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간 우당 이회영 집안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일가 역시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특히 독립운동을 논하는 데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이다.
이회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삼한갑족(신라, 고려, 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인 경주 이씨 백사공파 집안 출신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11세손이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이항복 이래 8대에 걸쳐서 연이어 10명의 재상(4명의 증영의정(贈領議政)을 포함, 9명의 영의증과 1명의 좌의정)을 배출한 조선조 최고의 명문이다.
해방 후에는 이회영의 동생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초대 부통령을 역임해 집안의 명성을 이었다. 이회영의 아버지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다. 이회영은 1901년 근대적 신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포(蔘圃)를 경영하다가 일본인들의 약탈로 실패한 뒤 1908년 장훈학교(長薰學校)를 설립하고 안창호, 이동녕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행동강령으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만주에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고 전 재산을 처분한 뒤 1910년 12월 추운 겨울에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게 된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인 이회영이었다. 그때 처분한 재산이 사료에 따라 조금씩 추정치가 다르나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때 만주로 간 우당 6형제는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 ~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 1875~1933) 등이다.
이때 만주로 가던 이회영이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배로 건너면서 뱃사공에게 원래 뱃삯의 두 배를 지불하며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정착하여 인근의 땅을 매입하고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경학사는 계몽운동의 이념이었던 식산흥업·교육구국론에 입각하여 생산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경학사 설립과 동시에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도 설치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1912~1913년에 걸친 흉작으로 곧바로 운영난에 부딪힌 데다 중국 관헌들의 탄압까지 겹쳐 1914년 해산되고 만다. 경학사는 3년 정도밖에 운영되지 못했으나, 그 조직경험은 그 후 중국 동북지역을 주 무대로 활동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신흥강습소도 후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로 개편돼 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학교의 교주(校主)는 둘째인 이석영이 맡았고, 교장에는 석주 이상룡(李相龍), 교관으로는 이동녕, 윤기섭, 이관직, 여준 등이 있었다. 학비와 숙식에 드는 비용은 모두 무료였다. 그 비용을 우당 집안이 망명하면서 가지고 온 재산으로 충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제1회 졸업생은 변영태, 김훈, 김도태, 이범석, 오광선 등이었으며, 우당의 아들인 이규학(李圭鶴, 1896~1973)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학교가 1930년 폐교될 때까지 배출한 수 천 명의 독립군들이 후일 청산리와 봉오동전투의 감격적인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자금이 바닥나자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기고 국내로 다시 잠입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한다. 그러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고종의 망명 계획 실패 이후, 이회영 일가는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게 된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기가 일쑤였으며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옷까지 팔아 겨우 연명할 정도였기 때문에 가족들 중 누구 하나 바깥으로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우당은 생활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1921년에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이며 분열된 임시정부의 단합을 위해 조정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후 1925년에는 비밀결사조직 '다물단'의 배후 역할을, 1931년에는 한중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또 '흑색공포단'이라는 행동대를 조직하여 활동해 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1932년 11월 지린성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 공작망조직과 만주 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던 도중 끝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이역 땅에서 옥사하게 된다. 우당의 나이 이미 환갑이 훨씬 지난 65세였다. 우당의 6형제 중 5명이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타국 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이다. 또한 5형제를 포함한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그리고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섯째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만이 유일하게 해방 이후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성재는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1951년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불의를 보면 좌시하지 못하는 가문의 전통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계속된 셈이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의 형제는 물론 그 자제들도 대부분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그들 또한 이국땅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고 상당수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전 국정원장 이종찬(李鍾贊)과 국회의원 이종걸(李鍾杰)이 우당의 직계손자들이다. 명문가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온 가족이 고난의 길을 자청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일화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다.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 왕산 허위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이 나라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그는 한일합방(1910)이 되기도 전인 1908년에 의병투쟁으로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할 정도로 일찌감치 항일전선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민비시해 이후 의병활동과 관직을 넘나들며 맹렬한 애국운동을 펼쳤고, 그의 형제와 후손들까지도 항일 무장투쟁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희생했다. 그러나 그 결과 그의 후손들은 불행하게도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해방된 조국의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허위의 장손녀인 허로자 할머니께서 80세의 고령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그동안 정부의 부실한 업무처리로 인해 그 알량한 독립유공보상금조차 지급받지 못했다고 하니 그의 집안에 큰 빚을 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지금부터라도 조국을 위해 온 몸을 던져 싸운 선조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 후손들을 배려하는 풍조가 생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허위는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던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세 분의 형님이 있었으니, 맏형 훈(薰, 호는 방산(舫山))을 비롯하여 둘째형 신(藎, 호는 로주(露州)), 셋째형 겸(蒹, 호는 성산(性山))이 그들이다. 요절한 둘째형을 제외하고 맏형 허훈은 한말의 거유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였으며, 셋째형 허겸도 만주·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는 이기찬(李起燦), 이은찬(李殷贊), 조동호(趙東鎬)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협공하는 관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자 그는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자진 해산했다.
그 후 허위는 대신 신기선이 고종황제에게 천거하여 벼슬길로 나가게 된다. 성균관박사, 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등을 거쳐 1904년에는 오늘날의 대법원장 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어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송사를 처리하여 큰 칭송을 얻었다.
1904년에 접어들자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하게 하는 등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이상천(李相天), 박규병(朴圭秉) 등과 함께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그 격문에는 전 국민이 의병으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만행에 대해 정부 관료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 상황에서 왕산이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규탄에 나섰던 것이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어 8월에는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국권은 사실상 일제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때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우리 군인들이 항전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의병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왕산은 1907년 9월 강원도와 경기도의 접경지인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킨 뒤 적성(積城), 철원, 파주, 안협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는 한편,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매국노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던 중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일본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48개 부대의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조직되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왕산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이 되었다.
이때 서울 진공작전의 선공을 맡았던 왕산은 300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군하였다. 그러나 왕산의 선발대는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화력과 병력 등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자 왕산이 대리총대장 겸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서울진공 작전은 좌절되었다.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왕산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전을 재개하였다. 그는 조인환(趙仁煥), 권준(權俊) 등의 쟁쟁한 의병장들과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왕산은 군율을 엄하게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비조달 시에는 군표(軍票)를 발행해, 뒷날 보상해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 결과 주민들은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항일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왕산의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경남관찰사 자리를 제시하며 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내부대신으로 임명하겠다고 유혹했으나 왕산이 크게 꾸짖어 쫓아버렸다고 한다. 또한 과거 고종에게 자신을 천거했던 신기선이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왕산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최후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다.
1908년 4월 이강년(李康秊), 유인석, 박정빈(朴正彬) 등과 함께 거국적인 의병항전을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했으며, 이어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 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 외교권의 회복, 통감부 철거 등 30개 조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왕산은 이와 같은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1908년 6월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경기도 양평에서 체포되고 만다. 서울로 압송된 왕산은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일제의 한국침략을 당당히 성토함으로써 의병장으로서 절의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아카시는 비록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심문을 하면 할수록 왕산의 인품과 애국심에 감복하여 그를 국사(國士)로 대우했다고 전해진다.
이 해 10월 21일 오전 10시, 왕산은 서대문 감옥 교수대에 섰다. 서대문 감옥이 지어진 이래 최초의 사형 집행이었다. 왕산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왕산의 봉기는 대지주이자 유학자 가문이었던 허씨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었다. 허위의 맏형이자 종손인 허훈은 3000마지기 땅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놨고, 셋째형 허겸은 허위와 함께 1895년 의병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허위의 사촌인 허혁도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 습격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경력이 있다. 왕산이 희생당한 뒤 그의 집안은 의병장 집안으로 낙인 찍혀 헌병과 밀정의 극심한 감시에 시달렸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한 왕산의 셋째형 허겸은 1912년 대대로 살아오던 경북 선산을 뒤로 하고 왕산의 네 아들과 두 딸까지 동반하여 서간도로 망명길에 오른다. 왕산의 사촌형제인 허필과 허혁도 몇 년 지나 그 뒤를 따른다.
그 뒤 허씨 집안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남만주에서 부민단을 이끌며 교민들의 단합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허위 세대가 의병을 일으켜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면, 다음 세대는 독립군 활동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희생했다.
왕산의 조카인 허형식(許亨植)은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에 북만주에서 활동한 뛰어난 항일 무장투쟁 지도자이다. 본명이 허극(許克)인 그는 만주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이 되었으며 1942년 8월 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허형식은 빛나는 무장독립투쟁을 했으나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보상은 고사하고 그 찬란한 업적을 조명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허위의 아들이자 허형식의 육촌형인 허학은 의병활동을 한 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허형식의 사촌형인 허발과 허규, 육촌인 허국도 항일투쟁 혐의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에 올랐다. 또 허형식의 사촌 누이인 허길의 아들은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육사 이원록이다.
허위의 가문은 의병과 독립군 활동에 온 집안이 나서 희생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불행하게도 이국땅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도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조국이 허위에게 보답한 것이라고는 해방 뒤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을 왕산로로 명명하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호를 추서한 것이 전부다.
직계 3대가 항일투쟁에 헌신한 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집안은 직계 삼대 외에도 아우와 조카까지 합쳐 아홉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평생을 항일운동에 몸 바친 그의 일생에서 두드러진 족적은 군웅이 할거하던 독립운동계에서 항상 양보와 화합으로 항일조직의 결집과 내부역량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석주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李承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을 공표하자 이에 항거하여 외숙인 권세연(權世淵)과 함께 구국 의병활동에 나선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자금을 마련해 가야산으로 들어가 의병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구식 무기로는 일제의 신식 무기를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 신돌석, 김상태 등 의병장이 일본군에 참패하자 이상룡은 무기와 근대적 군사훈련이 부족한 의병의 한계를 자각하게 된다.
그 후 석주는 일제의 근대식 군사력에 대항하는 승산 없는 의병항쟁 대신 새로운 방향의 구국운동을 모색한다. 이때부터 그는 새로운 문물에 눈뜨기 위해 동서양의 새로 나온 서적을 백방으로 구하여 열심히 읽었다. 신학문으로 서양의 민주제도에 눈을 뜬 후, 먼저 집안의 노비 문서부터 불살라 버리고 종들도 모두 해방시켰다. 또한 그는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유인식(柳寅植), 김동삼(金東三) 등과 더불어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전개하고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나선다.
1909년 6월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 회장에 선출되었고 여기에서 매월 2회씩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족 자강운동에 앞장서나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협회도 해산되고 만다. 한편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서는 조국의 위기를 맞아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해 해외에 독립군 기지개척을 추진하고 있었다. 주진수(朱鎭洙)와 황만영(黃萬英)을 통해 이 계획을 전해들은 석주는 1911년 1월 양기탁(梁起鐸)과 협의 후 뜻을 굳히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여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의 망명길에는 그의 뜻에 동조하는 친척과 동지 50여 가구가 동행하였다. 53세의 나이에 항일투쟁을 위해 자신의 고향땅을 떠나 이역만리로 간다는 것은 예사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아니었다. 이상룡이 낯선 간도 땅에 도착하여 처음 정착한 곳은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였다. 그는 먼저 도착한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시작했다.
이상룡은 우선 동지들과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고 한인의 경제적 안정과 법적지위 보장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그때까지 국경을 넘어온 동포들이 대부분 값싼 황무지를 빌어 화전 농사로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을 본 그는, 삼원포 일대의 넓고 기름진 땅을 빌어 억새풀을 베어내고 벼농사를 짓게 하여 비로소 동포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다. 간도에서의 벼농사는 이때 한인(韓人)들이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상룡이 경학사 창설 이래 가장 심혈을 이룬 사업은 남만주 일대에 소학교를 세워 동포의 자질 향상을 꾀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무력 독립운동을 통해 조국광복에 이바지할 인재 양성을 위해, 동지들과 합의 하에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문무를 겸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신흥학교는 그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후일 항일 전선에 앞장서게 된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민단(扶民團, 1912)과 한족회(韓族會, 1919)로 개편 발전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에 기여했다.
1919년 4월, 만주의 한인 대표들이 모여 군정부를 조직하자 이상룡은 총재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같은 무렵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 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남북 만주의 비무력(非武力) 독립운동 단체 및 무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의 활동이 돋보이는 것은 끊임없이 독립운동단체들의 단결을 추진한 그의 노력 때문이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지도체제를 대통령 중심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었으며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에 선출했다. 이에 그는 임시정부의 내분을 막고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9월 24일에 국무령 취임식을 거행하고 개혁에 착수했다. 석주는 우선 일본군과의 접전 속에서 항일운동의 전위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 동삼성 지역의 김동삼(金東三), 오동진(吳東振), 김좌진(金佐鎭)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여 임정이 다시금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기를 바랐으나, 그들 대부분이 사양하여 그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상해와 간도는 각기 처한 독립운동의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의 대립으로 인한 임시정부의 내분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크게 낙담한 이상룡은 임정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서간도로 돌아왔다. 서간도로 돌아온 그는 1928년 5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만이라도 통합을 이루기 위해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정의부(正義府)와 참의부(參議府) 및 신민부(新民府)의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 지역을 장악한 일제가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수립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는 그해 5월에 길림성 서란 소성자에서 병을 얻어 그렇게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상룡의 행적을 언급하며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처가에 관한 것이다. 석주의 처남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1845~ 1914)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이들 중 맏이는 석주 이상룡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기암 이중업에게 출가하여 한일합방 때 단식으로 자결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분이 바로 3.1운동 때 예안시위에 참가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두 눈을 잃은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金洛) 여사다.
김대락은 이미 6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빼앗긴 경술년 엄동설한에 석주와 함께 만삭의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백하의 집안도 석주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온 문중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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