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대륙이 얼음으로 뒤 덮이기 전인 기원전 1만 년 전에 작성된 남극 대륙 지도의 발견(남극 대륙이 지금의 인류에게 발견된 시기는 19세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페루 남부 나스카 고원에 있는 거대한 지상 그림과 잉카 문명, 그리고 세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홍수 신화, 신화 속에 은폐되어 있는 세차 운동에 대한 암시, 지각 이동설 등……. 현대의 과학으로는 도저히 그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고대 문명의 흔적과 신화들은 지금도 신비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현대 과학보다 훨씬 앞선 그 문명은 도대체 누가 세운 것이며, 그 문명의 주인공들은 왜 한순간에 사라졌는가? 어디로 사라졌는가?
또한 이러한 유적들이 현재의 지구와 인류에게 전해주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이 책 『신의 지문 Fimgerprimts of the Gods』의 저자인 그레이엄 핸콕은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지의 동아프리카 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런던 『선데이 타임스 Sunday Times』의 기자였다.
성서에 나오는 “계약의 궤”에 대한 진지한 탐색의 면면 을 기록해 놓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였던 『암호와 봉인 The Sign and the Seal』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매혹적인 사라진 초 고대 문명의 그림 조각을 맞추기 위해서 세계 곳곳을 탐사하고 있으며 고고천문학, 지질학, 고대 신화의 컴퓨터 분석 등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하여 태고 문명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핸콕은 그 문명의 진실을 밝혀내고 과거에 고대 인류가 멸망한 원인과 그들이 경고한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 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미래의 길흉을 말하는 예언서는 아니다. 방대한 자료와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태고에 고도로 발달한 인류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우주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와 문명들이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해 왔다. 지구도 그 흐름속에서 많은 변화의 과정을 밟아왔다. 아직 신비로 남아 있는 숱한 고대 문명의 흔적들은 오늘의 인류에게 우리 문명의 뿌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지도의 불가사리
1. 숨겨진 장소의 지도
1960년 햅굿교수는 1513년에 피리레이스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제독이 그린 지도가 실제로 현재 남극대륙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는 미국 공군의 답신을 받는다. 지금 현재 1.6킬로미터 두께의 얼음으로 덮인 이 지역을 어떻게 16세기 사람이 정확히 그릴 수 있었을까? 행콕은 그 비밀을 찾아간다.
이 지도는 알고보면 조작이나 창작과는 관계가 멀다. 아프리카 서해안, 남아프리카 동해안, 남극대륙의 북해안을 망라한 이 지도는 이미 있던 고대지도를 베낀 것이다.
아마도 남극대륙이 얼기 전인 기원전 1만3천년에서 기원전 4천년 사이에 남극 연안을 조사할 능력이 있던 사람들이 그린 고대지도를 베낀 것이다. 이 지도를 본 햅굿은 그의 추리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① 남극대륙은 한때 얼음으로 덮여 있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② 당시 남극이 얼음이 아니었던 것은 지금보다 3200킬로미터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③ 대륙이 이동한 것은 지각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각이동은 대륙이동과는 다른 것이며 오렌지 껍질과 알멩이가 따로 놀듯 내부의 부드러운 부분은 그대로 두고 표층부가 옮겨진 현상이다.
④ 남극대륙이 이동하는 동안 얼음으로 덮여 현재상태에 다다랐다.
2. 남쪽 대륙에 있는 강
워싱턴 D.C.의 의회도서관에서 햅굿이 발견한 중세 지도와 해도는 다른 도법으로 그린 그 전의 지도를 모사한 것으로 남극대륙을 선명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 지형과 강은 지진파측정결과 나타난 얼음 아래의 대륙과 일치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지도가 하나 뿐이라면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인 메르카토르의 지도, 18세기 프랑스 사람인 부아슈의 지도, 오스만투르크 하지 메이드의 지도 역시 얼음 아래의 남극을 그려놓고 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남극이 얼음이 아니었던 적은 수백만년전이라고 말하지만 이 지도들은 햅굿의 주장을 지지하는 듯하다. 적어도 기원전 4천년전, 신석기인들이 이 지도를 그린 것일까? 이 지도들은 남아메리카의 상세한 지형과 양대륙을 연결한 베링해협의 땅을 그리고 있다. 1만년전 북구의 빙하가 녹아 해면이 높아지면서 사라진 베링해협의 육로가 여기에는 있는 셈이다.
3. 사라진 과학의 지문
1569년에 작성한 메르카토르의 세계지도는 얼음이 없는 남극대륙의 지도를 상세히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해안의 정밀도는 오히려 떨어진다. 이 부분은 스페인 탐험가의 관찰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아직 경도측정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경도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남북의 위도는 태양과 별의 각도를 이용하면 간단히 잴 수 있지만 경도를 재는 것은 위치와 시간을 모두 측정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런데 이 고지도들은 정확한 경도를 나타내고 있다.
1339년의 둘체르트 포르톨라노라는 해도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그리고 있는데 흑해와 지중해의 경도가 0.5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이런 결과를 미루어볼 때 이 지도들은 이미 사라진 고대의 정확한 지도를 모사한 것이다.
특히 이 지도들은 현대에 와서나 사용한 고도의 수학을 사용하고 있다. 구형 삼각법, 평사도법 등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이런 지도는 중국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동일한 유산을 인류가 계승했고 이용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바다의 거품
4. 콘도르의 비상
저자는 세스나기를 타고 페루 남부에 있는 나스카를 날아간다. 고래, 원숭이, 벌새, 알카트라즈라는 왜가리, 물고기, 삼각형, 펠리컨, 콘도르. 반신반인의 비라코차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이 거대한 지상조형물은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나스카고원의 320평방킬로미터 대지 위에 있다. 높이서 보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수도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1400년전 에 그렸다는 것 뿐이다. 나스카의 그림은 2단계에 걸쳐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데, 먼저 만든 것이 더 높은 수준을 지니고 있다. 이 간격도 도무지 알 수 없다.
거미그림을 조사한 피틀루거 박사는 별자리와 비교해 조사한 결과 거대한 오리온자리를 지상에 그린 것이고, 그 그림에 연결된 화살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오리온 벨트의 별 세 개가 변천한 것을 그린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것은 암호문자가 아닐까? 종이 위에 그렸대도 상당한 역작인 한 줄로 그린 원숭이의 길이는 122미터, 폭은 91미터이다.
5. 과거로 인도하는 잉카
공예품이나 기념비, 마을, 사원보다 종교적 전승이 훨씬 오래 남는 법이다. 전승은 변형되기는 해도 없애기가 가장 어려운 인류의 문화유산일 것이다. 스페인이 절멸시킨 잉카의 전승은 그나마 가녀린 흔적이 남아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의 창시자는 비라코차들이며 이 신비로운 존재들이 나스카의 그림도 그렸다고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태평양연안에서 안데스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던 잉카제국의 광대한 도로망을 이용해 쉽사리 그들을 정복했다. 해안을 따라 3600킬로미터, 산맥을 따라 비슷한 길이로 난 도로는 많은 지선과 연결되어 스페인군대의 무자비한 진군을 도왔다.
잉카족은 태양신 인티를 최고신으로 숭배했고 인티는 나스카에 있는 그림을 그린 비라코차이며 이름의 뜻은 ‘바다의 거품’이라는 의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단단한 신전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그 위에 식민지풍의 사원을 지었다. 700장 이상의 순금이 덮였던 그곳을 스페인 사람들이 없애지 못한 것은 정교하게 짜맞추어 놓은 돌블록 시스템 덕분이었다.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돌들이 기묘하게 맞추어진 도로와 구조물. 접합부로는 종이한장 들어가지 않는다.
스페인이 들어오기 전, 여기는 예수의 제자 바돌로메와 닮은 턱수염을 기른 백인의 신전이었다. 비라코차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했고 스페인 군대는 잉카군을 손쉽게 이길 수 있었다. 잉카인은 돌아온 비라코차를 보았던 것일까?
6. 혼란의 시대에 나타난 남자
안데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고대전설에는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길렀으며 피부색이 하얗고 외투를 입은 불가사의한 인물이 등장한다. 다른 장소에서 여러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동일한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비라코차, 바다의 거품이라는 이 사내는 과학과 마술에 능통하고 무서운 병기를 다루며 혼란의 시대에 나타나서 세계질서를 바로잡았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안데스 전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지구가 홍수로 물에 잠기고 태양이 사라져서 암흑으로 변한 무서운 시대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위대한 힘을 가진 이 존재는 지나가는 모든 지역에 기적을 베풀고 모든 언어로 말할 수 있었다. 턱수염, 키 큰 하얀 남자. 하얀 외투에 허리띠의 이 사람은 문명화라는 사명을 마친후 바다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다의 거품’이라는 이름, 비라코차라고 부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사였다. 무질서한 사람들,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들, 식량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문명의 황금시대를 구축했다. 의학, 야금학, 농업학,가축학, 문장학, 공학과 건축학의 세련된 원리와 기술을 전해주었다. 그가 수행원을 데리고 다녔다는 기록도 있고, 비라코차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크샤우만의 고대성채는 돌들로 이루어져있고 돌 중 하나의 높이는 8.53미터, 무게는 361톤이다. 소형자동차 500대의 무게인 셈이다. 바퀴의 존재조차 알지못한 잉카에서 이런 건축물은 누가 만든 것일까? 전설에 따르면 이런 고대건축물은 턱수염을기른 하얀 이방인들, 빛나는 사람들인 비라코차가 건설했다고 전한다.
7. 그렇다면 거인이 있었단 말인가
저자는 쿠스코를 등지고 마추픽추라는 잉카의 도시로 가는 길에 인디오들의 전설을 되짚어본다. 대홍수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사하고 티티카카 호수에 한 명의 비라코차가 나타난다. 그는 태양과 달을 만들고 인류를 증식시킨다. 또다른 전승에는 최초에 창조의 신 비라코차가 거인들을 바위에 새기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거인들이 태어난 것이다. 거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싸우고 일하기를 싫어했다. 창조신은 홍수로 그들을 멸망시켜버렸다. 마치 구약성경에 나타난 거인들의 이야기같다.
비라코차는 그의 제자를 산과 들과 바다로 보내 사명을 수행한 다음 다시 합류한다. 그는 사람들을 남겨놓은채 제자들과 함께 물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파도 위를 걸어 태평양 저쪽으로 사라졌다.
마추픽추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던 나머지 유럽 침략자들의 파괴를 면할 수 있었던 기이한 유적이다. 마추픽추의 유적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불멸의 조각이다. 산 정상에서 맞은 편 우아나 픽추를 마주보며 건설된 이 신성한 구조물은 다각형돌을 완벽하게 서로 맞물려 쌓아올렸으며, 자연석도 군대군대 전체의 도안 속에 포함되어있다.
포츠담대학의 천문학교수인 롤프물러는 마추픽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천체의 위치에 맞추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 수천년의 별자리 위치를 계산한 결과 기원전 4천년에서 2천년 사이에 완성한 구조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추픽추는 티티카카 호수에 남쪽으로 떨어진 볼리비아의 콜라오라지방에 있다.
8. 세계의 지붕에 있는 호수
볼리비아의 수도 라 파스는 거대한 분지에 있는 도시이며 해발 3킬로미터 높이에 있다. 라 파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티티카카 호수가 있다. 티티카카 호수는 해발 3810미터의 높이 있고 볼리비아와 페루의 국경선이 여기를 지나간다. 길이는 222킬로미터, 폭은 112킬로미터다. 곳에 따라서는 깊이가 300미터인 곳도 있어 지질학상으로도 수수께끼인 호수다. 조개껍질 화석이나 살고있는 생물을 보면 여기는 예전에 바다였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드는 생물 중에는 해마도 있고 주위에는 태고의 해안선 흔적이 남아있다.
해안선에서 상당히 떨어진 티아우아나코에는 선착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가 티티카카 호수에 맞닿아 있었던 항구도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선착장은 지금의 수면에서 30미터나 높은 곳에 있다. 호수 수면이 급격이 낮아졌거나 이 선착장의 땅이 솟아오른 것이다. 티아우아나코라는 선착장을 건설하고 나서야 어떤 지각변동이 있었다는 셈이다. 이 선착장을 건설한 시기는 도대체 언제일까? 추정해보건데 기원전 1만5천년경이다. 갑작스러운 자연의 대변동은 기원전 1만1천년경에 닥쳐왔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
9. 과거 그리고 미래의 왕
티티카카 호수 부근인 콜라오라 지역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난 전승이 전해온다. 문명을 전파한 투누파라는 영웅이 신처럼 숭배되었다. 그는 위엄이 넘치는 백인으로 턱수염과 파란눈을 하고 있었고 냉정하고 금욕적이며 술에 취하는 일과 일부다처제, 그리고 전쟁을 하지 말도록 설교했다. 그는 평화로운 왕국을 세우고 문명과 기술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그를 질투하던 공모자들의 습격을 받고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들은 투누파를 풀로 만든 배에 실어 호수로 띠워보냈다.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그들은 놀랐다. 배는 강으로 흘러 해안선에 다다랐다.
이 전승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전승과 거의 흡사하다. 오시리스는 플루타르크가 상세한 전승을 남긴 이집트의 문화영웅으로 그의 의형제인 세트의 음모로 연회에 초대된 후 나무상자에 갇혀 나일강에 버려졌다.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가 이 상자를 감추자 세트는 상자를 찾아내어 신성한 사체를 14등분으로 토막냈다. 이시스는 시체의 파편을 찾아 하나로 모아 복원시키고 별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 저승의 왕이 되었다.
문명전파자, 음모에 빠져 죽고, 배와 같은 것에 넣어 띄어보내고, 강을 표류하고 바다에 도착하는 이야기의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 행콕 아저씨는 티티카카에 있는 수리키 섬으로 가서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배, 토토라라고 부르는 배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것은 이집트의 파피루스 배와 엄청나게 닮아있었던 것이다. 만드는 방법과 만든 모습이 똑같은 이 배를 보며 이집트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10. 태양의 문이 있는 도시
스페인 정복 직후 볼리비아의 티아우아나코 유적을 찾아온 초기 스페인 여행자들은 건축물의 크기와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감명을 받았다. 원주민들은 이것들이 잉카시대보다 훨씬 전에 지은 것이라고 했다. 전승에 따르면 하루 아침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트럼펫 소리와 함게 큰 돌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는 전설을 그들은 전한다. 모든 것이 너무나 큰, 16세기 스페인 사람이 보기에는 경이로운 건축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20세기에도 그 건축물들이 주는 당혹감은 변하지 않는다.
붉은 바위기둥에 조각되어 있는 비라코차는 평화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이마는 높고 크며 눈은 둥글다. 코는 곧바르고 콧마루는 콧구멍 쪽으로 가면서 넓어진다. 입술은 두텁다. 그러나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은 위엄을 느끼게 하는 턱수염이다. 턱수염 때문에 이마보다 턱이 넓어보인다. 귀의 위아래 그리고 머리 옆에는 동물의 묘한 그림을 조각해놓았다. 거대하고 꼴이 흉한 태고의 포유동물인 듯한 그 동물은 굵은 꼬리와 곤봉처럼 생긴 다리를 갖고 있다.
비라코차 석상의 양쪽 팔은 길게 흘러내리는 긴 옷을, 한 쪽은 위로 다른 한쪽은 아래로 감고있다. 이 긴 옷의 양쪽에 새긴, 몸을 비비꼬는 뱀은 바닥 근처에서 어깨까지 나선을 그리며 기어오르고 있다. 2미터 높이의 이 석상은 티티카카 호수를 등지고 남쪽을 향해있다. 중앙에 있는 석상 뒤편으로 두개의 작은 석상이 서있는데 아마도 비라코차의 제자일 것이다.
남쪽에 있는 인공언덕은 높이가 15미터이고 사원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눈 앞에 솟아있다. 이 언덕은 아카파나 피라미드로 알려져있고 동서남북의 방위를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와는 달리 토대가 불규칙적이지만 대건축물이다. 그 위의 언덕은 원래 안산암 블록으로 뒤덮힌 계단식 피라미드였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은 이곳을 채석장으로 만들었다. 무언가 역할을 하는 기계일지도 몰랐을 피라미드의 이름 아카파나는 사람들과 멸망을 뜻하는 말이다. 아카파나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곳이다.
피라미드 서쪽 벽에서 남서쪽 끝에 있는 칼라사사야 광장으로 가면 두꺼운 사다리꼴 블럭으로 만든 벽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거대한 단검처럼 생긴 바위가 줄지어 서 있다. 여기는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 등의 다채로운 계절변화를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산출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지의 서북쪽에 있는 유명한 ‘태양의 문’에는 정밀하고 정확한 달력이 조각된 예술품이다.
11. 태고의 암시
아르투르 포스난스키라는 교수는 「티아우아나코 : 아메리카 사람들의 요람」이라는 책에서 칼라사사야를 건설한 때와 현재의 황도경사 차이를 이용해 티아우아나코의 기원에 대한 정설을 뒤엎었다. 황도경사란 무엇인가? 지구의 자전축은 태양의 주위를 궤도와 수직이 아니라 약간 경사져있다. 따라서 지구의 적도와 천구의 적도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궤도 사이에 약간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 각도의 오차가 황도경사다.
지구라는 배는 항해중이라 약간씩 흔들린다. 그래서 경사각은 주기적으로 바뀐다. 22도 1분에서 24도 5분 을 왔다갔다 하는데 그 주기가 4만 1천년이다. 포스난스키는 태양의 표준방위각과 차이가 나는 몇 개의 건축물을 조사해서 칼라사사야가 건축된 때의 황도경사가 23도8분48초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 각도를 이용하면 건설시기는 기원전 1만 5천년이다.
칼라사사야 내부에는 두 개의 커다란 석상이 있다. 그중 하나는 엘 프라일레(수도사)라는 별명이 붙어있고, 하나는 동쪽 끝 중앙에 있는 거인인데 지하신전에서 본 석상이다. 엘 프라일레는 엄숙한 큰 눈과 입을 가진 2미터 높이의 석상인데 오른 손에는 칼과 같은 것을 잡고있다. 왼손에는 양장본 책과 같은 것을 들고있다. 허리 아래로 물고기 비늘이 덮힌 올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늘 하나하나는 고도로 양식화한 물고기 머리 형태를 묘사하고 있다. 인어일까? 갑각류 모습이 조각된 허리띠는 이런 추정이 옳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물고기 꼬리를 가진 출루아와 우만투아라는 호수의 신이다.
수륙양생하면서 문명을 전파했다는 수메르의 오안네스와 흡사하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부조를 보면 오안네스는 물고기 복장을 한 인간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상도 양손에 기묘한 것을 들고 있다.
칼라사사야 서북쪽에 있는 태양의 문은 회색이 섞인 녹색 안산암 덩어리로 폭이 3.8미터 높이 3미터 두께 45센티미터에 무게는 10톤정도로 파리의 개선문보다 조금 작다. 아메리카 고고학의 불가사의인 이 문의 동쪽 정면에는 달력이 조각해놓았다.
중앙상부의 높은 곳에는 비라코차가 틀림없는 상이 작은 벽을 압도하고 있다. 이상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는 무서운 면을 표현하고 있지만 뺨에는 동정의 눈물이 흐르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표정이다. 세개의 단에 여덟개씩 모두 스물네개의 인물상을 그려놓았는데 마치 만화와 같은 독특한 표정이다. 모든 인물상들은 높은 자리에 있는 신이 가지고있는 것과 같은 도구를 들고있다.
아래쪽은 기하학적인 계단모양의 피라미드가 연속적으로 새겨져있다. 오른쪽에서 세번째 피라미드에는 코끼리의 머리와 귀, 상아, 코가 분명하다. 그런데, 아메리카 대륙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는다. 아메리카 대륙에 코끼리가 존재한 것은 기원전 1만년전이다. 이미 멸종한 동물상을 여기에 조각했는데, 발가락이 세 개인 하마와 비슷한 톡소돈도 그중 하나다. 이 동물은 홍적세에 멸종했다. 1만2천년 전의 일이다. 티아우아나코가 그 시기에 건설한 것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12. 비라코차의 최후
티아우아나코는 티티카카 호수의 항구도시였고 현재보다 호수면이 더 높았을 때 건설한 것이다. 부두와 항만을 산 위에 지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 규모는 수백척의 배가 무거운 화물을 동시에 내릴 수 있는 정도였다. 제방을 만든데 사용한 블록 하나의 무게가 440톤이고 100톤이 넘는 돌들이 굴러다닌다. 많은 바위들은 연결용 금속으로 고정했던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고 십자모양도 새겨져있는데 보수적인 사학자들도 1500년이 넘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1500년전에 여기에는 예수교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공허만이 남았을까? 포스난스키 교수는 기원전 1만1천년에서 1만년 사이에 있었던 자연의 대재해 흔적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블록의 잔해나 출토된 화석유적을 살펴보면 이 대재해는 홍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홍수를 일으킨 것은 지진이나 화산분출일 수도 있다. 이 부근을 2미터만 파면 다양한 동물과 사람의 뼈와 도기, 보석, 도구, 농기구가 뒤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충적토와 티티카카 호수의 조개가 섞인 해저의 모래와 파괴된 큰 돌과 화산재를 볼 수 있다.
호수의 물이 줄어들면서 이 항구도시와 멀어지고 주변의 기온이 내리면서 농작물을 재배하기 힘들어졌다. 비라코차 사람들이라고 전해지는 티아우아나코 거주민들은 악전고투를 거듭하다가 여기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고지대에서 성장하는 식물과 감자같은 농작물이 지닌 독의 특성을 분석하여 해독기술을 개발하고 이 식물들을 무해하게 먹을 수 있도록 했다는 발견이 있으면서, 누군가 물이 빠진 호수바닥에 대단한 공을 들여 근대농업보다 기술이 앞선 복잡한 농업관개로를 일군 흔적을 발견하면서 그들의 이런 노력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들은 물 위를 걸어 기적처럼 사라졌다. 어디로 간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된, 컴퓨터에나 적합한 구문을 가진 인공언어의 흔적을 이 지역 인디오들에게 남겨놓고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깃털달린 뱀
13. 인류 생존을 위한 피와 인류 종말의 날
저자는 멕시코의 유카탄에 있는 치첸 이트사에서 쿠쿨칸의 신전을 찾는다. 30미터 높이의 이 지구라트는 전체계단 수가 365칸이다. 춘분과 추분에 시계처럼 정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삼각형의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서 북쪽 계단에서 거대한 뱀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이 보이게 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스페인이 정복하기 전에 이 지방 일대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희생자를 돌 위에 눕히고 네 명이 팔과 다리를 벌리게 하고 위에서 누르면 손에 칼을 든 집행자가 나타나 뛰어난 기술로 젖꼭지 아래 늑골 사이로 칼을 집어넣는다. 그 자리에 손을 넣어 심장을 움켜쥐고 접시 위에 얹었다. 멕시코에서 번성한 위대한 토착문명 모두가 인간학살의 의식에 열렬했다.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올멕문명이 이미 정착시킨 이 학살극은 스페인 점령 당시의 아즈텍인들이 이어받아 광적으로 거행했다. 8대황제 아위소틀은 우이칠로포크틀리 신전을 세울 때 8만명의 죄수들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 아즈텍인들은 죽인 제물의 가죽을 벗겨 몸에 걸치기를 좋아했다. 피와 기름을 흘리면서 도시를 뛰어다니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신전에는 피가 흘러넘치고 계단아래까지 흘려내려 얼어붙었고 공포에 떨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16세기 초반에는 매년 25만명을 죽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랬을까? 그들은 제물을 바쳐 세계의 종말이 오는 것을 늦추려고 했다. 우주의 대 주기가 흘러 스페인 점령시에는 제 5태양의 시기였다고 한다. 4008년동안 계속된 제1태양시기에는 거인이 살았는데 물로 멸망당했다.
제2태양시기는 4010년 동안이었으며 바람의 뱀 때문에 멸망당했다. 제3태양은 4081년 동안이었는데 불로 멸망했다. 제4태양은 5026년동안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피와 불의 홍수 속에서 기아로 죽어갔다.
여섯번째 황제 악사야카틀이 만든 태양의 돌은 무게가 24.5톤으로 동심원 모양을 연속적으로 조각했는데 네 개의 태양이 끝났음을 적어놓았다. 제5태양신의 혀는 입밖으로 나와있고 얼굴에는 주름이 많다. 혀를 내밀어 인간의 심장과 피에 굶주린 얼굴을 하고 있다. 제5태양은 운동의 태양이며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그들은 제5태양이 마지막에 와있다고 믿었다. 종말의 시기를 계산하는 방법은 아즈텍시기에 잊혀졌고 이 필수적인 정보가 사라지고 나자 빈번하게 제물을 바쳐서 불가피한 파국을 늦추려고 했다. 신들이 선택한 아즈텍인들은 성스러운 사명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포로의 피를 토나티우 태양신에게 바쳐 종말을 연장해온 것이다. 올멕이나 아즈텍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위대한 문명인 마야문명이 남긴비문을 현재의 양력에 대입하면, 제5태양이 끝나는 날은 2012년 12월23일이다.
14. 뱀의 사람들
저자는 안데스의 비라코차와 고대 멕시코의 주신 케찰코아틀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케찰코아틀은 피부가 희고 붉은 색이 감도는 얼굴이며 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전한다. 백인이고 키가 크며 긴 속눈썹, 큰 눈, 긴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턱수염이라는 기록도 있다.
과일과 꽃 이외의 제물을 비난했던 평화의 신이라는 전승도 있고, 노를 젓지 않아도 달리는 배를 타고 왔으며 사람들에게 불과 요리, 집과 일부일처제와 평화를 가르쳤다는 전승도 있다. 비라코차가 많은 이름으로 불리우듯 케찰코아틀도마찬가지였다. 구쿠마츠, 쿠쿨칸 등의 이름은 모두 깃털(날개)달린 뱀이라는 뜻이다. 이름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 마야의 신 보탄이나 이참나의 상징도 뱀이며 하얀피부와 턱수염과 긴 겉옷이 그 특징이다.
모든 전설은 이 신인이 먼 동쪽바다에서 왔고 사람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왔던 방향으로 다시 배를 타고 오겠다면서 떠났다. 멕시코에서는 바다 위를 걸어서가 아니라 뱀의 뗏목을 타고서다. 이 외국인들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었던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많은 전승 속에서 조수를 거느리고 있다. 이 뱀의 사람들의 손에 닿기만해도 병이 나았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었다고 전한다.
문자를 전하고 역법을 개발하며 건축의 비술을 가르치고 지구를 계측하며 옥수수를 보급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예술을 향유한 이 케찰코아틀의 시대를 제물에 미쳤던 아즈텍인들조차 흠모했다고 한다. 케찰코아틀은 살아있는 것을 다치게 해서는 안되며, 정 하려거든 새나 나비를 쓰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무엇이 잘못되어 여기를 떠났을까?
멕시코의 전설이다. 깃털 달린 뱀의 지배는 암흑의 신 테스카틸포, 즉 연기를 내뿜는 거울이 득세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 싸움의 무대는 툴라라는 곳으로 천년역사보다 더 오래된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현재 발굴중인 툴라의 피라미드 오른쪽에 있는 긴 운동장에서는 고무공을 갖고 빼앗는 경기를 하다가 지면 목이 잘리는 공이었다. 뒤로 서있는 우상은 무언가 들고있는데 자세히 보면서 상상해보면 어떤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암흑과 탐욕과 사악을 대표하는 테스카틸포카는 케찰코아틀과 매우 오랜동안 전쟁을 계혹했다고 전설은 말한다. 때로는 이쪽이 때로는 저쪽이 우세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악이 선을 이겨 케찰코아틀은 도망한다. 꽃을 제물로 받는 시대의 막을 열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15. 멕시코의 바벨탑
저자는 인공산인 틀라치우알테페틀로 향한다. 케찰코아틀을 숭배하는 종파의 성지였던 여기에는 현재 카톨릭교회를 세워놓았다. 토대의 크기는 45헥타르며 높이는 64미터이다. 이집트 대 피라미드의 세 배나 되는 크기이며 토대의 한 변은 500미터고 허물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퇴보하고 있던 원주민을 확실히 정복하기 위해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 인공산 위에 있던 신전을 깨부수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턱수염을 기르고 하얀 피부를 빛내는 이 사람들을, 원주민들은 상냥하게 신전으로 안내한다. 숭배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호화로운 음식을 내오고 춤과 노래로 그들을 대접하던 원주민들에게 스페인 사람들이 선사한 것은 다름아닌 ‘학살’이었다. 문을 잠그고 보초를 세운 다음 죽인 원주민의 수는 6000명으로 아즈텍의 학살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페루와 멕시코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이 지니고 있던 전설 덕분에 칙사대접을 받으면서 마음대로 난장판을 만들 수 있었다.
비라코차나 케찰코아틀과는 달리 안데스의 피사로와 중미의 코르테스는 이리처럼 날뛰며 땅과 사람과 문화를 먹어치웠고 대부분을 파괴했다. 그들은 무지와 편견과 탐욕으로 가득찬 더러운 손을 흔들어대며 인류의 귀중한 유산을 싹쓸이했다. 칼을 든 군인과 성경을 든 신부들은 상징을 파괴하고 보석을 갈아버리고 세공품을 녹여버리고 그림과 글자가 들어있는 수만점의 사본과 사슴가죽을 태워버렸다. (이 시점에서 초고대방 사람들은 잠시 눈물을 머금어야 마땅하다) 거대한 불기둥을 이루며 이 대륙의 역사기록이 연기로 날아갔다. 남은 것은 “스페인사람들 덕분에” 아직까지 전해지는 20여개의 사본과 두루마리다.
몇 명의 우리 초고방사람 같은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하고 수집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받아적고 유적을 조사해 기록했다. 그 중 하나가 바벨탑의 전설을 전한다. 디에고 데 두란이라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는 1585년 촐롤라에서 100살이 넘은 노인에게 “암흑 가운데서 태양이 떠올라 햇살을 비추자 거인들이 나타나 땅을 지배했으며 이들은 태양의 빛과 아름다움에 빠져 하늘까지 이르는 높은 탑을 지어올렸는데, 천국의 신이 분노하여 하늘의 주민들을 내려보내 탑을 파괴하고 건축가들을 지구 구석구석으로 내쫓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출롤라의 피라미드는 많은 서로 다른 문화가 다른 시대에 공동의 노력을 들여 짓고 고치고 한 것이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피라미드 위에 피라미드를 얹고 다시 올리고 한 식이다. 크기로만 본다면 지구 최대의 건축물이다. 누구를 위해 이 거대한 신전을 지었는지, 스페인 야만인들 덕분에 거의 알 수 없지만, 태초에 나타난 거대한 남자들이라는 희미한 흔적은 남아있다.
16. 뱀의 성지
저자는 올멕문명의 중심지인 베라크루스로 향한다. 기원전 2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올멕문화는 아즈텍보다 1500년 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고무산지에 살았던 이 사람들의 이름은 올멕의 말뜻대로 ‘고무사람들’이다. 아즈텍인들은 올멕인이 만든 도구를 신성하게 여겨 신전에 보물로 두었다. 코아트사코알코스라는 지역에서는 현재 석유가 쏟아져나오는 바람에 고고학상으로 중요한 유적이 많이 파괴되고 있다. 코아트사코알코스라는 말의 뜻은 ‘뱀의 성지’다. 케찰코아틀이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라고 전해온다.
역시 올멕문화 지역인 산티아고 툭스툴라에는 3미터가 넘는 조각상이 있는데, 헬멧을 쓴 아프리카인이다. 확실히 흑인의 풍모이며 빙하시대 후반인 기원전 1만5천년 경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사람들 중에 흑인들도 있다는 증거다.
사포테스라는 곳에서는 스털링이라는 사람이 역법비석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자세하게 조사해보자 마야보다 더 빨랐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야에서 발견한 가장 오래된 연대가 228년이었는데 여기서 발견한 비석에는 같은 마야와 같은 표기법으로 기원전 32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히려 올멕이 마야의 어머니문명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서도 흑인이 헬멧을 꽉 끼게 쓴 높이 2미터, 둘게 6미터, 무게 10톤의 조각을 발견했다. 거대한 현무암 덩어리는 세밀하고 명확했으며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하나의 충격적인 발견은 작은 바퀴가 달린 장난감이었다. 스페인이 들어올 때까지 바퀴를 몰랐다는 아메리카 문명에서 바퀴달린 장난감을 출토한 것이다. 바퀴를 장난감에만 쓰지는 않았겠지...
17. 올멕의 수수께끼
산 로렌소는 올멕의 땅인 동시에 케찰코아틀의 전설에 나오는 뱀의 성지이기도 하다. 고고학자들은 올멕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올멕은 중요한 문명을 건설하고 거창한 공사를 시행했으며 거대한 바위를 조각해서 운반했다. 그런데 산 로렌소에서 올멕문화가 발전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산 로렌소만이 아니라 신대륙 어디에서도 올멕의 문화가 발전하는 단계를 보여주는 유품은 찾을 수 없었다. 흑인의 머리를 조각한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를 전혀 알수 없다.
여기에는 스무개가 넘는 저수지가 있고 이것들을 현무암으로 만든 수로로 연결해 놓았다. 이 정교한 수문과 수로망의 목적을 고고학자들은 모르겠다고 말한다. 특수하게 배치한 무덤에서는 60개 이상의 귀중한 조각상과 공예품을 발견했는데 비취로 만든 악기와 자은 조각상도 있다. 조각상이 묻혀있는 상황도 수수께끼고 조각상의 연대를 추정하는 것도 곤란하다. 최소한 기원전 1200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이 작품들은 신비한 힘은 느끼게 한다.
산 로렌소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타바스코 주의 비야에르모사로 가는 길에는 트레스 사포테스가 있는데 올멕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100년 사이에 이곳에 정착해서 기원전 400년까지 산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400년경에 갑자기 도시건설을 중단하고 건축물은 파괴되며 머리 조각상이 특이한 무덤에 매장당한다. 라벤타의 무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엄밀하게 만든 것으로 어떤 장소에서는 약 5000세제곱미터의 흙을 파네고 구덩이를 만들었다. 바닥에는 뱀 무늬의 블록을 깔고 다시 흙을 덮기도 했다.
라벤타의 중요한 유적인 피라미드는 남쪽 끝에 있는데 하늘에서 보면 원형이지만 실제로는 원추형이고 벽 면에 10개의 수직고랑이 있다. 높이는 30미터이고 지름은 60미터 정도로 체적은 거의 9만 세제곱 미터다. 나머지 유적은 북쪽에서 서쪽으로 8도 만큼 기울어진 방향의 직선상에 위치하고 있고 이 축을 중심으로 몇 개의 작은 피라미드, 광장, 대지, 언덕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전체 넓이는 4.8미터이다.
사회조직, 의식, 신앙, 인종 등 그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은 올멕족은 멕시코 연안의 습도가 높아 뼈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다. 머리 조각상은 올멕의 것이겠지만 이 건축물들은 올멕이 아니라 그 전에 만든 것을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다. 일종의 문화로 전승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올멕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석유채굴시 발굴한 부조는 ‘뱀속의 남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머리에 장식을 하고 향낭을 손에 들고 깃털 달린 뱀에 둘러싸인 올멕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남자는 오른 손에 작은 양동이 모양의 물건을 들고있고 왼손은 레버를 당기는 듯하다. 머리 장식은 기묘한데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머리 장식 위에는 조작판과 같은것에 두개의 X형 십자가를 새겨놓았다. 깃털달린 뱀은 케찰코아틀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굉장히 개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경직되고 구조적이어서 기계의 일부로 보일 정도다.
어떤 조각상은 넓은 코와 두꺼운 입술을 가지고 있고 입술은 약간 열려있어서 마치 이집트 스핑크스를 연상하게 한다. 여러 인종의 다른 특징을 종합해서 창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런 조각상은 한 인물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올멕의 조각상은 흑인계에 속하는 인종을 묘사한 것이다.
이 아프리카인든 3000년전에 중앙아메리카에 있었을 것이다. 기계속에 있는 인간, 흑인머리 조각상...
18. 눈길을 끄는 이방인
라 벤타에서 발견한 또다른 비석에는 키가 큰 두 사람이 대면하는 장면을 조각했는데 한 사람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한 사람의 얼굴은 온전하다. 분명히 백인 남자이며 높은 코에 길고 풍부한 수염을 가지고 있다. 올멕인이 중요시 했던 이 두사람의 만남은 무엇일까? 이 비석을 넣기 위해 만든 엄청나게 큰 방호 울타리기둥을 보면 보통 일은 아니다. 고고학자들의 말대로 이 백인은 페니키아인들이고 흑인조각상은 그들이 서아프리카에서 붙잡은 노예였을까? 그러나 세계 곳곳에 수공작품이라는 독특한 족적을 남긴 페니키아인이 올멕 유적에는 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올멕에는 뿌리가 없다.
제 3자 가설이 맞는 것일까? 보통 인류사회는 무슨 일이든 시간에 따라 진보해가는데 고대 이집트 문명이나 올멕 문명은 갑자기 모든 사회형태를 지니고 출현했다. 원시에서 고도로 발전한 사회로의 이행기간이 너무 짧아서 역사라고 볼수가 없다. 수백 수천년이 걸려야할 기술적 진화가 거의 하룻밤만에 일어나고 그 사이의 과정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이들은 문명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신석기에서 갑자기 조직화된 왕조시대로 돌입하고, 문자가 등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서고 예술과 공예가 믿기 힘든 수준에 다다르는, 이 사건의 배경은 없다. 발전의 토대가 없는 것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가 같은 신을 섬기는 것을 보면 일리가 있다. 그들에게 문명을 전해준 사람들이 아메리카에는 오지 않았을까? 이집트와 수메르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들이 멕시코나 페루에서는 심각한 좌절을 맞아 급격하게 몰락한 것은 아닐까? 이 조각상들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전의 것들이 아닐까?
신들의 도시
19. 저승으로의 모험, 별로의 여행
제3자 가설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문명이 태고에 살았던 선조들로부터 동일한 두 문명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가정한다. 두 문명이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차이가 나는 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이 이론은 도대체 태고의 문명이 어디에 있었고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멕시코의 문명도 이 태고문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멕시코도 이집트나 슈메르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집트와 슈메르는 역사적으로 계속 교류가 있었으므로 단절된 멕시코는 좀더 고립성향이 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것이 나타난다면?
이집트인들은 이상하게도 난쟁이를 특별히 좋아하고 숭배했다. 이것은 올멕도 마찬가지다. 이집트인과 올멕인들은 난쟁이가 신들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집트 초기왕조의 헬리오폴리스에서는 전지전능한 아홉 신이 숭배를 받았다. 아즈텍과 마야인들은 전능한 아홉 명의 신을 믿고 있었다. 별로 환생하는 케찰코아틀의 신앙은 죽은 왕이 별로 다시 태어난다는 이집트의 종교관과 비슷하다. ‘사자의 서’는 어떤가? 중앙 아메리카인들은 저승이 9층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죽은 사람은 4년동안 저승의 9층을 여행하면서 곤란과 위험을 극복한다고 믿었다. 야수가 심장을 먹어버리는 저승의 7층과 이집트인들이 믿었던, 심장과 깃털을 저울에 올려놓고 균형이 깨지면 그 심장을 야수가 먹어버리는 심판의 장소는 다른 것일까?
이집트의 파라오는 저승세계를 거치지 않고 막바로 별로 태어날 수 있는 의식을 거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 “입을 연다”는 의식이다. 고대 중미의 “제물”이라는 말은 “입을 연다”는 의미다. 슈메르에 오안네스가 있다면 마야에는 우아나라는 “물 속에 집을 가진 자”가 등장한다. 창조신과 거대한 괴물의 대결, 탐욕스러운 여신, 이 비슷한 전승과 폭력의 형태는 과연 우연일까?
몬테알반의 유적에는 수십 개에 달하는 비속에 백인과 흑인의 모습을 함께 조각했다. 다른 조각과 비석에 보았던 강렬한 자부심과는 달리, 여기서 그들은 모두 벌거벗고 웅크리며, 거세당하고, 손발을 뻗고 누워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된 죄수들의 시체? 전쟁의 희생자에 인디오는 하나도 없고 백인과 흑인만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상형문자를 가졌던 몬테알반 사람들은 트레스 사포테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과 점으로 계산하는 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경이로운 역법도 사용했는데 이것을 올멕이 도입하고 마야가 계승했다. 이 역법이 나타내는 세계 종말일은 2012년 12월 23일이다.
20. 최초의 인간들의 아이들
치아파스 주의 팔렝케에서 행콕 아저씨는 마야의 비명이 있는 신전 북동쪽 아래에 앉아 정글이 암흑 속으로 잠겨들고 있는 북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전은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있고 높이 30미터의 9단 건축물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위에 서있다. 오른 쪽으로는 궁전이 보이는데 피라미드 형식의 넓은 직사각형 토대가 있고 주위에 4층 탑이 서있다.
신전 중앙에 있는 방에는 괴물과 인간의 얼굴, 그림문자들을 조각해놓았는데 그림문자와 음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혼합적으로 구성된 비명은 아직 완전하게 해독하지 못했다. 가파른 내부 계단을 내려가면 둥근 천장의 좁은 방이 있다. 벽에는 저승세계 아홉 지배자들의 모습을 부조해놓았고 석관 안에는 20개의 비취로 만들어진 가면이 두개골 전면에 덮여 있었다. 발판이 넓은 이 석관은 이집트의 것과 닮았는데, 이집트의 것이 나무로 만들어 세워두는 것이었다면, 세울 수도 없는 이석관의 발쪽을 이렇게 넓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석관의 뚜껑에는 지금껏 단정히 깎은 머리에 꽉끼는 커프스를 손발목에 달고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레버와 조종장치를 조작하고 있는 남자가 나타난다. 의자옆의 판자에 대갈 못과 튜브, 기계부품처럼 보이는 것이 있어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석관 속에서 발견한 작은 비취 조각상은 긴 외투를 걸치고 턱수염을 기른 늙은 백인상이다.
팔렝케에서 북쪽으로 700킬로미터 떨어진 욱스말의 피라미드는 옛부터 마술사의 피라미드나 난장이의 피라미드라고 불러왔다. 난쟁이들이 하룻만에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마야의 전설에 따른 것이다. 피리만 불면 돌이 움직였다는 이 전승은 안데스의 “트럼펫과 허공으로 날아다니는 돌” 전승과 거의 같다. 돌을 공중으로 띄워 옮기는 전승은 이집트에도 있다. 여기에 새겨지 모자이크 모양에는 십자가 모양이 자주 나타난다. 십자군 병사들이 즐겨 사용한 끝이 넓은 십자가와 성 안드레이 십자가 형태도 있다. 라벤타의 올멕조각 ‘뱀속의 남자’에도 두 개의 안드레 십자가가 있었다. 턱수염을 기른 남자, 뱀, 십자가...
21. 세계의 종말을 계산하는 컴퓨터
마야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었다. 케찰코아틀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천리안을 가지고 축지법을 쓰며 하늘의 천장 네 모서리와 지구의 둥근 표면도 조사했다는 이 ‘재규어’들이다. 이 종족을 질투한 다른 힘 센 신은 “우리의 창조물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좋지 않다. 다 알고 다 본다면 그들도 신이 되지 않겠는가?” 며 그들이 지구의 일부분만 보도록, 눈에 안개를 불어넣어 시야를 가렸다. 최초의 인간들은 지혜와 지식을 빼앗겼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와 흡사한 이 이야기는 물론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간직해온 전승이다. 지구를 조사하고 하늘을 조사했다는 최초의 인간들과 아담은 다른 존재일까? 치밀하고 창의적이며 세련되고 정확한 역법을 바탕으로 고도의 수학적 계산을 이용한 마야의 위대한 천체관측도 그냥 우연일까?
우스운 것은 이런 천체도를 그릴 능력이 있었던 마야인들이 바퀴하나 발명하지 못했을까, 영원한 세월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려는 업적을 남기면서 물려쌓는 천장대신 아치형 천장의 원리는 발견하지 못했을까, 백만단위는 헤아리면서 옥수수 한자루 계량하는 방법은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이 모순은 뛰어난 문명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들은 올멕에게서 역법체계를 가져왔다. 그러나 올멕은 누구로부터?
마야력에 따르면 1태양년은 365.2420일로 0.0002일의 오차만 난다. 달의 공전주기도 29.528395일로 29.530588로 계산한 최신과학에 뒤지지 않는다. 월식과 일식을 계산하는 표, 0의 개념, 자릿수를 이용한 수의 표현방식 등 근대 수학의 발견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처럼 마야인도 금성이 새벽별이자 저녁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이 같은 장소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584일을 근사치로 계산하고 있었다. 이 샛별의 회합주기를 성년(촐킨)이라고 불렀는데, 오차수정방법까지 있었으며 6000년 동안 단 하루가 차이나는 역법이었다. 왜 이런 정밀도가 필요했을까?
그들은 긴 기간을 계산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고 대주기에 따라 세상이 파멸과 재창조를 거듭한다는 믿음을 표현했다. 그들에 따르면 현재의 대우주는 기원전 3114년 8월 13일에 해당하는 4아하우 8쿰쿠의 암흑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대주기는 2012년 12월 23일인 4아하우 3칸킨에서 끝난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그들은, 시간은 사람들의 생명과 문명에 관계없이 주기와 함께 영속한다고 믿었다.
서구인들의 대부분이 세계가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다는 어셔 대주교의 견해를 파기한 것이 200년전의 일이다. 마야는 몇 백만년이라는 숫자를 가볍게 다르면서 벌써 오래전에 이런 믿음을 숫자로 나타내고 있었다. 도대체 실용적이지 않은 이 숫자는 무엇에 필요했던 것일까?
22. 신들의 도시
중앙 아메리카 대부분의 전설은 세계의 제 4시대가 겪은 비참한 최후를 전한다. 대홍수가 일어난 후에 하늘에서는 태양이 사라지고 불길한 암흑이 뒤덮혔다. 누군가가 성스러운 불꽃 속으로 몸을 던져야 태양이 생길 것이라고 신들이 외치자 두 명의 신이 뛰어들었다. 한 명은 불꽃의 중앙에 타올랐고 다른 신은 불꽃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타올랐다. 그러자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이 케찰코아틀, 비라코차와 쌍둥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턱수염을 기른 백인형상이다. 안데스에서 비라코차의 도시가 티아우아나코였다면 중앙 아메리카에서 케찰코아틀의 도시는 제 5의 태양이 생긴 신들의 도시 테오티우아칸이었다.
중앙 아메리카 대부분의 전설은 세계의 제 4시대가 겪은 비참한 최후를 전한다. 대홍수가 일어난 후에 하늘에서는 태양이 사라지고 불길한 암흑이 뒤덮혔다. 누군가가 성스러운 불꽃 속으로 몸을 던져야 태양이 생길 것이라고 신들이 외치자 두 명의 신이 뛰어들었다. 한 명은 불꽃의 중앙에 타올랐고 다른 신은 불꽃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타올랐다. 그러자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이 케찰코아틀, 비라코차와 쌍둥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턱수염을 기른 백인형상이다. 안데스에서 비라코차의 도시가 티아우아나코였다면 중앙 아메리카에서 케찰코아틀의 도시는 제 5의 태양이 생긴 신들의 도시 테오티우아칸이었다.
케찰코아틀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가 죽은 자의 길을 따라 나란히 서있다. 이 길은 동북쪽으로 기울져 15도 30분 정도로 향하고 있는데, 천문학자들 중에는 이 각도가 이 길을 건설할 당시의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방향을 맞춘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이 길이 은하수라는 주장도 있다.
발굴당시 태고의 신전을 파고 들어가자 6단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피라미드가 나왔는데 높이 22미터, 토대는 2만5천 제곱미터였다. 거대한 뱀의 머리 조각이 케찰코아틀을 상징한다. 죽은 자의 길 주위에 서있는 주요 건축물 사이에는 복잡한 연관이 있다고 판단된다. 마치 태양계를 정확히 축소한 듯하다. 케찰코아틀 신전을 태양으로 치면 죽은 자의 길을 따라 서 있는 건축물들은 정확히 생성과 소행성의 궤도를 반영하고 있다. 과연 우연일까?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가 오리온자리를 그려놓았다는 주장과 비교해보면 여기의 천체도도 마찬가지로 불가사의다. 왕이 죽어 신이 된다는 이 신전은 기자 피라미드의 종교적 역할과 거의 비슷하다. 기자와 마찬가지로 세 개의 피라미드가 서 있고 길을 따라 배치했다. 세번째 피라미드는 의식적으로 어긋나게 배치한 것도 기자와 같다.
아즈텍인들이 지은 이름인 ‘죽은 자의 길’은 지진 전문학자가 이 길이 걷는 길이 아니라 물 웅덩이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면서 잘못지은 이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높은 벽이 가로막은 이 길에 물이 찼다면 타지마할보다 더 장대했을 것이다. 운하와 수로시스템이 현재는 16킬로 떨어졌지만 고대에는 가까웠을 텍스코 호수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을 위해 만든 것일까? 지진학자들 말대로 지진을 예측하기 위한거라면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은 틀림없다.
23. 태양과 달과 죽은 자의 길
1906년 태양의 피라미드를 조사했을 때 피라미드 상부에서 운모로 이루어진 두꺼운 층을 발견했다. 운모는 시장가치가 있어서 발견되자마자 매각한 것이다. 최근에 테오티우아칸의 다른 장소에서도 운모를 발견했는데 이 운모의 신전은 태양의 피라미드 서면에서 남쪽으로 3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는 파티오 건축물 중의 하나다. 27제곱미터의 넓이에 2층으로 이루어져 바싹 붙은 운모층의 성분은 브라질에서만 생산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바닥재로 쓰지 않는 운모를 바닥 아래 숨긴 것도 괴이하다. 현대과학에서 운모는 축전기나 전기의 절연체, 내화물로 쓴다. 고속 중성자에 대해 부전도성이 있어서 핵반응을 감속시키는 감속재로 사용한다.
춘분과 추분에 태양광선이 피라미드 북쪽에서 내리쬐면 한낮에 완벽한 직선 그림자가 서면 아랫단에 생긴다. 완벽한 그림자가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66.6초다. 이 피라미드를 만든 이후로, 그리고 앞으로도 무너질 때까지 피라미드는 정확한 시계기능을 계속할 것이다. 부패한 독재자와 그 하수인이 피라미드의 겉을 파괴하고 조각상을 파괴했다. 엄청난 훼손에도 불구하고 건설자들이 계획했던 기능은 아직 그대로인 셈이다.
피라미드의 중요한 기하학적 요소는 지상에서 정상까지의 높이와 밑면 둘레다. 기자와 태양의 피라미드 모두가 파이값을 적용해 설계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수학적으로 정밀한 이 값을 우연히 사용했을 리는 없다. 고도의 수학지식을 사용했을 뿐만아니라 이집트와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같은 목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3차원의 피라미드를 이용해 구체라는 개념을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태양의 피라미드에서는 훼손되지 않은 지하도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배수로였다. 복잡한 배수시스템으로 보아 물이 매우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데스의 아카파나 피라미드 역시 물에 둘러싸여 있다. 테오티우아칸을 건설한 문명은 의식적으로 복잡한 정보를 부호화해서 내구성이 강한 유적에 수학적 언어로 남겨두었다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수학적 언어라...
신화의 불가사의
24. 꿈의 메아리
태고로부터 전승되어온 몇 개의 위대한 신화는 인류가 세계적인 대변동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서로 관계가 없을 듯한 문명들의 신화가 이렇게 비슷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메르의 길가메시는 거대하고 끔찍한 대홍수로 사라진 시대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그는 대홍수때 살아남아 인류를 존속시킨 대가로 불사의 몸을 얻은 우투나피시팀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신들도 땅에 살았단다, 공기의 신 아누, 하늘의 주신 엔릴, 전쟁과 사랑의 신 이슈타르, 인류의 친구이며 보호자인 에아...
신들은 엄청나게 늘어난 사람들과 그들의 싸움질을 보기 싫어 인류를 멸망시키려한다. 에아는 우투나피시팀을 가엽게 여겨 배를 만들고 살아있는 종자를 배에 실으라고 한다. 홍수가 일어났다. 바람과 물과 어두움, 신들조차 무서워했다. 그 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거의 같다. 중요한 것은 마치 본 듯이 생생히 이 파멸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이야기를 멕시코에서도 볼 수 있다. 4태양의 종말이 바로 그것이다. 아즈텍인들은 두 사람만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거대한 배를 만들어 산꼭대기에 도착한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많은 아이들을 낳았는데, 아이들은 비둘기가 나무 위에 앉아서 말을 알려줄 때까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은 각각 달라서 아이들은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중앙 아메리카의 메초아카네섹스 족의 전승은 창세기와 메소포타미아의 그것과 너무나 같다. 테스카틸포카라는 신은 테스피의 가족을 큰 배에 태워 살려주며 동물과 종자를 배에 실었고 배는 산의 정상에 도달한다. 테스피는 상륙해도 좋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콘도르를 날려보낸다. 콘도르는 돌아오지 않고 다른 새를 날려보냈는데 오직 벌새만 잎 달린 가지를 물고 돌아왔다. 다시 인구가 번성하고 땅위에 넘쳤다.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의 마야족도 위대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남아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그 형태가 비슷하다. 북 아메리카도 마찬가지다. 신화 속에 남아있는 인류의 대홍수 기억은 어디까지 퍼져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500편 이상의 홍수전설이 있고 86편을 조사한 리처드 안드레 박사는 62편이 메소포타미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한다. 중국과 말레이, 라오스와 태국, 버마의 카렌족, 베트남, 오세아니아에도 홍수의 전설은 있다.
그리스 신화는 시대별로 종족을 설명한다. 황금종족은 신처럼 살았다, 잠을 너무 많이 잤기 때문에 죽었고 제우스의 명령으로 지구바닥에 가라앉았다. 은의 종족과 동의 종족, 영웅의 종족에 이어 철의 종족이 나타나는데 바로 현생인류다. 흥미있는 것은 동의 종족인데, 그들은 거인의 힘과 강한 다리에 강한 손을 가졌고 프로메테우스라는 거인족이 인간에게 불을 주는 잘못을 저질러 제우스가 사멸시켰다. 신들이 지상을 단 한 번에 휩쓸어버린 방법은 홍수였다.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인 데우칼리온은 피라를 아내로 맞이했고 피라는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딸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데우칼리온에게 나무 상자를 만들어 그 속에 필요한 것을 모두 넣고 피신하라고 이른다. 홍수가 끝나고 이들이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자 제우스는 돌을 던지라고 한다. 데우칼리온이 던진 돌은 남자가 피라가 던진 돌은 여자가 된다.
인도에도 비슈누신이 마누에게 비슷한 일을 한다.
이집트에서는 세티 1세의 묘에서 사나운 홍수로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멸망시킨 달의 신 토트의 이야기가 나온다.
호피족의 신화는 매우 명쾌하다.
“최초의 세계는 인류의 잘못으로 하늘과 지하에서 나온 불이 모든 것을 태워서 파괴되었다. 두번째 세계는 지구의 축이 뒤집혀서 모두가 얼음으로 뒤덮였다. 세번째는 세계적인 홍수로 끝났다. 현재는 네번째 세계다. 이 시대의 운명은 사람들이 창조주의 계획대로 행동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된다”
25. 종말론의 다양한 가면
이슬람교에 귀의하기 전의 이란에 살았던 아베스타 계 아리안 인도 호피족과 비슷한 것을 믿고 있다. 최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순수하고 죄가 없었으며 키가 컸고 장수를 누렸다. 그 시대가 끝날 무렵 악마가 성스러운 신 아후라 마즈다에게 싸움을 걸어 재난이 잇따른다. 제 2시대는 악마가 실패한다. 제 3시대는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었다. 제 4시대, 현재는 악이 승리하기 시작했다.
흥미있는 것은, 제 1시대의 종말에 있었던 재난이 홍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악마인 안그라 마이뉴가 습격해오자 겨울이 열 달로 늘어나고 여름이 두 달로 줄었다. 모든 것이 얼음에 파묻혔다. 아후라마즈다는 이마라는 사람에게 지하저장소를 지어 짐승과 불꽃을 들고 들어가라고 한다. 물을 흐르게 하고 푸른풀을 자라게 하고 여기서 살아남으라고 한다. 하늘의 1/3이 악마의 지배에 들어가고 얼음이 지표를 뒤덮은 재해였다.
신의 경고와 함께 세상이 무너지고 소수의 사람이 구제되는 이야기는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혹독한 추위와 깊은 암흑, 인류를 줄이기 위한 방편, 배고픔과 고통, 식인, 죽음... 또는 홍수와 구름, 어둠과 함께 사라진 해와 달... 행성은 궤도를 바꾸고 태양과 달과 별은 움직임을 바꾼다. 땅은 갈라지고 풀은 마르며 나무는 연기를 내뿜고 바위는 가루로 변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다양한 형태의 설화와 전승과 상징적 이야기들로 전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며 남아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튜튼족은 다른 문화보다 태고의 기억이 신화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고대의 음유시인과 현인들의 노래들에 실린 이야기들은 학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있는 먼 삼림에서 나이를 먹은 거인이 어린 이리를 불러들였다. 이리들 중 한 마리가 태양을 쫓아가 손에 넣으려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매년 이리는 강해지고 마침내 태양에 도달했다. 태양은 줄어들어 피로 물든 것처럼 붉어졌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끔찍한 겨울이 닥쳤다.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은 이리처럼 변해 서로를 죽였다. 세계는 공허한 나락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던 중 신들이 묶어놓았던 큰 괴물이리가 쇠사슬을 끊고 도망쳤다. 이 괴물 펜리르가 몸부림을 치자 세계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산들은 무너져내리고 정상에서 기슭까지 갈라졌다.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은 땅 위에서 한꺼번에 사라졌다. 별은 하늘에서 표류하다가 땅 사이로 떨어졌다. 갈라진 틈에서 불이 나오고 증기로 가득찼다. 모든 생물과 생명이 사라졌다.
그 다음에는 모든 강과 바닷물이 넘쳐 홍수가 일어났다. 파도와 파도가 맞부딪치고 육지는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런 재해 속에서도 물푸레 나무 이그드라실 안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죽음을 면하고 다시 시작하는 시대의 시조가 되었다. 서서히 육지가 파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26. 지구의 긴 겨울에 태어난 인류
역사라는 것은 인류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대를 의미하며 그 기간동안 인류전체가 한꺼번에 파멸의 위기에 직면한 적은 없다. 그러나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그랬을까? 우리 선조들은 절멸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종말론적인 신화의 무대는 바로 그런 시대가 아닐까?
40만년 전에는 이야기를 만들거나 신화를 만들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확실히, 원시적인 종족은 40만년전에서 10만년 전 사이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인류와 유인원이 구분되는 시기다. 우리와 똑같은 인류는 11만 5천년이거나 5만년 전에 출현했을 것이다. 대재해를 인류가 경험했다면 지각 대변동은 적어도 11만 5천년 전에, 더 가능성이 높게는 5만년 전에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지질학과 인류학이 부합된다.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된 시기와 진전된 시기가 문명화된 인류가 발생하고 급격하게 증가한 시기와 중첩되기 때문이다. 서로를 잘 모르는 이 두 학문이 그 사실을 미리 짰을리도 없다. 마지막 빙하기가 11만 5천년 전에 나타나고 그 이후로 만년설은 확대와 축소를 되풀이 했다. 만년설이 가장 빠르게 퍼진 것은 6만년 전에서 1만 7천년 사이다. 빙하의 전성기가 1만 5천년경이며 1만 3천년부터는 불투명한 이유로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기원전 8천년경에 위스콘신 빙하기는 완전히 끝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대두한 것은 지질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길고 거친 시기였다. 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앞서서, 우리는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우리와 완전히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들은 거칠고 황량한 시대에 몇 번이나 절멸의 위기에 처했을까?
27. 지표는 암흑으로 뒤덮이고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빙하시대에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게 무서운 힘이 덮쳐왔다. 그 힘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당시의 다른 큰 동물들이 받은 피해의 증거로 알수 있다. 빙하시대에 아메리카에 살던 많은 포유동물들이 멸종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빙하시기의 마지막 7000년 기간인 기원전 1만5천년에서 기원전 8천년 사이에 멸종했다. 이유나 원인은 뒤로 하고 이 시기에 멸종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찰스 다윈은 이 혼란이 지구의 구조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대륙에서는 70여종의 대형 포유동물이 멸종했다. 코끼리, 맘모스도 여기에 속한다. 약 4000만마리 이상의 동물이 죽었다. 그런데 집중적으로 죽은 것은 기원전 1만 1천년에서 기원전 9천년 사이다. 이 전의 30만년동안 20여종만 멸종했다는 사실을 보면, 기원전 1만5천년에서 기원전 8천년 사이에 떼죽음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북방은 기원전 1만3천년부터 기원전 1만1천년 사이에 대혼란에 빠진 듯하다. 북극권의 가장자리는 대규모 천재지변의 흔적이 남아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물들의 유체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맘모스는 상아가 완벽하고 살이 붙어있어서, 지금도 개들의 먹이로 쓸 수 있다. 알래스카의 페어뱅크스의 레스토랑에서는 맘모스 스테이크를 메뉴로 내놓고 있다. 엄청난 힘이 이런 파국을 초래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동물이 알래스카에 살았을까? 송곳니가 발달한 호랑이, 낙타, 말, 코뿔소, 당나귀, 사슴, 사자, 족제비 등의 동물이 발견되었다. 이 정도면 동물의 왕국 수준이다. 아마 지금과는 완전히 환경이 달랐을 것이다.
다양한 층에서 당시의 상태로 얼어있는 석기가 나왔다. 동물상도 있었다. 인류는 알래스카에 살고 있었다. 몇 톤씩이나 되는 동물들은 누가 그런 흔적도 없는데, 찢어지고 끊어진 채 한 곳으로 날려와 뒤엉켜 여기에 쌓였고 검은 진흙이 덮이고 얼어붙었다. 시베리아도 마찬가지다.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10년마다 4만개의 상아를 파냈다. 코뿔소와 영양, 말, 들소, 호랑이 등이 발견되는데 온난한 기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동물의 유체가 더 증가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동물들의 뱃 속에서 발견된 식물들, 풀, 초롱꽃, 미나리아재비, 사초, 야생콩은 이 추운지방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이 원래 얼음이 뒤덮힌 땅에 살았던 것이 아니고 죽었을 때 얼음으로 뒤덮였다는 설명이 유일하게 논리적이다. 그런데 세계의 다른 지역이 마지막 빙하시기를 끝내려고 했던 시기에 왜 낙원이었던 죽음의 겨울을 맞이한 것일까?
끔찍한 규모의 화산폭발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거의 모든 진흙 속에 화산재가 퇴적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스콘신 빙하기가 쇠퇴하는 중에 화산분화가 다발한 증거로,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 오리건, 콜로라도, 더 나아가서는 중앙 아메리카, 남 아메리카, 북대서양, 아시아, 일본에서도 있었다.
1883년의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화산은 3만6천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4827킬로미터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진원지에서는 해일이 발생해 파도가 30미터를 넘었고 증기선은 수 킬로 내륙으로 파도를 타고 날아갔다. 18세제곱 킬로미터의 바위와 재, 먼지가 날려 지구의 하늘은 2년동안 눈에 보일 정도로 어두웠으며 석양은 매우 붉었다. 지구의 평균기온은 크게 떨어졌다. 연속된 폭발이었다면 신화에 나온대로 하늘이 검어지고 태양과 달이 사라질만 한 것이다.
대격변이 있고난 세계 각 지역은 빙하에서 벗어났지만, 그 전까지 전혀 얼음이 없던 알래스카, 시베리아는 지금과 같은 기후로 변했다. 당시의 해면은 지금보다 121미터 정도 낮았다. 그런데 엄청난 분량의 만년설이 갑자기 녹기 시작했다. 해면은 상승하고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던 섬들이 사라졌다. 산꼭대기와 동굴로 도망가던 동물과 사람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이 대홍수는 세계 전역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몇 백년 후에 완전히 물이 빠졌다. 이 세계적인 사건들은 곳곳에 신화와 전승으로 남아 지질학적 발견을 증언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상상력이 기발한 생각을 만들어낸 것일까?
출처 - 신의 지문 - 그레이엄 핸콕 지음, 이경덕 옮김, 출판사 까치 200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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