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2. 역사적으로 영국과 스페인은 왜 사이가 안 좋았을까?
3. "감시기지 지브롤터로 떠납니다" 진짜 지브롤터는 어떤 곳일까?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인 17~18세기부터 서유럽은 타 문명권에 대해 상당한 우위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이 시기 서유럽은 군사력, 무역의 규모와 광범위함, 자본주의의 등장과 각종 금융 제도, 도시화율, 조세 규모와 1인당 국민 소득 등에서 타 문명권을 앞지르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학파 학자들은 1800년 이전까지는 아시아가 유럽을 앞지르고 있었으나, 식민지의 존재로 유럽이 아시아를 1800년 이후부터 앞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18세기 유럽은 매우 발달된 상업과 무역과 자본주의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 혁명을 일으키는 데 있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유럽, 그중에서도 왜 하필 영국에서 가장 먼저 산업 혁명이 일어났을까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은 네덜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나 스페인도 발달된 나라로서 산업 혁명을 일으키지 못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영국보다 인구가 3~4배는 많았고, 당연히 경제 규모도 더 컸습니다. 그런데, 왜 산업 혁명은 영국에서 먼저 일어났을까요?
먼저 영국의 산업 혁명에 대해 다루기 위해서는 산업 혁명이 무엇인지부터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산업 혁명은 다양한 기술 혁신과 기계화로 인해 생산력이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증대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발명된 증기 기관, 직물 기술, 제철 기술은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고, 특히 증기 기관은 19세기에 선박, 기차 등의 교통 수단에 활용되면서 교통의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증기 기관, 방직 기술, 제철 기술들이 18세기 영국에서 발명되고 널리 사용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산업 혁명 이전의 발전 상황
18세기 영국의 우위는 결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인 16세기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16~18세기 영국의 발전상은 상업, 농업, 사회 제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습니다. 먼저 농업을 살펴보자면, 17~18세기 영국은 소위 말하는 "농업 혁명"을 이루었습니다. 캘리포니아 학파류의 학자들은 서유럽이 식민지로부터 목재, 식량 등의 원료를 착취해 오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애초에 17~18세기 영국의 농업 생산량은 자급자족을 하고도 남아돌아 수출까지 할 정도로 높았습니다(1750년까지 영국은 농업 총생산량의 약 25%를 수출했습니다). 이는 16세기 이후로 진행된 인클로저 운동이 토지의 집약적이고 효율적인 이용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농업 기술 면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7~18세기 영국의 농업은 고도의 상업화를 달성한 상황이었습니다. 농민들은 생산물로 자급자족하기보다는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지역별로 목축, 낙농업, 채소, 과일 재배 등 특화된 농업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생산물들은 지방의 시장이나 런던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가령 이스트 앵글리아, 에식스, 켄트, 도싯 등 남부 지방에서는 주로 밀이 생산되었고, 케임브리지셔, 하트퍼드셔, 버크셔, 윌트셔 등에서는 보리가 주로 생산되었습니다. 미들랜드,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에는 스코틀랜드, 웨일스로부터 사들인 가축들을 방목하는 목장들이 있었고, 체셔와 윌트셔 지방에서는 낙농업이 이루어졌습니다. 18세기 영국의 농업 발전과 생산량 증대는 산업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영국이 산업 사회로 탈바꿈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음은 확실합니다.
이 시기 영국은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룩합니다. 17세기 시민 혁명의 영향으로 권력은 국왕이 아닌 의회에 넘어갔습니다. 국왕은 이전처럼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고, 개인에게는 인신의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보장되었습니다. 주로 상인, 중소 지주 등으로 구성된 영국 의회는 개인의 상업 활동에 대해 최소한의 규제만을 가했으며, 대신 외국으로부터 보호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상인과 자본가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가능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거대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영국의 신분제 역시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개방적인 편이었습니다. 근대 영국의 지배 계급은 젠트리로서, 전체 인구의 약 5%를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소수의 귀족과 지방 엘리트, 교구 젠트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대부분은 상인과 중소 지주였습니다. 대토지를 기반으로 한 귀족들이 사회 상층부를 대거 차지한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에서는 전체 상층부에서 대토지 귀족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는 전통적으로 장자에게만 모든 토지가 승계되었기 때문에 차남 이하의 자식들은 상업이나 군대에 종사해야 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연 수입 5,000파운드 이상의 대귀족 가문이 약 400개 정도였는데(이 시기 영국 가정의 절반 정도는 연 수입이 20~30파운드 정도에 불과), 이 극소수의 대토지 귀족들이 가장 핵심적인 귀족들이었던 셈입니다.
영국에서는 많은 귀족들이 토지를 보유하지 못한 채 상업 등에 종사했고, 이들은 비귀족 젠트리 계급과의 괴리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는 상인이 토지 귀족에 비해 천시된 대다수 유럽, 아시아 국가들과 크게 구별되는 점입니다. 당시 영국에서 비(非)젠트리가 젠트리로 올라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물론 올라가는 것이 쉬웠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를 축적한 상인이나 공업가라면 젠트리 계급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잘하면 귀족의 칭호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인들을 천시하지 않는 풍조와 비교적 개방된 신분 제도는 영국의 자본가, 사업가, 발명가들로 하여금 신기술을 개발, 상용화시킬 동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18~19세기 영국의 농업 생산량 증가. 1700년 4천만 파운드였던 영국의 농업 생산량은 1800년에는 그 2배로 증가합니다.)
직물 산업
직물 산업은 철강, 증기 기관과 더불어 초기 산업 혁명을 견인한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입니다. 전통적으로 영국의 주요 직물은 면직물이 아닌 모직물이었습니다. 영국의 모직물 산업은 중세 말부터 이어지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했고, 18세기 중반까지도 모직물 생산, 수출량이 면직물보다 많았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에서 면직물 제품들이 큰 인기를 끌었으나, 영국산 면직물 제품은 경쟁력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인건비가 저렴한 인도산 면직물에 비해 인건비가 높은 영국산 면직물들은 가격 경쟁력에서 열세였습니다. 때문에 영국의 면직물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위해 다양한 기계들을 개발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주요 직물 기계의 발명을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733년 플라잉 셔틀(존 케이)
1764년 제니 방적기(제임스 하그리브스)
1769년 수력 방적기(리처드 아크라이트)
1779년 뮬 방적기(새뮤얼 크럼프턴)
1791년 역직기(카트라이트)
1733년 존 케이에 의해 플라잉 셔틀(flying shuttle, 나는 북)이 발명되었는데, 이는 1명의 직공이 방적공 10명분의 실을 이용해 직물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방직기였습니다. 방직 기술이 발달하자, 실의 생산량이 관건이 되었고, 실을 뽑아 낼 수 있는 방적기들이 발명되었습니다. 먼저 1764년에 발명된 제니 방적기는 8개의 방추를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한 사람이 8명분의 실을 짜낼 수 있었습니다. 초기의 제니 방적기는 그리 비용이 크지 않은 소규모 기계였기 때문에 소규모 가내 수공업장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제니 방적기에 방추가 추가되고 대형화되면서 더 이상 가내 수공업에서 쓰기가 힘들어졌고, 이는 소공장 제조업으로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제니 방적기와 비슷한 시기인 1769년에는 아크라이트에 의해 수력 방적기가 발명되었습니다. 수력 방적기는 물레바퀴가 원통 모양의 롤러 네 쌍을 작동시키면 실이 방추에 감기는 원리로, 이름 그대로 수력을 이용했습니다. 1771년 아크라이트는 자신의 기술을 바탕으로 크롬포드에 최초의 수력 방적 공장을 세웠고, 이후 더비, 벨퍼, 맨체스터에도 공장들을 세웠습니다. 아크라이트는 수력 방적기의 발명 외에도 직물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던 소면기를 개량했고(소면은 방적 공정 이전에 원면을 다듬는 공정을 말함), 소면기를 공장제에 도입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아크라이트는 방적 공정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준비 공정까지 기계화 시스템에 편입시켰고, 효율성 증대에 기여했습니다. 제니 방적기와 달리, 수력 방적기는 설치 비용이 컸기 때문에 소규모 가내 수공업이나 소공장에서는 설치하기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수력 방적기의 발명은 진정한 의미의 공장을 탄생시켰습니다. 수력 방적기의 가장 큰 단점은 공장이 반드시 강과 하천 옆에 들어서야 한다는 점이었으나, 1790년대에 발명된 와트의 증기 기관이 방적기의 동력으로 이용되면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제니 방적기와 수력 방적기의 발명으로 영국은 캘리코 면직물(30~40번의 면사를 사용함) 부분에서 인도산 면직물을 추월하게 되었으나, 그보다 훨씬 가는 실을 요구하는 머슬린 부분에서는 여전히 뒤처졌습니다. 이는 1779년 크럼프턴에 의해 발명된 뮬 방적기에 의해 해결되었습니다. 뮬 방적기는 제니 방적기를 약간 개량하여 롤러 드래프팅으로 실을 끌어올리는 기술을 추가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초기의 뮬 방적기는 소규모였고, 주로 농촌 가내 수공업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1790년대에 뮬 방적기에 증기 기관을 이용하게 되면서 점차 대규모 공장에서 쓰이게 되었습니다. 뮬 방적기에 증기 기관을 달게 되면서 생산량이 급증했고, 1789년 5만 추에 불과했던 뮬 방적기는 1812년에는 420만 추로 급증했습니다. 뮬 방적기 덕에 19세기 초 영국산 면직물은 가격 경쟁력에서 인도산을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18세기 영국의 면직물 생산량이 급증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과학 기술의 발달이 아니었습니다. 동시기 프랑스도 이러한 방적기들을 개발시킬 기술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고(증기 기관을 빼면), 제니 방적기는 프랑스에도 전파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니 방적기 등의 방직 기계들이 18세기 영국에서는 광범위하게 이용된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령 1790년 영국에는 2만 대의 제니 방적기가 있었지만, 프랑스에는 고작 900대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영국의 비싼 노동자 임금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임금은 비교적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굳이 신기술을 도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제니 방적기 한 대의 가격은 280리브르였는데, 노동자의 일당은 3/4 리브르였습니다. 때문에 방적기 한 대의 가격이 노동자의 373일 치 임금과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영국에서 제니 방적기 한 대의 가격은 140실링, 노동자의 일당은 1실링이었습니다. 방적기 한 대의 가격이 노동자의 140일 치 임금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영국에서는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보다는 방직기를 사들이는 것이 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18세기 영국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적 기계들이 개발되었고, 이것들이 광범위하게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높은 영국의 노동자 임금이 방직 기술의 개발을 촉진시켰고, 다양한 기계들의 발명으로 인해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1764년에 발명된 제니 방적기)
(1779년에 발명된 뮬 방적기. 20세기 초반까지도 널리 쓰인 발명품입니다.)
(세계 각국 도시들의 실질 임금 지수. 17~18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노동자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임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방적기의 노동 생산성)
증기 기관과 석탄
영국에서 상업적인 증기 기관을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토머스 뉴커먼입니다(정확히는 기압 기관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증기 기관과 유사한 아이디어들은 뉴커먼 이전부터 꾸준히 있었습니다. AD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원시적인 증기 기관인 아이오리필레(Aeoliphile)를 발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이디어"에 그쳤을 뿐, 영국처럼 널리 이용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영국에서 증기 기관이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석탄 광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중부, 북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탄 매장지이며, 잉글랜드 북부에는 수많은 석탄 광산들이 있었습니다. 1700년 기준 영국은 유럽의 석탄 생산량 중 81%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7세기부터 영국에서 석탄은 값비싼 나무를 대신하여 매우 널리 쓰인 연료가 되었으며, 이미 산업 혁명 이전부터 석탄은 가정용 연료, 공업 연료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었습니다. 석탄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탄갱은 점점 깊어져 갔는데, 18세기 영국의 탄광들은 일반적으로 깊이가 지하 36m 이상이었고, 지하 100m 이상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갱도가 깊어지면서 통풍, 배수와 운반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18세기에 발명된 증기 기관 펌프는 이러한 석탄 광산들의 배수 작업에 요긴하게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영국에서는 증기 기관이 단순한 아이디어나 장난감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널리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증기 기관이 배수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가격 경쟁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전부터 이용되었던 풍력, 수력, 마력 펌프가 증기 기관 펌프보다 저렴했다면 이는 결코 널리 퍼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문제 역시 석탄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증기 기관은 기본적으로 석탄에 의해 돌아가는데, 증기 기관 펌프들은 석탄 광산에 있었으므로 현지 광산에서 캐낸 석탄들을 바로 증기 기관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뉴커먼 증기 기관은 석탄 광산의 배수 작업을 위해 투입되었으며, 광산에서 바로 캐낸 석탄을 연료로 써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뉴커먼 증기 기관 펌프는 1733년까지 100개가 만들어졌고, 1775년부터 1800년까지 영국 전역에서 무려 1천 대 이상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뉴커먼 펌프는 석탄 소모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단점이 있었으며, 때문에 광산 외에는 널리 이용되지 못했습니다.
이를 타개한 것이 바로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 기관이었습니다. 와트의 증기 기관은 뉴커먼에 비해 훨씬 효율성이 높았고, 석탄 소모량은 뉴커먼의 1/4에 불과했습니다. 1776년에 완성된 와트의 펌프는 단순히 광산 배수 작업이 아닌 방적기, 제철 등 여러 분야에 활용되었습니다. 증기 기관의 발명은 먼저 석탄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습니다. 1700년 300만 톤에 불과했던 영국의 석탄 생산량은 1750년 520만 톤으로 증가했고, 1800년에는 무려 1,500만 톤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석탄들은 초기에는 촘촘한 운하망과 해로를 통해 런던으로 운송되었습니다. 하지만 1830년대에 기차가 발명되면서 석탄을 더욱 싸고 빠르게 운송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석탄 산업은 결과적으로 증기 기관의 발전과 기차, 증기선의 발명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셈입니다.
(뉴커먼 증기 기관의 모형)
(와트의 증기 기관 모형. 공돌이가 아니라서 뉴커먼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영국의 석탄 분포 지도. 석탄이 집중적으로 매장된 잉글랜드 중부 지역에 여러 산업 도시들이 생겼고, 대표적인 곳이 맨체스터, 버밍엄이었습니다.)
제철 기술
18세기에 개발된 코크스 제철법은 이전의 목탄 제철법보다 철을 대량으로 값싸게 생산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철이 모든 산업의 근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철법의 발전은 산업 혁명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먼저 철광석을 용광로에 녹여 선철(pig iron)을 제조했습니다. 선철 중 일부는 용해되어 주철이 되었고, 대부분은 단철소에서 제련되어 단철, 봉철이 되었습니다. 선철의 용광로에는 목탄이 연료로 쓰였고, 용광로 밑부분에 설치된 풀무는 수력으로 가동되었습니다. 때문에 제철소들은 풍부한 목재와 수력이 있는 곳에만 위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용광로들은 내부 수리와 풀무 수리 문제 때문에 연간 30주 정도만 가동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18세기 전반 영국의 철 생산량은 정체된 상태였습니다. 급증하는 철의 수요를 생산이 따라잡지 못했고, 매년 수만 톤의 봉철을 스웨덴으로부터 수입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의 철은 영국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훨씬 높았습니다. 따라서 영국의 제조업자들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구세주가 등장했으니, 바로 에이브러햄 다비 1세(Abraham Darby I)였습니다. 그는 1709년 콜브룩데일에 위치한 자신의 제철소에서 목탄 대신 석탄을 이용하는 코크스 제철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신기술이 영국에서 대대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입니다. 초기의 코크스 제철법은 의외로 생산 단가가 비싼 편이어서 가격 경쟁력이 우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의 목재 가격이 크게 상승하면서1)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목탄이 석탄에 비해 몇 배는 비싼 상황에서 생산자들은 굳이 목탄 제철법을 고수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기에 기술 개량으로 코크스 제철법의 효율성이 더욱 증대되면서 점차 많은 생산자들이 코크스 제철법을 택하기 시작했습니다. 1750년 전체 선철 생산량 중 불과 5%만을 차지했던 코크스 제철법이 1790년에는 무려 90%를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에이브러햄 다비의 코크스 제철법은 석탄 가격이 저렴한 지역에서는 목탄 제철법보다 훨씬 값싸고 효율적이었습니다. 18세기 유럽 석탄 생산량의 약 80%는 영국이었기 때문에 코크스 제철법은 사실상 영국과 벨기에에서 널리 쓰였습니다(벨기에도 석탄이 풍부했습니다). 반면, 프랑스나 프로이센의 경우 심지어 1840년대까지도 철강의 대부분이 목탄으로 생산되었습니다. 코크스 제철법이 유럽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이용되려면 1850년대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후 1780년대에는 새로운 제련법과 압연법이 등장했고, 결정적으로 와트의 증기 기관이 코크스 제철에 도입되면서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증기 기관은 구식 피혁, 목제 풀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송풍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증기 기관의 도입으로 인해 용광로는 이전과 달리 연중무휴로 가동되었고, 이는 용광로의 위치 선정을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코크스 제철법의 확산과 증기 기관의 도입 덕분에 영국의 선철 생산량은 1728년의 25,000톤에서 1788년에 60,000톤, 1796년에는 125,000톤으로 증가했습니다. 이후 19세기에는 열풍법이라는 기술이 등장하여, 석탄을 코크스화하지 않고도 산출량을 증가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비가 처음으로 석탄을 이용하여 철을 제조한 용광로(콜브룩데일))
(1781년에 완공된 콜브룩데일 아이언 브릿지. 세계 최초의 철교입니다.)
(런던의 석탄, 목탄 가격 비교. 17세기 중반부터 목탄의 가격이 급상승한 반면, 석탄은 비교적 가격이 낮은 편이었습니다.)
(영국의 목탄, 석탄 제철량 수치. 석탄을 이용한 코크스 선철의 비중이 점점 증가했습니다. 참고로 표에서 1760, 1775년의 수치가 좀 잘못됐으니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이 외에도 산업 혁명의 탄생에는 크고 작은 제도적 요인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유 재산권의 보호와 특허법은 개인 발명가들이 기술 개발에 매진할 동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난 원인은 한두 가지로 설명이 불가능하며, 수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서 일어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갖추어져 있던 상업과 자본주의의 발전, 농업 생산량 증대, 높은 도시화율, 특허법과 사유 재산권 보호, 상업을 천시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고임금과 풍부한 석탄 매장량 등의 다양한 요건들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산업 혁명이 과학 기술 발전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입니다. 의외로 산업 혁명의 탄생에는 과학의 발달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기술을 상용화시키고 대규모로 퍼트릴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 해도, 실용성이나 경제성이 없으면 널리 이용될 수 없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신기술이 경제성을 갖추었고, 광범위하게 이용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기술 그 자체보다는 그 기술을 지속적으로 후원하여 발전시키고 그것이 상용화되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셈이지요.
- 각주 -
1) 당시 목재 가격이 상승한 요인은 복합적이었다. 영국에서 산업이 발전하면서 여러모로 목재 수요가 증가했고, 때문에 목재가 부족해졌다. 또한 영국의 높은 노동자 임금 역시 목재 가격 상승에 기여했다.
<참고 문헌>
- 영국 산업혁명의 재조명
- 영국 산업혁명의 의의와 시사점
- The British Industrial Revolution in Global Perspective
- British Business Cycles 1270-1870
- European Farmers and the British Agricultural Revolution
출처: 네이버 부흥 카페 traian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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