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문화재 -
평양성(平壤城) - 고구려 동천왕 21년(247) 봄 2월에 환도성이 난리를 겪게 되어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고, 고국원왕 12년(342)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으며, 가을 8월에 환도성으로 옮겼다. 그 후 장수왕(長壽王)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양원왕(陽原王) 8년(552) 장안성(長安城)을 쌓았으며, 평원왕(平原王) 28년(586)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정릉사(定陵寺) - 고구려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동명왕릉을 함께 옮기고,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절로, 동명왕릉 앞에 자리잡고 있다. 오래 전에 폐사되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고구려', '정릉', '능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릇조각들이 발견되어, 이 절이 고구려의 동명왕릉을 위한 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고구려 고분벽화(高句麗古墳壁畵) -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90여 개에 이른다. 평양과 대동강 근처에 60여 개, 압록강 근처에 20여 개가 있다. 벽화가 있는 고구려의 무덤은 주로 돌을 쌓아 시체를 보관할 묘실(널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드는 돌방흙무덤인데, 벽화는 주로 무덤 내부에 그려져 있다.
보현사(普賢寺)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절. 1042년에 창건한 후 1765년까지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절에는 주불전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만세루, 관음전, 해장원, 영산전, 명부전, 응향각 등 여러 건물들과 4각9층탑과 8각13층탑 그리고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등 여러 건축물들이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에 지세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왕건왕릉(王建王陵) -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옛 무덤. 943년에 축조되었다. 태조현릉(太祖顯陵) 또는 현릉(顯陵)이라고도 불렸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시신이 안치된 왕릉이다. 이 왕릉에 그의 아내 신혜왕후도 합장되었다고 전한다. 고분 둘레에는 12각으로 병풍석을 돌렸으며 그 밖으로는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왕릉구역은 외적의 파괴와 도굴로 인하여 원상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현재 무덤 앞에는 망주석 한 쌍, 상돌 한 개, 문인상 한 쌍, 돌짐승 두 쌍, 석등 한 개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민왕릉(恭愍王陵) -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옛 무덤. 고려 31대 공민왕의 왕릉으로 1365~1374년에 축조되었다. 쌍릉형식으로 병립되어 있는데 서쪽에는 공민왕의 현릉이고, 동쪽에는 노국공주(왕비)의 정릉이다. 고분구역은 3개의 단과 맨 아래의 경사단으로 이루어졌다. 맨 윗단의 크기는 동서 약 40m, 남북 약 24m인데 그 중심에 2기의 무덤을 남향으로 나란히 안치했다. 무덤은 석조흙무덤이다.
고려 성균관(高麗成均館) -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다. 992년(고려 성종 11)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건물은 1602~161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원래는 고려의 별궁(別宮)인 대명궁이 있던 곳이었는데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전(崇文殿)으로도 사용되었다가, 1089년에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선죽교(善竹橋) - 원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석봉(韓石峯) 글씨의 비(碑)가 있다. 돌기둥과 노면(路面)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돌을 철도의 침목처럼 올렸으며, 이 돌은 좌우로 거의 튀어나오지 않았다.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기다란 난간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板石)으로 깔았다. 선죽교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 4, 5인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 한다.
표훈사(表訓寺) - 금강산 1만 2천 봉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살들의 우두머리 법기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사찰로,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신라의 승려 능인·신림·표훈이 처음 세우고 신림사라 하였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쳤다. 내금강 만폭동, 내금강 어귀에서 골짜기를 따라 약 4km 거리에 있으며, 금강산 4대 사찰(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불에 타버리거나 쇠락한 것을 1682년(숙종 8)과 1778년(정조 2)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하였다. 원래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 경내에는 반야보전(般若寶殿),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御室閣), 칠성각, 능파루(凌波樓) 등의 전각과 7층석탑이 남아 있다.
함흥본궁(咸興本宮) -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된 뒤 자기 조상들이 살던 집터에 새로 집을 짓고, 거기에 4대조상들의 신주를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게 하던 곳이다. 그리고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이 건물을 본궁이라 부르며 여기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함흥본궁과 관련하여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있는데, 1398년(태조 7) 권좌를 둘째 아들[定宗]에게 물려주고 함흥본궁에 내려와 살던 이성계가 형과 동생들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방원[太宗]에 대한 분풀이로 그가 보낸 사신을 모조리 죽여 버린 데서 ‘심부름을 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아무 소식이 없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정북사(靖北祠) - 동북 국방을 강화하는 데 공을 세운 고려시대의 윤관(尹瓘)과 조선시대의 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한 4명의 장군들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1437년(세종 19)에 처음으로 세워 노당(盧堂)으로 불렀으나, 1845년(헌종 11)에 건물을 고쳐 세워 정북사라고 불렀으며, 1904년에 다시 세웠다. 총 9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에 정북루(靖北樓)의 2층 다락채가 있고, 그 안쪽에 양현당(養賢堂)을 중심으로 그뒤에는 정묘(正廟), 그 앞에는 동무(東廡)·서무(西廡) 등이 있다.
양화사(陽和寺) - 양화사는 발해 때인 872년에 처음 세워졌고, 992년(고려 성종 11)과 1461년(조선 세조 6)에 고쳐 지었다. 이때 원래 주불전이었던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양화사는 서북지방에서는 묘향산의 보현사 다음 가는 큰 가람이었으며 보국사라고도 불렸다. 조선 중기와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성불사(成佛寺) -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였고, 1327년(충숙왕 14)에 응진전을 지었으며, 1374년(공민왕 23)에 나옹(懶翁)이 중창하였다. 나옹은 건물의 중창뿐 아니라 다수의 석물을 새로 조성하였는데, 성불사를 비롯한 산내암자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대규모의 중창 기록은 없으며, 1569년(선조 2) 설숭(雪崇)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진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방산에 성을 쌓은 이후부터 이 절은 해서지방의 종찰이 되었다.
관음사(觀音寺) - 황해북도 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 박연폭포 부근에 있는 절. 970년에 지은 관음사는 1393년에는 크게 확장 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64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원래 다섯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관음사에는 지금 대웅전과 승방, 7층탑과 관음굴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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