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반도엔 어떤 나라가 있었나?
고구려.백제.신라의 주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하면 많은 한국인들은 오히려 믿기 싫어하며, 역사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필자의 글에 심하게 항의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국민들 가슴 속에는 뜨거운 애국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으로, 그래서
그런지 망국의 반도사관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호응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사학자들의 이론은 한반도가 삼국의 주 활동무대가 아니라는 것이지 한반도가 삼국의 영토가 아니란 말이 아니다. 한반도
는 삼국의 변두리 강역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지대 즉 대대로 신성한 소도(蘇塗)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한반도에 무수히 널려
있는 고인돌이 그 증거이기도 하며, 한반도에서는 고대 전쟁 유물이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즉 우리 조상들은 중국대륙의 동부 평야지대에서 활동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족에게 밀려 변방인 한반도와 만주로 쫓겨
들어온 것으로 본다. 그 시기는 고려 초로 보이며 근세조선 때까지도 만주를 잃은 적이 없었다. 명나라 사서인 <명일통지>에도
분명 “조선의 땅은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이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기록은 간도(만주)가 조선의 영역임을 분명히 말해주는
물적 증거인 것이다.
한반도는 대대로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가 단군조선 이후 BC 195년 최숭이 낙랑국을 세워 한반도는 낙랑국의 강역이 되었다
가, A.D 32년 낙랑국이 고구려에게 망하자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A.D 503년 신라의 지증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립국가의 길을 걷는다. 무령대왕이 붕어한 A.D 523년 경에는 한반도는
동신라의 강역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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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건국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 등으로 불리고, 존호(尊號)도 왕이 아닌 마립간(麻立干)
이사금(尼師今) 등으로 불렀다. 22대 지증왕 4년(A.D 503년)부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속국에서 벗어나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사용한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 때 비롯되어 왕이 죽자 지증이란 시호를 처음 쓴다.
신라는 503년 이전에는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태왕비문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태왕 시절
부터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가, 백제의 전성기인 동성대왕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대륙신라는 백제의 속국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양나라의 공직공도로서 백제 사신의 그림과 함께 백제를 설명하는 글에 보면,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는 문구가 있어 신라가 당시 백제의 속국(부용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한반도에서는 동신라가 원래부터 속국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지증왕
시기부터 한반도에서 신라세력이 커져 고구려로부터 자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한반도에서 A.D 450년 이후의 고구려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지증왕 이전의 신라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남당선생의 고구려 사략/초의 기록을 연결시키면 무령왕릉의 의문점이 풀리게 된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백제 성왕이 두려운 무령왕의 추종세력들이 독살당한 왕의 시신을 몰래 빼내, 얼마 전까지 속국이었던 대륙신라에게 장례를
부탁했던 것 같다. 대륙신라 역시 성왕에게 탄로날 것을 염려해 한반도의 동신라에게 무령왕의 장지를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설은 물론 기록에 근거를 두었지만 필자의 추정일 뿐 역사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 아니고서는
현재 무령왕릉에 대한 의혹을 해소할 수가 없다. 분명 백제의 주 활동무대인 대륙에 있어야 할 왕의 무덤이 느닷없이 한반도
공주에서 발견된 이 기이한 일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무령왕릉은 가짜다. 누군가가
고의로 지석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삼국의 주무대가 대륙이라고 해서 한반도에 삼국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보았다시피 이 살기 좋은 금수강산 한반도
에는 고조선 마한의 도읍 --> 낙랑국의 도읍 --> 고구려의 영역 --> 동신라의 영역으로 대를 이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백제
는 장기간이 아닌 짧은 기간 담로라는 형태로 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삼국의 왕 중 유일하게 무령왕릉이 한반도 公州
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근거가 <삼국유사>의 무왕편에 나오는 무강왕이라는 칭호인데,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
는 무강왕이 없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중략)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
다 (이하생략)”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에 기록하면서 정식 왕이 된 인물을 과부의 아들이라고 함부로 쓸 수는 없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강왕을 무왕이라
고 단정했으나, 주해자는 무녕왕이 아니겠냐는 견해이고, 아니면 혹자는 무강왕은 백제의 본국왕이 아니라 한반도 백제 담로의
총독(왕)이 아니겠냐는 하는 것이다. 여하튼 백제가 한반도에 흔적을 남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본다.
그리고 남당 고구려 사략/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은 <산해경>과 <남서>에 언급되어 있는 평화지역이며, 함초가 나는
지역이며, 불교가 전래된 동쪽지역인 부상국(扶桑國)이 한반도이며 부상국=우산국(于山國)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부상국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亡國的 <半島史觀> 을 믿으면 안되는 이유
식민사학계는 무령왕릉의 발굴을 계기로 더욱 더 매국적인 반도사관을 확장지어 버린다. 자신들의 엉터리 이론을 무령왕릉이
란 확실한 유물이 뒷받침해 주니 이거보다 더 낭보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필자가 툭하면 식민사학이니 반도사관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그게 그렇게 매국적인 것인지 반문할 수 있다.
반도사관은 일제가 우리의 민족혼을 빼기 위해 만든 역사이론이다. 당시는 일제치하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 하겠으나, 문제는
광복 62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사교과서에 식민사관의 이론을 버젓이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민족혼을 빼고 있으니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일제의 추종자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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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에 의해 기용된 이병도/신석호/홍희로 대변되는 국사학계의 큰 독나방
몇 마리가 뿌리고 간 독가루가 이 나라 역사를 온통 흑탕물로 뒤범벅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학교의 강단을 점령한 그 후학들은
아직도 똑같은 독가루를 온 국민들에게 뿌려대고 있다, 여하튼 조상의 역사를 좀먹는 나쁜 독나방들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특효약의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왜 국민들이 반도사관을 절대로 신봉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 보면 그 이유
를 쉽게 알 수 있다. 백제의 주무대(수도)가 한반도라면 마한으로 대변되는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이 한반도 남부란 이야기
이다. 나중에 삼한으로 발전하는 한(韓)을 세운 왕은 번(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으로,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수도를 넘겨
주고 남하하여 한을 세운다.
그렇다면 기준의 번(기자)조선은 한반도 남부인 한의 북쪽이므로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것이 되며, 이 말은 위만조선이 평양
에 있었다는 말과 같고,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섰으니 결국 한사군은 북한 지역 특히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
는 이론과 같은 것으로 이것을 반도사관이라고 한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식민반도사관의 이론이란 다음과 같다. 고조선의 단군은 국가가 아닌 신화
이고, 북한 땅에 중국인이 세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나타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인 한나라가 식민지인 한사군
을 설치한다. 따라서 조선의 조상들의 역사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므로, 지금은 천손민족인 천황의 일본이라
는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한 이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일본서기>에만 나와 있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론(三韓政伐論)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역사적 사실
이라고 우기고 있다. 결국 반도사관의 주제는 북한 땅에는 한사군이 있었기에 중국 땅이고, 남한에는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
했기에 일본 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땅은 어디 있는가? 그래서 반도사관은 무서운 이론이며, 망국적인 식민반도사관
을 추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기자조선/위만조선을 대동강 평양으로 끌고 오려다보니, 진조선/막조선이 발전한
북부여와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패륜을 범하게 된다. 번조선의 수도는 하북성 창려(진황도)였다. 그곳을 위만
에게 빼앗기자 기준이 어디로 남하했느냐가 우리 역사의 최대 핵심 포인트이다. 왜냐하면 망국의 반도사관의 핵심은 기준이
한반도 남부로 내려가 삼한을 건설했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기준이 남으로 내려 간 곳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번조선의 영토였던 중국대륙 동부평야지대의 중심인
황하와 회수 사이로 간 것이었다. 그 땅은 기준의 조상인 기자가 산 하남성 서화(西華) 땅과 죽어서 묻힌 안휘성 몽성(蒙城) 땅
과 가까운 곳이다. 기준은 비록 수도인 창려를 위만에게 빼앗겼지만 자기와 연고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웠던 것이다.
결국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한에는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
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반도사관은 역사적 사실도 아닐뿐더러 이렇듯 우리의 강역을 이민족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 무서운 망국의 이론인 것이다.
역사적 진실에 근거해 중국대륙 동부가 원래 우리의 강역이었음을 알리는 것만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을 무력
화시키고 분쇄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루빨리 식민사학을 추방하는 길만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임을
국민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망국의 반도사관을 이 땅에 확정시키는 유물로 철저히 이용된 것이 바로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이었다. 이제 새로
이 무령왕릉 지석을 해석함으로서 반도사관은 허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바이다.
성헌식 기자께서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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