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수메르,수메르 사람들

대운풍 2009. 4. 19. 10:10

수메르, 수메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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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사람들은 대략 기원전 4500-4000년경에 지금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 약 2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사라진 민족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민족 가운데 이들의 공식적인 후예는 없어졌지만, 이들은 인류 전체의 뿌리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동물을 사냥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살던 원시시대에서 지금과 같이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문명생활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인류가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글로 써서 남에게 전달하고 후대에까지 남길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러시아 태생의 저명한 미국인 수메르학자 사무엘 크레이머는 인류 최초의 학교, 최초의 민주적 대의제도 등 인류의 문명사, 문화사에서 최초의 중요한 것 27가지가 수메르인들의 발명품이라고 쓰고 있다.
그밖에도 물론 대단히 많은 최초의 것들이 이 수메르 민족의 창작품이었다. 수메르 민족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최초로 빛을 가져다 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영웅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문자와 도시 발명



cuneiform tablet수메르 사람들이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은 모든 분야에서 뚜렷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는 문자의 발명과 도시건설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루크(Uruk)에서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기호로 뜻을 나타낸 상형문자였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되고 개량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이른 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을 굵은 갈대펜(stylus)으로 긁어서 문자를 기록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사를 선사(先史)시대와 역사(歷史)시대로 구분짓게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본다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을 가져다 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도시의 발명이 지닌 의의 역시 매우 크다.
인간들이 모여서 집결된 주거지를 건설하고 조직이라는 것을 만들어 서로간의 삶을 규율하게 된 사건은 오늘날까지 인간 삶의 기본 패턴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의의를 지닌 도시 건설이 기원전 3천년대의 후반기에 역시 수메르 사람들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기원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민족



수메르 사람들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의 평야에 나타나 살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사용한 도구로 시대를 구분하는 통상적인 시대구분법에 따른다면 이때는 목축과 농경생활이 막 시작된 신석기시대였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지대에는 수메르인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셈어족과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여러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이들보다 우월한 문화를 지니고 이주하여 이내 이들을 압도하고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이 어디에서 기원한 민족인지, 그리고 이들의 초기 역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분명한 정설이 없다.
이들의 기원이 매우 불명확한 반면, 이들이 남긴 문화 유산이 너무도 두드러지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수메르인들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내가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도 있었다.

"수메르 문헌의 제시된 증거에 기초해 볼 때, 기자의 피라미드는 시나이 사막에 위치한 우주 기지에서 끝나는, 우주관제센터의 착륙복도의 일부로서 외계인들에 의해 유도 장치로 쓰일 목적으로 건설된 듯 하다."

이 글의 저자에 따르면 고대 수메르인들은 태양계의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를 일종의 행성간 버스 정거장으로 사용했던 우주 여행자들의 자손으로서 이들이 바로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대피라밋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수메르인의 기원에 관한 이 저자의 추리는 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모든 것의 이전'이었던 문화가 갑자기 등장하여 복잡한 문자, 경제체제, 그리고 잘 구성된 사회구조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을까?"

이 저자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의 문화적 유산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당시 겨우 석기를 사용하던 원시시대 인간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고도의 첨단문명을 가지고 외계에서 이주해온 우주인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리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의 업적이 매우 뛰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글의 필자가 생각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수메르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알게 되겠지만, 그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부단한 실험과 개량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교착어를 사용한 검은 머리의 사람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수메르인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생김새가 주위에 있던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민족들하고는 매우 달랐으며, 수메르인들 자신은 이러한 생김새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기 민족을 주위 민족들과 구분해 불렀다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위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것하고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언어는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agglutinative)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메르인들이 검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고, 교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동양의 일부 사학자들은 이들을 동아시아의 민족들과 연관시키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학설들을 제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른 바 "재야사학자"들 중에 수메르인을 우리 한민족과 연관시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에 따르면 단군 이전에 한민족이 세운 12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수밀이(須密爾)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재야 사학자들은 바로 이 수밀이국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그 수메르국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수메르 역사를 정통으로 연구해 온 서양학자들은 수메르민족의 기원을 오늘날의 동아시아 민족들과 연계시키는데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사무엘 크레이머는 수메르인들 자신들은 처음부터 메소포타미아에 태어나 그 곳에서 살아온 것으로 믿었다고 말한다.
저명한 아랍사학자인 히티(Philip K. Hitti)는 수메르어가 터키어, 헝가리어, 핀란드어 등에서 발견되는 교착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점을 제외한 다른 어떤 특성도 이들 언어 또는 기타의 우랄 알타이어나 몽고어와 비슷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각종 부조물에 나타난 수메르인들의 생김새를 보아서는 그들이 긴 머리의 지중해 인종과 넓은 이마의 북동부 산악지대인인 아르메니아족과의 혼혈로 보여진다고 말하고 있다.

수메르 유적 발굴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와 역시 고고학자인 독일인 세람(C. W. Ceram) 등은 수메르인들이 계단 모양의 신전을 만들어 그 곳에 신을 모신 것을 본다면 산악지대가 그들의 고향으로서 신들은 높은 언덕 위에 산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수메르
축조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목조건물 양식에 따라 지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나무가 무성한 고지대가 그들의 발원지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인류학자인 영국인 아더 케이트(Arthur Kate)는 인더스강 계곡이 수메르인들의 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들은 아직까지 어느 것이 맞다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어쨌거나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민족이 지금의 중동 민족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이 아니고 어찌 보면 우리 민족과 관련이 깊을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은 우리에게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문화가 된 수메르 문화



수메르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그후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들의 기술과 생활양식, 종교, 문학 등은 그들 주변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수메르의 뒤를 이은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멀리 이집트 등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오늘날 청바지와 햄버거, 코카콜라로 상징되는 미국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듯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수메르 문화는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 문화로서의 역할을 했다.

ziggurat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최초로 맥주를 빚어서 마신 민족이 수메르 민족이라는 사실은 이 점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르(Ur)의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정(王政)을 이룩한 민족이 수메르 민족인데, 이것이 주위의 민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훨씬 후대에 이르러 유태인들이 사울을 최초의 왕으로 추대하는 성서 속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이 있어야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유태인들이 갖게 된 것은 수메르인들이 이미 소멸하고 난 이후에도 천년 이상이나 지난 시기였던 것이다.

Hammurabi Code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우르남무라는 수메르왕이 반포한 이 법률은 유명한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먼 훗날 모세의 법률을 특징짓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이 함무라비 법전에 정확히 들어있는 말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밖에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식이나 기도문, 찬송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차용되었고 먼 훗날 유태인들의 종교에도 분명히 반영되었다.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유명한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Gilgamesh)를 노래한 서사시는 바빌론과 앗시리아인들이 각색하여 더욱 발전시켰고, 기독교의 성경에도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영웅을 소재로 한 서사문학에까지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수메르 문학과 기독교 성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조상들과 직접적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수메르인들에 대해 지금까지 변변한 책 하나 발간된 적도 없지만, 이와 달리 수메르 역사가 재발견된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수메르인에 대한 연구는 비상한 관심을 모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수메르 문명의 발굴은 성서의 무대였던 이 지역에서 성서에 기록된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자 한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이 진전되면서 성서의 기록보다 훨씬 앞서는 수메르인들의 기록들이 나타나 성서의 독창성과 신비성을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것이 오히려 일반인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는 수메르문명에 대한 연구가 기독교의 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나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이것이 연구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사무엘 크레이머의 책에서도 여러 군데 소개되고 있듯이 성서의 천지창조, 에덴 동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 등은 뚜렷하게 수메르인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거나 차용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 뿐만 아니라 성서의 가장 독창적인 요소들로 꼽히는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등의 지혜 문학도 이미 수메르인들에게서 그 원형이 발견되고 있다.

크레이머가 소개한 최초의 욥(Job)이야기는 성서의 욥기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주제, 동일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욥기가 기록된 후 천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이것에서 영감을 얻은 독일의 괴테가 파우스트를 썼지만, 성서의 욥이야기는 그보다 천여년 이상 전에 나온 수메르인들의 이야기에서 그 소재와 구성을 따왔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성서와의 관련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이다.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가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대홍수에서 살아 남은 지우수드라(Ziusudra)라는 노인을 만나 영생의 비결을 듣게 되는데, 이 때 이 노인이 들려주는 홍수 이야기가 바로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전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 사본들이 최근 발견되었고, 바빌론인들이 지우수드라를 우트나피슈팀(Utnapishutim)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더욱 발전시킨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이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번역했다고 볼 정도로 유사한 것이다.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구약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11:31).
그런데 이 갈대아땅은 수메르인들이 활약하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의미하며, 우르는 유명한 수메르의 왕조가 건설되었던 바로 그 도시의 이름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추정한다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수메르의 역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다수의 야만적인 민족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들은 수메르인들과 공존하면서 훗날 아카드와 바빌론 등의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는데,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정리하면 수메르문화가 고대 중동세계에서 보편 문화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들 주위에서 떠돌던 유목민족의 일파였던 유태인들이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 이에 따라 유태인들이 만든 성서에서 수메르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성서의 신적 영감성과 독창성에 대한 신앙을 견지하려는 기독교계의 논자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반박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들의 논지는 매우 옹색하게 보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소재와 구성이 동일하지 않다거나 신관(神觀)이 다르다는 등의 논리는 유태인들이 그것들을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 재구성하고 각색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너무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수메르인들의 이야기에서 자신들 이야기의 착상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대영제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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