 손실을 입을 때 독일군 폭격기 12대를 파괴할 수 있었다. 처칠은 그것을 가리켜 영국공군의 "가장 화려한 시대"(the finest hours)라 불렀다.
영국에서의 전투는 그해 말까지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전환점은 히틀러가 해상공격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던 9월 17일 이었다.
이 전투는 오로지 공군력에 의해 판가름난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으며 그것은 히틀러의 놀라운 연승행렬을 잠시 정지시키는 것이었다. 영국공군이 독일 공군을 저지한 것은 후에 전쟁의 조류가 연합국 측에 유리하도록 전환하기 시작한 지점이었음이 증명될 것이다.
77. 미국 2차대전에 참전하다: 1941
1941 호치민은 베트 민을 조직, 인도차이나반드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임.
1941 일본은 홍콩을 점령하고 말레이지아와 필리핀을 침공.
1941 롬멜이 이끄는 북아프리카의 독일군은 반격을 개시함.
1942 프랑스의 알베르 까뮈는 [이방인]을 발표.
1942 간디는 침묵의 저항운동으로 인해 체포됨.
영국전은 독일의 세계지배를 향한 노력의 큰 후퇴였으나 그것은 히틀러의 군대를 멈추지는 못했다. 영국은 1년간이나 여전히 홀로 고립되어 있었던 반면 유럽 대륙의 나머지 국가들은 독일과 동맹을 맺거나, 독일군의 점령지가 되거나 독일군의 공격을 예견하고 있었다. 독일은 성공적으로 불가리아, 로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그리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으며 7월 22일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a)를 개시했다.
전쟁의 첫 두해동안 미국은 전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한편 계속해서 영국에 도덕적 지원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비슷한 문화와 민주정부를 가진 영국인들에 대해 긴밀한 친화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들은 "유럽 전쟁"의 유혈사태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프랭클린 딜레도 루스벨트(1882-1945)는 미국이 결국 전쟁에 끌려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1차 대전 때 그랬던 것처럼 독일의 잠수함들은 대서양에서 미국의 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1941년 8월 비밀리에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과 회동하였고 두 지도자는 미국이 전쟁에 불가피하게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면 서로 긴밀히 협력할 것에 동의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독일의 추축국 동맹이었던 일본이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침략함으로써 자신이 대동아 공영권이라 불렀던 제국을 계속해서 확장시키고 있었다. 일본의 공격에 대해 더욱 더 우려하게 된 루스벨트는 그 섬나라에 대한 수출을 금지시키고 다른 제재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러한 조치들을 극동을 지배하려는 자신들의 계획의 주요 장애물이라 판단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결심을 했다.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공격은 대단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듯 했고 영국은 거의 항복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일본이 보기에는 추축국의 전세계적인 승리의 유일한 장애물은 태평양에서의 미 해군의 존재였다. 따라서 일본은 이러한 위협을 근절시키기 위한 한 차례의 대담한 공격을 계획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30분 항공모함으로부터 출발한 일본의 폭격기들이 하와이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 특히 진주만의 해군기지를 폭격했다. 이 공격은 완전히 기습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공격이 끝났을 때 3000명의 미국인이 사망했고 100대의 비행기가 파괴되었으며 미해군 태평양함대가 대폭 축소되었다.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전함 아홉대 중 여덟대가 못쓰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오욕의 날"(day of infamy)라고 부르면서 의회에 전쟁선포를 요청했다. 12월 11일 독일과 이딸리아는 미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으며 일본은 영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은 확실히 2차 대전 중 가장 암울한 시점 중의 하나였으나 미국의 광대한 자원이 전쟁에 바쳐짐으로써 이제 추축국이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78. 연합군, 추축국의 예봉을 꺾다: 1942-1943
1942 유태인 대학살 시작됨.
1942 멘하턴 계획은 최초로 제어되는 핵 연쇄반응을 만들어냄.
1942 일본은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버마를 점령.
1942 V-2 로켓이 독일의 피네문테에서 시험됨.
1943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는 [존재와 허무]를 출간.
1943 독일 공수부대는 무솔리니를 구출해냄.
1943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폭 제조를 위해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를 건립.
진주만 공격 이후 수개월 동안 일본이 거둔 성공은 1939-40년에 독일의 전격전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한달 내에 일본은 웨이크 섬, 괌, 홍콩과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졌던 싱가포르의 영국 요새를 획득했다. 필리핀에 상륙한 후 그들은 수도 마닐라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했고 바탄 반도에 있는 미국인들의 불운한 요새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일본제국은 이제 한국에서 인도에 이르는 거의 모든 아시아 본토의 해안과 알래스카의 알류샌 열도의 세개의 섬을 포함하여 거의 태평양 전체를 손에 넣었고 오스트레일리아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동시에 히틀러는 유럽 대륙 모두를 지배했다. 그의 군대는 1941년 12월 모스크바 문턱까지 도착했으나 러시아의 겨울과 러시아 군대의 무장저항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42년 봄 독일은 반격을 개시하여 그들이 잃었던 것의 대부분을 다시 차지했다. 추축국은 이제 대서양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전역을 통제했고 카이로와 수에즈 운하를 공격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1942년 여름 전쟁에 질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던 연합국은 그들에게 유리하게 형세가 바뀌려면 전쟁 이전에 그들이 추축국이라는 전쟁기계의 가차없는 운동을 막았어야만 했다는 것을 알았다. 태평양에서는 결정적인 전환점은 일본의 침략 함대가 하와이 군도의 앞부분에 있는 미드웨이 섬으로 항행한 것이었다. 1942년 7월 3일 그들은 4일간의 맹렬한 전투에서 미 해군과 격돌했다. 그 전투는 거의 항공모함에 탑재된 전투기 간의 싸움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이 끝았을 때 미 해군은 1대의 전함을 잃었던 반면 일본은 4대를 잃었고 그 중 두대는 순양함이었다. 일본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일본군의 여세는 꺾이게 되었고 그들은 다시는 대규모 공세에 나설 수 없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수에즈 운하를 향한 독일의 대공세는 1942년 7월 1일 엘 아라메인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한 벽촌에서 영국에 의해 한풀 꺾였다. 독일의 아프리카 코르프스는 살아 남았으나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은 완전히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어떤 전선에서의 사망자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죽었던 러시아와 맞선 독일의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인들이 독일인들에게 스탈린그라드 (현재의 볼가그라드) 를 내주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였을 때 전세는 결정적으로 반전되었다. 가장 희생이 많았던 전쟁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1943년의 극심한 추위 속에서 계속 되었고 결국 독일은 1943년 2월 항복하고 말았다.
추축국이 아직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패배 후에 그들의 전 세계적인 전략적 위치는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게 되었다.
79. 연합국의 대공세: 1944
1944 영국군은 버마를 일본으로부터 탈환.
1944 티토를 중심으로하는 공산주의자 저항군은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킴.
1944 독일 장교들은 히틀러를 암살하려 함.
1944 폴란드의 저항군은 바르샤바 봉기를 통해 독일군을 몰아냄.
1944 유럽의 전후 회복을 돕기위해 세계은행이 설립됨.
1945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 발표.
1943년 2차 대전의 전황은 추축국에서 연합국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나, 1944년에 가서야 연합국은 비로소 추축국을 완전히 분쇄할만한 수의 군대와 장비를 축적할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승리한 후 붉은 군대로 알려진 소련 군대는 대공세를 시작했다. 1944년 독일군을 러시아에서 성공적으로 축출한 후 붉은 군대는 세계사에서 가장 대규모라고 할 수 있는 지상전을 치루면서 폴란드와 로마니아를 통해 독일군을 밀어부쳤다.
동시에 미국와 영국의 폭격기들은 독일의 철도망과 산업의 하부조직을 겨냥한 광범위한 전략적 폭격을 감행했다. 1943년 동안 연합국은 독일을 북아프리카로부터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며 시실리를 재탈환했으며 이딸리아에 상륙했다. 이딸리아가 항복한 이후 독일은 연합국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본국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에서 1943년은 행동을 자제하는 해였으나 1944년에 총사령관이었던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 1880-1964)의 지휘 아래 연합국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섬들을 재탈환하려는 일련의 대공세에 착수했다. 괌과 마리아나 제도가 8월에 재탈환되었고 그것은 일본 본토에 타격을 입힐 초공위 요새 B-29 폭격기를 위한 기지를 제공했다. 10월 20일 맥아더는 필리핀에 상륙하여 2달간에 걸친 필리핀 해방전을 시작했다.
1944년에 수행된 --그리고 사실 이차대전 중 가장 대규모였던-- 가장 대규모의 작전은 7월 6일 전개된 연합국의 노르망디 침공이었다. 연합국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데이빗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장군의 지휘 아래 290만명의 연합군, 5000척의 전함, 그리고 15000대 이상의 항공기가 영국으로부터 영불해협을 건너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다. 상륙은 성공이었으며 8월 25일에 연합국은 승승장구하여 파리로 행진했다.
1944년말에 이르면 일본과 독일은 그들이 정복한 곳의 대부분을 잃었다. 비록 그들은 2차 대전에서 승리할 아무런 희망도 없었으나 그들은 필사적으로 전쟁을 계속했으며 이로써 연합국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얻는데는 양측 모두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80. 2차 대전의 종결: 1945
1945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예멘은 아랍 연 맹을 창설.
1945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연합국간에 4분할 점령됨.
1945 호치민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
1945 수카르노가 이끄는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을 선포.
1945 한국은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
1945 뉘른베르크에서 나찌 전범 재판이 시작됨.
1945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원수가 됨.
앵글로-아메리칸 연합국은 1945년 초 전쟁을 독일 본국으로 몰고 가서 3월 8일에는 라인강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붉은 군대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동부로부터 베를린에 다가왔다. 4월 19일 러시아군과 미군은 엘베강에서 조우했고 베를린은 포위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4월 30일 그의 요새화된 벙커에서 자살을 기도했으며 "유럽에서의 승리"(Victory in Europe)라는 명칭이 붙은 5월 7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이 제시한 무조건항복의 조건들을 받아들였다.
독일이 패배함에 따라 연합군은 이제 그들의 관심을 일본제국을 정복하는데 돌렸다. 미군이 일본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일본은 더욱 더 완강하게 태평양의 섬들을 방어하려 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연합국은 그 섬들을 재탈환하는데는 수백만의 사상자 --그들의 대부분은 미군이 될 것이다-- 라는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라 판단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의 사망에 따라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은 그러한 결과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시점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핵무기 --당시는 원자폭탄이라고 알려진-- 개발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다. 트루먼은 그의 각료 및 수석 군사고문과 함께 일본에 대해 새로운 폭탄 중의 두개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그러한 전술은 일본이 즉각 항복하도록 만들것이며 많은 희생을 내는 대회전을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8월 6일과 8월 9일 미국의 초공위 요새 B-29 폭격기는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했다. 첫번째 폭탄은 히로시마에 다른 하나는 남부의 도시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각각 TNT 5만톤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폭탄들은 기대한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8월 14일 일본은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조항을 받아들인다는 전갈을 보내왔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진 것은 1945년 9월 3일 이었고 이날은 공식적으로 "일본에 대한 승전일"( Victory over Japan Day)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서명은 토쿄만에 정박하고 있던 엄청난 연합군 무적함대 중 한대인 미주리호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요구했던 전쟁이 드디어 끝났다. 그러나 어렵게 얻어낸 평화의 이면에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라는 불길한 유령이 숨어있었다. 그러한 무기의 존재는 모든 후대들의 세계관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81. 스탈린의 철의 장막: 1946
1946 EAM-ELS 공산군이 그리스에서 내란을 시작함
이태리에서 선거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제 수립.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베트민, 인도차이나(베트남)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함
1947 척 예거가 최초로 X-1 로켓비행기로 소리의 벽을 넘음.
인도는 독립해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국가가 분리됨.
자화르달 네루가 인도의 첫번째 수상이 되다.
유럽의 경제적 복구를 위한 미국의 마샬플렌이 수립됨.
1948 아랍군이 1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다.
영국, 버마의 독립 승인.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인들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함
스탈린, 유고슬라비아를 공산진영에서 축출하다.
소련, 베를린봉쇄;영국과 미국은 베를린공수를 시작.
"철의 장막"이란 말은 2차대전때의 영국 수상이던 윈스턴 스펜서 처칠(1874-1965)이 1946년 3월 5일, 미주리주의 풀턴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 만든 말이다. 이 말은 2차대전의 발발시부터 거슬러 내려오던 새로운 정치적 실재성-이후 45년간 동안 전세계의 정치학을 형성하게 될-을 서술하는 용어로 2차대전 이후 막바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1941년 패배의 벼랑에 서서 소련의 지도자인 요지프 스탈린(1879-1953)은 그의 국민을 규합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만들고, 1945년 독일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독일 점령하의 다수 주권 국가들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스탈린의 거대한 적군(亦軍)은 폴란드와 루마니아 사이에 있는 예전에 독립국이었던 나라들을 모두 점령했다. 그때 스탈린은 독일이 1941년에 했던것을 다시는 성취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독일과 소련 사이의 완충지대를 만들기를 원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점령지에서 그의 군대를 철수시킬 의도가 없다고 발표했다.
소련과 전시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은 스탈린의 동유럽 전체의 지배를 비난했으나, 실제로는 그것이 가능하게 도와주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2월에 스탈린, 처칠, 그리고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우즈벨트는 소련의 크리미아 반도에 있는 얄타(Yalta)에 모여서 전후 유럽의 질서에 관해 논의를 하였다. 스탈린은 독일을 영구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과 동유럽의 "우호적인" 국가를 유지하는것에 대해 그의 의사를 피력하였다. 비록 류우즈벨트와 처칠이 이러한 생각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스탈린은 그의 지배하의 국가들에게 민주주의를 허용할것을 약속했으며, 스탈린을 믿기를 열망하는 서방의 지도자들은 그의 계획에 동의하였다. 루우즈벨트 역시 스탈린에 반대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전후의 세 강국에 의해 이루어진 "대동맹"이 세계평화를 보존하는데 최상의 방법이라고 믿었기에, 이 동맹을 유지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처어칠은 스탈린의 새로운 제국을 반대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처어칠이 만일 이를 반대할 경우, 스탈린이 영국 제국을 해체하라고 나올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루우즈벨트는 얄타 회담이 있은지 2개월 후에 죽었다. 일년 후에, 스탈린은 소련을 대동맹에서 탈퇴시켰다. 10년이 지나기 전에, 영국 제국은 거의 쇠잔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무지비한 독재자였으며, 1930년대에는, 알려지거나 의심이 가는 불순분자의 수많은 "숙청"을 지시한 결과로 2차대전중 독일이 소련인을 죽인것보다 더많은 소련 국민을 죽였다. 그의 맞수인 아돌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카리스마적인 인물로서 민주주의나 선거를 통하지 않은 철권 통치를 행하였고, 그의 견해에 반대하는 어떠한 견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비록 스탈린은 공산주의자였으나, 그의 동기는 경제 철학의 원칙을 영속화하려는 소망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강력한 소련이 전체적으로 소련에 의해 조종되는 국가들에 의해 둘려쌓여지게 하려는 정치적 개념에서 나온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는 1949년에 궁극적으로 성취된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원하였고, 전세계적으로 권력 탈취의 수많은 시도를 지원하였다. 그는 서유럽을 재패하기 위해서 적군을 투입할것을 심사숙고했으나, 미국 핵무기 공장의 존재와, 서유럽에 대한 공격이 미국의 핵보복을 초래할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견제로 인하여 투입은 저지되었다. 심지어 1949년에 스탈린이 핵무기를 개발시킨 이후에도 이러한 위협은 남아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냉전은 시작했으며, 바로 이 냉전은 초강대국이라 알려진 미국과 소련간의 45년간의 핵무기 대립의 교착상태인 것이다.
82. 중국대륙 혁명: 1949
1949 그리스에서 내란이 공산주의자들의 패배로 종결됨.
콘라드 아데나워, 서독의 첫번째 수상이 됨.
트랜스 요르단의 하시미테 왕조는 국명을 요르단으로 개칭.
네덜란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하다(이전 네덜란드령 동인도)
서방세력에 의해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되다.
소련은 동부에 동독민주주의공화국수립
제1차 인도-파키스탄전쟁이 카시미르분할로 종결됨.
1950 중국군, 티벳트 침공, 1951년에 공식 합병됨.
북한공산군, 남한 침공.
트루먼대통령, 수소폭탄개발 명령
국제연합,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 결정;맥아더가 사령관으로 임명됨
명조(明祖;1368-1644)는 중국 문화의 황금기였다. 명나라때에 북경이 건설되었고, 문화는 번창하였다. 청조(淸祖;1644-1912)는 명조에 이어서 들어섰는데, 만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청조는 정치적 팽창주의의 시기로 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중국이 외세에 의해 지배당하는 정반대의 결과로 반전되었다.
19세기에 중국은 여러 유럽 국가들에게 계속된 전쟁에서 패하였으며 결국 "조차지(租借地)"가 부과되었으며 이는 다수의 항구도시가 외국의 실제적 식민지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은 칭따오를,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프랑스는 꽝쪼우를, 러시아는 다이렌을, 영국은 카오룽과 홍콩을 차지하였다.
1912년에 청조가 망하였을때, 국민당은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손문 박사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새로운 중국 공화정은 1차 세계대전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외국 조차지를 청산할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그 땅은 다른 중국의 군벌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문에 국민당은 통일 중국을 하나의 단일체로 만드는데 실패하였다.
손문의 후계자 장개석(1887-1975)은 군벌에게서 뿐만 아니라, 1937년 7월 7일 시작한 일본의 침략이라는 저항에 직면하였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래로 스스로를 중국보다 강력하다고 믿어왔는데, 1937년의 침략은 전체 극동지역의 지배를 위한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었을 뿐이었다. 장개석은 곧 중국의 국민당 지배 지역의 많은 부분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1941년에 대일본 합작이 일본에게 선전(宣戰)을 했을때, 장개석의 국민당은 이에 참여했다. 비록 이 합작이 중국에서 침략세력을 실제로 몰아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일본 패배의 날(VJ day)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의 한 부분으로서 일본인의 철수를 얻어냈다.
전쟁중에 장개석은 명목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인 모택동(1893-1976)과 제휴하였는데, 나중에 일본인의 철수 후에, 모택동은 대륙의 지배를 놓고 내전을 시작하였다. 모택동은 농민층 사이의 굳건한 연대를 구축해놓았으며, 이 농민층이야말로 전쟁과 외국 지배의 기간동안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서, 모택동의 운동은 지속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섬으로 옮겨갔으며, 모택동은 그의 국가를 중화 인민 공화국이라고 선포하였다. 1949년 까지 수십년간 두개의 대립하는 정부는 서로 적대적이었으며, 1949년은 1644년 이래 한족에 의해 처음으로 전체 중국 대륙이 통일된 해였다. 공산당은 엄격한 사회 구조를 이끌어 나갔으며 모택동이 죽은 1975년에 개혁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야 그 구조는 완화되었다.
83. 원자력의 시대: 1951
1951년 한국전에서 전선이 38선을 따라 형성되다; 평화협상이 개성에서 시작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상호방위 안저스 조약을 맺다.
이란 수상 무하마드 모자데크가 이란의 석쥬자원을 국유화하다.
1952년 이집트의 파루크국왕이 나기브장군이 지도하는 혁명에서 퇴의함.
미국, 태평양에서 첫번째 수소폭탄실험을 하다.
터키, 나토가입.
1953년 공산주의자 정치가인 이므레 나기가 헝가리의 수상이 되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였던 라오스가 독립하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 사망;말렌코프가 신임수상이 되다.
1954년 프랑스군, 디엔비엔푸전투에서 북베트남군에 패배하다.
가말 아브델 나세르, 나기브장군을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쫓아내다.
제네바회의,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리할 것을 확정하다.
미국 핵잠수함 노틸러스호, 발진하다.
1955년 아르헨티나의 군부가 후안 페론 대통령을 축출하다.
오스트리아 독립획득;4대강국점령은 끝나다.
독일연방공화국(서독), 나토에 가입
바르샤바조약이 유럽의 공산국가들의 군사동맹체로 수립되다.
1956년 나세르대통령,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다.
소련의 제1서기장 니키타 흐루쉬초프, 스탈린시대의 죄악을 폭로.
헝가리봉기가 소련군에 의해 강제진압당하다.
1957년 소련, 초최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1호 발사
베트콩, 남배트남에 대한 반란행동을 시작.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 성립
미국, 과학위성인 엑스플로러1호와 벵가드1호 발사
1959년 피델 카스트로, 공산주의혁명으로 쿠바의 지ㅗ자 풀게니코 바티스타를 축
출하다.
소련, 달로 루나우주선 시리즈를 보냄.
1960년 한국에서 학생봉기, 이승만대통령의 사임을 강요하다.
남아공,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금지하다.
베트콩그룹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SV)으로 결집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 전쟁을 끝내게 한 원자력이 전 세계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하고 혁명화하는데 쓰일 것이라고 환영받게 되었다. 최초로 발전용 원자로가 1951년에 미국에 설치되었으며, 곧바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890-1969)는 그의 평화를 위한 핵 계획을 발표했다. 즉 미국 정부는 전세계에 원자로를 보급하며 모든이를 위한 이러한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인 원자력을 보급하기 위해 기술적 원조를 제공할것이라는 계획이다.
원자력의 이론은 유명한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이론(1905)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상대성이론에서, 그는 광속에서 에너지는 질량과 동등하다고 언급했다(E=mc2). 즉 질량이 광속으로 가속될 경우에, 질량은 에너지로 변환될수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원자로, 혹은 핵 연쇄반응의 지속성을 가능케 하는 장치는 시카고 대학에 건설되었다. 이 원자로는 이탈리아인 물리학자인 앙리코 페르미(1901-1954)의 지휘아래 건설되었는데, 그는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1942년 12월 2일 세계 최초로 이 원자로에서 핵 연쇄반응을 제어해 낸 사람이었다. 미 육군은 이 원자로의 건설을 "맨하턴 계획(Manhattan Project)"의 첫걸음이라고 기록했는데, 맨하턴 계획은 궁국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한 핵무기 개발 계획이었던 것이다.
1945년에, 민간인들이 사용하기 위한 값싼 전기 에너지의 약속된 원천으로서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론적으로, 원자력 발전은 단순한 것이다. 즉 원자로에서 강한 열을 만들어 내고, 그 열로서 증기를 만들고, 이 증기로 터어빈을 돌려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은 미국 아르곤 국립 연구소에 만들어진 실험용 증식로(EBR) 였는데, 이곳에서 1951년 12월 20일에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소형 원자로는 그후에 외항선, 특히 잠수함의 동력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원자로는 사실상 연료 재충전 없이 무한대의 거리를 항해할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로서 최초의 배는 1955년 1월 17일 취역한 미국해군의 잠수함인 USS 노틸러스호였다. 최초의 원자력 추진 상선은 사바나 호로서 1959년에 취항하였고, 최초의 원자력 항모인 USS 엔터프라이즈호는 1960년에 취역하였다. 1960년에 원자력 잠수함인 USS 트라이톤호는 연료 재충전 없이 물속에서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배가 되었다.
원자력의 시대는 많은 흥분과 낙관주의를 불러일으켰으나, 1970년대 초에 원자로의 안전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원자로의 노심(爐心)은 고수준의 방사능을 지니며, 그렇기때문에 재난이 닥칠경우 주변 지역을 절망적으로 오염시킬 수 있다는 잠재적 위험성을 지닌다. 이 염려는 1979년 3월 29일 확인되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드리마일 섬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 증기가 거대한 구름을 이루며 뿜어져 나왔다. 역사상 가장 최악의 방사능 누출 사건은 1986년 4월 28일,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전에서 일어났는데, 노심이 폭발하여서 주변지역에 사람이 살수없게 되었고,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이러한 사건들 이후에 원자력 시대의 어두운 면이 강조되었으며, 핵 에너지의 사용이 좋지않은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미국에서는 새로운 원전의 건설이 사실상 정지상태를 맞게 되었다. 다른곳에서는 즉, 프랑스, 독일, 일본등에서는 희망찬 보다 안전한 새로운 세대의 원전이 1990년대 초에 건설중에 있다.
84. 외계로 진출한 인류: 1961
인간이 공기보다 무거운 기계를 타고서 하늘을 나를수 있는 능력을 지니기 이전에 조차, 주울 베르느 같은 공상과학 소설가는 단지 인간이 대기를 나르는 것이 아니라 외계로 진출한다는 소설을 가지고 대중의 상상력과 흥미를 돋구었다.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누구도 우주공간을 돌아다닐수 없다고 믿었다. 실제적인 문제로서 지구의 중력장에서 벗어나는 것과, 외계에서 인간 생존을 유지하는데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중 일어난 놀라운 기술의 발전은 모든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 기간중 가장 유명한 발전은 V-2 로켓인데, 이 로켓은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 (1912-1977)에 의해 만들어졌다. 독일의 패배 이후, V-2로켓의 기술은 미국과 소련 양국에 의해 포획되었는데 이 기술은 양국의 독자적 로켓 개발 계획의 기본기술로 사용되었다. 1957년에, 소련은 최초로 지구에서 외계로 발사되어 지구 주위의 궤도를 돈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했다. 이는 살아있는 인간을 외계로 쏘아 올리려는 꿈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는 미소 양국간의 정치적인 "우주 개발 경합"에도 불을 당겼다. 즉, 자국의 국민을 위성에 태워 우주로 보내는 첫번째 국가가 되기위한 명백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4년간 미소 영국은 특별히 유인 우주선 임무의 준비를 위한 몇가지 기구를 포함하여서 무인 우주선을 발사시켰다.
결국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유리 A. 가가린(1934-1968)이 탑승한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 여행을 한 사람이 되었고, 영웅의 귀환을 기다리는 지구로 돌아오기 전에 지구 궤도를 한바퀴 돌았다.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우주 여행을 한 사람은 알랜 B. 쉐퍼드였는데, 그는 스푸트니크 1호 발사후 3주일후 5월 5일에 그 비행을 하였다. 1961년 말엽에 2명의 소련 우주 비행사와 2명의 미국 우주비행사가 우주로 보내졌는데, 미국 비행사는 실제로 지구 궤도를 돌지는 못하였다. 1962년 2월 20일에 죤 글랜(1921- )은 미국 우주 비행사로서 처음 지구 궤도를 돌았다.
가가린이 지구를 돈지 5년후에 소련은 8번의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고, 미국은 머큐리호와 제미니호를 이용해서 12번을 발사했다.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는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슈코바(1937- )이었는데, 그녀는 1963년 6월 14일에 보스토크 6호를 타고서 지구궤도를 48바퀴 돌았다.
유인 우주 비행의 꿈-그리고 기술의 업적-을 달성하고서, 미소 양국은 그들의 목적을 우주 개발로 방향전환을 했다. 1968년 12월에 미국의 아폴로 8호는 프랑클린 보만, 제임스 러벨, 윌리엄 앤더스를 싣고서 지구를 떠났는데, 이는 최초로 지구 궤도를 떠나서 깊숙한 우주 공간으로 진출한 유인 우주 비행이었다. 아폴로 8호는 인간이 전에 도달했던 어떤 곳보다도 멀리 진출했다. 그들은 25만 마일을 비행했으며, 그들의 우주선을 달 주위 궤도로 진입시켰다. 일년 후에, 그들의 동료 우주비행사는 달 표면에 실제로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85. 베를린 장벽, 쿠바 미사일 위기: 1961-1962
1961년 미국의 지원을 받는 쿠바인 추방자들이 피그만으로 성공하기 힘든 침공을 시도하다.
인도, 포루투칼령인 고아, 다만, 그리고 디우를 합병하다.
케네디미국대통령, 평화봉사단 창설.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베트남주둔 미군을 증가시키다.
소련의 우주조종사 유리 가가린, 지구를 궤도비행하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리을 분리시키는 베를린장벽이 건설되다.
유엔사무총장 다그 함마슐드, 콩고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
1962년 알제리 독립획득 ; 아메드 벤 벨라가 초대수상이 됨
우주조종사 존 글렌이 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지구궤도를 비행하다.
영국 팝그룹, 비틀즈, 첫번째 판을 제작하다.
쿠바미사일위기 발생;소련미사일들은 쿠바로부터 철수.
미국, 첫번째 상업용 통신위성인 텔스타 발사
미시시피대학이 제임스 메레디스라는 흑인학생의 입학을 허용하도록 강요 받다.
유엔평화유지군이 카탕가주에서 이탈시도를 종식시키다.
존 피츠제랄드 케네디(1917-1963)는 열정적인 새로운 미국을 약속하면서 1961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행정부가 맞게 될 가장 심각한 위기는 2차대전 종전후부터 시작한 미소 영국간의 곪은 상처인 냉전으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15년간 이상 끌어온 불편한 교착상태는, 니키타 흐루시초프(1894-1971)가 케네디에게 선수를 쳐서 그의 국내 기관을 이용하여 소련의 세계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공고화하려고 결정하였을때 극에 달했다. 최초로 이것을 극명히 보여준 예는 1961년 8월 13일에 일어났는데, 소련과 동독의 군대가 갑작스레 높이가 거의 2층이나 되는 시멘트 장벽을 베를린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면서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장벽은 전후 독일의 분할을 강조시키면서 동시에 동과 서를 확실히 분할하는 경계선이 되었던 것이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정치적 실재성을 심대하게 나타내는 물건이었다. 장벽은 서구의 정치적 실패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며, 소련 연방의 사실상 무제한적 힘을 나타냈으며, 케네디를 굉장히 난처하게 만들었다.
또다른 어려움을 제공하는 원천은 바로 카리브해의 국가인 쿠바였다. 쿠바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1927- )가 1959년부터 권력을 잡고있던 곳이다. 1961년 4월,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직후에, 미국이 지원한 쿠바 피그만(灣) 침공은 실패했는데, 이는 분노한 쿠바인과 소련인 양자에게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1962년 9월, 흐루시쵸프는 쿠바에 대한 어떠한 차후의 공격도 전쟁 행위라고 간주할 것이라고 케네디에게 밝혔다. 이 직후에, 소련이 핵탄두를 장착한 중거리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한것이 밝혀졌다. 이 미사일은 하역된 후 짧은 시간 안에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할수 있었는데, 이는 미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요소였다.
10월 22일, 케네디는 공개적으로 소련이 미사일을 철수할것을 요구하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쿠바를 공격할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냉전기간중 쿠바 미사일 위기라고 열려진 한주일의 시작이었으며, 이 미사일 위기는 두 초강대국을 전면 핵전쟁의 대량 학살 상황으로 바짝 끌어당길 수도 있었다. 양국간의 상호 보복의 결과는 두 국가의 중요 도시에 살고있던 인구의 최소 절반을 없애버릴수도 있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협상이 전쟁을 준비하는 양국간에 계속되었다. 미국 전함들은 쿠바를 둘러싸고 모든 하역작업을 "차단"조치 하였으며, 미국 폭격기들은 플로리다로 옮겨져서 공중 강습의 준비상태로 대기하였다. 10월 28일, 흐루시쵸프는 케네디에게 만일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쿠바에서 모든 미사일을 철수할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냉전기간중 가장 뜨거운 사건이었으며, 위기의 해결로 인하여 제 3차 세계대전은 피할수 있었다.
86. 존 F.케네디의 암살: 1963
1963년 제한적인 핵실험금지조약이 영국, 미국, 소련사이에 체결.
유럽경제공동체로 영국의 가입신청이 프랑스에 의해 거부되다.
케네디 대통령,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암살당하다.
베트남의 고딘디엠 대통령 암살당하다.
말라야, 싱가포르, 사라와크와 사바흐가 말레이지아연방결성하다
마틴 루터 킹, 워싱턴 D.C.에서 "I have d Dream"이란 제목으로 연설하다
아프리카통일기구(OAU)가 에디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결성되다.
모든 20세기의 정치적 암살에 있어서, 오직 1914년 프란쯔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세계 제 1차대전을 몰고온 사건-만이 1963년 11월 22일에 일어난 미국 35대 대통령의 암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존 피츠제랄드 케네디(1917-1963)는 정치 유세를 위해 택사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1964년 대통령 선거가 채 일년도 남지 않았고, 남부지역에서 그에 대한 인기도는 민권에 관한 입법에 대한 그의 강력한 지지로 말미암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1월 22일, 케네디가 무개차에 앉아서 자동차 퍼레이드로 달라스시를 지나가고 있을 무렵,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알 한발이 그의 목을 관총했다. 다른 총알을 맞고 그의 머리 절반은 부숴졌고, 또다른 한발로써 같은 차에 타고있던 택사스 주지사 존 B.코넬리는 부상당하였다.
이는 텔리비젼과 전세계 동시방송의 츨현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세계적 주요 지도자의 암살이었다. 케네디의 암살 사건은, 이틀후의 그의 장례식과, 암살자로 지목된 리 하베이 오스왈드(1939-1963)이 잭 루비(1911-1967)에 의해 살해된것을 포함하여 방송되었는데, 이 방송은 는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웅변에 선천적 재능을 지닌, 아이같고 정력적인 케네디는 전후 세대의 이미지를 창조했는데, 미국에서는 충격과 슬픔의 그득한 감정이 있었다. 1960년대에 성인이 된 많은 사람들에게 케네디의 죽음은 아마도 그들 인생의 또다른 시작을 이루었을 것이다. 많은 미국인에게 있어서 그들의 대통령의 손실은 후임자인 린든 베인즈 죤슨(1908-1973)에게서 케네디가 지녔던 젊음과 카리스마를 찾아볼수 없다는 점에서 청산되었다. 죤슨은 미국이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전쟁인 베트남전에 참전하도록 분위기를 고조시킨 인물이었고, 위대한 사회라는 계획을 도입한 인물로 기억된다. 위대한 사회는 빈곤과 같은 영구적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출자 계획의 일환인데, 의도는 좋았으나 좋은 결과는 보지 못하였었다.
오스왈드는 케네디를 죽인지 이틀만에 살해되었기 때문에, 조사를 받거나 유죄판결을 받지 못하였다. 널리 퍼진 의혹의 시각을 종식시키기 위해, 죤슨 대통령은 대법원장 어얼 워렌(1891-1974)을 위원장으로하는 암살 조사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워렌 위원회는 리 하베이 오스왈드에 대한 유죄 판결 보다는 수집 가능한 모든 증거의 객관적 조사를 문제시하였다. 이 문제는 수십년동안 꼬리를 물고 이어져온 미국인들의 그들 정부에 대한 신뢰를 부식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청문회가 1978년 미 의회에서 재개되었을때에, 다음의 결론이 났다. 결론인 즉슨, 두번째 암살범이 또다른 장소에서 케네디에게 총을 발사했으며, 아마도 그 총격은 치명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의 암살범은 결코 밝혀질수 없으며, 해를 이어 증식해온 수많은 케네디 암살 음모설중 어떤것도 밣힐 수 있는 반박할수 없는 증거는 찾아낸 것이 없다.
케네디의 암살이 끼친 가장 심대한 충격은 미국인들의 시각이 낙관주의와 희망에서 냉소주의로 변화한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의 경제적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이후 40년간 역사상 전세계의 어떤 나라보다도 가장 융성한 번영을 누렸다. 존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은 미국이 그들 자신의 취약성에 직면하도록 만든 것이다.
87. 미국 민권 운동: 1964
1964년 키프로스에서 그리스인과 터키계 키프로스인간에 전투가 발생하다.
북베트남,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을 공격하다.
소련수상 흐루시초프가 몰락하고, 알렉세이 코시킨이 수상이 되다.
1965년 북베트남정규군, 처음으로 남베트남에서 작전행동을 하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지아로부터 탈퇴하다;수상은 여전히 이관요.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발발
베트남전쟁, 미군이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한층 가열되다.
1966년 모택동, 중국 문화대혁명 시작.
드골대통령, 나토로부터 프랑스군을 철수시키다.
1967년 라틴아메리카의 게릴라지도자, 체 게바라 볼리비아에서 죽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6일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 나다.
미국 흑인의 조상들은 북아메리카에 노예로 도착해서, 아프리카의 그들 고향을 빼앗긴채, 대부분 미국 남부에서 노예로 일하였다. 미국 북부에서는 강력한 노예 폐지 운동이 있어왔는데, 이는 전 미국에서 노예제를 없애자는 운동이었다.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연방 정부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게되자 남부는 1861년에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1809-1865)은 연방을 보존하기 위해서 남북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1862년에는 노예 해방령을 공포함으로써 전쟁의 뿌리깊은 원인을 근절하고자 하는 첫번째 법률적 조치를 취했다. 노예해방령은 모든 주-남부와 북부 모두-의 노예제를 제거하며, 이는 1863년 1월 1일날 효력을 갖는 것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 헌법 수정조항 제 13조에 의해서 예전의 노예였던 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었으며(1865), 이 조항은 링컨의 노예 해방령이 헌법에 기록된 것이다. 수정조항 제 14조(1868)는 노예였던 자를 그들이 거주하던 주의 시민이 되도록 한것이고, 수정조항 제 15조(1870)는 예전의 남자 노예에게 투표권을 준것이다. (피부색을 불문하고 미국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기까지는 이로부터 50년이나 더 걸렸다.)
이러한 수정조항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부 주에서는 주 자치법을 통해 흑인 미국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었다. 분리정책이라 알려진 관행은 물을 마시거나 버스를 타는등의 어떤 공공시설 이용은 백인들만 할수있다고 제한을 가하였다. 사적 영업장소는, 가령 식당같은데에서는, 만들어 질때부터 흑인 이용 금지를 시킬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공립 학교에서조차 흑백 분리는 1964년까지 남아있었다.
1950년대에 분리정책을 없애자는 자발적인 운동이 남부 여러지역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흑인들 자신을 단결하고, 투표권등 그들의 법률적 권리를 완전히 보장하는 흑인의 민권을 주장하는 것을 모색했다. 1955년에 마틴 루터 킹박사(1929-1968)는, 카리스마적 흑인 목사였는데, 알라바마의 몽고메리에서 벌어진 버스 탑승의 분리정책의 보이콧 운동을 조직했을때에 민권운동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9년 후에, 민권 운동은 특히 존 F.케네디(1917-1963)가 대통령이 된 1961년 이후에 기세를 올리고 지원을 얻었다. 이 운동의 절정은 1963년 여름에 워싱턴에서 행해진 군중 행진이었는데, 이때 킹목사가 8월 28일에 행한 불멸의 "나는 소망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로서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1964년 7월 2일, 공공시설과, 편의시설, 학교에서의 어떠한 형태의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 민권법이 제정되었다. 같은 해에 킹목사는 미국 흑인의 민권을 신장시킨 그의 업적으로 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비록 킹목사가 1968년에 암살되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민권의 추구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88. 구정 대공세: 1968
1968 반전 시위대는 시카고에서 경찰과 충돌.
1968 심해 탐사정 첼린저호는 탐사를 시작함.
1968 스페인은 적도 기니아의 독립을 승인.
1968 북아일랜드의 소수파 카톨릭교도는 영국에 대한 시위를 벌임.
1968 미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게 나포됨.
베트남전쟁(1964-1975)은 미국과, 세계와,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1968년의 구정 대공세는 베트남전의 중추적 사건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확실히 할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 스스로는 세계질서의 주도자로서 세계의 힘의 평형과 질서 유지에 책임을 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미국은 이러한 임무의 일부로서 전 세계의 약소국가들에게 공산주의의 조류가 범람하는 것을 막을 의무를 위임받았다고 여겼다.
동남 아시아의 남 베트남과 라오스는 공산국가인 북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반란군(베트공과 파테 라오라고 각각 알려진)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린든 죤슨 미국 대통령(1908-1973)은 미국 군사력의 과시가 북 베트남에게 위협이 될수 있으리라고 결정했다. 미국 전함이 1964년 8월 2일, 통킹만(灣)에서 북 베트남의 순찰선에게 공격을 받았을때, 죤슨은 미 공군기들이 북 베트남을 보복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역시 남 베트남의 미 군사 고문단의 숫자를 크게 증가시켰다. 일년동안, 미군의 수는 25000으로 증가하였으며, 그들은 실제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3년동안,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의 숫자는 50만을 넘었고 희생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병력과 돈의 막대한 투입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것처럼 보였다. 베트콩은 그들이 1964년에 제어했던 남 베트남의 많은 지역을 1967년에도 제어했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죤슨 행정부는 전쟁은 이기기 위한 것일 뿐이며 그들은 이를 입증해 보일 전략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죤슨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신뢰성의 결함"을 두고 논의를 불붙게 하였다. 비록 젊은 세대-25세 이하-는 점점더 분노하게 되고 베트남전의 미국 참전에 대해 환상이 깨져갔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들의 부모들은 여전히 죤슨의 거짓말이 주는 이득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구정기간 동안은 전통적으로 군사활동이 적었었다. 그러나 1968년 1월 31일, 구정기간 한 가운데에 북베트남은 남 베트남을 향하여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그들은 심지어 남 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에 있던 미국 대사관의 한쪽 부분을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미국은 궁극적으로 이 공격을 막아낼수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한달이나 걸렸다. 구정 대공세는 베트남 내전에 대한 미국의 3년동안의 개입이 공산주의자들의 의지를 꺾는데에도 실패하였고, 어떠한 방법으로든 베트남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는데에도 실패한 것이라 결론적으로 증명해낸 것이다.
죤슨은 구정 대공세로 인하여 매우 당황하였다 특히 1968년은 선거가 있는 해였기때문이다. 그리고 3월 31일에 그는 재선 출마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상을 개시하겠다고 공표하였다. 구정 대공세는 한 미국 대통령의 정치 경력의 종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북 베트남으로 하여금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졌던 전쟁을 계속 이끌어나가게 한 것이다.
47000명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겪고서야 미국은 최종적으로 1973년에 남 베트남에서 모든 미군 부대를 철수시켰다. 1975년 4월 30일, 북 베트남은 결국 남 베트남을 함락하고 공산주의 강령에 의거하여 베트남을 통일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는 오늘날까지 이어오게 된 것이다.
89. 혼돈의 해: 1968
1969 북 아일랜드에서 카톨릭교도와 신교도는 충돌사태를 일으킴.
1969 무아마르 알 카다피 대령은 리비아의 정권을 장악.
1969 가파르 알 니메이리 장군은 수단의 정권 장악.
1969 드골이 사퇴하고 퐁피두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됨.
1969 IRA는 아일랜드의 영국군데 대한 무력시위를 개시함.
1969 체코의 자유주의적 지도자 알렉산더 두브체크가 교체됨.
제 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해를 제외하고는 1848년 이래로 서구의 사회조직을 이렇게 근원에서부터 흔들어버린 한 해는 없었다. 프랑스의 대학생들은 1968년 5월에 시위를 벌였고, 이들은 천만명의 노동자들과 합세하여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5월의 파리를 강타한 폭도들과 사회적 대변혁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의 그것과 비견될수 있다. 1968년의 미국에서는, 1963년 케네디 암살로서 시작된 미국 역사 전환기의 최고조이던 시기이다.
정부와 기성 제도에 대한 신뢰심은, 베트남전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두고 린든 죤슨의 [신뢰성 결함]에 의해 한층 불안해졌는데, 2차 대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 중 상당 부분에게는 이제 신뢰심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지경이었다. 구정 대공세는 베트남전에 대해서 미국인들을 잘못 인도했다고 드러냈고, 죤슨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예선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전운동가 유진 맥카시 상원의원(1916- )은 3월 12일에 실시한 후보 예선에서 죤슨을 300표차로 눌러 이겼던 것이다.
3월 30일 죤슨이 후보 경선에서 사퇴한것을 시발로, 미국은 국가의 사회구조에 반한 유례없는 일련의 강타로 인해 삐꺽거렸다.
4월 4일: 마틴 킹 루터 목사(1929-1968)는 민권 획득을 위한 비폭력적인 접근을 유창하게 연설해 낸 가장 중요한 흑인 지도자인데,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피격당했다. 이후 125개 도시에서 분노한 군중들의 굽이침이 이어졌다.
6월 5일: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 (1925-1968)는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민주당 대통령후보중 선두주자였는데, 캘리포니아 대통령 후보 예선의 승리 직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되었다.
8월 20일: 자정 직전, 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군 60만은 체코의 진보적 지도자인 알랙산더 두보체크(1921- )를 실각시키기 위해 체코를 침공했다. 두보체크는 그의 조국에서 공산주의적 전체주의를 분해하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이는 요지프 스탈린의 억압적 정책을 나타냈는데, 이 정책은 그때까지도 문제없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와중에 있었고 전국적인 국민들의 동요로인해 좌초돈 상태라 체코슬로바키아을 도와주러 갈수가 없었다.
8월 26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무렵, 시카고에서는 반전 군중 시위와 폭동의 와중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수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경찰의 과잉진압이라 표현된 진압에 의해 부상당했으며, 심지어 후보자들 자신까지 최루탄으로 콜록거려야 했었다. 대통령 지명은, 아마도 로버트 케네디가 살아있었다면 그에게 돌아갔겠지만, 결국 허버트 험프리(19111-1978) 부통령에게 돌아갔다.
11월 1일: 베트남 전쟁이 대통령 후보인 험프리의 진영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린든 죤슨은 험프리가 반전 지지자들로부터 표를 얻어서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는것을 도와주기 위해 필사적인 시도로서 미군 군용기를 타고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11월 5일: 허버트 험프리는 공화당 후보인 리차드 마일러스 닉슨(1913- )에게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닉슨은 겨우 43%의 지지표밖에 얻지 못하였다. 조지 코울리 왈라스(1913- )은 미국 역사상 제 3당 후보로서 가장많은 표를 획득하였다. 이 두가지 결과는 미국에 드리워진 깊은 불만을 나타내는 징후인 것이다.
90. 인간은 다른 세상을 걸어다니다: 1969
1969 영불 합작의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가 처녀비행을 함.
1969 야지르 아라파트는 팔레스티안 해방기구(PLO)의 의장이 됨.
1970 요르단 정부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간의 내전이 벌어짐.
1970 낫세르 사망함. 뒤이어 안와르 알 사타트가 대통령이 됨.
1970 마르크시스 지도자인 살바도레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으로 선출.
1970 폴란드의 폭동으로 고물카 사임.
1971 뒤발리에가 아버지를 이어 아이티의 대통령이 됨.
1971 중화민국(대만)은 유엔에서 의석을 잃음.
1972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뮌헨 올림픽에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살해.
1961년에 외계에서 인간 생존을 지탱해 낼수 있다는 꿈을 달성한 이후에, 미소 양국은 각자 자국민을 달로 보내고 귀환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소련의 노력중 세부사항은 거의 30년간이나 장막에 가리워져 있었지만 미국의 개발 계획은 널리 알려졌다.
1960년대 중반에 양국은 한명 이상을 태운 우주선을 개발하고,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달까지의 비행에 있어서 필요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필수적인 개발인 것이다. 소련이 유인우주선을 첫번째로 쏘아올리는 기세를 보이자, 미국은 1965년과 1966년에 2인승 우주선인 제미니호를 10차례나 대단히 성공적으로 쏘아올리는 기세를 보였다. 제미니호 계획은 330시간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 비행 시간은 1970년대 초반에 들어와서야 깨졌다.
미국의 달 탐사 계획은, 아폴로 우주선을 이용하였는데, 아폴로는 세명의 승무원을 싣고 지구를 떠나 달궤도를 돌수가 있었다. 2인의 승무원은 달 표면 탐사를 하고, 며칠간을 보낸 후 그의 동료와 다시 합류하여 지구로 귀환하는 것이다. 처음 인간이 탑승한 아폴로 우주선(아폴로 7호)은 1968년 10월에 지구궤도를 시험비행하였다. 1968년 12월 21일, 아폴로 8호는 승무원을 싣고서 달까지 비행하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프랭크 보만, 테임스 코벨, 윌리엄 앤더스는 외계의 궤도를 돈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아폴로8호는 달에 착륙하기로 계획되어있지 않기에 그대로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였다.
1969년초, 1969년 7월 16일에 심화된 연습비행이 있은 후에, 아폴로 11호는 플로리다의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아폴로 11호는 달표면에 최초로 인간을 실어 나르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7월 20일에, 닐 암스트롱, 에드윈 올드린은 마이클 콜린스를 달궤도에 남겨둔채 달 표면으로 강하하였다. 몇시간 후에, 암스트롱은 지구이외의 다른 외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닐 암스트롱이 말하기를 이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발자국"이라고 했다. 이후 이러한 12명의 인간이 먼지투성이의 달표면을 걸은 후에, 다른 어떠한 인간도 20세기에 이만큼의 성취를 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발걸음은 더욱 위대한 것이다.
91.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과 석유 禁輸조치: 1973
1972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군법을 필리핀에 선보.
1972 영국정부는 북아일랜드의 직접 통치 실시를 결정.
1973 칠레에 우익 군사혁명이 발발. 아옌데 정부는 전복됨.
1973 영국은 바하마 군도의 독립을 승인.
1973 미국의 스카이랩 유인 괘도선이 발사됨.
1974 포르투갈에 군사 혁명이 발발, 민주 개혁에 이름.
1974 진시황의 무덤에서 실물크기의 도자기 병사들이 출토됨.
1948년 5월 14일의 이스라엘 건국은 아랍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유태인의 국가는 아랍과 유태인 양자가 모두 자기것이라 주장하는 땅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주로 시리아,요르단,이집트로 구성된 아랍 연맹의 1948년의 공격을 분쇄시켰으며, 1956년에 이집트에 보복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재발과는 별도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존재를 계속하여 주장하고, 아랍세계가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한 광범위한 교착상태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1967년 6월 6일, 아랍은 이스라엘의 철저한 파괴를 목적으로 중요한 보복을 감행하였다. 이를 6일전쟁이라 하는데,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고유 영토의 두배에 해당하는 지역을 획득함으로서 아랍에 대항하였다. 이 지역은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요르단 수중에 있던 예루살렘, 그리고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시리아와 골란고원이었다.
당황한 아랍 국가들은, 특히 이집트와 시리아는 닥쳐올 포위공격을 준비하기 위해서 재무장을 했다. 이스라엘을 침몰시키기 위한 아랍 국가들의 두번째 노력은 1973년 10월 6일, 유대인 성일인 욤 키푸르(Yom Kippur)에 일어났다. 이번에 아랍인들, 특히 이집트인들은 전쟁을 잘 꾸려나갔다. 그러나, 서구의 대량 공수 물자지원, 특히 미국은 이스라엘의 방어를 지지하였는데, 결국 이스라엘군이 아랍 연합군의 전진을 가로막고 그들이 1967년의 6일전쟁때에 획득한 정복지의 대부분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아랍 세계는, 명백한 불만 없이 서구의 이스라엘 원조를 인정하고 있었는데, 가혹하게 돌변하여서, 오토만 투르크 제국의 붕괴이후로 뭉친 적이 없던 단일체로서의 역량을 보여줌으로서 보복을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새 아랍 연합은 사우디 아라비아같이 이스사엘과의 전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국가조차 포함했으며, 아랍 국가들은 집단적으로 그들의 풍부한 석유 자원을 서구 국가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경제적 무기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73년 10월 17일 그들은 유럽과 북 아메리카로의 모든 원유 선적에 대한 금수조치를 결정했다. 이 금수조치의 충격은 매우 빨리 닥쳐와서, 영향권에 든 국가들은배급제를 실시하고 석유 비축시설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1974년 3월 18일, 아랍국가의 석유 금수조치가 최종적으로 풀렸을 때 조차 석유 가격은 일년 전에 비해 두배 이상 높은 가격으로 유지되었다.
세계 경제에 미친 1973년의 아랍 석유 금수조치의 충격은 의미심장한 것이었고, 영구한 세계적인 유산을 남겼다. 석유를 원료로 생산되는 제품, 특히 플라스틱은 가격이 2배가 되었으며, 대체 에너지원을 찾으려는 시도가 진전되었다. 서구 국가들은 중동산 값싼 석유의 고갈되지 않는 공급에 더이상 의존할수가 없게 되었다. 1973년 이후로 산업 세계는 결코 그 이전시기와 똑같을 수는 없게된 것이다.
92. 대통령직을 내놓게 한 워터게이트 사건: 1974
1974 헬무트 슈미트는 독일 수상이 됨.
1974 이자벨 페론은 남편의 사망후에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됨.
1974 소련 무용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서방으로 망명.
1974 사이프러스 사태는 그리스의 군사정권을 몰락시킴.
1975 레바논에서 회교와 기독교도간의 내전 발발.
1975 후안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의 사망 후에 스페인의 왕이 됨.
1975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에게서 독립.
1975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노벨 평화상 수상.
1976 주은래와 모택동 사망. 화국봉이 이어서 정권 장악.
리차드 마일러스 닉슨(1913-1994)이 1968년에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비록 그의 대통령 당선이 존슨과 험프리의 행정부가 베트남전을 해결하는데 실패한 것에 부분적으로 기인하지만, 닉슨은 당선후에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지속시켰다. 그는 한발짝 더 나아가서 1970년 4월 29일에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지금껏 보지 못하던 가장 격렬한 반전 군중 시위를 불러 일으켰다. 5월 4일, 오하이오의 켄트 주립대학에서 있었던 한 학생 시위는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주방위군이 "경고용 발포"를 했을때 4명의 학생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1972년에, 닉슨이 재선을 위해 뛰고있을 무렵, 그는 암암리에 야당을 정찰하고 야당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활동에 연루되었다. 이 활동의 절정은 워싱턴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던 민주당의 참모본부에 침입한 사건이다.
동시에, 민주당의 한 선거구에서는 중도좌파 후보인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1922- )의 지명이 있었다. 그는 대다수 선거구민들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었다. 이것이 닉슨이 선거 전날 "평화가 가까이 다가왔다"라고 발표한것과 결합하여 그가 투표에서 승리한 것이다.
닉슨은 재임기간동안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도 많은 고초를 겪었다. 1973년 초에 워터게이트 칩입사건이 시도되고 있을때, 닉슨의 가장 면밀한 도움이 침입사건의 계획에 관계되었을 것이라는 대중의 의혹이 짙었다. 닉슨 자신이 백악관의 집단 사건 은폐에 능동적으로 개입되었다는 잇달은 문제제기가 제시되자, 상원은 사건 조사 청문회를 소집했다. 청문회 의장은 샘 어빈이었는데, 1973년 5월 17일부터 11월 15일까지 청문회가 열렸다. 결국 다수의 백악관과 정보기관의 인물이 워터게이트 침입과 그에 이은 은폐에 참여했다는 증거가 폭로되었다. H.R.할데만, 존 에리히만, 존 딘, 법무장관 리차드 클레인디엔스트가 이에 연루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직하도록 조치되었다.
이와 동시에, 닉슨은 특별 검사로 아키발드 콬스를 임명했는데, 그는 11월 26일 닉슨 자신이 은폐에 가담하였음을 폭로해냈다. 이 시점부터 닉슨은 어떠한 더이상의 조사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1974년 6월 24일-30일에 상원 사법 위원회는 닉슨에 대한 세 항목의 탄핵서를 의결했다. 8월 8일, 닉슨은 이 탄핵으로 인해 사임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다.
리차드 닉슨이 불명예 속에서 탈퇴한 때는, 바로 행정부에 대한 일반적인 환멸,냉소주의,불신과 특히 정치인들에 대한 이러한 감정이 미국에 드리워지게 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인 것이다.
93. 다른 행성에 설치된 인류의 전초기지: 1976
1976 포르투갈의 마리오 소아레즈는 최초의 수상이 됨.
1976 멕시코의 수아레즈 곤잘레스는 41년만에 실시된 선거에서 수상으로 선출.
1977 프랑스 령이었던 지부티가 독립함.
1978 기아나의 존스타운에서 사교단체의 교도 900명이 자살함.
1978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캠프데이비드 협상을 통해 이집트-이스라엘간 평화협 정을 채켤케 함.
1979 마거릿 대처가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 됨.
1979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됨.
17세기 초에, 망원경은 행성이 천체(天體)이며, 달과 지구와 마찬가지로 고형(固形)물체임을 확인시켜주었다.
19세기 말에는 인간이 지구를 떠나 실제로 달과 다른 행성을 여행할수 있다는 환상적인 글이 많았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인류의 탐구심은 기술을 지구에 이웃한 행성들에 도달하는데 사용하게 되기를 바랐다. 1950년대 후반에 미소 양국은 우주로 진출하는 법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했다. 1969년에, 미국인들은 달에 다녀왔으나, 그외의 다른 행성에 인간을 보내는것은 연기되었다. 달까지는 단지 3일만 걸릴 뿐이지만, 타 행성으로의 여행은 무척이나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것이다. 해결책은 행성간 우주선으로 알려진 원격조종 우주선들을 보내는 것이다.
1959년에 소련의 루나3호는 달 뒷면(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의 사진을 최초로 찍었으며, 1966년과 1968년에는 미국의 달 궤도 탐험선 시리즈가 달 대부분의 지도를 촬영하고, 착륙하여 표면을 자세히 분석했다. 1962년에 미국의 마리너 2호는 금성을 향해 발사된지 4개월만에 최초로 다른 행성의 사진을 가까이 찍은 최초의 우주선이 되었다. 1965년에 마리너 4호는 화성에 도착하여 화성 표면의 사진을 찍었다. 7년후에 마리너 9호는 화성 궤도를 90일간이나 돌았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는, 미소 양국이 탐험용 우주선을 달,화성,수성에 추가로 보냈으며, 미국은 실제로 12명의 우주비행사를 달로 보냈던 것이다.
1970년대 초에 미국과 소련은 실제로 다른 행성에 착륙하는 우주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은 금성 9,10,13,14호를 1975년부터 1982년까지 계속해서 보냈으나 금성의 대기(大氣)상태가 워낙 험해서 4대의 우주선은 모두 잠깐동안의 교신후에 타서 녹아버렸다.
그러나 진정한 행성 탐사의 이정표는 미국에서 발사한 두대의 바이킹호에 의해 만들어졌다. 바이킹호는 달에 착륙했을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몇년동안 이 붉은 행성의 전초기지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976년 6월 20일, 바이킹 1호의 착륙선은 무사히 착륙해서 인간의 눈으로는 볼수 없었던 다른 행성 표면의 상세한 사진 4장을 지구로 전송했다. 9월 3일의 바이킹 2호의 착륙도 역시 성공적이었다. 2대의 우주선은 화성의 계절 변화를 거치면서 지구로 계속해서 화성의 환경에 대한 데이터를 전송했다. 바이킹 2호는 43개월동안 지구의 전초기지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바이킹 1호는 1982년에 50만 마일 떨어진 지구의 운영자로부터 작동 불능상태에 이르기까지 76개월동안 임무수행을 했다.
인류 역사는 우리들 선조가 선사시대로부터 발을 건너 띈 이후로 다수의 이정표들에 의해서 표시되어 왔다. 역사는 1976년부터 1982년까지 바이킹호 계획으로 인해 처음으로-아마도 이로서 끝나버지 않는- 우리 세상의 사건이 다른 세상의 사건과 서로 관련지어지게 된것이다.
94. 회교 원리주의의 跋扈: 1980
1980 국경문제를 둘러싼 이란과 이라크간의 전쟁 발발.
1980 로데지아는 짐바브웨로 명칭을 바꿈.
1980 테드 터너는 CNN 회사를 설립.
1980 터키의 케닌 에브렌 장군은 군사 혁명을 일으킴.
1980 카스트로의 독재정권을 피해 12만명의 쿠바인이 플로리다로 도망침.
1980 미국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
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570-632) 사망이후로, 그의 추종자들은 회교 강령과 정치적 영향력을 인디아에서 프랑스까지 퍼뜨리는데 성공했다. , 1096년부터 1270년까지 크리스트교 유럽은 십자군 원정을 통해 회교 세계에 대한 일격을 도모했다. 이후 수 세기동안 두 종교간의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18-19세기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흥기는 회교의 정치력 쇠퇴를 가져왔다.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유럽국가들이 영향권아래 두었다 하더라도 종교적으로는 회교가 남아있었다.
2차대전 말엽, 18세기 회교제국의 마지막 흔적이었던 터키의 오스만 제국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범 회교적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1958년에 아랍국가를 하나의 정치적 단일체로 만들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이집트 대통령 가멜 압델 낫세르(1918-1970)의 영도아래, 이집트와 시리아는 단명한 통일 아랍 공화국을 만들었었고, 1973-74년에는 원유 수출국 조직(OPEC)의 영향력 아래 중동 산유국들은 서로 결집할수 있었다. OPEC는 유럽과 미국에 대항한 석유 금수조치를 위해 만들어졌다.
석유금수조치와 1973년의 욤 키푸르 전쟁때에 새로운 세력, 즉 종래 아랍 세계의 영역이었던 곳에서 정치적, 영토적 경계선을 긋는 세력-회교 세력-이 등장했다. 1970년대 말에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회교도 사이에서 그들의 세속 정부가 너무도 서구화되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그 예로서 그들은 낫세르의 후계자인 안와르 사다트(1918-1981)와 이란를 지목했다. 그는 1979년 3월 26일에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에 서명한 사람이었다.
회교 강령을 따르고 있었으나 아랍 국가는 아닌 이란에서는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1919-1980)왕이 1974년이래 인상된 유가로 인해 얻은 부를 근대, 서구식의 경제를 구축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팔레비왕은 무례한, 전체주의 정치를 펼치는 국가를 만들면서 경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열렬한 회교도에게서, 또 새로 등장하는 서구화된 중산층에게서도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1978년에 불안감이 나타났을때, 팔레비 왕의 권력은 조기에 무너졌으며, 1979년 1월 16일에 그는 쫓겨서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민과 군의 지도자들이 잇달아 등장하여 팔레비는 내전을 피한 것이다.
1979년 2월 11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1900-1989)는 이란을 회교 공화국으로 선포하였다. 그는 회교 원리주의자로서 엄격한 회교 강령을 가지고 이란을 통치하였다. 팔레비 왕을 지원하였던 미국에 대한 강한 중오심때문에, 호메이니는 1979년 11월 4일, 이란 수도인 테헤란에 있던 미국 대사관의 접수를 명하였다. 결과적으로 대사관에 있던 52명의 인질은 적지에서 444일간 억류당하였다. 이는 이란 인질사건으로 알려졌으며, 미국의 정치적 입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지미카터 미국 대통령(1924-)의 무능력 때문에 사건은 해결되지 못하였고, 이것이 주로 작용하여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로널드 레이건(1911-)에게 그는 패배하였다.
이란과 같은 꽤 큰 국가에서 정통 회교 정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슬람 세계를 동요하도록 만들었다. 1981년에 이집트 대통령인 안와르 사다트가 압살된것은 하나의 반향이었다. 이는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정치적 구도에 계속해서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95. 어디서든 만날수 있는 컴퓨터: 1981
1981년 이집트의 사다트대통령암살되다: 무바라크가 이집트대통령으로 취임하다
호요방, 중국공산당 서기장이 되다.
이란의 미국인질들 풀려나다.
최초의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 발사되다.승무원은 존 영과 로버트 크리펜
1982년 아르헨티나 포클랜드군도 강습. 영국, 아르헨티나에 전쟁선포
브레즈네프 사망, 안드로포프가 계승함.
이스라엘군 레바논에 침공하여 PLO게릴라들을 축출하고자 시도.
1983년 스리랑카에서 싱할리족과 타밀분리주의자들간에 내란이 발생하다.
레이건대통령, 일명 SDI계획 발표.
소련, 한국의 KAL기 격추하다.
1984년 산디니스타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 사베드라, 니카라과의 대통령으로 당 선되다.
1985년 고르바쵸프,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제시함.
1986년 남예멘에서 내란발생.
스웨덴 수상 올로프 팔메가 암살되다.
1987년 동독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하다.
한국, 민주화에 대한 욕망이 한꺼번에 분출하다.
1988년 오스트리아 대통령 쿠르트 발트하임이 전쟁범죄와 연루문제에 대해 해명하 다.
버마군부, 버마를 장악하다.
컴퓨터는 1980년대 이래로 서구 근대 사회의 면면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전자 두뇌"라고 은유적으로 알려진 기계는 다수의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다. 컴퓨터는 자동차와 비행기가 수송능력을 확장시키듯이 계산능력에 있어서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1937년에 미국 엔지니어인 하워드 에이킨이 아이비엠 마크 7을 고안했는데, 이 컴퓨터는 오늘날 메인프레임 컴퓨터(대형 컴퓨터)의 할아버지 격이었으며, 전자식 스위치가 아닌 기계식 스위치와 진공관을 사용했다. 최초의 진정한 전자식 컴퓨터는 2차대전이 몰고온 기술 진보의 결과로서 개발되었다. 이 컴퓨터는 콜로서스 1호인데 맨체스터 대학의 알랜 튜링과 M.H.A 뉴먼에 의해 영국정부를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 컴퓨터에 의해 독일군의 은밀한 암호인 「울트라 코드」 가 풀렸으며 일일의 근거로서 1943년에는 주축국의 암호를 풀었다. 콜로서스에 이어 30톤짜리의 전자식 수치 적분기와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이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존 모츨리, 존 프레스퍼 에커트에 의해 미국정부를 위해 개발되었다. 최초의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전자 컴퓨터는 스페리 범용 자동 컴퓨터(UNIVAC)인데, 에커트와 모츨리에 의해 고안되고 1951년에 소개되었다. IBM이 판매한 IBM 1401은 산업계와 기업에서 기계식 계산기를 대체한 최초의 컴퓨터였다.
트랜지스터 컴퓨터는 성가시고 잘 깨지는 진공관을 벗어나서 튼튼한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컴퓨터인데, 1958년에 콘트롤 데이터 회사를 위해 세이무어 크레이가 개발했다. 이로서 컴퓨터는 집채만한 크기에서 매우 작고 빠른 컴퓨터로 바뀌어 나가게 되었다.
크레이는 나중에 컴퓨터 회사를 차려서 최상급의 수퍼컴퓨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크레이 1은 1975년에 소개된 수퍼컴퓨터로서 초당 100만개의 연산을 할수있는 능력이 있었다. 1985년에는 이를 능가하는 크레이 2가 나왔는데, 초당 1천 2백만번의 연산능력이 있었다. 1991년에 싱킹 머쉰 社에서 나온 CM-200 수퍼컴퓨터는 초당 9천 3만번의 연산이 가능하다.
모든 가정에 놓여진 개인용 컴퓨터라는 개념은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산타 클라라 계곡에서 탄생하였다. 이곳을 이름하여 실리컨 벨리라고 한다. 1976년에 스티븐 잡스(1955-)와 스티븐 워즈니액(1950-)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한 가정용 컴퓨터인 애플 I를 잡스 부모님 집의 차고에서 만들었다. 두사람은 애플 I을 만들어 지역 컴퓨터 애호가와 전자제품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하였다. 1977년 초에 잡스와 워즈니액은 애플컴퓨터社를 설립하고, 4월에는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 II를 등장시켰다.
이 애플컴퓨터社는 수만대의 저가 컴퓨터를 세계시장에 판매함으로서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마이크로 컴퓨터 혁명을 일으켰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라는 개념은 이제 실현된 것이다. 컴퓨터를 구매할 능력이 없는-혹은 복잡한 컴퓨터 언어를 사용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칠 능력이 없는- 기업과 교육기관에서 이제는 이러한 기술의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애플 컴퓨터社는 5년만에 외형이 5억불이나 되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거인인 IBM社가 1981년 8월, 개인용 컴퓨터(PC)를 발표하기 이전까지 컴퓨터 산업을 석권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애플社와 IBM社는 시장을 양분했으며, 마이크로 컴퓨터는 전세계 산업화 사회의 기업,학교,가정에서 찾아볼수 있게 되었다.
96. 유럽 공산주의의 몰락: 1989-1990
1989년 재정오용의 강력한 주장으로 일본총리 노보루는 사임을 강요당하다.
불가리아 총리 토도르 지브코프가 사임하다;그의 후임자는 페타르 믈라데 노프.
동독에서 시위가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가져오다.
수백명의 시위대가 뻬이징의 천안문광장에서 군에 의해 학살당하다.
루마니아대통령 차우셰스쿠, 축출된뒤에 사형당하다.
소련군,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철수완료;내란은 계속되다.
미군 파나마침공, 노리에가장군은 항복했으며, 마약문제로 체포되다.
요지프 스탈린의 적군이 1945년에 동유럽에 진주해서 철의 장막을 내리운 이후, 공산주의적 전체주의는 세계의 일부분을 그의 손아귀에서 풀어주지 않을것처럼 보였다.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 정부는 재빠르고도 대담하게 어떠한 폭동의 불꽃도 진압했다. 소련의 강력한 군사력과 모든이에게 퍼져있는 비밀 경찰 기관은 소련 공산 제국이 영구히 지속할것이라는데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게 만들었다.
공산주의의 절박한 사망의 첫번째 신호는 1980년에 왔다. 폴란드 노동자들이 비공산주의 노조를 만든 것이다. 레흐 바웬사(1943- )가 이끈 이 노조는 「연대」라고 불리웠는데, 더 많은 임금과 파업권,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의 확대도 요구하였다. 비록 이 노력으로 인해 연대는 억압받고, 군법이 이에 부과되었으나 연대는 살아남았다. 소련의 지도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1906-1982)는 196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명령한 인물로서, 폴란드에 침공의 위협을 가하였으나 실제로 군대를 보내지는 않았다.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소련과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에, 비틀거리는 공산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신속한 개입을 계획에 두었으나, 개입은 10년을 끌게 되었다.
1982년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연로한 지도자가 그를 대신하였는데, 그는 오직 짧은 기간동안만 통치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는동안에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군과 참호를 파놓고 싸우는 반란군사이간의 승부를 점칠수 없는 전쟁으로 변질하였다. 결국 1985년에 상당히 젊고 보다 진보적인 지도자가 정권을 장악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 )는 보다 자유롭고 보다 개방적인 정부를 약속하였다. 암묵적으로 그의 생각속에는 소련의 군대, 즉 적군이 이제 더이상 공산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원하기 위해 동유럽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있었으며, 1988년에 고르바쵸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일단 소련이 규제를 풀기 시작하자, 공산주의 시스템은 상상할수 없을정도의 속도로 분해되어 나갔다.
폴란드에서 「연대」는 1989년에 합법화되었으며, 새로운 의회에서 99%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결과적으로 폴란드 공산당은 1990년에 자진 해산을 의결하였다. 헝가리에서는 1989년 5월에 국경을 개방하고, 11월에는 공산당은 명칭을 개명하였으나 1990년 3월과 4월에 실시한 자유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운동은 이를 벨벳 혁명이라 부르는데, 1989년 10월에 시작하여 공산당의 해체와 1989년 12월에 비공산주의자 시인이자 극작가인 바클라프 하벨(1936- )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90년 8월에 불가리아에서는 비록 공산당이 1991년 10월 선거때까지 정부에서의 역할을 쥐고 있었으나,불가리아 최초의 비공산주의자 지도자가 선출되었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세스쿠(1918-1989)가 그의 아내와 더불어 1989년 12월에 사형당하였다. 그러나 예전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계속 쥐고 있었다. 시민적 의견 불일치가 1991년 내내 계속되다가 1992년 2월에 비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정부가 선출되었다.
비록 유고슬라비아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전시기의 구성상태로 나라가 쪼개지고, 일련의 유혈 내전 상태가 발발하였으나,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은 50년만에 처음으로 그들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미래를 자유롭게 추종할수 있게 되었다.
97. 독일의 재통일: 1990
1990년 보리스 엘친,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다.
동서독일, 재통일하다:헬무트 콜이 통일독일의 초대 수상이 됨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페르시아만전쟁의 시작.
레흐 바웬사, 폴란드 역사상 첫번째 직선대통령이 되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소연방으로부터 독립선언
칠레에서 16년간의 군정정치를 종식시키켜, 피노체트장군을 이어 Particio Aylwin이 대통령이 되다.
남아공 대통령 드 클레르크,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다;ANC에 대한 금지도 해제됨
유엔, 이라크 경제제제 결의
남예멘과 북예멘이 예멘공화국으로 통일
2차대전 말엽, 패전국 독일은 4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었으며, 분할지 각각은 승전국 연합이 각각 점령하였다. 1949년에, 영국,프랑스,미국은 그들의 군사정부를 철수시키고 그들의 점령지역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 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그들의 동부 점령지역이 독일 연방 공화국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했다. 독일 공산당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적군은 "보호"아래 세워졌다.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 Deutsch Demokratische Republik, DDR)이 탄생한 것이다.
서독과 동독의 경계선은 봉쇄되었으며, 두 독일인들은 40년간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재통일의 생각은 희망을 잃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에 독일의 예전 수도의 중앙을 가로질러서 세워졌는데,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장벽, 혹은 국경선의 어떤 부분이라도 넘어가려고 시도하는 어떠한 이도 동독 국경 수비대에 의해 총에 맞아서 죽은채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1989년에,변화의 기운이 동유럽에 불어닥쳤고, 이는 동독 주민들을 휘져었다. 곧 탈출을 갈망하는 수천의 동독인이 국경이 열려있던 헝가리로 우회하여 서독으로 넘어왔다. 1989년 11월에 독일인들은 돌로 내려 치거나 망치로 내려치는등 급작스레 베를린 장벽을 공격하였다. 예전에는 장벽에 다가가는 사람들을 사살하도록 명령받았던 동독 수비대는 방관만 하고 있었다. 양국의 수비대가 장벽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을때에, 수천의 독일인들은 맨손으로 경악의 상징을 찢어나가기 시작했다.
동독 공산 정부는 해체되었으며, 1990년 3월에 최초의 비공산정부가 선출되었고, 이 정부의 유일한 일정은 통일되는 것이었다. 1990년 7월 3일, 서독의 통화인 도이취 마르크를 사용하는 경제적 연합체가 탄생하였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이제 사라지고, 동독의 6개 주는 서독의 주로 편입하였다. 1990년 12월에, 58년만의 최초 전체 독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비록 두 국가간의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을 화합해야 하는 많은 숙제가 남아있을지라도,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다시한번 그들의 통일된 국가를 갖게된것에 대해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98. 소련 연방의 붕괴: 1991
1991년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쿠웨이트에서 철수를 거부하는 이라크를 공격 하기 시작함.
보리스 엘친, 러시아대통령으로 선출
전직 인도수상 라지브 간디가 선거유세도중 암살당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의 지도자들, 독립국가공동체 설립에 동의
고르바쵸프 실각
부시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전략무기감축협정에 서명.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는 넬슨 만델라를 의장으로 선출
고르바쵸프와 노태우대통령, 만나다.
대만총통 이등휘, 43년간 계엄령을 철회하다.
미국과 소련,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적 지원 중단에 동의
거의 70년동안 소련은 일당국가를 지향하는 단일체로서 건재하였고, 공산당은 마치 자식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엄한 아버지처럼 국가를 지배하였다. 요지프 스탈린(1879-1953)은 1924년부터 1953년까지 통치하였는데, 강력한 국제 안보 기구와 거대한 중앙계획 경제를 건설하였다. 그에게 반대하는 어떤 이라도 사형시켰다고 알려지는 그는 나찌 독일을 패배시키는데 일조했고, 서유럽과 소련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동유럽에 국가들을 건설했다. 그의 후계자인 니키타 흐루시초프(1894-1971)는 1953년부터 1964년까지 통치했고, 레오니드 브레즈네프(1906-1982)는 1964년부터 죽을때까지 소련을 통치했다.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는 권력이 공산당과 공산당 지도자에게 집중되어있는 독재 체제를 물려받았다. 영자는 막강한 적군에 의해 뒷받침되는 전능한 소련이라는 스탈린의 견해에 공감했다. 양자는 내부적 불만을 같은 방법으로 억압했다. 흐루시초프는 1956년의 헝가리 사태를 분쇄했고, 브레즈네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그런 방식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에 같은 전술을 시도하나, 적군이 힌두 쿠시 산맥에 숨어있는 회교도 게릴라와 벌인 전투는 미국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겪었던 경험과 마찬가지로 곧 교착상태에 봉착하게 되었다. 국내정치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소련내부의 기존 질서가 난파하기 시작한 원인이 되었다.
1985년, 브레즈네프가 죽은지 3년후에, 새로운 개혁적 성향을 지닌 지도자가 권좌에 올랐다.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 )는 소련의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공산 국가는 이미 부스러지기 시작하였고, 오직 전체주의가 뒷받침한 철의 유대만이 소련의 각 조각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르바쵸프가 이 유대를 풀어놓자, 15개의 공화국은 각자 더 많은 자치권을 달라고 외쳐댔고, 발틱해 연안 국가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보리스 옐친(1931-)은 1991년 6월에 넓은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소련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그의 공화국, 러시아에거 보다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였다.
1991년 8월 19일, 일단의 강경파 공산주의자 집단이 고르바쵸프를 구금하고 브레즈네프 식의 국가로 복괴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들에게 놀랍게도, 옐친은 그들에게 대항하였으며, 그들의 쿠데타는 며칠만에 끝나게 되었다. 비록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구출해 내는데 성공했지만, 소련 연방의 통치 구조는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사실은 모든이에게 명백해졌다.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들을 서로 모으기를 몇개월간 시도하였으나, 결국 소련 공산당과 소련은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1991년 12월 23일, 75년간의 소련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친숙한 붉은 깃발은 마지막으로 내려지고, 새로운 15개의 독립 공화국들의 15개의 깃발이 그를 대신하였다. 1992년 1월 1일, 소련 연방과 소련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그 존재가 끝난것이다.
99. 유럽 경제 연합: 1992
1992년 이스라엘의 야당인 이츠하크 라빈이 지도하는 노동당이 여당인 리쿠드블록 을 의회선거에서 패배시키다.
엘친 러시아대통령과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간 협력 조약에 서명하다.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의회가 체코와 슬로바크로 분리를 결정하다.
국제연합,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지구환경회의를 개최하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신유고연방을 선언하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하고 그것을 국회비준에 위임하다.
유고슬라비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쩨고비나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때문에 유 엔에서 축출되다.
통일 유럽의 개념은 샤를마뉴가 처음으로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이 된 국가를 형성한 AD 800년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대부분의 유럽 역사는 긴 지역간 이익 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몇몇 예로서 프랑스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러시아가 우세했던 독일이 있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무력에 의해 유럽을 통일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중 하나이다. 정치력의 우세가 뒤따르지 않는 통일이란 불가능해 보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 유럽은 사회 기간 시설과 경제적 기반의 파괴로 고초를 겪었다. 비록 소련과 미국이 대립하는 두 군사동맹의 중심부로서 그들 자신을 설정해 놓았지만, 유럽은 그들 스스로의 경제 동맹을 모색했다.
전후 최초의 경제 동맹은 1948-1944년의 벨지움-네덜란드-룩셈부르크(베네룩스) 동맹이었고, 이어 프랑스-독일간 석탄과 철강의 협정이 있었는데, 이는 1951년에 유럽 철강,석탄 공동체(ECSC)가 되었고 여기에는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삼국이 참여하였다. 이 6개 국가는 1957년에 설립된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중심국이 되었으며, 1973년에는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1973년에 합류하였다. EEC의 목적-단일 시장이라고도 알려진-은 회원 국가간의 관세를 없애고, 역외 국가들과의 교역에서 단일 관세를 매기며, 회원 국가간의 자유로운 노동과 자본거래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EEC-이제는 간단히 유럽 공동체(EC)라고 하는데-는 전유럽의 궁극적인 경제 통합을 행한 첫 발걸음었던 것이다.
1965년에 EC는 프랑스-독일 국경의 스트라스부르크 설치되어 미래의 정치적 단일체를 준비하는 기반이 되는 경제적 임무를 수행할 유럽 의회를 설립하기 위해 모였다. 1979년에 유럽 화폐 체제(EMS)가 유럽 단일 통화(ECU)를 진척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
1986년에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가 회원국으로 추가되었으며, 유럽 의회는 1992년에 "국경없는 유럽"을 요구하는 단일 유럽 법률을 통과시켰다. 1991년 12월 9일에 있었던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서명은 중요한 그다음 단계였다. 이 서명으로 유럽 경제와 화폐 통합(EMU)이 만들어졌다.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EMU는 1999년부터 대륙에서 ECU를 상용 통화로 사용하는 완전한 경제 통합을 이루기 위한 연합이다.
1992년경, 통합이 이루어질 날을 상상하는 "국경없는 유럽"이라는 개념은, EC 의 원래 회원국간에서 상당히 현실적이다. 처음에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오랜기간동안 유럽을 분할했던, 아직도 깊히 뿌리박혀있는 전통주의의 함정 때문에 다른 회원국들의 유권자들로부터 오직 실날같은 차이의 우세로 비준되었다. 12개 회원국간에는 국경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일 통화를 향한 전진이 계속중이다. 더 중요한 점은, 그만큼 많은 수의 다른 국가들이, 전통적으로 중립국인 스위스로부터 동구의 새로운 민주국가들까지, 하나가 될 유럽의 일부로 참여하는데 대한 흥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00. 무한으로 뻗어 나가는 인류: 1993
1993년 캄보디아선거에서 노로돔 시아누크공으로 권력이 되돌아오다.
내란과 윤리적 투쟁이 한때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했던 나라들을 파괴하는것 이 계속되다.
러시아대통령 보리스엘친이 인민회의와 권력투쟁에서 살아남다.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이 워싱턴DC에서 문을 열다.
미국과 기타 국가들이 페르시아만전쟁에서 유엔결의를 따르지 않은 불복종 을 이유로 이라크를 폭격하다.
1957년 초에 인간은 우주로 위성들을 발사함으로써 자신이 사는 세계를 벗어난 곳에 다다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15년간 사람들은 무인 탐사선을 가장 가까운 행성들-금성,수성,화성,목성-에 보냈고, 달을 걷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미국은 더 큰 임무를 지닌 4대의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들의 첫번째 임무는 우리의 태양계 내에 있는 가장 큰 4개의 행성-토성,천왕성,해왕성,명왕성-을 방문하는 것이다. 이들 행성 모두는 지금까지 우주선이 이미 도달했던 지구에서 가까운 행성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있다. 두번째 임무는 지구로부터 외계로 보내는 인사말을 싣고 태양계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서 항성간 우주의 미탐사지역 깊숙히 비행해 가는 것이다.
파이오니어 10호와 파이오니어 11호는 1972년과 1973년에 각각 발사되었다. 이 우주선들은 1979년에 목성과 토성을 통과하였다. 보이저 1호와 보이저 2호는 1977년에 둘다 발사되었는데, 1979년과 1981년 사이에 목성과 토성을 방문하고, 보이저 2호는 비행을 계속해나가서 최초로 지구에서 천왕성(1986)과 해왕성(1989)을 방문한 우주선이 되었다. 보이저 2호가 1989년 8월에 비교할수 없이 근접해서 해왕성의 뒷면을 찍어서 지구로 전송했을때, 그때 명왕성은 실제로 해왕성보다 태양에서 더 가까이 있었다. 이 시점부터 4대의 주목할만한 우주선은 우리의 태양계 가장자리를 넘어서서 비행을 하였는데, 인간이 예전에 만든 어떠한 물체보다 지구로부터 30배가 넘게 멀리 떨어져서, 지구로부터 일년에 5억킬로미터의 속도로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90년 2월에 수신된 보이저 2호의 마지막 사진은, 가장 근처에 있는 사람의 심장박동으로부터 4800만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있는 춥고 어두운 곳에서 보내진 인간역사의 이정표이다. 이 순간은, 인류가 의식적으로 우리 태양의 따뜻함이 있는 보금자리를 벗어나서 거의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있는, 알지못하는 다른 장소의 다른 사람들에게 도달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다.
1993년 5월, 보이저호는 태양계와 항성간 우주를 구분해주는 경계선인 태양풍 경계선의 직접적인 최초의 증거를 탐지해냈다. 파이어니어호나 보이저호는 인간 역사의 모든 이정표가 끝난지 오래 된 아주 먼 미래에 우리들이 아직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1970년대에 시작한 우주의 무한한 넓이 속으로의 여행은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이정표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나갈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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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거 글쓴이들 입니다.
1-20 : 한상훈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4학년
21-40 : 손승욱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3학년
40-60 : 김진만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3학년
60-80 : 김대륜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4학년
80-100: 이수화 / 책임번역자 /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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