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호시탐탐 대한제국을 노린 일본은 광무황제의 인준도 받지 않은 채 강제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우리는 이를 한일합방이라 배웠다. 하지만 한일합방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합방이라는 단어는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1910년은 경술년이다. 이 해는 우리가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마땅히 경술국치라 불러야 한다.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을 강제 식민지로 삼은 일본은 무단통치라며 강압적으로 대한제국을 다스렸다.
일본의 강제병합에 분개한 무수히 많은 애국지사들은 자살을 하거나,
독립운동에 나섰다.
기득권층은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협조하며 호의호식 지내는 동안 대한제국의 독립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세우고, 외교를 통해 독립을 꾀하려 했고,
일부는 만주나 연해주로 가 무장투쟁으로 나라를 되찾으려 하였다.
이 땅의 독립을 위해 수없이 쓰러져간 애국지사들 덕분에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렇듯 잘 살고 있는게 아닐까?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박상진 등의 의사가 있었고 이회영, 신채호, 박은식, 김구 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난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진 애국지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일본 3대 총독 사이토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인물, 바로 강우규 의사다.
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났다.
30대 초반 그는 함경남도 흥원으로 이주한 뒤 장사를 통해 상당수의 재산을 모았으나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만주로 떠났다.
그는 1915년 중국 길림성 요하현에 정착했는데,
정착 당시 세 가구밖에 살지 않던 이 곳을 강우규는 2년만에 백여 가구가 넘게 사는 한인마을로 개척하였다.
사이토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체포된 그에게 일본인 검사가 왜 만주 요하현으로 갔는지 물었을 때
강우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눈앞에 보이며 접촉하는 것은 모두 반갑지 않은 일본인들밖에 없으니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소? 그래서 사랑하는 조국을 버리고 멀리 갔었던 것이오
그는 1917년 신흥동에 광동학교를 설립했다.
누구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청년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을 판단하고,
힘들게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미래를 위해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자한 것이다.
교육자인 , 이것이 강우규 의사의 참모습이 아니었을까?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고, 그 여파는 만주와 연해주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우규가 살던 길림성 요하현 역시 3월 4일 강우규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광복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그는 국내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노인동맹단에 가입하였다.
노인동맹단은 가입조건으로 46세 이상 70대까지의 나이 제한을 두었다.
독립운동 1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입한
이 단체는 독립운동을 전면적 혹은 측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이 단체의 회원명부를 보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을 비롯한
연해주 지역 한인지도자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3.1운동의 만세시위가 실패로 돌아가자 강우규는 홀로 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6개월 뒤인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광장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일본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와 일본군 의장대가 사열한 역 광장은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정각 5시가 되자 귀빈을 태운 열차가 도착했다.
예포 소리와 함께 남대문 역을 나서는 인물은 조선 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였다
사이토가 군중들을 지나 자신이 타고 갈 마차에 오르는 순간 군중 속에서 한 인물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는 총독을 향해 뭔가를 던졌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순간 커다란 폭발이 발생하였고,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대문 역 광장을 뒤흔든 폭발음...
그것은 3.1운동 이후 최초로 국내에서 벌어진 무력독립투쟁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폭탄 투척 사건, 그것은 신임총독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였다.
불행히도 사이토는 죽지 않았다. 육군 소장과 경찰서장, 신문기자 등 귀빈실에 모여있던 30여 명이 부상당했고,
이들 중 세 명이 사망했지만, 사이토는 허리띠에 찬 대검에 파편이 박혔을 뿐 상처는 입지 않았다.
폭탄 투척의 주인공은 광동학교를 세운 강우규 의사였다.
강우규는 그가 노린 표적이 별다른 상처없이 무사히(?) 마차에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며 낙심했다.
강우규는 혼란한 틈을 이용해 그 곳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한편 일제는 경악했다. 경성 한 복판에서 그것도 신임 총독을 노린 폭탄투척 사건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일제는 최소한 사건의 규모, 대범함을 볼 때 5~6명이 공모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강우규 의사가 단독으로 사이토를 죽이려 했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강우규의사의 손녀인 강영재씨가 쓴 글을 보자
열 서넛쯤 된 소년이 일경(日警)애개 할아버지를 일러주었지만,
일경은 설마 저런 노인이 폭탄을 던졌을까 싶었던지 그냥 지나친 일이 있었다.
거사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는 65세, 백발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랬기에 일본 경찰도 강우규 의사를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튼, 범인을 색출하려는 일제의 집요한 수사로 마침내 1919년 9월 17일 가회동 하숙집에서 강우규 의사가 체포되었다.
사건 발생 보름 만이었다. 폭탄투척사건이 65세 노인의 단독범행으로 밝혀지자 세상은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다.
심지어 일본 경찰마저도 경악했다.
3.1운동이라는 거대한 민족적 움직임 이후에 부임한 신임 총독 암살 미수사건은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대사건이었다.
당연히 그의 재판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강우규 의사의 의거 5개월 후인 1920년 2월 14일 경성지방법원 7호 법정에서 강우규 의사의 첫 공판이 시작되었다.
당시 그 재판을 보려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밀려들어 법정이 혼잡해지자 임시구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재판을 받으러 온 강우규 의사는 당당한 모습으로 재판장에 들어섰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일본인 판사에게 호통을 치는 대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고얀놈!! 피고라니! 니들 나라엔 법도도 없더냐?
판사나 검사가 반말로 질문하면 강우규 의사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고,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언도 서슴지 않았으며 법정에서 의자를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놀듯 그는 일본인 판사와 검사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폭탄을 수건에 싸서 계집차듯 아래에 차고 상륙한 고로 세관리들은 폭탄을 감춘 것인 줄은 모르고
나의 불알이 그같이 큰줄 안 듯하오.
재판과정에서 강우규 의사는 자신이 노인동맹단 대표로 거사를 준비했으며,
다른 공범자는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강우규 의사가 러시아로부터 폭탄을 구입한 시기는 1919년 2월이었다.
그런데 노인동맹단은 3.1운동 이후 결성되었다.
이는 강우규 의사가 노인동맹단과는 무관하게 폭탄을 구입했다는 것을 뜻한다.
강우규 의사가 던진 폭탄은 영국식 수류폭탄으로
5미터 반경 이내에 있는 사람을 사망이나 중상을 입힐 수 있는 강력한 수류탄이었다.
그런데 강우규 의사는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고 증언하였다.
그 폭탄을 본즉, 꼭지에 작은 구녕이 있는 고로, 그 구녕으로 탄약이 나와 사람을 맞추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소.
나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다칠 줄은 차마 생각도 못했소.
그런데 강우규 의사의 법정진술은 고도의 전략의도, 주변 인물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강우규 의사가 보호하려 했던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였다.
강우규 의사는 이동휘를 비롯한 무장독립단원들과 교류하며,
그들이 수시로 강의사의 집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김규면씨가 쓴 책에는 강우규 의사의 배후에 이동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한인 사회당에서는 조선총독을 반대하여 비밀 특파원 강우규를 보내 남대문 정거장에서 사이토를 포격하였는데
또 다른 기록에는 강우규 의사가 '신민당 유격대장'이었다고 한다.
신민단은 3.1운동 당시에 만주지역과 훈춘일대에 만들어진 단체로, 단장은 김규면이었고,
구성원들 대다수는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대한신민단은 1919년 4월 이동휘가 이끄는 한인사회당과 합당을 했다.
강우규 의사는 대한신민단 단원이자, 한인사회당 당원으로 이 두 조직이 사이토 암살 사건 배후였다.
또한 강우규 의사의 배후인물로 정재관을 거론하고 있다. 김규면씨의 회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정재관은 강우규가 경성남대문 정거장에서 사이토 총독을 포격한 사건의 직접 조직자이다.
정재관은 미주 지역에서 독립신문과 신한 민보의 주필을 맡았고, 구한말 미주지역의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08년 스티븐슨 저격에 중요역할을 했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이동, 이곳에서 창간된 항일 민족지 대동공보의 주필로 있으면서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기획한 당사자였다.
강우규 의사의 폭탄투척은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와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기획했던
정재관 등과 함께 공모한 치밀하고 계획적인 의거였다.
재판과정에서 강우규 의사는 노인동맹단의 존재만 밝힌 것은 국제무대에 노인동맹단을 알리는 한편,
다른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를 취조한 지바 료는 강우규 의사에 매료되어, 그에 대해 평가할 때 일제 입장에서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강우규 의사가 진정한 우국지사였다고 회고했다.
1920년 5월 27일 강우규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청년들에게 본보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 청년의 가슴에 적게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다. 조선 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박힌다면 그만이다.
쾌할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조선 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싶다.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자신이 친히 무장투쟁에 나선 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조선의 청년들에게 독립에의 의지를 불어넣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안중근 의사가 허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나이가 30세였고,
이봉창 의사는 32세의 나이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켰으며,
윤봉길 의사는 24세의 나이에 거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강우규 의사는 이들보다 앞서 그것도 무려 65세라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사이토를 향한 의거를 일으켰다.
이는 대단한 일이고, 마땅히 기억해야 할 일 임에도 강우규 의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교육의 부재가 아닐까? 영어몰입교육을 강조하며 정작 중요한 국사,윤리 교육을 내팽개치니
가뜩이나 국사교육비중이 작은데 더 작게 만들었으니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강우규 의사와 그가 한 의거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은 상황에서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기억해달라는게 무리일까?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이분들의 공이 크다.
최소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사형이 선고된 후 강우규 의사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남은 인생을 보냈다.
독방에서 밤낮으로 성경을 읽고 묵도를 하며 평온한 모습으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그는
1920년 11월 독방 마룻바닥에 무언가를 새겼다. 자신의 이름과 사형 날짜였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죽기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끝으로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부디 이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강우규 의사를 그리고 그의 빛나는 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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