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부터 1936년까지 진행된 이른바 '민생단 사건'은 중공이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만주에서 철저하게 말살하려는 대규모 숙청 작업이었다. 1932년 8월 지린성 옌지현(延吉縣)에서 '송노인(宋老頭)'이라고 불린 한 조선 공산주의자가 일본 헌병에게 붙들렸다가 일주일 만에 석방된 일이 있었다. 송노인이 일본의 첩자라고 의심한 중공은 그를 잡아들여 혹독한 고문을 한 끝에 다수의 조선 공산주의자 간부들이 친일파 단체인 민생단원이라는 자백을 얻었다. 물론 고문에 의한 강제 자백 이외에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중공의 만주 지부인 만주성위는 동만주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이번 기회에 죄다 숙청할 요량으로 대대적인 마녀 사냥에 나섰다. 조사도, 증거도 필요없었다. 의심이 가면 무조건 잡아다가 고문한 후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인 간부들은 400여 명이 넘었다. 그중에는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독립 사단장으로 공산 계열 지도자 중에서는 항일 투쟁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주진(朱鎭)을 비롯하여 주요 유격대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인 사회를 통틀어 희생자 수는 수천여 명에 달했고 이는 3,700여 명이 학살된 일제의 '간도 대학살'에 비견될 정도였다.
민생단 사건으로 만주 내 조선인 사회를 이끌던 명망 있는 지도자들은 완전히 몰살당했다. 심지어 식사 중에 밥알을 흘렸다는 이유만으로 식량을 낭비했다면서 민생단으로 몰려 총살당한 사람도 있었다. 훗날 문화 대혁명으로 중국 대륙을 휩쓸게 되는 중공 특유의 광기 어린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서막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달아나서 일본에게 자수하는 등 만주에서 조선인 유격대는 사실상 괴멸 상태가 되었다. 또한 훈춘 유격대의 정치 위원이었던 박두남(朴斗南)은 달아난 뒤 정말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항일 유격대를 토벌하는 토벌대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동만주 특위의 선전 부장으로서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겨우 탈출한 이상묵(李相默)은 이렇게 한탄했다.
"우리들은 과거 혁명 전선에서 중공과 노동자, 농민을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는데, 중공은 우리에게 반동분자라는 명칭을 주었으며, 조선인들의 빛나는 투쟁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
조선 공산주의자들도 중공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대항하여 싸울 수도 있었겠지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택하거나 차라리 달아나는 쪽을 선택했다. 소련 코민테른이 인정한 중공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곧 코민테른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기 한 사람 때문에 혁명을 더럽힐 수 없다면서 제 발로 찾아가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다. 또한 일부 간부들은 동지들의 억울함을 감싸고 보호하기보다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겠답시고, 또는 이 기회에 정적들을 제거하겠다는 욕심으로 스스로 중공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가혹한 숙청 작업을 도맡아 수많은 동지들을 죽음에 내몰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중에는 토사구팽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다. 비록 아무리 당시의 열악한 여건 속에서 외세의 도움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독립 투쟁에 나선 사람들이 스스로 또 다른 외세에게 종속되는 길을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주객전도나 다름없었다. 과연 무엇을 위한 독립 투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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