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진공 작전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는 급히 지청천과 의논하여 국내에 광복군 선발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국내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고 발 빠르게 들어가서 선점하는 쪽이 앞으로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임무는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던 제2 지대 대원들이 맡았다. 이들은 광복군 정진대(挺進隊)로 편성되었고 미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임정(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준말)의 국내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지 3일 뒤인 1945년 8월 18일 새벽 4시 30분. 제2 지대장인 이범석과 김준엽, 장준하, 노태서 등 4명의 광복군은 18명의 OSS(미국 첩보 기관 중 하나) 대원들과 함께 C-47 수송기에 올랐다. 그리고 시안을 출발하여 낮 12시에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들은 점령군으로서 완전 무장한 상태로 수송기에서 내렸으나 막상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떼의 일본군 병사들이었다. 일본군은 "아직 항복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으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면서 무력시위와 함께 광복군 대원들에게 즉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결국 한동안 대치 끝에 다음날 빈손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 해제를 광복군의 손으로 받아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물거품이 되었다.
게다가 미국은 임정의 존재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임정과 광복군의 귀환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김구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1945년 8월 28일 제5차 임시 정당 대표 대회에서 광복군 확군 계획을 결의했다. 항복한 일본군에서 조선인 병사를 분류하여 광복군에 편입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전선에서 항복한 일본군은 만주를 제외하고도 약 128만 명에 달했다. 그중에서 조선인 출신 병사가 정확하게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3만 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학력과 건장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가장 우수한 장정들이었다. 만약 이들 모두를 광복군에 편입할 수 있다면 그 세력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관할권은 장제스에게 있었으므로 김구는 장제스에게 조선인 병사들의 광복군 편입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인받았다.
또한 제3 지대장인 김학규는 OSS 중국 지부 비밀 첩보 과장인 헐리웰 중령에게 광복군의 귀국과 자금, 수송 수단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헐리웰 중령더러 소련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남한에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어야 하며 그 정부를 지킬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광복군이라고 호소했다. 따라서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는 곧 미국을 위하는 길이라면서 설득했다. 그러나 헐리웰 중령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며 맥아더의 태평양 전구에서 결정할 일이라면서 거절했다. 물론 극동의 사정에 정통한 OSS 중국 지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태평양 전구를 설득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의 방침이 여전히 불분명하여 OSS로서는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처지였다.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 주둔 지나 파견군의 상황은 혼란의 극치였다. 지휘 계통이 붕괴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병사들이 탈영하여 각자의 살길을 찾아 나서는 판이었다. 그중에는 자신의 힘으로 송환에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지 공산주의 부대에 포섭되어 용병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식량 부족에 허덕이던 일본군 부대에서는 조선인 병사들을 쫓아내다시피 약간의 돈과 먹을 것을 주고 강제로 제대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별도로 관동군, 만주군에 있다가 화북으로 흘러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생계에 매우 곤란을 겪고 있었고, 자력으로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광복군으로서는 모병에 나서기에 그야말로 적합한 여건이었다. 임정은 베이핑(베이징)에 광복군 공작원들을 파견하고 광복군 국내 정진군 주 베이핑 판사처를 설치했다. 그리고 조선인들을 상대로 포섭에 나섰다. 베이핑에서 모집한 광복군 대원은 1,3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광복군 간부들끼리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면서 심지어 중국군을 동원하여 제3 지대 소속의 1개 중대를 무장 해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하이와 난징, 광저우, 우한 등 중국 내 주요 대도시에서도 광복군 지부가 설치되어 모병 작업에 나섰다. 1945년 10월까지 광복군에 편입된 숫자는 정확한 추계는 없지만 적어도 5천여 명 이상이었다.
중국 정부의 입장은 처음에는 매우 협조적이었으나 1945년 12월에 오면 비협조로 돌변했다. 1945년 12월 22일에는 <조선인 포로 처리관리판법'>을 제정했는데, 조선인 출신 병사들을 일본군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아니라 패전국의 전쟁 포로로 취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의 항복 이후 광복군에 편입된 조선인 병사들을 광복군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과 중국군에서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은 모두 한반도로 강제 송환의 대상이 되었다. 그동안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무색해졌고 광복군의 활동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임정으로서는 항의를 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오만한 태도'라는 것은 단순하고 일방적인 논리다. 상황은 훨씬 복잡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일본 점령 지구에서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의 차별 정책이 남긴 결과였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에게는 차별당하는 존재였지만 중국인보다는 우대를 받았고 중국인들로서는 일본인들에게 향하는 만큼이나 조선인들에 대해서도 깊은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억눌러져 있었던 중국인들의 분노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꺼번에 폭발했다. 특히 만주와 화북에서는 중국인들이 무정부의 혼란을 이용하여 조선인 마을을 공격하고 땅과 재산을 몰수하거나 심지어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장제스는 조선인을 보호하라고 지시했지만 현지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광복군의 활동을 보장하기란 어려웠다.
불상사의 원인에는 임정과 광복군도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임정과 광복군은 현지 조선인 사회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급급했을 뿐, 막상 양 민족의 갈등과 오해를 해소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해소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출신과 배경을 따지지 않고 마구잡이로 광복군의 숫자를 늘리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신분이 불분명한 무뢰배들도 대거 편입되었고 자신이 광복군이라는 것을 내세워 현지 조선인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이름만 광복군일 뿐, 아무런 이념도 애국심도 없었다. 중국 정부는 광복군의 활동이 오히려 현지의 반감으로 이어져서 중공에게 이용되는 것을 우려했다. 결국 해결 방안은 광복군을 포함한 조선인 병사들을 죄다 한반도로 송환하여 문젯거리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저 중국 탓만 할 수는 없었다. 불편한 얘기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피해자 프레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당시 임정은 중국 입장에서는 손님이었다. 하지만 주인더러 손님에 걸맞는 대우를 요구했을 뿐 막상 임정 스스로 손님으로서의 행동을 했는가도 한 번 돌아볼 일이다.
출처: 네이버 욱이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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